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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칼럼] 미국 기후·에너지 정책의 불확실성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기후대응기금 운용심의위원 지난 5월 21일부터 2일간 서울에서는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가 개최됐다. 이는 한국판 다보스 포럼으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나 마윈 알리바바 그룹 회장 등 저명한 글로벌 리더들이 한곳에 모여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을 놓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 왔는데, 올해는 리시 수낙 전 영국 총리 및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연사가 국제 정세, 세계 경제, 기후 위기 등에 대해 논의했다. 필자는 올해도 환경에너지 세션을 진행했는데, 최근 쏟아지는 트럼프2기 기후·에너지 정책의 후속조치들이 한국은 물론 아시아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위해 미국내 기후·에너지정책 씽크탱크인 C2ES(Center for Climate and Energy Solutions)의 정책전문가를 초대해, 미국 행정부 조치 및 의회 입법화 현황을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 또한, 급격한 정책변화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풍력 산업을 예시하기 위해, 글로벌 리딩 해상풍력 개발사의 아시아 태평양 대표를 초청해, 인사이트를 공유함으로서 불확실성을 구체화하고 시사점을 모색했다. 불확실성의 실체는 이렇다. 트럼프 2기 정부의 기후 변화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서 미국의 정책방향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취임 첫 날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NATIONAL ENERGY EMERGENCY) 선언하고 미국에너지해방을 위한 행정명령을(UNLEASHING AMERICAN ENERGY) 발표함으로서, 청정에너지 보조금 동결이나 사회적 탄소비용 배제 등 급격한 정책방향 전환의 서막을 열었다. 후속조치로 지난 3월 환경보호청(EPA)은 기존 환경 규제의 전반적인 재검토를 명령했고, 환경정의를(Environmental Justice) 더 이상 적용하지 않는 정책방침(Memorandum)도 발표했다. 이번달에는 에너지부(DoE)도 역사상 최대인 47개 규제 완화 및 철폐를 추진한다고 밝혀, 청정에너지에서 화석에너지로의 전환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영향이 큰 해상풍력을 예로 들면, 지난 4월 내무부 장관은 뉴욕 인근에서 공사가 30% 진행되고 있던 Empire Wind Project 건설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810MW 규모로 6조원이 넘는 규모의 사업이다. 다행히 지난주 건설 중지가 철회되어 공사를 재개하게 되었지만 시장의 혼란은 여전하다. 게다가 의회도 세수 조정의 일환으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의한 청정에너지 및 전기차 보조금을 축소하거나 철폐하는 법안을 지난주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지난 2022년 IRA가 발효된 이후 발표된 청정에너지 사업은 총 390건인데 그 중 243건이 공화당 우세지역내 사업이므로 의회내 합의 과정에서 보조금 축소의 정도가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관측이 무색해 짐에 따라, 그 불확실성은 최고조인 상황이다. 상술한 정책변화는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나 의회가 새로운 기후·에너지 관련 조치를 발표할 때 대부분 이는 미국 산업을 위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인 12월부터 2월사이에 전세계 고위경영층을 대상으로 설문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정작 미국 임원들의 97%는 정부가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길 원한다고 답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2기의 에너지정책으로 과연 급증하는 AI의 에너지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미국은 2030년까지 84GW 수준의 막대한 AI 에너지수요가 예상되는데, SMR(소형원자력)이나 가스터빈은 2030년까지 활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청정에너지를 배제하면 대규모 단기수요 증가를 감당할 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편, 2024년 기준 전세계에서 재생에너지가 신규로 설치된 양은 585GW였는데, 이 중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3GW로 약 7%인 반면,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74GW로 무려 64%에 달한다. 향후 미국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자국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되지 않음과 동시에 중국 청정기술 의존도를 지나치게 높이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약 20년간 워싱턴에서 미국 기후·에너지 정책을 분석해 온 전문가도 트럼프 2기의 정책변화는 선례가 없는 것이라 예측이 어렵다고 개별 식사자리에서 토로했다. 아무래도 상술한 초유의 불확실성은 미국 법원의 판단과 상원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김성우

