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각 사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과 SK의 총수의 지분을 두고 같은 날 조 단위의 금액이 움직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9일 약 1조9000억원을 들여 모친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명예관장의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이기로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지급하라는 재산분할금 가운데 7000억원을 받아들이는 대신 보유 주식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한쪽은 지분을 늘리는 데 돈을 쓰고 다른 한쪽은 지분을 지키기 위해 현금 부담을 감수했다. 거래의 배경과 법적 성격은 다르지만, 국내 반도체 1·2위 기업을 이끄는 두 총수에게 개인 자금조달과 지배력 유지라는 과제가 동시에 놓였다는 점에서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 삼성은 가족 지분 이재용에게 집중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이 회장은 홍 명예관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보통주 718만8793주를 오는 10월12일 장외에서 매수할 예정이다.
매매 단가는 지난 8일 종가인 주당 26만9500원이며 전체 거래액은 약 1조9374억원이다. 거래가 예정대로 마무리되면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은 9755만1953주에서 1억474만746주로 늘어난다. 우선주를 포함한 지분율은 1.47%에서 1.58%로 0.11%포인트 상승한다.
홍 명예관장에게는 대규모 현금이 유입되고 이 회장에게는 삼성전자 지분이 추가로 집중되는 구조다. 시장에서 한꺼번에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모자간 장외거래 방식을 택해 주가에 미칠 충격도 줄였다.
재계에서는 홍 명예관장이 고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이후 상속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받은 금융기관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지분을 매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월 말 기준 홍 명예관장의 주식담보대출 잔액은 약 1조8550억원으로 전해졌다. 다만 삼성 측은 대주주 개인 간 거래라는 이유로 매각대금의 용도와 자금 계획에 관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번 거래만으로 삼성그룹 지배구조가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직접 지분율 상승 폭은 0.11%포인트에 그치고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삼성물산과 삼성생명 등을 통해 삼성전자로 연결된다.
그럼에도 상속 이후 가족에게 분산됐던 삼성전자 지분 일부가 총수에게 이동했다는 의미가 있다. 상속세 납부 과정에서 가족 지분이 외부로 매각되는 대신 이 회장에게 집중되는 방향이어서다.
◇ 최태원은 현금 부담 지고 ㈜SK 지분 유지
최 회장은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는 재산분할금 9440억원 중 7000억원은 다투지 않고 나머지 2440억원에 대해서만 대법원 판단을 받기로 했다.
최 회장 측은 지난달 31일 서울고법에 상고취지 감축 신청서를 제출했다. 장기간 이어진 분쟁을 축소하고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7000억원까지는 수긍하되, 나머지 금액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서울고법은 지난 7월 파기환송심에서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 등을 재산분할 대상으로 인정하면서도 주식 자체가 아닌 현금 9440억원을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최 회장은 ㈜SK 지분을 직접 나누지 않고 그룹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최 회장은 ㈜SK 지분을 통해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 회장이 보유한 주식은 SK하이닉스 주식이 아니라 그룹 지주회사인 ㈜SK 지분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직접 매입하는 이 회장 사례와 차이가 있다.
재상고심에서는 노 관장의 재산 형성 기여도와 ㈜SK 주식의 가치 평가 시점, 혼인 관계 파탄 이후인 2017년 최 회장이 취득한 SK실트론 지분을 공동재산으로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7000억원이 즉시 확정돼 지급되는 것은 아니다. 최 회장이 해당 금액을 재상고심에서 더는 다투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실제 지급은 판결 확정 이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최종적으로 상당한 현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자금조달 방식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 지분 확대와 방어에 필요한 '총수의 현금'
이 회장과 최 회장의 선택은 방향은 다르지만 '주식 대신 현금을 움직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회장은 가족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자신이 현금으로 인수한다. 최 회장은 ㈜SK 주식을 노 관장에게 넘기는 대신 현금으로 재산분할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받아들였다. 삼성은 총수 지분이 늘고 SK는 총수 지분이 유지된다.
두 사안은 각 총수의 개인 거래와 소송이므로 삼성전자나 SK 계열사의 자금을 직접 투입할 수는 없다. 구체적인 자금조달 방법도 공개되지 않았다. 보유 현금과 계열사 배당, 금융기관 대출, 주식담보대출 또는 일부 자산 처분 등이 가능한 수단으로 거론되지만 확인되지 않은 추정이다.
향후 시장이 주목할 부분은 조 단위 현금 수요가 총수 일가의 배당 정책과 보유지분 운용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다. 총수 개인의 대출이 늘면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한 배당 수요가 커질 수 있고, 주식담보대출을 활용하면 주가 하락에 따른 담보가치 변동 위험도 발생한다.
삼성과 SK는 인공지능 반도체 패권 경쟁의 중심에 서 있다.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와 파운드리 경쟁력 회복을 추진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급증한 반도체 이익을 기반으로 국내외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상속 이후 가족 지분을 이 회장에게 모으는 과정에 들어갔고, SK는 이혼 이후에도 최 회장의 지주회사 지분을 유지하는 방향을 택했다"며 “앞으로의 관전 지점은 지분율 자체보다 두 총수가 조 단위 자금을 어떤 방식으로 마련하고, 그 과정이 배당과 지분 운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여부"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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