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정기주총 시즌을 앞두고 '집중투표제'가 주주권 강화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제도로 주목받는 한편, 경영권 분쟁과 법적 쟁점이 얽히며 그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소액주주 행동 플랫폼 액트도 다수 상장사가 집중투표제를 도입시키도록 추진하고 있어 주총의 변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집중투표제는 한 주주가 여러 이사를 선임할 때 자신의 의결권을 특정 후보자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주식 100주를 보유한 주주가 세 명의 이사를 선임할 경우, 최대 300개의 의결권을 한 명의 후보자에게 몰아줄 수 있다. 이는 소액주주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자를 선임하게 용이하게 해 주며, 사측이 다수 후보에 의결권을 분산해야 하는 점에서 소액주주 보호의 대표적 장치로 여겨진다.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액트는 현재 다수 상장사 소액주주연대와 활발히 소통하는 중이다. 오는 3월 정기주총 시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적지 않은 소액주주연대가 집중투표제 도입을 놓고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집중투표제는 이미 지난 1998년 우리 상법에 규정됐다. 그러나 당시 재계의 반발로 회사가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원천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 국내에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다. 삼일PwC의 조사에 따르면 총자산 5000억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 중 집중투표제를 실행한 곳은 거의 없다.
윤태준 액트 연구소장은 “그나마 3%의 기업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했거나 도입 여지가 있도록 정관에 배제 조항을 삽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년 말 기준 공정거래위원회가 344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집중투표제 도입 기업은 SK텔레콤, 한화생명보험 등 13개사에 불과하다. 작년에는 KT&G가 실제로 집중투표제를 실시해 이사를 선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년부터 이어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집중투표제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단 고려아연 분쟁에서는 특이하게 경영진이 아닌 주주, 즉 MBK 측에서 집중투표제를 반대하고 있다. 현 상황상 집중투표제가 도입될 경우 양측이 보유한 지분에 비례해 비슷한 수의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하게 되므로, MBK 측이 단기간 내 이사회를 장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소액주주연대가 집중투표제의 존재를 알고, 그 도입을 고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두산에너빌리티, DB하이텍 등의 주주연대는 3월 정기주총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안으로 상정하기로 정했다. 그밖에 50~60개 상장사 소액주주연대가 집중투표제 관련으로 액트와 상담했으며, 30여개 상장사는 내부 논의 단계에 있다. 제이오 인수 및 대규모 유상증자로 갈등이 빚어진 이수페타시스도 그중 하나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존재한다. 우선 액트 및 다수 소액주주연대는 임시주총, 또는 정기주총에서 선순위 의안으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는 정관 변경안을 상정한 후, 이사 선임안을 후순위로 넣어 곧장 집중투표제가 적용되도록 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변수가 생겼다. 고려아연 분쟁에서 불거진 문제다. 오는 23일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및 이사 선임안 동시 상정에 반발한 MBK가 이를 막는 가처분 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우선 임시주총을 통해 정관을 변경한 후, 다음 정기주총이 돼서야 집중투표제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일 이번 가처분이 실제로 인용돼 선례로 남을 경우 집중투표제를 시도하는 많은 소액주주연대에 난관이 닥칠 것으로 보인다. 회사 정관변경부터 이사 선임까지 두 번의 주주총회를 추진하면서 결집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주주연대는 회사 측보다 시간, 인력, 자금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윤 소장은 “한국에서는 항상 선행 안건으로 정관을 변경하고 이를 기반으로 후행 안건을 다뤄왔다"며 “오랜 기간 관례로 해왔던 부분인 만큼 MBK 측이 이를 바꾸기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관으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상법의 개정 여부도 주목된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에는 회사가 정관으로 집중투표제 도입을 막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안도 포함됐다. 단 현재 탄핵 등으로 정국이 혼란한 데다, 이사의 충실의무 등 우선순위 안건이 있어 단기간 내 처리될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