[EE칼럼] 인공지능으로 설계하는 새로운 대한민국

작년 말 충격적인 비상계엄 선포 후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는 짙은 불확실성의 안개 속을 헤쳐 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2기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고, 세계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혼란한 시기에 출마한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인공지능(AI) 관련 공약은 향후 대한민국호의 진로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기존 대선에서 주로 부동산 정책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인공지능 관련 정책을 내세우기 바쁘다.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현재의 인터넷 이상으로 인간 문명의 근본적 기반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기에 이러한 열성이 당연하다 여겨지기도 하나, 공약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행의 현실성에 있어서는 차분한 복기가 필요해 보인다. 인공지능 관련 산업의 현 주소를 보면 아직도 수익이 주로 발생하는 분야는 인공지능 모델 개발과 개발된 모델로 서비스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와 설비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하드웨어 분야이다. 물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는 미국의 엔비디아지만 기존부터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도 반도체 부품을 공급하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하드웨어 분야에 대한 지원 역시 국가 경쟁력 유지와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세한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지원과 구분되지 않으면 오히려 인공지능 산업의 보다 본질적인 요소인 소프트웨어 몫까지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더구나 현재 공약으로 제시된 GPU나 AI데이터센터 확보와 같이 단순한 자금 지원만으로 가능한 방법으로는 인공지능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엔비디아가 오늘날 인공지능 업계 정상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GPU만 제조한 것이 아니라 '쿠다(CUDA)'라는 GPU를 활용할 수 있는 개발 툴로 AI 개발 생태계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기반 전환(AX, AI Transfomation) 역시 AI 모델을 바탕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혁신적인 서비스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이지, 인공지능 칩이나 데이터센터 확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버린 AI 구축이냐 해외 인공지능 모델 기반 서비스 활성화냐 논쟁도 결국 국내 인공지능 기반 산업 생태계가 존재해야 의미가 있다. 또한, 인공지능 산업 생태계의 본격적인 지원을 위해서는 인공지능 개발과 활용의 가장 핵심이 되는 데이터에 대한 규제 명확화 및 자율 규제 확대가 필요하다. 공공 영역에 쌓여 있다고 홍보가 많이 되는 의료데이터는 품질 문제나 개인정보 보호 등 가공의 어려움으로 활용에 많은 난관이 있다. 의료데이터를 활용해 개인형 맞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국민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필수적인데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생명윤리법 등 각 부처별로 관할 법령에서 따로 규제를 하고 있어 하나의 장애물을 넘어도 다른 장애물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자동차를 포함하는 모빌리티 산업은 자율주행을 핵심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향후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이자 아시아 최초로 자율주행자동차법을 선도적으로 제정한 우리는 수년간 시범운행지구에서 제한된 방식의 운행만 허용한 결과 자율주행자동차 업계의 기술력이 중국, 미국 등 세계 수준과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자국에서 이미 충분한 운행 데이터를 확보한 중국의 자율주행 업체가 최근 국내에서 로보택시 운행을 위한 임시운행 허가를 신청한 반면 국내 업체들은 자율주행 사업에서 철수하고 있다. 결국 정부의 데이터에 대한 규제 방식과 정책 방향 차이가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데이터 보호기관이자 동시에 데이터 활용 규제의 중심축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도 최근 전 분야 마이데이터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데이터 활용을 장려하는 정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인공지능 산업은 데이터를 원료로 발전하기에 양질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데이터 활용을 위해서는 활용 범위와 방법에 대한 규제가 명확해야 한다. 또한 이제 초창기에 들어선 인공지능 산업에 규제 만능주의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업계의 자율규제에 맡길 부분을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원인제공자에게 명확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후보들이 대선을 위한 공약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인공지능으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길 빈다. 양희철

