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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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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진단 : 석유화학 퍼펙트 스톰] ① 수출역군에서 생존위기산업 전락…민관 안일한 대응 화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5.09.01 17:10

K-석화, 중국·중동·미국 저가 공세에 원가 경쟁력 상실

‘버티면 좋아진다’는 옛말…과거 성공 방정식의 종말

성공 신화 이끈 설비, 이젠 부채 늘리는 ‘자본의 함정’

석유화학공장 단지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석유화학공장 단지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의 연 270만~370만톤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중국이라는 만리장성, 최대 고객에서 최대 경쟁자로

한때 석유화학(석화)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심장이자 수출의 역군이었다. 그랬던 석화업계는 전례 없는 구조적 위기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게 됐다. 과거의 호황을 이끌었던 성공 방정식은 이제 생존을 위협하는 족쇄가 됐다. 따라서 '버티면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의 유통 기한은 끝났다. 이번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의 하강 국면이 아닌,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다.


이번 위기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는 단연 중국의 전략적 선회를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성장은 한국의 선진 제조 역량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세계 최대 석화 제품 수입국이던 중국의 폭발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단순하고 강력한 모델에 기반했다. 이 모델은 나프타 분해 시설(NCC) 설비에 대한 수조 원대의 막대한 자본 투자를 정당화했다.


그랬던 중국이 완전 자급 수준의 생산 능력을 갖춤에 따라 한국 석화 산업 지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의 핵심 수출 시장이 소멸했음을 넘어 중국이 저가 제품으로 역내 시장을 잠식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실제 중국의 석화 제품 자급률은 2023년 90%를 상회했고, 일부 범용 제품은 100%를 넘는다. 반면 한국의 대중국 석화 수출액은 2013년 235억달러였지만 2023년 170억달러로 급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매출의 일부가 증발한 것이 아니라 산업 성장 동력을 담당해온 엔진이 멈춰 섰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에는 중국 정부 주도의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공급망 내재화를 목표로 석화 자국 기업들의 대규모 설비 증설을 독려해 왔다. 그 결과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2020년 3227만톤에서 2024년 5440만톤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과시하며 전 세계 증설 물량의 약 64%를 차지했다. 결국 한국 기업들은 가장 큰 시장을 상실했고, 이제는 여타 아시아 시장에서 차별성 없는 중국의 저가 제품과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이중고에 처하게 됐다.


석유화학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식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 다섯번째)과 국내 석유화학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지난 8월 20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석유화학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식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공급 과잉과 원가 경쟁력의 균열

현재 전 세계적 공급 과잉은 전례 없는 수준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고유가 시대에는 원가 구조의 차이가 기업의 수익성을 좌우한다. 저유가 시대에는 중동과 한국 간 원가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배럴당 60달러대인 요즘 같은 때에는 원료 기반의 차이가 수익성의 현격한 차이를 낳는다. 저렴한 에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중동이나 미국과 다르게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NCC는 근본적인 원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화 산업 육성 의지를 꾸준히 갖고 있었지만 자금력·인프라 부족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고유가로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해 '원유 직투입 석유화학 공법(COTC, Crude Oil To Chemical)'을 적용한 공격적인 설비 투자를 감행했다. 비근한 예로 아람코의 자회사 에쓰오일은 9조원을 들여 울산 석화단지에 이와 같은 시설을 건립하고 있다.


미국 역시 셰일 혁명을 바탕으로 에틸렌 생산을 급격히 늘리며 시장을 포화 상태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러시아산 저가 제품이 아시아 시장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낳으며 가격 하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번 위기는 왜 다른가

과거의 경기 순환적 하강과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의 경기 사이클은 업계 수익성이 좋으면 투자가 집중되고, 그 결과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하락하면 투자가 위축된다. 이후 공급 부족이 발생하면 다시 수익성이 회복되는 순환 구조의 논리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는 업계 참여자들이 비슷한 원가 구조와 수익성을 공유할 때만 가능한 얘기다. 지금은 원가 구조가 판이하게 다른 경쟁국이 시장의 법칙을 바꾸고 있다. 원가 경쟁력이 뛰어난 중국이나 중동, 미국 등은 한국 석화 회사들이 손실을 보는 구간에서도 이익을 낼 수 있다. 시장이 한국 기업에 유리한 방향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정부 또한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글로벌 공급 과잉이 예고됐음에도 국내 석화업계는 과거 호황에 취해 오히려 설비를 증설했고 고부가 전환까지 실기했다"고 지적하며 업계의 안일한 대응이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말했다.


막대한 고정 자산 투자의 전제 자체가 붕괴되자 석화업계가 과거의 성공을 위해 투자했던 생산 설비는 이제는 부채를 늘리는 '자본의 함정(Capital Trap)'으로 변했다. 단순한 불황 극복이 아니라 산업의 자본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석유화학 사업재편 금융권 간담회

▲지난 8월 21일 서울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석유화학 사업재편 금융권 간담회에 5대 시중은행, 국책은행 등 참석자들이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무제표의 경고: 재정 위기에 빠진 K-석화 산업

구조적 위기가 기업 재무에 미친 영향은 파괴적이다.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재정적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고, 이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


주요 기업들의 실적은 처참한 수준이다. 한국 석화 1위를 오랜 기간 굳혀온 LG화학의 석유화학부문의 2022년 영업이익은 1조745억원이었지만 이듬해에는 도리어 영업손실 1434억원을 내며 적자로 돌아섰다. 롯데그룹의 가장 큰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은 수년 째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실정이고, 한화솔루션 또한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러한 개별 기업의 부진은 석화 산업계의 심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난 6월 30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기업경기전망지수(BSI)에서 석화 업종은 72를 나타내 기준치인 100을 크게 밑돌았다. 이는 극도로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석화의 위기는 단순 재무제표상의 숫자에 그치지 않고 관련 업계의 상징인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2022년 111조5094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여수 산단은 입주 기업들의 실적 악화 탓에 신규 투자가 급감했고, 고용 불안 심화 등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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