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 구조개편이 좌초되면서 수급계획의 역할도 어정쩡한 상태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수급계획을 없애자니 아쉽고 그렇다고 매번 논란에 휩싸이는 것도 달갑지 않다. 어쩌면 계륵과도 같을 것이다. 조만간 전기사업법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형식적이고 소모적인 절차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요즘은 본래 수급계획이 만들어진 목적이나 역할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법에 규정되어 있고 정부의 업무라 하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수급계획이 국가 에너지정책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전원의 선택과 물량이 국가 에너지산업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이제라도 수급계획에 대해 냉정하게 집어보고 바람직한 방향을 생각해볼 때다.
오랜전 부터 수급계획 무용론이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계획의 목적이 무언지, 누구를 위한 계획인지 사실 명확하지 않다. 매번 계획을 통해 전원믹스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선언처럼 보인다. 특히, 근래 들어서는 신재생과 원전으로 대변되는 전원믹스의 변동이 반복되고 있다. 6차계획(2013년)은 석탄으로 7차(2015년)에는 원전으로 8차, 9차는 원전 없애기로, 10차, 11차는 다시 원전 늘리기다. 원전이 늘어날 때면 예상할 수 있듯이 수요전망이 높아지는 패턴도 여전하다. 매번 수요예측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소위 롤링플랜이라며 2년후의 계획으로 떠넘길 뿐이다. 다음에 또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최근 10년 정도만 보더라도 6차부터 진행중인 11차까지 여섯 번의 계획이 수립되었다. 6차계획에서는 수요가 비교적 높아서 대규모 신규 석탄과 가스복합이 1,530만 kW나 반영되었다. 7차(2015년)도 6차와 비슷한 높은 수요를 유지하면서 신규 원전 2기, 300만 kW가 반영되었다. 지난 정부에서 수립된 8차(2017년)와 9차(2020년)에서는 수요가 크게 낮아졌고, 예상하듯이 신규 원전이 철회되고 수명연장도 중지되었다. 현 정부들어 수립된 10차(2023년)와 올해 예정인 11차에서는 다시 수요가 늘어났고, 신규 원전이 각각 2기, 4기 반영되었다. 물론 미래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2년마다 예측이 크게 바뀌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수요증가폭이 낮을때는 경제성장 둔화, BTM(자가 태양광) 등 이유가 등장하고, 반대로 높아지면 데이터센터, 전기차 등이 단골메뉴처럼 되풀이된다.
최근 우리의 연간 전력수요는 대략 550 TWh 수준이고, 연중 피크부하는 9,450MW 안팎이다. 앞에서 언급한 수급계획의 예측치와 견주어 보면 6, 7차는 높았고, 8차는 비슷하며, 9차는 낮았다. 2030년 예측치로 비교하자면 11차의 수요예상치는 9차, 10차에 비해서 각각 18%, 12%나 높다. 앞으로 6년 후 수요가 지금의 추이에 비추어볼 때 크게 늘어날지는 의문이다. 현재 전력수요는 2018년 수요에서 4.5% 증가하는데 그쳤다, 연평균 1% 정도이다. 수요관리, 신산업, 무탄소 전원과 같은 에너지 정책과 의지를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높은 요인들은 시나리오에 의해 접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으로 유리 수요예측도 이러한 방식으로 유연성을 높여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에너지 여건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의 필요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본다. 이제 국가의 책무는 늘어나는 전력수요에 대비하는 성격보다는 불시에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비상계획의 성격이 더 크다. 즉, 공급력 확보가 위태로울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기능은 정부보다는 산업과 시장에서 스스로 해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 거론되는 송전망 문제도 과거 수급계획의 누적된 문제로 볼 수 있다. 전력산업 패러다임이 이미 변했음에도 여전히 대규모 발전단지와 원거리 송전 접근방법이 누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계획된 송전망이 어떻게 될지도 불확실하다. 설사 건설되더라도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분산시스템, 스마트빌딩 등 환경변화로 힘들어 구축한 전력망의 활용도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원의 선택문제도 불확실성이 크기는 마찬가지다. 투자결정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토대로 한다. 지금 신규설비 건설을 결정하더라도 원전은 입지, 인허가, 건설, 운용에 이르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예상보다 공기가 길어지면 투자비 또한 늘게 된다. KTX, 인천공항 등 굵직한 국책사업만 보더라도 알수 있다. 반면에 공기가 짧은 기술의 비용은 안정적이다. 재생에너지 중 일부는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공급비용이 하락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계획설비에 대한 경제성 평가는 미래의 비용이 기준이다. 시간을 무시한 경제성 비교는 객관성이 낮다. 과거에 건설비가 낮았으니 내일도 낮을 것이라는 가정은 불합리하다. 미국 에너지부에서는 해마다 전원별 공급단가 즉, LCOE를 발표한다. 비용산정을 위한 기초데이터는 투자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되었거나 금융절차가 진행 중인 계획 프로젝트를 기준으로 한다. 논란이 많은 전원별 경제성 평가방법도 개선이 필요하다.
수급계획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시급하다. 정부의 에너지정책 기능인 에너지 전망과 독립적 시스템운영자가 담당할 계통계획 기능으로 나누어 목적과 용도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금 제기되는 문제들도 대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어둡고 험한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