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전지성 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에도 고향이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도,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공장도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수십·수백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그룹들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방의 상점과 직물공장, 자동차수리업 등 작은 사업과 만난다.
추석을 맞아 창업주들의 고향과 첫 사업을 따라가 보면 한국 재계가 성장한 또 다른 지도가 드러난다.
◇ 의령에서 대구로…삼성은 '상회'에서 출발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가 1938년 대구에서 세운 삼성상회가 오늘날 삼성그룹 역사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당시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 등을 취급하고 이를 중국 등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했다. 이후 제당·섬유 등 제조업으로 사업을 넓혔고 1960년대 후반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오늘날 삼성 하면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먼저 떠올리지만 출발점은 지역 농산물 등을 취급하던 상사였던 것이다. 삼성상회가 1938년 설립됐다는 점은 기업사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 통천 청년 정주영, 서울에서 현대를 만들다
현대의 역사는 이동의 역사에 가깝다.
정주영 창업주는 지금의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러 차례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쌀가게 등에서 일한 뒤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고 자동차수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우고 1947년 현대토건을 설립하면서 '현대'라는 이름의 기업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설에서 자동차, 조선으로 이어진 현대의 성장 과정은 창업 초기부터 사업 영역을 끊임없이 바꿔온 과정이기도 했다.
◇ 포목과 화장품, 직물과 화약…첫 사업은 지금과 달랐다
LG 역시 처음부터 전자기업은 아니었다.
구인회 창업주는 경남 지역에서 포목상을 운영했고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웠다. 화장품 등 생활용품에서 출발해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하면서 전자산업으로 진출했다. 현재 LG화학과 LG전자로 이어지는 두 축이 이때 만들어졌다.
SK의 출발에는 직물이 있다. 최종건 창업주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1953년 인수·복구해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반도체·통신·에너지 중심 SK그룹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한화 역시 현재의 방산·조선·우주기업 이미지와 출발점 사이에 변화가 있다. 김종희 창업주는 1952년 한국화약을 설립했고 산업용 화약 국산화를 추진했다. 1957년에는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했다.
◇ GS의 고향도 경남…57년 동업 끝에 독립 그룹으로
GS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걸었다. GS의 뿌리는 허만정 창업주와 구인회 LG 창업회장이 함께 시작한 구·허 양가의 동업 역사와 맞닿아 있다. 두 집안의 동업은 창업 1세대에서 시작해 3대에 걸쳐 57년간 이어졌다. 이후 2004년 ㈜LG에서 에너지·유통 부문을 분할해 GS홀딩스가 출범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의 계열분리 승인을 거쳐 GS가 독립 그룹으로 새 출발했다.
오늘날 GS가 에너지·유통·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것도 이 계열분리의 결과다. GS칼텍스와 GS리테일, GS건설 등이 GS에 편입됐고 이후 발전·종합상사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GS 역시 공식적으로 LG와의 오랜 동업과 분리를 그룹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 고향보다 기회를 따라 움직였다
창업주들의 경로에는 공통점도 보인다.
고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지금의 그룹을 그대로 키운 경우보다 사업 기회를 찾아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업종을 바꾼 사례가 많다.
이병철은 의령에서 대구로, 정주영은 통천에서 서울로 움직였다. 첫 사업 역시 현재 그룹의 대표사업과 일치하지 않는다.
상회가 반도체 기업으로, 자동차수리업과 건설업이 세계적인 자동차·조선 산업으로, 포목과 화학제품 사업이 전자·배터리 기업으로, 직물회사가 반도체·통신 그룹으로 변했다.
추석 귀성길을 반대로 따라가 보면 오늘날 한국 재계의 산업지도 뒤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이동경로가 나타나는 이유다.
한 경제사 연구자는 “1세대 기업가들에게 고향은 가족·친족과 초기 자본, 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기반이었지만 사업이 커지면서 시장과 자본이 모이는 도시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창업주들의 이동은 개인의 성공담인 동시에 해방과 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한국 경제의 중심이 이동한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첫 사업과 현재 그룹의 주력사업이 크게 다르다는 점도 당시 기업가들이 시장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업종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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