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상대로 통상·안보 압박 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정 지지율이 하락세를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외교 분야마저 흔들릴 경우, 이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은 통상과 안보 문제를 놓고 오랜 동맹국인 한국을 압박하는 와중에 김 위원장에게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미 국방부에 한미 연합 군사훈련 규모를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다. 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연합훈련이 북한에 부적절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루 뒤에는 자신의 대화 요청에 김 위원장이 응답했다며 이를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자신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합성 사진을 트루스소셜에 올리기도 했다. 이 사진에는 김 위원장이 전화기를 들고 '이봐 도널드, 우리 사이 괜찮지?'라고 말하는 내용이 덧씌워졌다.
이런 가운데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르면 올가을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참모들에게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북미 정상 간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사진=트루스소셜)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이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피스메이커' 역할을 공개적으로 요청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백악관에서 이 대통령에 대해 “사실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취재진에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의 대화를 본격 추진할 경우 이른바 '코리아 패싱' 논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블룸버그는 “미국과 북한 간 접촉이나 한미 연합훈련 축소 계획을 한국 정부가 사전에 전달받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짚었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관련해 조현 외교부 장관은 19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트루스소셜에 밝힌 내용은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의 관계자들도 전혀 사전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저희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미측과, 트루스소셜에 (내용이) 나온 이후 긴밀하게 협의해온 것으로 안다"며 “우리 장관이 함께 협의했기 때문에 (미측의) 일방적 통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는 전술적 역량을 강화하는 훈련은 계속하되 '을지 자유의 방패(UFS)'를 대폭 축소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번 훈련은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일주일 앞당겨 오는 21일 종료될 예정이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도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측의 제안에 따라 연습 기간과 규모 등을 일부 조정하기로 했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메이슨 리치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한국과 충분한 협의 없이 북미 대화가 진행될 경우 “한국은 자국의 안보와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인 외교 과정에서 충분한 발언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적어도 트럼프 대통령 집권하에서는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라는 한국 국민의 광범위한 믿음을 훼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외교 호평받았는데…지지율 하락 속 새로운 부담
▲8월 2주차 이재명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 요약. 자료=리얼미터
이 같은 상황에서 이 대통령을 향한 비판이 거세질 경우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짚었다. 블룸버그는 또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외교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실제로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43.0%로 집계, 5주 연속 하락하며 최저치를 경신했다.
리얼미터는 “부동산 세제 개편안을 둘러싼 혼선과 '폐버스 청년주택' 발언 논란으로 촉발된 청년 주거 민심 반발이 겹치면서, 정책 신뢰도 하락이 누적되어 긍정평가 하락으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4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44%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부정 평가는 46%로 8%포인트(p) 상승하며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긍정 평가를 넘어섰다. 해당 조사에서 긍정 평가 이유로는 '외교'(19%)가 가장 많이 꼽혔다.
그러나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북미 직접대화 가능성 등이 맞물리면서 야당은 이재명 정부의 대미 외교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7일 페이스북을 통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축소를 지시한 것을 두고 “이재명 정부의 오만한 외교 행태가 자초한 안보 참사"라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전날에도 “대한민국이 배제된 미북 대화의 결과는 뻔하다. 북한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한미동맹은 와해될 것"이라며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주한미군 철수까지 밀어붙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대통령의 진짜 속내가 궁금하다. 주한미군 내보내고, 한미동맹 해체하겠다는 것인가"라며 “북한에 무릎 꿇고 중국에 '셰셰'하며 사는 나라로 바꿀 생각인가"라고 꼬집었다.
한미 간 불협화음이 커지는 가운데 북한 문제를 둘러싼 한중 외교 채널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블룸버그는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약 5년 만에 방한해 한반도 문제 등을 논의하는 것을 두고 '물밑 외교의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왕 부장은 19~20일 이틀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오는 20일 이 대통령을 접견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일 경북 경주 소노캄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위한 국빈만찬에서 시 주석 건배사 때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건배하고 있다.
◇ 3500억달러 투자·핵잠수함도 난항…한미 곳곳 '불협화음'
한미 간 갈등은 안보뿐 아니라 통상 문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지나치게 늦추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대미 투자 패키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의 추가 미국 투자를 포함하기를 원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이 대통령의 고민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에 추가 생산시설을 건설할 경우 국내에 반도체·인공지능(AI) 산업 거점을 확대해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확산시키겠다는 이 대통령의 정책 구상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한국도 미국을 향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전날 제1회 을지국무회의에서 18일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한국의 첫 핵추진잠수함 확보를 위한 한미 간 논의가 지연되는 것과 관련해 “추진에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우리 자신의 힘 키워야 동맹으로의 가치와 필요성도 더 커지게 된다"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합의에 서명한 뒤 한국의 첫 핵추진 잠수함 확보 추진을 전격 승인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대미 투자와 핵추진잠수함 모두에서 눈에 띄는 진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정부가 쿠팡을 대하는 방식에도 불만을 표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최근 갈등이 한미 동맹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레이프 에릭 이즐리 이화여대 교수는 “한미 관계는 관세와 투자 지연, 방위산업 조달, 기업 규제 등 여러 분야에서 난기류에 직면해 있다"면서도 “한미 동맹은 추락하기보다는 고도를 조정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한편 북미 정상회담이 실제 성사될 가능성은 미지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북한은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최대 220억달러의 해외 수입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화한 2018년부터 2021년의 약 4배에 달한다.
블룸버그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상당한 외화 수입을 확보한 만큼 김 위원장이 핵 억지력을 놓고 미국과 협상에 나설 유인이 과거보다 크게 줄었다고 분석했다.
기사에 인용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0%p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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