[EE칼럼] 미래 에너지를 찾아 우주로

인공지능(AI), 전기차 등이 늘어나면 앞으로는 기존 에너지 생산 시스템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데 한계에 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미국은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전 구글 CEO인 에릭 슈미트가 2021년 설립한 미국의 초당파 싱크탱크인 SCSP(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는 2024년 발표한 '미국 차세대 에너지 리더십을 위한 국가 행동계획'에서 2030년까지의 기간이 미국의 미래가 걸린 시기라면서 이 기간에 미국과 중국의 에너지 신기술 패권전쟁에서 핵융합 발전과 우주 태양광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융합 발전은 태양과 같은 별들이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리인 핵융합 반응을 지구상에서 인공적으로 일으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다. 핵융합은 핵분열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면서도 방사능은 훨씬 적게 배출하기 때문에 에너지 생산에 있어서 성배나 다름없다. 양성자 1개와 중성자 1개를 가진 중수소와 양성자 1개와 중성자 2개를 가진 삼중수소의 원자핵이 충돌하면 헬륨 원자액과 고에너지의 중성자가 생성된다. 이 때 생성된 헬륨 원자액과 중성자의 총 질량은 반응 전의 중수소와 삼중수소 원자핵의 총 질량보다 아주 약간 더 작다. 줄어든 미세한 질량이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법칙(E=mc2)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로 변환된다. 빛의 속도(c)가 매우 크기 때문에 아주 작은 질량 변화도 막대한 에너지로 바뀐다. 중수소는 바닷물에서 얻을 수 있어 사실상 무한한 연료로 간주된다. 반면에 삼중수소는 자연상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리튬과 중성자를 반응시켜 만든다. 이 때문에 추출 비용이 1g에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삼중수소를 헬륨-3로 대체한다면 핵융합 에너지를 낮은 단가에 확보할 수 있다. 삼중수소와 달리 헬륨-3는 핵융합 과정에서 방사선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지구에는 헬륨-3가 전체 헬륨 중 고작 0.0001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달에는 무려 100만 톤이나 존재할 것이라 추정한다. 수십억 년 동안 태양풍에 실려온 헬륨-3가 달 표면에 잔뜩 쌓여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1톤의 헬륨-3가 5천만 배럴의 석유에 상당하는 에너지를 생산할 것이라고 추산하다. 우주 태양광은 1968년 NASA의 피터 글레이저 박사가 처음 언급을 했다. 55년이 지난 2023년에 와서야 세계 최초로 캘리포니아공대의 과학자들이 우주에서 태양광 패널로 얻은 에너지를 빔의 형태로 지구에 전송했다. 태양에너지를 마이크로파로 전환하여 무선으로 전송한 것이다. 지상에 있는 수신 장비는 전송된 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했다. 중국은 우주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최근 공개했다.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온 우주 태양광 발전은 2020년대 들어 재사용 발사체로 발사 비용이 대폭 떨어지고 있어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우주 태양광 발전은 낮과 밤, 날씨에 관계없이 24시간 내내 태양광 에너지를 전기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주 태양광 발전은 국가 안보 측면에서도 중요성이 크다. 우주에 있는 태양전지판이 섬이나 지나가는 배, 전쟁터 등 어디든 전력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요 국가들은 가까운 장래에 지구 정지궤도에는 태양광 패널을, 달에는 헬륨-3 채취 작업장을 차릴 것이다. 경쟁국들이 멀리 앞서가는데 두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다. 지구 정지궤도는 혼잡해 질 것이고, 헬륨-3는 재생가능한 자원이 아니다. 비싼 임대료를 내고 패널 설치할 자리를 얻을 수도 없고, 태양풍이 불어와 달에 헬륨-3가 다시 쌓일 때까지 10억 년을 기다릴 수도 없다. 먼저 오는 국가가 차지하는 선착순일 뿐이다.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기업들도 우주 진출을 위해 경쟁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스페이스X, 버진 갤럭틱, 블루 오리진, 중국의 아이스페이스, 러시아의 아스날과 같은 우주산업 관련 민간기업이 우주판 동인도회사 역할을 할 것이다. 재생에너지냐, 원전이냐 하는 소모적 논쟁을 끝내고, 이제는 도전과 상상력을 발휘할 때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의 틀에서 벗어나, 에너지 분야의 파괴적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콘트롤+알트+딜리트 키를 동시에 누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강제 종료 버튼을 누르지 말아야 한다. 우주로 나가는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박성우

