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이슈&인사이트] 간첩법 개정해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법적 안전망 구축해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4.08.13 11:02

이강국 전 중국 시안주재 총영사

이강국

▲이강국 전 중국 시안주재 총영사

해외에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는 첩보요원 신상이 유출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블랙 요원'들의 상세한 개인정보와 부대원 현황이 담긴 극비 자료가 군무원을 통해 중국 국적 동포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일단 신분이 노출된 요원은 재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타국 내 정보원 등 협조자 신상도 줄줄이 노출될 수 있다. 수년간 정보 당국이 공을 들여 만든 정보망이 와해될 수 있다.


군에서 극소수밖에 접근이 안 되는 블랙요원 자료가 일개 군무원에게 유출된 것도 황당하지만,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군 검찰이 군무원을 구속하면서 군형법상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 못하고 '기밀누설'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국가 기밀 정보를 적국에 넘길 때에만 간첩죄를 적용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며, 적국은 북한만 해당한다.


지난 제21대 국회에서만 해도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 개정안이 4건 발의됐으나 국회 법안 심의 과정에서 무산됐다. 법원행정처가 반대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별법 형태의 군사기밀보호법이 개정 논의되던 간첩법보다 법정형이 가벼운 점을 들어 법체계상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부정적 입장을 냈다. 또 우방국, 동맹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와 적국, 준적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도 일률적으로 높은 법정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임을 표명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간첩법 개정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신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법안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법원행정처 논리는 우리 기밀을 탈취한 국가가 우방국이냐 비우방국이냐에 따라 간첩행위를 한 자의 처벌 수준도 달리 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그런데, 어느 국가를 위해 정보를 누설하든 간첩행위란 본질은 그대로인데 해당 국가와의 관계가 왜 고려 대상이 돼야 하는 지 의문이다. 결국, 간첩행위 처벌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간첩법)은 법원행정처와 민주당의 반대로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은 적국과 동맹국·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간첩죄의 대상을 외국 일반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랙 요원' 자료 유출 같은 일이 이들 나라에서 벌어졌다면 당연히 간첩죄나 그 이상의 죄로 중형에 처할 것이다. 미 해군정보국(ONI) 분석관으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이 주미대사관 무관에게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과 관련한 군사기밀을 유출한 사건인 '로버트 김 사건'은 그 사례다.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동맹 관계이며,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한국이 당사국인 사건이었지만, 미 연방법원은 간첩죄를 적용해 로버트 김에게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했다.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반(反)간첩법(방첩법)'을 개정하여 간첩 행위의 범위를 넓히고 처벌을 강화하였다. 법적으로 '비밀 자료'로 간주되지 않는 통계 수집이나 지도 저장, 국가기관 사진 촬영도 처벌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중국 주재 대사관에서는 중국 여행시에 각별히 유념해달라는 공지를 올렸고, 중국에 여행가는 것도 꺼려진다는 말이 나왔다.


제22대 국회 개원 이후 주호영 의원은 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해외 국가·개인·단체의 간첩행위에 대해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등 처벌 근거를 마련했다. 격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외국과 적국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일 뿐이다. 다른 나라들은 적국과 동맹국·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간첩죄의 대상을 외국 일반으로 규정하여 국익을 도모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법적 안전망을 하루 속히 만들어야 하며, 간첩법 개정에 여당은 물론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촉구한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