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초저녁 안개가 내려앉은 유배지.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하나가 낡은 초가의 마루를 비춘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이다.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 조용히 앉아 있고,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신하도 아니고 군사도 아닌 권력과는 상관없는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는다. 왕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순간 관객의 마음은 묘하게 흔들린다. 낡은 역사 속의 일이 아니다.지금 우리의 삶과 어딘가 맞닿아 있는 우리들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요즘 극장가에서 이 영화는 놀라운 속도로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관객 수는 어느덧 1000만을 넘어 1200만을 향해 달려간다.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단순한 흥행 이상의 무엇임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줄거리 보다 장면의 공기를 이야기한다. 권력을 잃은 왕의 눈빛, 곁을 지키는 한 사람의 조용한 숨결, 그 사이에 흐르는 말없는 관계를.
우리는 지금 권력의 인간적인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권력은 멀고 높은 곳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어떤 것이 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점점 깨닫는다. 권력의 무게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싶다는 마음, 영화 속 왕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속에 묻어난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지도자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높은 곳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인지.
이 질문은 지금 우리의 정치와 오버랩된다. “대통령은 국민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5200만 국민과 함께 사는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이재명 대통령이 종종 이야기해온 표현이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진영논리로 그냥 지나쳐 왔던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가 더욱 깊어 보이는 것이 일부의 생각만은 아닌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긍정의 이미지로 또렷하게 다가서는 듯하다.
시장 골목을 지나고, 공장의 소리를 듣고, 농촌의 바람을 느끼며,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삶의 가장 낮은 자리와 연결되어 있는 대통령 모습을 진보 보수를 떠나 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속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권력을 잃은 왕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왕의 모습. 어쩌면 오늘의 관객들이 그 장면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너무 앞서간 개인적인 생각일까.
지금 세계는 조용하지 않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위기는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는 긴장을 품고 있고, 관세 갈등과 경제의 불안은 우리의 삶을 흔들고 있다. 세계의 바람이 거칠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 깊은 무엇을 찾는다. 화려한 권력보다 따뜻한 관계, 강한 지도자보다 국민 곁에 있는 지도자를. 영화 속 왕과 백성의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오히려 사람의 관계가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권력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장면,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지금의 마음에 스며든다. 정치는 결국 관계의 이야기다. 국민과 멀어질수록 권력은 차가워지고, 국민과 가까워질수록 권력은 살아 숨 쉰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를 함께 걷고 호흡하는 자리 말이다.
역사는 늘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비춘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왕이 누구와 함께 사는가. 권력이 누구와 함께 있는가. 오늘의 민주주의는 그 질문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지도자는 그 권력을 잠시 맡아 사용하는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의 성공은 권력을 얼마나 크게 행사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국민과 함께 살았는가로 기억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국민과 살았던 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 사람들은 그의 거창한 업적보다 이런 말을 먼저 떠올렸으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에 젖는다. 문득 이런 질문도 스친다. '대통령과 함께 사는 국민'은 어떤 국민일까?. “ 권력의 그늘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 민주주의가 허락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국민"일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이 이어진다. 그건 역사와 시대가 허락한 '가장 운 좋고 복 많은 국민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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