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바이오산업은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점진적 제도 개선이 아닌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상임부회장은 혁신신약 개발, 조단위 기술수출의 잇따른 성사 등 국내 바이오산업의 국제적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며 이 기회를 잡기 위한 산업계와 정부의 패러다임 대전환을 주문했다.
이승규 부회장은 먼저 그동안 국내 바이오산업의 성장에 대해 국제적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지난해 유한양행의 폐암신약 '렉라자'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고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가 미국에서 처방 건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국내 바이오벤처의 기술이전 규모도 커지면서 조단위 기술수출도 지속되고 있죠."
이 부회장은 세노바메이트의 경우 SK바이오팜이 개발부터 임상, 승인, 출시, 마케팅까지 독자 수행해 성공했고 렉라자는 벤처기업-제약사-빅파마라는 전통적 경로를 통한 성공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성숙도가 높아지고 글로벌 빅파마들도 한국을 몇 안 되는 신뢰할 만한 파트너 국가로 인식하면서 한국 바이오산업이 다시없을 기회를 맞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승규 부회장은 이 기회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특히 현재의 국내 정세불안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며 불확실성의 해소를 주문했다.
제로베이스서 추격자 전략 성공적 수행…해외서도 놀라워 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바이오 투자시장이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도 올해 상반기부터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계엄·탄핵 여파로 예측가능성을 중시하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우리나라는 후순위 투자대상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 부회장은 지금 찾아온 기회는 길어야 3~5년으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인도는 물론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바이오 분야에서 우리보다 뒤쳐져 있었던 일본도 이제는 도전적인 투자로 우리를 앞지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금까지 우리 바이오산업이 '팔로워(추격자)' 전략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해 왔다면 이제는 '퍼스트 무버' 전략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성장을 위한 팔로워 전략은 성공적이었으며 해외에서도 한국 바이오산업의 성장을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발주자의 거센 추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산업 경쟁력 못지않게 제도 경쟁력 제고가 중요하며 새해는 여기에 방점을 둬야 합니다."
이승규 부회장은 제도 경쟁력 강화와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해법으로 산업계가 주도하는 범부처 컨트롤타워 구축과 이를 통한 어젠다 제시 및 이를 뒷받침할 범부처 협업체계를 강조했다.
산업적 인사이트(통찰력)를 갖춘 산업계가 주도해 미래 방향 및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학계가 뒷받침하며 정부부처가 범부처 협업 통해 이를 실현하고 지원하는 명실상부 범국가 컨트롤타워 구축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 부회장은 이 범국가 컨트롤타워가 모든 분야를 다 다룰 필요는 없으며 가장 중요한 몇 개 어젠다만 추려 제시해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바이오벤처의 상장유지조건을 개선해 코스닥 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 개선방안을 꼽았다.
현재 코스닥 시장에서는 '법인세 비용 차감전 계속사업 손실(법차손)'이 3년간 2회 이상 자본의 50%를 초과하거나 매출액이 30억원 미만인 기업은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추후 상장폐지될 수 있다. 다만 기술특례상장제도로 상장한 바이오벤처의 경우 법차손 요건은 3년, 매출액 요건은 5년간 적용유예를 받는다.
그러나 신약 1개 개발에 통상 10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적용유예 기간은 턱없이 짧아 실효성이 부족하므로 상장유지조건을 현실에 맞게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게 이 부회장의 설명이다.
“바이오 분야의 경우 코스닥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투자자가 모이지 않고 펀드가 조성되지 않아 코스닥이 활성화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 코스닥 시장을 활성화해야 하며 그 첫째로 법차손 문제를 융통성 있게 풀어줘야 합니다."
