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만난 HD현대 정기선 회장과 빌 게이츠.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이 다시 만나면서 HD현대의 국내외 소형모듈원자로(SMR) 사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회장은 14일 방한한 게이츠 이사장과 만나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자력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만난 이후 7개월 만이다.
두 사람의 만남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4년간 이어진 HD현대의 행보다. 국내 원전 기자재 업체들이 여러 해외 SMR 개발사와 협력망을 넓혀가는 동안 HD현대는 육상 SMR 상업 공급망에서는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키워왔다.
단순한 업무협약(MOU)도 아니다. 지분 투자에서 시작해 실제 기자재 수주와 공급망 구축으로 협력의 단계가 올라가고 있다.
◇ 두산은 '다중 베팅' vs HD현대는 테라파워 공급망 집중
HD현대와 테라파워의 협력은 2022년 본격화됐다.
HD한국조선해양은 그해 테라파워에 3000만달러를 투자했다. 이어 2024년 12월에는 테라파워가 미국 와이오밍주 캐머러에 건설하는 345MW급 소듐냉각고속로(SFR) '나트륨(Natrium)'에 들어갈 원자로 용기를 수주했다.
테라파워는 당시 첫 나트륨 원자로의 주요 기자재를 글로벌 업체에 나눠 발주했다. HD현대가 원자로 용기를 맡았고 두산에너빌리티도 코어 배럴과 가드 베슬, 내부 지지구조물 등을 수주했다.
HD현대는 이후에도 테라파워와 나트륨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대 협력을 이어가며 단순 투자자에서 핵심 기자재 공급자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 두산은 뉴스케일파워에 2019년과 2021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400만달러를 투자했고 엑스에너지에도 지분을 투자했다. 영국 롤스로이스 SMR과도 기자재 공급 협력을 추진하는 등 복수의 SMR 개발사와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특정 원자로를 직접 개발하기보다 어떤 SMR 노형이 먼저 상용화되더라도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 핵심 기자재를 공급하는 이른바 'SMR 파운드리'에 가까운 전략이다.
같은 SMR 시장을 두고 두산은 여러 노형에 공급망을 펼치는 반면 HD현대는 테라파워의 상업화 과정에 깊숙이 들어가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 '탈원전 이탈' 아닌 신규 진입…4년짜리 우회로
HD현대의 행보는 국내 원전 생태계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국내 대형 원전 주기기 제작 시장은 오랜 기간 두산에너빌리티를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수주한 체코 두코바니 원전에서도 두산에너빌리티가 '팀코리아'의 핵심 공급사로 참여하는 구조다.
HD현대는 기존 국내 원전 밸류체인에서 이탈했다기보다 애초 원전 주기기 시장에 새롭게 진입하는 기업에 가깝다.
따라서 기존 국내 공급망에 들어가기보다 해외 차세대 원자로 개발사에 먼저 투자하고 실제 기자재 제작 능력을 입증한 뒤 상업화 단계의 공급망에 진입하는 길을 택했다.
테라파워 투자가 단순한 재무적 투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 종착지는 원전이 아니라 '배'
정 회장이 SMR에 공을 들이는 이유를 육상 원전 기자재 사업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HD현대의 본업은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업이다. 회사는 SMR을 적용한 해상 원자력 발전과 원자력 추진선 기술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HD현대는 테라파워를 비롯해 웨스팅하우스, 영국 로이드선급 등과 해상 원자력 에너지 협의기구(NEMO) 설립에도 참여했다. NEMO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해상 원자력의 국제 표준과 제도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육상 SMR 상업 공급망에서는 테라파워와 관계를 깊게 가져가되 해상 원자력에서는 원자로 개발사와 선급 등 다양한 글로벌 사업자와 협력하는 '투트랙' 전략인 셈이다.
배경에는 조선산업의 탈탄소 문제가 있다. 국제 해운의 탄소 규제가 강화되면서 LNG와 메탄올·암모니아에 이어 장기간 무탄소 운항이 가능한 원자력 추진선이 미래 기술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두산이 원전 시장 자체의 확대에서 기자재 수주 기회를 찾는다면 HD현대는 원자력 기술을 조선업의 다음 시장으로 가져오려는 차이가 있다.
◇ 첫 상업로의 위험…'집중 베팅'은 성공할까
집중 전략에는 위험도 따른다.
테라파워의 나트륨은 지난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건설허가를 받아 원자로 관련 공사 단계에 진입했다. 차세대 원자로 상용화 경쟁에서 상당히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첫 상업호기(FOAK)인 만큼 실제 건설 일정과 비용, 운영허가 취득 및 상업운전까지는 변수가 남아 있다. 테라파워의 상업화 속도가 HD현대가 기대하는 공급 물량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개발사에 걸쳐 공급망을 구축한 두산보다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노출도가 크다.
원자력 추진선은 넘어야 할 산이 더 많다. 선박에 원자로를 탑재할 경우 원자력손해배상과 핵비확산 통제, 기항국 허가 등 국제적인 규범이 아직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다. HD현대가 NEMO를 통해 국제 표준 마련에 직접 뛰어든 배경이기도 하다.
국내 제도 환경도 변하고 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2035년까지 0.7GW 규모 SMR을 도입한다는 계획이 반영돼 있다. 다만 국내 SMR 사업은 혁신형 SMR(i-SMR)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HD현대가 테라파워와 구축한 미국 공급망과는 별도의 트랙이다.
정 회장과 게이츠의 이번 만남은 그래서 단순한 총수 간 친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22년 3000만달러 투자로 시작한 HD현대의 선택은 이제 실제 원자로 제작과 상업 공급망 구축 단계까지 넘어왔다.
다음 목표는 원자로 몇 기의 기자재를 수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자력을 HD현대의 본업인 '배'에 접목하는 것까지 성공한다면 4년 전 테라파워에 건 3000만달러의 베팅은 조선업의 새로운 시장을 여는 투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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