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체결 등을 요구하며 휴업에 들어간 전국레미콘운송노동조합 조합원들이 9일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 앞에서 불공정거래 철폐 촉구 총력 투쟁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수도권 레미콘 운송노조의 집단 휴업이 8일 만에 종료됐다. 레미콘 제조업계와 운송노조가 운송비 인상안에 최종 합의하면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와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주요 건설현장의 콘크리트 타설 차질도 정상화 수순에 들어갈 전망이다.
다만 이번 합의가 8개월짜리 단기 합의에 그친 데다, 단체교섭권 인정 여부와 건설기계 수급조절제도 개편을 둘러싼 노사 간 시각차가 여전해 갈등의 불씨는 남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의 레미콘 대란은 피했지만 운송시장 구조와 교섭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유사한 갈등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다.
1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국레미콘운송노동조합은 전날 수도권 조합원 7517명을 대상으로 2차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진행한 결과, 찬성 65.9%로 합의안이 가결됐다고 밝혔다. 투표에는 조합원 7158명이 참여해 투표율은 95.2%를 기록했다. 찬성은 4714명, 반대는 2316명, 무효·기권은 128명이었다.
이번 합의안은 유류비를 제외한 레미콘 운송 단가를 회당 4200원 인상하고, 적용 기간을 기존 1년에서 8개월로 줄이는 내용이 핵심이다. 노사는 앞서 지난 9일 국토교통부 중재 아래 회당 운송비를 4200원 인상하는 1차 잠정합의안을 마련했지만, 이튿날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반대 68.3%로 부결됐다. 이후 재협상 과정에서 인상 폭은 유지하되 적용 기간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접점을 찾았다.
노조는 합의안 가결에 따라 지난 8일부터 이어온 운송 중단을 종료하고 현장 복귀에 나섰다. 이에 따라 수도권 주요 건설현장의 레미콘 공급 차질도 순차적으로 해소될 전망이다.
이번 파업은 반도체 공장 등 대형 건설현장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 15일 오후 기준 대형 건설사 27개사의 공사현장 119곳에서 레미콘 공급이 중단됐고, 약 18만㎥ 규모의 콘크리트 타설이 지연된 것으로 집계됐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와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국가 핵심산업 관련 공사 현장도 영향권에 들면서 업계의 긴장감이 커졌다.
건설업계에서는 일단 운송 재개로 급한 불은 껐다는 평가가 나온다. 레미콘은 생산 후 짧은 시간 안에 타설해야 하는 특성상 공급이 멈추면 골조 공정뿐 아니라 후속 공정까지 연쇄적으로 밀릴 수 있다. 특히 반도체 공장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는 공기 지연에 따른 비용 부담이 커 현장 관리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근본적인 갈등을 해소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쟁점은 교섭체계다. 전운련은 레미콘 운송 노동자들이 노조법상 교섭 주체로 인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원 판단과 고용노동부의 설립필증 교부 등을 근거로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레미콘 제조업계는 운송 기사 상당수가 개인사업자 형태로 계약을 맺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단체교섭권 인정에 신중한 입장이다. 관련 소송이 항소심에 계류 중인 점도 변수다. 결국 운송비 인상 폭을 둘러싼 협상은 마무리됐지만, 누가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교섭할지에 대한 근본 문제는 남아 있는 셈이다.
협상 과정에서 노사 간 불신도 확인됐다. 앞서 제조업계는 1차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된 뒤 공식 합의안 번복에 유감을 표하며 향후 운반비 협상을 권역별 협상으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반면 노조는 통일 교섭 방식과 단체교섭 이행을 요구해왔다. 이번 합의로 파업은 멈췄지만 교섭 방식 자체를 둘러싼 이견은 그대로 남았다.
파업 과정에서는 일부 비노조 운송사업자와 다른 노조 소속 사업자들의 운행 재개 움직임도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흐름이 운송 중단의 영향력을 일부 제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레미콘 운송시장은 지입차, 자가용 차량, 용차 등으로 나뉘며, 파업 국면에서는 차량 유형과 소속에 따라 운행 여부가 엇갈리는 모습도 나타났다.
업계 일각에서는 배치플랜트 도입 검토와 관련 규제 완화 가능성 등이 거론된 점도 운송 중단 장기화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배치플랜트는 건설현장에서 직접 레미콘을 제조할 수 있는 설비로, 실제 도입 여부와 범위에 따라 기존 운송시장 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레미콘 운송 노동조합이 사측에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체결 등을 요구하며 휴업에 들어간 8일 경기도 안양시의 한 레미콘 업체에 레미콘 차량이 멈춰 서있다. 연합뉴스
8개월 뒤 다시 협상…운송시장 구조개편 없인 재발 우려
8개월짜리 합의라는 점도 향후 부담으로 꼽힌다. 통상 운송비 협상은 1년 단위로 진행돼 왔지만, 이번에는 적용 기간을 2026년 7월부터 2027년 2월까지로 줄였다. 당장 파업을 끝내는 효과는 있었지만 내년 초 다시 협상이 불가피해졌다. 업계에서는 향후 재협상 과정에서 인상 기준 기간과 적용 폭을 둘러싼 추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레미콘업계 관계자는 “이번 합의는 현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며 “적용 기간이 8개월에 그친 만큼 내년 초 다시 운송비 협상이 시작되면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운송비 인상 여부를 매번 파업과 협상으로 결정하는 구조가 반복되면 건설현장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건설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운송시장 구조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레미콘 믹서트럭 신규 등록을 제한하는 건설기계 수급조절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제도는 공급 과잉과 과당 경쟁을 막고 영세 차주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장기간 증차가 제한되면서 기존 운송사업자의 시장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믹서트럭 신규 진입이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기존 운송사업자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커졌고, 운송비 협상이 집단 운송 중단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운송노동자 측은 유류비와 차량 유지비, 노동 강도 등을 감안하면 운송비 현실화와 고용 안정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레미콘 운송시장은 수급조절제도로 신규 진입이 제한되면서 기존 사업자들의 협상력이 커진 측면이 있다"며 “지역별 건설 수요와 교통 여건, 산업 구조에 맞게 수급조절제도를 유연하게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레미콘 운송 갈등은 단순한 운송비 인상 문제가 아니라 건설현장 공급망 안정성과 운송시장 제도, 노동자성 인정 여부가 얽힌 구조적 문제로 번지고 있다. 운송비를 시장 지표와 연동하는 표준 체계를 마련하고 제조사와 운송노동자, 건설업계가 참여하는 상시 협의체를 통해 갈등을 사전에 조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레미콘 공급 차질은 단기간에도 현장 공정에 큰 영향을 준다"며 “특히 반도체 공장처럼 일정 관리가 중요한 현장은 운송 중단 리스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공급망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비슷한 갈등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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