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사피온코리아와 리벨리온이 손잡고 합병법인 설립에 나선다.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선점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신사업 확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13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SK텔레콤의 자회사 사피온과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합병에 대한 의사 결정을 마친 상태다. 양사는 모두 AI 특화 반도체인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이다. 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주 동의 등 절차를 거쳐 올해 3분기 중 본계약을 체결하고 연내 합병 절차를 완료할 계획이다. 합병 비율이나 합병 법인 사명, 이사회 구성 등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리벨리온은 8800억원, 사피온은 5000억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양사의 기업가치를 합치면 최소 1조3000억원에 달한다. 통합법인 경영은 리벨리온이 맡는다. 급변하는 반도체 산업 특성상 대기업보다는 스타트업이 시장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류수정 사피온 대표는 합병 발표와 동시에 사임했다. SK텔레콤은 전략적 투자자로서 합병법인의 해외 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사피온의 지배기업인 SK스퀘어와 SK하이닉스도 지원에 나선다. 이중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든든한 우군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리벨리온의 전략적 투자사인 KT 역시 합병 이후에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힘을 보탤 전망이다. KT는 올 초 리벨리온의 시리즈B 라운드에 330억원을 투자한 바 있다. 사피온코리아는 2016년 SK텔레콤 내부 연구개발 조직에서 출발해 분사된 AI반도체 전문기업이다. 2020년 국내 최초로 데이터센터용 AI반도체를 선보인데 이어 지난해 11월에는 차세대 AI반도체 'X330'을 공개하는 등 고성능 AI반도체 개발을 통해 자율주행, 엣지 서비스 등으로 사업범위를 확장해왔다. 리벨리온은 2020년 박성현 대표와 오진욱 최고기술책임자(CTO)가 공동 창업한 AI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이다. 창립 이후 출시한 AI반도체 '아톰(ATOM)'은 지난해 국내 NPU 최초로 데이터센터 상용화로 거대언어모델(LLM)을 가속했으며, 올해 양산에 돌입하며 주목받고 있다. 현재 LLM시장을 겨냥한 차세대 AI반도체 '리벨(REBEL)'을 개발 중이다. AI 반도체는 생성형 AI의 연산 성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챗GPT 등 이후 생성형 AI 수요가 급증하면서 글로벌 시장 선점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이 중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시장에서 97%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양사 합병을 통해 국내 AI 반도체 생태계 규모가 확장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 강국'으로 꼽히지만 사실상 메모리에 편중돼 있어 국내 팹리스 기업의 경쟁력이 아직 미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양사의 AI 역량을 결집시킨다면 국내 시장 선도 기업이 탄생하면서 규모가 작은 기업들도 낙수효과를 입을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는 국가안보와 경쟁력 제고 등을 위한 핵심 기술로 국내 산업 경쟁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며 “국내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여서 개별 단위로는 기술·재무적 우위에서 엔비디아에 밀리기 때문에 경쟁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내 기업들은 각자 수요처를 다각화하는 추세인데, 양사 합병이 추진되면 스마트폰, 자동차 등 다양한 수요처를 두루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신업계가 AI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자체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한 전략이란 분석도 나온다. 막대한 연산을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하는 생성형 AI의 특성상 고전력·고비용 한계가 따르는데, NPU는 AI 연산에 특화돼 효율이 좋고 가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통신업계는 기존에 주력하던 유·무선 사업이 정체기를 맞으면서 수익성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통신시장 경쟁상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2조9452억원이던 통신 3사의 이동통신 부문 영업이익은 2022년 2조6870억원으로 감소했다. 이 기간 통신 3사의 합산 영업이익률은 2013년 11%에서 2022년 10.1%로 0.9%p 감소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매출 성장은 둔화되고 있는데 기술 투자 비용은 점점 높아지면서 실질적인 수익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해외 기업들이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칩 개발을 추진 중임을 감안하면 투자 비용은 줄이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태민 기자 etm@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