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업 밸류업 정책 및 ESG(환경, 사회, 기업 지배구조) 경영 확산으로 자사주를 소각한 상장사가 늘어나고 있으나 주가 부양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초 이후 소각을 발표한 상장사 중 절반 이상의 주가가 하락했으며, 오른 경우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단순 주가 부양 정책보다는 기업의 실제 가치가 커질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연초 이후 현재까지 자사주 소각을 공시한 상장사는 총 121곳(중복 포함)으로 나타났다. 작년 한 해 95곳에 그친 것과 비교해 대폭 늘어난 수준이다. 통상 주주가치 증대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받으려면 발행주식 대비 소각비율이 1%를 상회해야 하는데, 이 조건에 드는 소각 건수도 85개(쌍용C&E는 상장폐지로 제외)에 달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자사주 소각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주가는 대부분 하락하거나 기대만큼 상승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85건의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 공시 날부터 이달 10일까지의 주가 추이를 살핀 결과, 57개사의 주가가 하락했으며 28개사만이 주가가 상승했다.
특히 자사주 소각 비율 상위권에 속하는 상장사들 역시 주가 하락을 면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2024년 자사주 소각 비율 상위 6개사 주가 변동률 추이
소각 비율이 29%로 가장 높았던 에스앤디는 3월 공시 후 6개월 간 주가가 14.70% 상승했지만, 이를 제외한 상위 3개 기업 모두 주가가 20% 이상 폭락했다. DL이엔씨(소각비율 7.60%) 주가는 30.50%, 콜마홀딩스(소각비율 6.73%) 주가는 25.40%, SK네트웍스(소각비율 6.15%) 주가는 36.50%만큼 각각 하락했다. 소각 금액이 절대적으로 큰 SK이노베이션(7936억원)에도 공시 이후 현재까지 주가가 14%가량 하락했다.
단 소각 규모가 작을수록 주가 낙폭도 훨씬 큰 모습을 보여 아직 자사주 소각과 주가 간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2월 말 자사주 소각을 공시한 후 현재까지 주가가 62% 폭락한 스튜디오미르의 경우 발행주식 대비 소각 비율이 1.90%밖에 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낙폭이 큰 에치에프알(-46.30%)과 상신이디피(-44.90%), OCI홀딩스(-40.70%), 주성엔지니어링(-40.00%) 등 모두 발행주식 대비 자사주 소각 비율이 2% 이하였다.
반대로 주가 상승률이 112.80%로 가장 큰 에프앤가이드의 자사주 소각 비율은 6.04%에 달했다. 이를 포함해 주가 상승률 20% 이상인 10개사 중 소각비율이 1%대인 곳은 네 군데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자사주 소각은 기업의 유통 가능한 발행 주식 수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주가 상승효과를 불러와,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 진행 중인 밸류업 정책 또한 기업의 주주환원 정책을 적극 장려하고 있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주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는 평가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단순 주가 부양이 아닌 실질적인 기업 가치가 증대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주환원이 이뤄지더라도 기업이 고평가됐다고 판단한다면 주가가 오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밸류업 정책에서도 주가순자산비율(PBR) 하나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유 자산의 가치, 현금 창출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저히 저하된 기업의 수익성을 개선하기 전에는 단기간에 주가 견인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장기적으로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구조적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