[EE칼럼] 에너지믹스와 전력믹스, 제대로 알자

최근 대선을 앞두고 에너지 정책이 주요 이슈로 부상하면서 '에너지믹스(energy mix)'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종종 잘못 사용되며, 그로 인해 에너지 현실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있다. 정확한 정책 논의를 위해서는 개념부터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에너지믹스'란 석유, 천연가스, 석탄,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섯 가지 1차 에너지의 전체 사용량 중 각 에너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여기서 '1차 에너지'란 가공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에너지를 뜻한다. 예컨대, 전 세계적으로는 석유가 약 3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뒤를 석탄(26%), 천연가스(23%), 재생에너지(15%), 원자력(4%)이 잇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발전원 다변화를 이야기할 때 '에너지믹스'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이는 엄밀히 말해 '전력믹스(power mix)' 또는 '전기믹스'가 정확한 용어다. 일부 전력회사가 '전력(power)' 대신 '에너지(energy)'를 사명에 사용하면서 혼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오용이 정책 담당자뿐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착오를 넘어, 에너지 정책에 대한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은 전력믹스에서 재생에너지가 52%를 차지하며, 2030년까지 이를 80%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두고 “독일이 곧 화석에너지에서 완전히 탈피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력믹스를 에너지믹스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실제로 2030년에도 독일의 전체 에너지믹스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며, 나머지 60%는 여전히 화석에너지에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3년 발전량 기준 전력믹스는 석탄 31%, 원자력 31%, 천연가스 27%, 신재생 10%, 석유 1%였다. 그러나 1차 에너지 기준으로 보면 석유 43%, 석탄 22%, 천연가스 17%, 원자력 13%, 재생에너지 5% 순이다. 특히 석유 비중이 높은 것은, 수입한 원유를 정제해 국내 소비뿐 아니라 석유제품과 석유화학제품으로 수출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82%를 화석에너지에 의존하며,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다. 이처럼 에너지믹스와 전력믹스를 혼동하면 정책 판단에 심각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전기차, 반도체,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 등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지금, 에너지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더욱 절실하다. 현재 우리나라 전력 생산의 60%가 화석에너지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탄소 배출의 주범인 석탄 발전을 줄이는 것이 시급하다. 천연가스 발전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지만, 국제 가격 변동성과 수입 의존도를 고려할 때 그 비중 확대는 신중해야 한다. 따라서 저탄소이면서 에너지 안보에도 기여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전기 사용이 증가한다고 해서 '앞으로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탄소중립을 논하며 “이제 석유나 가스를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미래 에너지 문제는 원자력이 해결할 것"이라며 원전만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은 모두 전기만 생산할 수 있으며, 수송 연료, 석유화학 원료, 제철용 원료, 산업용·난방용 열원 등으로 여전히 화석에너지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된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최종 에너지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불과하며, 에너지 전환에 낙관적인 국제에너지기구(IEA)조차 2050년에도 그 비중이 32%를 넘기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우리나라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에너지 정책이 곧 국가 안보이자 미래 전략이다. 그런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에너지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용어부터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에너지믹스와 전력믹스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 그것이 실효성 있는 에너지 정책의 첫걸음이다. 양수영

