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포함한 상법개정안을 발의하자, 기업들이 최대주주나 계열사에 자사주를 서둘러 매각하고 있다. 상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자사주 담보 교환사채(EB)를 발행으로 규제를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최근 당국이 태광산업 EB 발행에 제동을 걸자 기업들이 계열사에 자사주를 넘기는 방식으로 우회로를 찾는 모양새다.
최대주주, 특수관계인, 계열사, 우호주주에게 자사주 넘기는 상장사
10일 업계에 따르면, 여당의 상법 개정 움직임을 전후로 자사주를 처분하려는 상장사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다. 자사주를 최대주주나 특수관계인, 계열사에 넘기는 사례도 나타났다. 회사가 취득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제삼자에 처분할 때 의결권, 배당 등 권리가 되살아난다.
2일 코스닥 상장사 진양제약은 자사주 32만주를 20억4800만원에 창업주인 최윤환 회장에 장외 매도했다. 처분 가격은 이사회 결의일 전일 종가(6400원)와 같다. 처분 목적은 “기업 운영자금 확보 및 재무구조 개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진양제약은 5년 연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지난해 117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만큼 재무적 이유보다는 경영권 안정 목적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최 회장은 지난달 16일 전환사채(CB) 17만1690주도 인수했다. CB와 보통주 인수로 최 회장 지분율은 0.45%에서 4.17%로 높아졌다.
현재 진양제약의 최대 주주는 최재준 대표이사 사장으로 지분 22.61%를 보유하고 있다. 최 사장은 최 회장의 아들(특수관계인)이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은 총 27.81%다. 자사주 인수로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은 전체 30%를 웃돌 것으로 보인다.
코스닥 상장사인 솔본은 계열사인 테크하임에 자사주 167만9052주(6.14%)를 장외 처분한다고 2일 공시했다. 처분 가격은 주당 4080원으로 전체 68억5053만원 수준이다. 이에 따라 홍기태 솔본 회장을 비롯한 최대 주주·특수관계인 지분율은 57.88%로 불어났다.
환인제약은 발행주식총수의 5.38%에 해당하는 자사주 100만주를 케이프투자증권을 비롯한 국내 투자자에 시간외대량매매 방식으로 처분한다고 7일 공시했다. 처분가격은 전날 종가에 5% 할인율을 적용한 주당 1만2170원이다. 총 처분금액은 122억원 수준이다. 회사 측은 처분 목적으로 “유통 주식 수 증가를 통한 거래 활성화와 운영자금 확보"를 내세웠다. 환인제약은 처분 상대방이 회사 또는 최대주주와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사주를 제삼자에게 매각할 경우 의결권이 되살아나고 최근 10년간 최저 수준인 현 주가에 할인까지 적용해 처분한다는 점에서 기존 주주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제로 이날 환인제약 주가는 약 3.8% 하락 마감했다.
윤태준 액트 지배구조연수소장은 “세 사례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이런 사례 때문에 자사주 의무 소각 논의가 나오는 거라고 이해한다"고 말했다.
대주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인 자사주…1년 내 소각 의무화 법안 발의
올해 상반기까지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 의무를 피하기 위해 잇따라 교환사채(EB) 발행에 나섰지만, 태광산업 사태로 제동이 걸린 상태다. 교환사채는 기업이 보유한 자사주 등을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EB 투자자가 교환 청구하면 의결권이 살아날 수 있다. 더불어 주식 전환이 이뤄지면 유통 주식 수가 늘어나 소액주주의 지분 가치는 희석된다.
태광산업은 지난달 27일 자사주 전량(지분율 24.4%)을 담보로 EB 3186억원어치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분 희석을 우려해 상법 위반이자 배임 행위라며 법원에 발행 금지 가처분을 냈다.
금융감독원도 태광산업의 EB 발행에 대해 “발행 상대방에 대한 중요한 누락이 있다"며 정정 명령을 내렸다. 이에 태광산업은 지난 2일 관련 절차를 전면 중단했다.

▲자사주 교환형 EB 발행 추이
1일 대신증권은 '돈이 되는 ESG' 보고서를 통해 자사주 교환형 EB 발행 기업 수는 2022년 19건에서 2023년 26건, 2024년 31건으로 증가했고, 올해 상반기에만 기업 17곳이 자사주 교환형 EB를 발행했다고 밝혔다. 이경연 대신증권 책임연구위원은 “특히 올해 상반기 EB 교환대상 자사주 비율이 72.1%에 달한다는 점은 기업들이 자사주를 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자기주식 제도의 개선과제'에서 “상장회사들이 자기주식을 대주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여 주주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며 “자기주식을 활용해 지배주주 지분율을 강화하는 사례, 조직재편시 백기사로 자기주식을 활용하는 사례, 상호주 보유를 통해 우호주주를 형성하고 지배권을 강화하는 사례 등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이 3일 국회를 통과하면서 자사주 관련 법안도 순차적으로 상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9일 민주당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은 기업이 자사주 취득 후 1년 이내에 원칙적으로 소각하도록 하는 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발의안은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취득 후 1년 이내 소각 ▲임직원 보상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보유를 허용(주총 승인) ▲대주주의 의결권은 발행주식 총수의 3%로 제한 등을 골자로 한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달 발간한 '대한민국 진짜성장을 위한 전략' 정책 해설 보고서에서 자사주 규제와 관련한 밑그림을 공개했다. 자기주식의 취득은 상여금 지급, 주식 보상 등을 제외하고는 소각을 목적으로 한 경우만 허용하기로 했다. 이미 보유한 자사주의 경우 소각 유예기간을 충분히 부여하되, 자사주 처분 시 신주 발행 절차에 준용해 심사를 거치도록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