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캐럴보다 자주 들리던 환율, 위기, 경기침체 등 암울한 말들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다. 문득 1997년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된다. 외환위기는 대외채무를 저변으로 고성장을 이어온 한국식 성장모형의 종말이었다. 외환보유액은 800원대의 고정환율을 유지할 수준인 3백억 달러 정도였으며 단기외화채무를 감당할 수준에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에 비하면 약 27년이 지난 지금은 4천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97년과는 분명히 다르다. 시장전문가라는 분들도 여러 매체에서 그러한 점을 부각하며 지금이 외환위기와는 다르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개하고 있다.
2008년 연말연초도 지금과 분위기가 비슷하였다. 불과 석달 전에 글로벌 채권시장의 맹주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고 국제금융시장에는 한파가 닥쳤으며 우리나라로부터 자본이탈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시장에는 우려가 가득했고 누구도 이듬해 경기가 어떻게 될지 점칠 수 없던 암울한 새해의 시작이었다. 연말 당국의 개입으로 환율이 일시적으로 1,250원 부근까지 일시 하락하기도 하였으나, 연초부터 환율은 다시 치솟기 시작하여 3월중에는 일중 1,600원을 부근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당시 미연준과 체결한 달러스왑이 아니었다면 환율은 결국 1,600원을 돌파하여 우리 경제는 다시 제2의 외환위기를 겪어야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2008년 당시는 미국발 충격이었으므로 외환보유액 또는 달러유동성이 충분하다면 환율의 급격한 변동성은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천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액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듯 환율이 급등하게 된 것은 외환보유액의 규모가 곧 외환시장의 안정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외환보유액이 주로 미정부채에 투자되어 있었으니, 당시 미연준과 재무부가 양적완화를 통해 미국발 금융충격으로 위태해진 미정부채 가격을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환율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채를 투매하여 미정부채 가격을 폭락시키는 것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국제금융시장은 이러한 여건을 잘 알고 있었고 한은이 미연준과 원달러스왑을 체결하기까지 원달러환율 급등세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환율상승은 외부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내부적이고 구조적 요인이 합쳐진 결과라는 점에서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달러인덱스와 여타 주요국 환율의 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만 상승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외환보유액이야 2008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불어났고, 1997년 당시와 같이 대외부채에 기대어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도 않지만, 외환시장 불안의 진원지가 내부에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전개될 상황에 대한 이해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1997년과 2008년의 경우 달러유동성 부족에 따른 “대한민국"이라는 자산의 일시적 저평가에서 발생한 위기라면,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가치하락은 실질적인 가치 하락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도, 세계 1위의 GDP 대비 민간부채, 세계 최고수준의 수도권 과밀화 등 고질적 경제구조가 성장잠재력을 모두 잠식하는 가운데, 수출위주의 산업구조는 대외 무역여건의 변화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특히 최근 발생한 정치적 리스크는 밖으로는 한국의 대외신인도 하락, 안으로는 내수 파괴에 가까운 충격을 가져와 우리 경제의 펀더멘탈을 송두리째 가라앉히고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키는 원흉이 되고 있다.
2008년 12월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을 풀어 환율을 단기간에 200원 가량 급격히 낮춘 데에는 심리적, 정치적, 그리고 통계적인 측면에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당시와 같은 수준의 환율에도 당국이 손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현재 상황이 장기화 될 우려에 따른 것이다. 외환보유액 4천억 중, 원화를 방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난 2008년과 같이 현재에도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미정부채 등을 매각하여 조달할 수 있는 액수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위 말하는 서학개미들이 또는 해외에 달러를 보유한 기업들이 원화환율의 안정를 위해 달러를 국내로 유입할 것이라는 시장전문가들의 의견도 순진한 발상은 아닌가 의심해본다. 자금은 애국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가격이 바닥을 확인할 때쯤에야 해외로 나간 자금들은 수익을 노리고 국내에 돌아올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이 얼마나 가격조정을 받아야 비로소 매수세가 들어올지 가늠할 수 없는 극심한 불확실성이 우리가 위기의 터널을 직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