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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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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공시 의무화 충돌…“글로벌 기준에 맞춰” vs “기업 부담 적게”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6.04.07 09:57

2월 로드맵 발표 후 대상·시기 등 논란
외국에 비해 한국은 2~3년 뒤처진 일정
“정합성·인프라·유연성” 확보가 큰 과제
금융위, 이달 말 의무화 로드맵 확정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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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이행지원 세미나'. (사진=강찬수 기자)

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제도 설계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이해관계자 간 논란이 뜨겁다. '글로벌 정합성 확보'와 '기업 부담 완화'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정책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 ESG 공시 제도는 지난 2월 26일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가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을 의결하면서 본격적인 틀이 마련됐다. 기준은 일반 공시를 다루는 '제1호'와 기후 관련 공시를 담은 '제2호'로 구성되는데, 특히 기후 관련 정보는 의무 적용 대상이다. 반면 기타 ESG 요소는 자율 공시로 설계됐다.


이와 관련 금융위원회는 하루 전인 2월 25일 단계적 의무화 로드맵 초안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ESG 공시는 2028년부터 자산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시작되고, 2029년에는 자산 10조 원 이상으로 확대된다. 가치사슬 전반의 온실가스 배출량인 '스코프 3(Scope 3)' 공시는 기업 부담을 고려해 2031년으로 3년 유예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러한 '점진적 도입' 전략은 발표 직후부터 투자자, 기업, 시민사회 간 첨예한 논쟁을 촉발했다.



◇쟁점 1: 공시 대상과 시기…“너무 늦고 좁다" vs “현실 무시"


가장 큰 논란은 공시 대상 범위와 도입 시점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지난달 30일 서원주 기금이사 명의 의견서를 통해 금융위 안이 “장기 투자자 관점에서 불충분하다"고 비판했다.




국민연금은 공시 의무화 기준을 자산 30조 원 이상으로 할 경우 약 58개 기업만 포함하고, 더욱이 그중 상당수가 금융기관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제조업 등 실질적 전환 리스크를 지닌 기업이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시 대상을 자산 2조 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시행 시기도 2027년으로 앞당길 것을 요구했다.


반면 재계는 준비 부족을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조사에 따르면 상당수 기업이 ESG 전담 인력 없이 기존 업무와 병행하는 '겸직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한경협 측은 “전문 인력 확보와 데이터 체계 구축이 선행되지 않으면 제도는 형식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쟁점은 결국 “시장 신뢰 확보를 위한 조기 도입"과 “기업 생존을 고려한 속도 조절" 사이의 충돌로 요약된다.


현재 로드맵 기준으로 한국의 ESG 공시 도입 시기는 주요국 대비 2~3년 늦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유럽연합(EU)은 이미 2024년부터 시행 중이고, 일본·중국 등도 2026년 전후로 의무화를 시작한다.


특히 공시 확대 완료 시점 역시 한국은 2033년으로 예상돼 글로벌 흐름보다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투자자들은 정보 공백이 장기화될 경우 자본 이탈이나 '코리아 디스카운트'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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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한국회계기준원)


◇쟁점 2: 스코프 3 공시…유예 기간을 둘러싼 격돌


스코프 3 공시를 3년 유예한 방안도 핵심 논쟁 대상이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플랜1.5 등 시민사회는 국제 기준과의 괴리를 문제 삼는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1년 유예를 권고하고, 주요국이 2030년 이전에 공시를 완료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2031년으로 늦추는 것은 국제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기업들은 현실적 한계를 강조한다. 스코프 3는 협력사 데이터를 포함해야 하는데, 중소 협력사의 측정 역량 부족, 데이터 신뢰성 문제, 막대한 비용 부담, 그리고 영업비밀 유출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법적 책임이 수반될 경우 '그린워싱' 논란까지 겹쳐 리스크가 확대된다는 점이 핵심 우려다.


이 논쟁은 단순한 일정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의 완결성"과 “조기 공개 필요성"이라는 상반된 입장이 낳은 갈등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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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거래소(KRX) 앞의 황소와 곰 동상. (사진=강찬수 기자)

◇쟁점 3: 공시 방식…거래소 vs 법정 공시


공시를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도 중요한 쟁점이다.


금융위원회는 초기에는 부담이 적은 '거래소 공시'로 시작한 뒤 점진적으로 법정 공시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국회 박상혁 의원(더불어민주당, 경기도 김포시을)은 지난달 30일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법률안을 통해 처음부터 사업보고서에 포함되는 '법정 공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지속가능성 공시가 돼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 의원은 대신 기업 부담 완화를 위해 '세이프 하버(Safe Harbor)' 조항 도입을 제안했다. 이는 고의가 아닌 오류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일정 기간 면제하는 장치로, 불확실성이 큰 ESG 데이터 공시의 현실을 반영한 절충안으로 평가된다.


결국 이 쟁점은 “신뢰성 확보"와 “법적 리스크 완화" 사이의 균형 문제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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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의원.


◇데이터 부족엔 비례성 메커니즘 활용을


전문가들은 향후 정책 방향으로 세 가지 축을 제시한다.


첫째, 국제적 정합성 확보다. 지현영 변호사 등은 “글로벌 투자자 신뢰 확보를 위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공시 체계를 조속히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 지표를 공시에 포함하고 법정 공시 전환 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둘째, 인프라 구축이다. 전문가들은 제3자 인증 의무화와 함께 중소 협력사까지 활용 가능한 공공 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한다. 이는 스코프 3 공시의 실효성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셋째, 실무적 유연성이다. 정량 데이터 확보가 어려운 경우, 가정과 방법론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공시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정량적 데이터가 없을 때는 정성적 설명을 허용하는 '비례성 메커니즘' 활용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비례성 메커니즘'은 기업이 공시 의무를 이행할 때 자사의 상황과 역량에 맞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 기업의 부담을 완화해 주는 원칙을 말한다. '과도한 원가나 노력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뒷받침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정교한 정책 설계가 필요


한국이 2028년을 ESG 공시 의무화 시점으로 설정한 데에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 등 EU의 역외 규제 영향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U가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ESG 정보 공개를 요구하면서, 국내 기업들도 수출과 투자 유치를 위해 이에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는 기업 부담과 준비 수준을 고려해 시기를 조정한 측면이 있어, 단순히 외부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기보다 대응과 완충을 병행한 절충적 결정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의무화는 외부 규제 대응 성격과 내부 수용성 고려가 결합된 정책으로 평가된다.


어쨌든 국내 ESG 공시 의무화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도입할 것인가에 있다. 투자자들은 빠른 도입과 정보 신뢰성을 요구하고, 기업은 현실적인 준비 기간과 부담 완화를 호소한다.


결국 해법은 단순한 속도 조절이 아니라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 확보 △데이터 인프라 구축 △법적 리스크 완화 장치 마련이라는 세 요소를 동시에 충족하는 정교한 정책 설계에 달려 있다.


금융위원회가 이달 말 확정할 최종 로드맵에서 어떤 균형점을 제시할지, 그 결정이 한국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좌우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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