[EE칼럼] 가격규제와 고정 관념

정부는 공공사업에 대한 건설 입찰, 자연독점적 공익산업, 독과점 품목 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가격을 규제한다. 가격규제에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숨어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상품과 서비스는 그 가격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상품 및 서비스가 지역과 시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불편해한다. 동일 제품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높은 가격을 사업자가 더 큰 이윤이나 폭리를 보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는 사업자의 폭리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다는 소비자의 비난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전국이 동일하다. 그러나 전국 동일 전기요금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져왔는가? 발전설비의 분산화가 왜 실패하였고, 전력망을 보급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우며, 수도권에 전력수요가 왜 몰려 있는지를 알려면 전국 동일 전기요금이 가져오는 폐해를 이해해야 한다. 전국 전기요금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전국 주유소의 상이한 기름값도 한때는 동일요금 규제에 묶여 있었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공급자의 다른 비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공급량이 많아질수록 비용은 점차 상승한다. 그것이 공급의 법칙이다. 보통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하는 사업자(A)는 이를 가장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사업자이다. 그러나 두 번째(B), 세 번째(C)로 진입하는 사업자는 첫 번째 사업자보다 더 불리한 비용조건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공급비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A는 공급비용이 낮았는데, 왜 B와 C는 공급비용이 높은가라고 소비자와 정부는 반문한다. 그리고 형평성을 이유로 높은 공급비용에 맞춰 가격 올려주기를 꺼려한다. 최근 부산의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높은 건설비로 계속 유찰되고 수의계약마저도 쉽지 않은 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1년 9·15 순환정전을 계기 정부는 급하게 전력설비를 확충하기 위해 민간 석탄발전사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기존에 건설된 접안시설과 부두를 활용해 추가로 석탄발전기 기수를 늘릴 수 있는 한전 발전자회사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부지를 확보하고 부두 및 접안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높은 추가비용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석탄발전소와 비용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높은 건설비용을 CP로 보전받는 것을 정부와 전력거래소에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 번째 고정관념은 사업자가 버는 수익을 용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업자가 돈을 벌게 되면 소비자 돈을 사업자가 가져갔다고 정부와 소비자는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기업과 소비자가 이윤이나 편익을 추구하는 것을 은근히 죄악시하는 풍토가 적지 않다. 체리피킹이라는 말로 사업자의 수익추구를 폄하하기도 하며 높은 산업용 전기요금으로 인해 직접구매나 자가발전을 추진하는 것을 '기업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돈을 벌려고 생긴 조직에 대하여 돈 벌었다고 흉보는 것이 옳은 시각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이미 가격이 자유화된 경우에도 나타난다. 유가가 자율화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요즘도 기름값이 높을 때면 정유사에 횡재세를 부과하여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손해나면 보전해 주지도 않을 것이면서 이윤이 나면 뺏아가겠다는 것이다. 전력시장에서 SMP에 상한을 둔 적도 있고 한국지역난방공사의 열요금을 기준으로 규제하는 열시장에서도 사업자가 버는 이윤을 탐탁치 않게 여겨 산업부는 사실상의 원가규제를 도입하려 하기도 한다. 사업자는 돈을 벌려고 가스터빈도 국산화하고, 원료도 싸게 들여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경쟁효과에 의해 다른 기업을 자극하여 결국은 소비자 편익으로 이어진다. 돈 버는 것을 죄악시하면 기업은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개선할 유인을 잃게 된다. 가격규제에 잠재되어 있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이유다. 조성봉

