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AFP/연합)
중동의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아랍에미리트(UAE)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OPEC+(OPEC과 주요 산유국 협의체)에서 내달 1일부터 탈퇴하기로 하면서 글로벌 원유 시장이 큰 변곡점을 맞을 전망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해온 글로벌 석유 카르텔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공급 조절을 통해 가격을 좌우해온 OPEC의 영향력도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UAE가 산유량 쿼터제(할당량)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증산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면서 '가격 전쟁' 재점화 우려도 제기된다. 이 같은 변화는 그동안 OPEC을 비판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UAE는 28일(현지시간) 국영 WAM 통신을 통해 5월 1일자로 탈퇴를 전격 발표했다.
UAE의 탈퇴 준비는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됐으며, 결정적인 계기는 이번 이란 전쟁이었다고 수하일 알 마즈루에이 UAE 에너지 장관은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이번 결정은 모든 전략을 장기간에 걸쳐 매우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내린 것"이라며 “현재 원유 시장이 공급 부족 상태인 만큼, 이번 결정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해 적절한 시점에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어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공급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OPEC의 집단 의사결정에 얽매이지 않고 시장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UAE는 책임 있는 산유국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상 탈퇴 이후 증산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UAE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에 이어 OPEC 내 세 번째 규모의 산유국으로, 전체 공급의 약 12%를 차지해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UAE의 원유 생산량은 지난 2월 기준 하루 약 360만 배럴 수준이다. 다만 최근에는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생산량이 약 40% 감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포우 오일 어소시에이츠의 앤디 리포우 대표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이 종료되고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될 경우 UAE는 보유한 여유 생산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가능한 한 많은 원유를 생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하일 알 마즈루에이 UAE 에너지 장관(사진=로이터/연합)
◇ UAE, 사우디와 갈등 누적…탈퇴 '예견된 수순'
UAE의 탈퇴는 사실상 예견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UAE는 1967년 아부다비 토후국 시절 OPEC에 가입했으며, 1971년 연방 출범 이후에도 회원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산유 정책을 둘러싸고 UAE와 사우디 간 갈등이 심화돼 왔다. 사우디는 유가 방어를 위해 감산 중심 전략을 유지해온 반면, UAE는 미래 산업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생산 확대를 선호해왔다. UAE는 2027년까지 생산능력을 하루 500만 배럴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추진해왔지만, OPEC 쿼터제에 따라 실제 생산량은 하루 300만~350만 배럴 수준으로 제한됐다. UAE는 할당량을 초과 생산한 사례도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우디로부터 공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불만이 누적되면서 수년 전부터 탈퇴를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양국은 예멘 내전 등 지역 분쟁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왔고, 경제적으로도 중동 '금융 허브' 지위를 둘러싸고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이란 전쟁을 계기로 OPEC 내부 균열이 더욱 심화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UAE는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해 유엔의 무력 사용 승인을 추진했지만, 주변국들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OPEC 로고(사진=EPA/연합)
◇ “OPEC 핵심 축 이탈"…도미노 이탈 가능성
전문가들은 이번 UAE 탈퇴로 OPEC의 시장 통제력이 크게 약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1960년 출범한 OPEC은 회원국 산유량을 조절해 국제유가를 관리해왔지만, 핵심 산유국인 UAE의 이탈로 이러한 조정 기능이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라이스태드 에너지의 호르헤 레온 지정학 분석 책임자는 “UAE는 사우디에 이어 OPEC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산유국 중 하나였다"며 “이번 이탈은 OPEC의 시장 관리 능력을 지탱해온 핵심 축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OPEC은 구조적으로 더욱 취약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UAE는 탈퇴 후 생산을 늘릴 유인과 능력을 동시에 갖추게 된다"며 “사우디가 시장의 핵심 안정자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골드윈 전 미 에너지부 당국자 역시 “사우디는 여전히 자체적인 여유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조절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UAE가 빠지면서 그 힘은 이전보다 약해질 것"이라고 CNBC에 말했다.
UAE 탈퇴를 계기로 다른 회원국들의 연쇄 이탈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OPEC은 최근 수년간 앙골라(2023년), 에콰도르(2020년), 카타르(2018년), 인도네시아(2016년) 등의 탈퇴를 겪은 바 있다.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클레이튼 시글 선임연구원은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다른 회원국들이 연쇄적으로 이탈하는 도미노 효과"라며 “UAE의 전례를 따를지 여부가 향후 시장의 핵심 변수"라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오피니언을 통해 “OPEC이 설립 이후 가장 큰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며 베네수엘라와 카자흐스탄 등이 잠재적 이탈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진=로이터/연합)
◇ 국제유가 단기 영향 제한적…중장기엔 하방 압력
UAE의 탈퇴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의 영향으로 단기적인 유가 흐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유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어게인캐피털의 존 킬더프 창립자는 “이번 사안은 향후 시장에 약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공급 과잉 국면에서 산유국 간 결속력이 약화될 경우 유가 하락을 막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글 연구원 역시 “향후 3~5년간 유가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블룸버그는 이번 이란 전쟁이 종료되고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될 경우, 2020년 사우디와 러시아 간 벌어졌던 유가 전쟁과 유사한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다음 충돌은 사우디와 UAE 간 경쟁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전쟁이 종료되고 원유 수송이 정상화될 경우 UAE가 보유한 여유 생산능력을 활용해 증산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장 점유율 경쟁이 격화되면서 유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다른 OPEC 회원국들까지 독자 노선을 택할 경우 글로벌 원유 시장은 카르텔 중심 구조에서 경쟁 체제로 전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UAE의 OPEC 탈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희소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OPEC이 생산량을 인위적으로 억제해 유가를 끌어올리며 “전 세계를 갈취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탈퇴 발표 시점도 주목된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UAE는 전쟁 장기화로 경제 충격이 커질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과 통화스와프 체결을 논의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확인했다.
통화스와프는 외환위기 등 비상시 상대국 통화를 교환해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는 장치로, 기축통화국인 미국과의 협정은 금융시장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UAE는 이란의 드론·미사일 공격으로 에너지 인프라 일부가 타격을 입은 데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유 수출이 제한되면서 핵심 외화 수입원이 위축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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