산업계 주도 범부처 컨트롤타워 구축…핵심 어젠다 추려 제시해야
특히 2005년 도입된 기술특례상장제도와 같은 획기적인 제도가 새롭게 나와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기술특례상장제도는 보유기술이 유망하다고 판단될 경우 재무제표상 적자가 있더라도 상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2015년 한 해에만 기술특례로 상장한 바이오기업이 10개에 이를 정도로 바이오기업의 성장발판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20년간 지속된 상장요건 규제가 바이오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술특례상장제도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제도로 이 제도 덕분에 벤처기업의 도전정신을 키워줬고 국내 바이오산업이 획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려면 20년 전 도입됐던 기술특례상장제도 수준의 파급력 있는 제도들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세부적으로 이 부회장은 상장폐지 조건으로 매출을 기준으로 하기보다 기술의 미래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주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신약개발 벤처기업이 기술특례로 상장한 뒤 5년 후 매출 30억원을 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상장을 유지하기 위해 신약개발에 투자할 비용으로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물티슈 회사를 인수하기도 하죠. 이래서는 신약개발에 전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장유지조건으로 매출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최초 공모가보다 주가가 몇% 하락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가는 기술의 미래 가치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주가를 기준으로 하면 처음 공모가를 너무 높게 설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법차손 문제도 자연스럽게 줄일 수 있고요."
레드바이오 분야에서는 세포유전자치료제(CGT), 항체약물접합체(ADC) 등 혁신기술을 심사하기 위한 식품의약품안전처 심사인력 확충이 컨트롤타워의 핵심 어젠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CGT, ADC 등 혁신기술을 신속히 심사하기 위해서는 식약처의 심사인력을 늘리고 전문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식약처 혼자 힘으로 되지 않고 행정안전부가 인력과 예산을 확충해 줘야 합니다. 범부처 협업이 필요한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러한 범부처 협업체계 구축이야말로 컨트롤타워가 해야 할 역할이죠."
법차손 완화, 매출기준 상장조건 개선, 심사관 확충 등 범부처 해결과제
이 부회장은 미국 FDA 사례를 벤치마킹해 식약처 심사관 채용의 투트랙 정책도 제안했다. “신약개발 기업이 신속한 인허가를 원한다면 높은 심사료를 책정해 심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 심사료로 3~4개월 근무기간의 계약직 심사관을 채용함으로써 신속한 신약 승인이 가능하고 심사 후 계약직 심사관은 다시 산업계 연구원으로 돌아가 심사업무 경험을 연구 현장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 이 부회장은 그린바이오 분야에서는 유전자재조합생물(GMO), 융복합바이오 분야에서는 개인정보보호 등의 과제가 범부처 협업이 필요한 핵심 과제이며 이러한 과제를 도출해 제시하는 것이 범부처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린바이오 분야에서는 유전자가위(크리스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에도 기존 GMO 관련 규제가 유전자가위 기술의 도입을 저해하고 있고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엄격한 국내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보건의료 관련 빅데이터 수집 및 활용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부처는 물론 국회와의 논의와 협업도 필요하다.
이승규 부회장은 “국내 바이오산업 생태계는 75~80% 가량 완성됐지만 아직 생태계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산업은 아직 선진국이 아닌데 제도만 선진국 수준으로 엄격하게 갖춰놓고 규제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생태계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해 3월 미국이 백악관 주도로 범부처 컨트롤타워인 '국가바이오경제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중국 역시 바이오산업에만큼은 '네거티브 규제방식'을 전면 도입한 만큼 우리도 전환기를 이끌 컨트롤타워 설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범국가 컨트롤타워는 바이오산업에 대한 인사이트(통찰력)을 갖춘 산업계가 주도해 핵심 어젠다를 도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를 제시해 이를 각 정부부처가 실천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야 합니다. 새해는 한국 바이오산업의 현실에 맞는 한국만의 제도가 나오는 원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 Who's 이승규
△연세대학교 공학박사 △일본동경공업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한국바이오협회 상임부회장 △국무총리 산하 디지털·바이오헬스 혁신위원회 자문위원 △미래의학연구재단 이사장 △한국생물공학회 부회장 △(재)국가신약개발재단(KDDF) 이사/투자심의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R&D투자 혁신자문단' 자문위원 △다부처공동기획사업 추진위원회 민간위원 △국회 산하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회 이사 △방역연계범부처감염병연구개발사업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