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 문구·완구 도매 종합시장에서 손님이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박주성 기자
중동 전쟁 장기화로 중동산 원유수급 불안이 커지면서 생활물가에 비상등이 켜졌다.
중소 제조업체와 소상공인들은 높아진 원가부담에 손실을 떠안으면서도 섣불리 소비자 판매가격을 올리지 못해 아직 전쟁으로 인한 생활물가 상승이 본격화되진 않았지만, 이들의 비용 감수가 곧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제조 현장과 전통 시장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참가격 데이터를 통해 전쟁 직전인 2월과 지난 3월의 평균 생필품 가격 동향을 대분류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전반적인 물가 지표는 대체로 보합세를 보였다.
생활용품과 신선식품의 3월 평균 가격은 전월 대비 각각 1.1%, 0.8% 하락했다. 다만 소비자들이 마트에서 자주 구매하는 가공식품의 경우 3월 전체 평균 가격은 한 달 새 0.4% 소폭 상승했다.
전체 지표상 생활물가 상승 폭은 미미하다. 다만 유지류와 수산물 등 국제 공급망 불안과 직결되는 일부 품목만 오름세를 보였다. 고등어 가격은 한 달 만에 26.4% 급등했고, 참치캔 가격은 6.2% 올랐다. 마가린(5.6%), 식용유(5.1%), 부침가루(5.1%) 등도 오름세를 보였다.
이러한 원가상승 압박은 식품 및 외식 프랜차이즈업계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다만 업계는 당장의 제품 가격 인상보다는 본사 차원의 비용 감내와 경영효율화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경기침체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치며 유가와 환율 급등으로 주요 원부자재 가격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현재는 내부적인 경영 효율화를 통해 경비 부담을 완화하고 있어 당장의 가격 인상 계획은 없다"고 설명했다.
프랜차이즈업계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한 프랜차이즈업계 관계자는 “전쟁 발발 이후 외국에서 직접 들여오는 치즈 등 수입 원부자재 쪽에서 가격 인상 여파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토로했지만 가격 전가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이 관계자는 “원가 인상 압박이 큰 것은 사실이나 가맹점의 안정적인 영업이 최우선"이라며 “현재는 가맹점 공급가나 소비자 가격에 이를 반영하지 않고 본사가 인상분을 직접 감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제조업체들의 자체 비용상승분 감수 노력으로 유통업체들은 아직 생필품 가격을 올리지는 않는 분위기다.
이달 1~5일 150여종 상품을 대상으로 반값 할인행사 '랜더스 쇼핑 페스타(랜쇼페)'를 진행하고 있는 이마트의 한 관계자는 “아직 납품업체들이 이마트에 납품하는 제품의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다"며 “아직 유통업계쪽에는 전쟁의 여파가 직접 닿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조업체들이 이미 높아진 제조원가를 아직 판매가격에 전가하지 않았을 뿐, 제조업체들의 손실이 누적되면 가격인상과 물가상승은 시간문제라는게 업계의 분위기다.
특히 플라스틱·고무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 완구·문구 제조업계의 경우 이미 원가 상승이 본격화됐으나 저출산과 학령인구 감소로 내수부진을 겪는 만큼 소비자 가격 인상은 극히 자제하고 있다.
한 완구 제조업체 관계자는 “플라스틱·고무 등을 주재료로 하는 완구의 제조원가가 전쟁 발발 이후 30% 가량 오른 상황"이라며 “그러나 내수가 침체돼 있는 상황에서 판매가 인상은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3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 문구·완구 도매 종합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제품 판매가격은 아직 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완구류를 판매하는 업체 사장은 “포켓몬 캐릭터 신제품 등 새로 출시한 IP(지적재산권) 적용 제품은 비슷한 기존 제품보다 가격을 다소 높게 책정하지만 기존 제품 가격을 인상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에서 판매하는 식재료·반찬류의 가격도 치킨이나 튀김류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아직 오름세가 크진 않다. 다만 식용유 등 식품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부대비용의 증가가 불가피한 만큼 앞으로 가격 상승은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
서울 중구 황학동 서울중앙시장에서 반찬류를 판매하는 업체 사장은 “우리는 아직 가격을 올리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말했고, 닭강정을 판매하는 업체 사장은 “원청이 계육 공급가격을 올려서 어쩔 수 없이 판매가격을 최소한으로 올렸다. 배로 운송되는 브라질산 계육이라 앞으로 공급가격이 더 오를텐데 그때 되면 장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국제 나프타가격 폭등의 직격탄을 맞은 플라스틱·비닐 용기·포장재 업체들은 이미 판매가격을 올린 것은 물론, 향후 공급 차질까지 우려하고 있다.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서 비닐 포장재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 사장은 “4월 들어 판매제품 가격을 20% 올렸다"며 “공급업체가 오는 15일 다시 (가격과 공급물량에 대해) 조정안을 공지하겠다고 알려온 상태"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곳(방산시장)에서는 거의 모든 업체가 이미 판매가격을 올렸다. 앞으로 더 오를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수급 불안은 의약품 분야로도 번지고 있다. 의약품의 경우 정부의 가격관리체계 아래에 있어 당장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약국 현장에서 자동조제기(ATC) 약포지·일회용 주사기 등 필수 의료 소모품 대란 우려가 확산하는 모양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 관계자는 “물약을 처방·투약하는데 필수적인 물약통(플라스틱 재질 투약병)의 경우, 제품 공급이 언제 안정될지 예측하기 어려워 손님이 추가 제공을 요구하더라도 1인당 1~2개로 제한해 판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화장품 업체 역시 용기 확보가 관건이다. 국내 화장품 ODM기업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일정 수준의 물량이 충분히 확보돼 당장 생산에 큰 차질은 없지만 전쟁이 장기화에 따라 종이 등 대체재 확보 및 공급망 다변화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장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소상공인들에게 포장재 가격 폭등은 또 다른 근심을 주고 있다"라며 “정부가 이번 사태를 엄중히 인식하고 소상공인 위기 극복을 위해 총력을 다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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