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그룹의 승계 과정을 살펴보면 지난 2018년을 변곡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당시 총괄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같은 해에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 고리 해소와 승계를 마무리하기 위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의 골자는 현대모비스 모듈과 사후관리(AS) 부품 사업 등을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발표 이후 합병비율이 현대글로비스 주주에게 유리하게 책정됐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합병 자체가 무산됐다.
합병이 무산된 이후 현대차그룹의 승계 시계는 사실상 멈춰 있다. 그러나 2018년 이후부터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 극대화가 현대차그룹의 승계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기업가치가 높아질수록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20%의 가치도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극대화된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활용해 승계를 마무리할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글로비스, 물류 전문 계열사로 출발…초창기부터 급성장
현대글로비스의 전신은 2001년 3월 현대차그룹이 설립한 현대로지텍이라는 물류 전문 계열사다. 당시 자본금은 12억5300만원에 불과했고, 정 회장이 59.85%, 정 회장의 부친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40.15%의 지분을 보유한 개인 회사에 가까웠다. 이후 현대로지텍은 사명을 2003년에 글로비스로, 2011년에 현대글로비스로 각각 변경했다.
현대글로비스는 설립 이후 현대차 계열사의 물류 수요를 흡수하며 급성장했다. 현대글로비스의 연간 매출은 설립 첫해인 2001년 1984억원에 불과했으나 4년 후인 2005년 1조5408억원으로 7배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93억원에서 785억원으로 8배 이상 늘었다.
이후 노르웨이 해운사 빌헬름센에 지분 매각과 기업공개(IPO)로 정 회장과 정 명예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지난 2015년 2월 당시에는 정 회장과 정 명예회장 둘이 합쳐 현대글로비스 지분 13.39%를 시간외대량매매(블록딜)로 처분하기도 했다.
공정거래법 시행으로 대주주 일가 지분이 30%를 초과하는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해 지분을 30% 이하로 낮춘 것으로 관측된다. 이후 정 회장이 20%의 지분을 보유한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신사업에 광폭 행보…현대차·기아보다 사업목적 2배 수준
설립 당시 단순 물류사에 가까웠던 현대글로비스는 최근 기업 정관에 60개가 넘는 사업 목적을 명시하며 적극적으로 신규 사업에 진출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 지난해 말 현대글로비스는 사업목적 현황에 사업 근거 62개를 등재했다.
이 중 실제 현대글로비스가 영위하는 사업도 53개에 달한다. 주요 영위 사업은 육·해상 및 항공화물운송업과 그 관련 서비스업, 화물운송주선업, 물류센터 운영 및 관련 서비스업 등이다.
이는 현대차그룹 핵심 계열사 중에서 가장 사업 목적이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그룹의 맏형인 현대차는 사업 목적으로 총 30개를 등재했다. 기아와 현대모비스도 정관에 기재한 사업 목적이 각각 34개와 13개 수준에 그친다. 이를 감안하면 현대글로비스는 그룹의 다른 핵심 계열사보다 2배 가량 사업 목적이 많은 셈이다.
특히 현대글로비스는 최근 3년 동안 주목할 만한 사업목적들을 연이어 추가해왔다. 2022년에 수소·암모니아 발전사업 및 탄소 중립 관련 부대사업을 등재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해에는 폐전지 판매 및 재활용업, 비철금속제품의 제조 및 판매업 2가지를 추가하기도 했다.
최근 현대글로비스는 해당 사업목적과 연계해 '사용 후 배터리 재활용(BaSS)'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배터리 회수 및 전처리, 재활용을 아우르는 종합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향후 전기차 등에 배터리 활용이 늘어나면 엄청난 잠재력을 갖춘 사업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정의선 회장, 결단의 시기 다가온다
현대글로비스가 신사업에 의욕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기업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로 분석된다. 특히 성장성이 높은 여러 신사업 분야에 광범위하게 진출한 것은 다른 핵심 계열사와의 어느정도 의사소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현대자동차그룹 경영권 승계 관점에서 다른 계열사보다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20%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핵심 자산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2020년 그룹 회장으로 선임됐다. 다만 회장 취임 후 5년차가 되도록 승계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 측면에서는 확고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으나 현대차그룹의 핵심 계열사 지분을 확보해 부친인 정 명예회장을 능가하는 지배력을 갖추지는 못한 것이다.
다만 조만간 정 회장이 결단을 내려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 명예회장은 올해 86세로 고령인 데다 2016년 12월 국정농단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에 출석한 이후 8년째 공식석상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건강 악화설까지 돌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도 2018년 이후 승계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다만 어떤 경우라도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의 지분을 승계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