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새 정부 출범 이후 지배구조를 겨냥한 입법 드라이브가 속도를 내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 법안이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이달 초 상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확대,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 권고적 주주제안 도입 등 후속 입법이 줄줄이 발의되고 있다. 상장사들은 정관 개정부터 경영권 방어 전략 재설계까지 전방위적 대응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책 당국은 '소액주주 권익 보호'를 내세우지만, 기업들은 “법안은 쏟아지는데 구체적인 기준조차 없다"며 혼란을 호소하고 있다.
이달 9일부터 17일까지 단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국회에 발의된 상법 개정안만 7건. 이 중 자사주 소각 관련 법안만 3건(김남근·김현정·차규근 의원안)에 달하고, 권고적 주주제안 제도(이소영), 집중투표제 및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임(신장식) 등을 담은 발의안도 나왔다. 특히 자사주 소각 기한만 해도 법안마다 6개월~3년으로 제각각이다.
이달 15일 공포된 1차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모든 주주'로 확대하고, 감사위원 선임 시 사외이사 여부와 관계없이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합산 3%로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전자주총 의무화,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 독립이사 비중 1/4→1/3 상향 등도 함께 담겼다. 시행 시점은 공포 즉시부터 2027년까지 항목별로 순차 적용된다.
문제는 이 같은 입법 러시에 기업들의 실무 대응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조항은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라는 추상적 문구가 핵심인데, 이를 정관이나 내부 규정에 어떻게 반영할지 몰라 현장에서는 해석 혼선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련 세미나는 연일 매진 행렬이다. 서울대 금융법센터가 29일 개최하는 '이사 충실의무 실무 쟁점' 세미나는 공지와 동시에 조기 마감됐고, 같은 날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설명회도 250석 전석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삼일PwC, 법무법인 세종, 광장 등 회계법인과 로펌도 잇따라 웨비나와 설명회를 열고 기업 대응 전략 수립을 지원하고 있다.
혼란의 중심에는 '자사주 소각' 문제가 있다. 자사주를 모두 소각할 경우,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3분의 1 이하로 떨어질 수 있는 기업이 기존 776곳에서 871곳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자사주 활용 전략도 급변하고 있다.
실제 2025년 상반기 자사주 소각 규모는 15조5000억원으로, 이미 작년 전체(13조9000억원)를 넘겼다. 같은 기간 자사주 매입은 9조5000억원, 자사주 처분은 1조203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6.5배 이상 급증했다. 특히 자사주를 활용한 EB(교환사채) 발행 규모는 620억원에서 1조원을 넘기며 폭증했다.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자사주를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6일 롯데지주는 자사주 1477억원어치를 롯데물산에 넘겼고, 이달 2일 진양제약은 2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창업주에게 처분했다.
입법 논의는 상법을 넘어 자본시장법까지 확장되고 있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M&A 시 의무공개매수제 부활 △물적분할 자회사 상장 시 소액주주 신주 우선배정 의무화 △합병 시 공정가액 외부평가 및 이사회 의견서 공시 의무화 등도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여야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유사 법안을 제출하면서 국회 논의는 당분간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한 관계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입법 속도전에 기업들이 따라가지를 못하는 상황"이라며 “정책 목표와 실무 사이의 간극을 좁힐 조율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