에너지경제 포토

박상주

redphoto@ekn.kr

박상주기자 기사모음




[데스크 칼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5.04.27 11:06
.

▲박상주 자본시장부장(부국장)

“우리가 언제부터 패시브 ETF(상장지수펀드), 이런 거에 목을 맸습니까? 자본시장이 비겁해졌어요."


한국 자본시장을 개척해 온 증권업계 구루가 소주 한 잔을 앞에 놓고 한탄했다. 자산운용에 한 획을 그은 뒤 최근 은퇴해 누구보다 업계를 훤히 꿰뚫고 있을터다. 너도 나도 패시브 ETF를 선보이는 2025년, 그는 무엇을 아쉬워했을까.


공모펀드나 ETF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목받았다. 미국 채권 시장이 흔들린 여파가 한국으로 이연했다. 위기를 겪으며 개인은 본인 정보력이 기관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당신만 알고 있어' 따위 정보에 현혹돼 개별 종목에 투자했다가 낭패를 거듭하고 난 뒤다.


백전백패하느니 증권 전문가가 운용하는 펀드에 올라타자는 심리가 확산했다. 전문가가 운용하니 잘될 거란 기대감이 컸다. 돈 좀 벌어보려 매분 내가 가진 주가가 오르나 내리나 노심초사하며 눈알 빠지게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지 않아도 됐다.


대신 펀드매니저가 바빠졌다. 애널리스트를 통해 업황과 기업을 조사·분석하고, 밤을 새워 투자 전략을 수립, 타이밍에 맞춰 종목을 편/출입했다. 정보와 전략이 중요했고 펀드매니저간 경쟁도 치열했다. 매일 수익률로 평가받았다. 밤에도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2020년대 들어 액티브 ETF가 부상했다. 매니저는 펀드액의 30%내(상관계수 0.7 규제)에서 직접 주식이나 기타 자산을 선택하고 거래했다. 지수추종의 대세추종성, 매니저의 전략적 수익추구성, ETF의 투명성과 저렴한 보수 등 장점이란 장점은 모두 모았다.


지난해 초 펀드 매니저에게 굴욕적인 통계가 나왔다. 주식형 액티브펀드의 10년 누적수익률이 인덱스펀드의 절반에 그쳤다는 거다. 밤을 새워 정보를 모으고 전략을 짜고 종목을 골라 사고 팔지 않아도 수익률이 배 이상 많이 나왔다. 펀드매니저는 '당신, 일을 왜 했어'란 핀잔을 들었다.


그래 그런지 요즘 자산운용업계는 패시브 ETF가 대세다. 업체 설명만 듣고 있으면, 세상 이렇게 앉아서 돈을 버는 상품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상세 설명서를 받아 상세히 뜯어봤다. 읽어본 결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시브 ETF는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팔기만 하면 된다. 펀드 매니저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되고, 설정 이후 아무 것도 할 수도 없다.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에 불이 꺼졌다. 자산운용사에 워라밸이 찾아왔다. 달리 말해보자. '투자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만, 돈만 벌어드리겠습니다'라는 자세만 견지하면 된다.


그것이 자본시장과 증권맨의 존재이유인가? 투자로 돈을 버는 것은 결과다. 자본시장의 목적은 세상의 가치를 키워낼 기업을 골라내 육성하는 일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기업을 찾아내고 투자해 성장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수익과 가치를 이뤄내는 게 자산운용업계의 본업이다.


'투자업'을 하지 않고 안정적인 수익만 쫒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모의 시장에서 신산업을 키워낸 펀드 매니저는 존경 받게 마련이다. 구루는 이를 한탄한 게 아닐까.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