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진=로이터/연합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국가별 세율·쿼터를 미국 내 투자 실적과 연계하는 '2단계 반도체 관세'를 예고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새로운 투자 압박에 직면했다. 정작 이 부담을 덜어줄 협상 카드는 정부가 쥐고 있지만 집행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미국이 꺼내든 관세 카드는 세금을 걷으려는 게 아니라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압박용에 가깝다. 그런데 이를 대신 풀어줄 한미 전략투자 집행이 늦어지면서, 개별 기업들만 미국의 전방위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3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 투자신고식'을 마친 뒤 취재진과 만나 반도체 관세와 관련한 정부 입장을 밝혔다. 김 장관은 “지난 10월 관세 협상 때 우리 반도체에 대해서는 경쟁국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하겠다고 미국이 이미 얘기한 적이 있고, 그 정신 하에 계속 논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 정상 간 합의를 담은 공동설명자료와 대미투자 양해각서(MOU), 최근의 무역법 301조 관세 부과까지 모두 같은 원칙 아래 다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 측의 구체적인 발표 시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고 선을 그었고, 이달 중 마무리하기로 한 대미투자 사업 계획도 “변함없다"고만 했다. 투자 규모 확대 요청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국익이 걸린 협상인 만큼 지켜봐 달라"는 원론적 답변에 그쳤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출국장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앞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미 CNBC·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2단계 반도체 관세의 얼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미국 내 생산 비중이 낮은 기업일수록 고강도 관세를 물리고, 대상도 반도체 자체를 넘어 노트북·게임기·데이터센터 서버 등 완제품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러트닉 장관은 “미국에서 생산하면 관세를 내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에 들어오기 위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직접 겨냥해 “이곳에 공장을 짓는 건 필수적"이라고 압박 수위를 높였다. 그는 앞서 지난 7월 마이크론 뉴욕 공장 기념식에서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데려와 공장을 짓게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구조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서는 곳은 TSMC다. TSMC는 애리조나에 기존 1650억 달러 투자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지난 7월 100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추가로 발표하며 총 2650억 달러 규모 설비를 짓고 있다. 여기에 200억~300억 달러를 더 얹을 계획도 세워둔 상태다. 투자 규모에 비례해 관세가 낮아지는 구조라면 TSMC는 관세 부담 대부분을 흡수하며 경쟁사보다 유리한 조건을 손에 쥘 공산이 크다.
반면 삼성전자의 누적 대미 투자는 370억 달러, SK하이닉스는 39억 달러에 그친다. 대만 수준으로 맞추려면 지금까지 쓴 재원의 6.5배를 더 투입해야 하는 셈이다. 더 민감한 대목은 투자의 '질'이다.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오스틴에 짓는 시설은 파운드리와 연구개발(R&D) 라인이고,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에 구축 중인 시설은 메모리 후공정 거점이다. 미국이 관세 면제 조건으로 '메모리 전공정 팹'을 콕 집어 요구할 경우 두 기업 모두 부담이 한층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공정 팹 한 곳을 새로 짓는 데만 60조~100조원이 들고 핵심 기술 유출 우려까지 겹쳐, 기업들이 선뜻 결단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 관세 압박과 한미 전략투자 집행 지연에 따른 국내 반도체 기업의 투자 부담을 나타낸 그래픽. 그래픽=김하나 기자
통상 전문가들은 미국의 반도체 관세 압박이 실제 관세 부과보다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현지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협상 카드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관세를 저렇게 타겟팅하겠다는 것은 지렛대로 삼는 것이지, 실제로 관세를 부과하기는 어렵거나 하더라도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한국 기업이 순순히 미국의 요구에 맞출 유인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고, 국내 투자 여력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처지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따라 받기로 한 보조금조차 완전히 지급되지 않은 전례도 있다. 김 교수는 “이 문제는 삼성·SK 반도체 부문만 떼어내 볼 게 아니라 한미 FTA와 3500억 달러 전략적 투자를 함께 봐야 한다"며 “그중 2000억 달러는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부분인 만큼, 반도체 생태계 투자 사업 중 하나로 엮어서 추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지점이 정부의 '늑장 대응'이 도마에 오르는 대목이다. 개별 기업이 관세 압박에 대응해 독자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결단하기는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운 만큼, 정부가 연간 200억 달러 한도로 운용 중인 전략투자 사업을 서둘러 집행해 반도체 생태계 투자와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렇게 하려면 개별 기업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올해 200억 달러 실링으로 잡혀 있는 전략적 투자 사업을 정부가 빨리 추진하는 게 낫다"며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가 계속 미적미적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이 계속 압박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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