[EE칼럼] 공약의 자충

대선 국면에서 여러 가지 공약이 발표되면서 공약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종의 자충(自充)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충이라는 말은 바둑에서 자기 돌로 자기 수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행동이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AI등 신산업 집중육성'이라는 공약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양립되기 어렵다. AI 즉 인공지능 분야는 전기를 먹는 하마이다. 오픈AI(사)의 사장인 샘 올트만은 2025년 미국내에서 5GW(기가와트)를 사용하는 AI 데이터센터가 5개에서 7개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2030년이 되면 미국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가 80GW에 달한다고 하였다. 1GW는 원전1기라고 보면 된다. 즉 2025년 AI산업으로 인해 적어도 원전 25기분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만한 전력수요가 갑자기 발생했다는 사실과 트럼프 대통령이 '에너지 위기'를 선언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7월 미국에너지부는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발표하였다. 요지는 딱 한 가지이다. '탄력적인 전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력수요의 증감에 민감하게 따라갈 수 있는 전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원자력발전의 전력생산단가는 킬로와트시(kW시)당 52원이다. 그런데 재생에너지는 270원이 넘는다. 5배가 넘는다. 엄청난 전기를 필요로 하는 산업의 경우 전기요금은 산업경쟁력에 직결된다. 5배 비싼 전력을 쓰면서 경쟁력있는 AI 산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한 재생에너지는 급전불응(給電 不應) 설비이다. 즉 급전지시가 내려와도 환경여건에 따라서 전력을 생산할 수 없기 떄문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탄력적인 전원이 아니다. 물론 공약이라는 것이 대선 후보자 한 명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과 집단의 생각과 요구를 담은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일관성을 요구하기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좌측통행을 할 것인지 혹은 우측통행을 할 것인지는 일관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병행하게 되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당선 후에 어떤 공약은 살아남을 것이고 어떤 공약은 득표하는 즉시 폐기될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흔히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는 경향성에서 어떤 쪽의 경향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를 결정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친노동 반기업 정서를 바탕에 둔 후보가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부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면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민간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서 보조금을 주고 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끌어가는 세력이라면 말로만 육성을 하는 것이고 규제를 만들고 보조금을 뿌려주는 재미만 누리려는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첨단전략산업에 대한 대규모 집중투자를 하겠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아무리 투자를 해도 값비싼 전기요금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국가첨단전략산업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RE100 산단도 마찬가지다. 벤처투자도 마찬가지다. 그건 돈이 된다면 민간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정부가 나서서 벤처투자를 했던 시절은 김대중 정부였고 그때 투자해서 제대로 벤처로 자립한 기업은 거의 없다. 당시 벤처투자는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외환위기 이후 국가적 불경기 상황에 고용을 늘리기 위한 임시적 방안으로 정부가 돈을 풀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스마트 데이터 농업, 푸드테크, 그린바이오산업도 굳이 정부가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일하는 방식은 세금을 그 분야에 보조금으로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조금이 있는 동안만 유지되는 산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보조금 산업은 당연히 정치화로 나설 수밖에 없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에너지 정책을 가져갈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전력생산단가가 5배 비싸지고 관성전력의 부족에도 안정적인 전력망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력망에 또한 그만큼의 투자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비용을 국민과 산업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에너지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간 필요한 부분만 전력망을 건설했던 이유가 뭐겠는가? 비용이 너무 막대하게 들어가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햇빛/바람 연금과 농가태양광 설치로 주민소득을 증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누군가는 내야 할 것이다. 정범진

[EE칼럼] 자연생태계 균형의 중요성을 생각해보자

매년 5월 22일은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유엔이 지정한 '세계 생물다양성의 날'이다. 생물다양성이란 지구에 생존하는 모든 종의 다양성, 이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다양성, 생물이 지닌 유전자의 다양성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이다. '침팬지 박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은 생물다양성을 거미줄에 비유했다. 거미줄의 줄이 한두 개씩 끊어지면 거미줄이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동식물이 하나씩 없어지면 생명의 그물망이 끊겨 나가 안전망에 구멍이 생기고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생물다양성은 모든 생명의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경제활동에 중요한 생물자원을 제공한다. 곤충을 포함해서 인간 생활에 필요하거나 유용한 동식물을 생물자원이라고 한다. 의약품의 70%가 생물자원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버드나무 껍질로부터 만들어진 아스피린은 대표적인 해열진통제로 100년이 넘도록 판매되고 있고, 주목나무 성분으로 만들어진 항암제 택솔 역시 지금까지 치료제로 이용되고 있다. 귀뚜리미가 14초 동안 우는 횟수에 40을 더하면 그 주변의 온도를 알 수 있다는 '돌베어 법칙' 역시 귀뚜라미가 주변 온도에 민감하다는 특성을 관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생태계가 균형을 유지해야만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이 공급될 수 있고, 건강한 토양으로부터 안전한 먹거리가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현재 지구 생태계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변화, 환경오염, 산림 훼손,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인해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유용한 생물자원이 줄어드는 위험에 처해 있다. 매년 전 세계가 직면한 위험요인을 조사하고 있는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생물다양성 손실'은 2020년 이후 매년 심각한 위험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또 UN생물다양성협약 사무국이 2020년 발표한 다섯 번째 '지구생물다양성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50년 사이에 전 세계 야생동물 개체군의 68%가 사라졌고, 공룡 멸종에 이어 여섯 번째 '생물종 대멸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했다. 2022년 발표된 세계자연기금의 '지구생명보고서' 역시 5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생물종 개체 수가 1/3 수준으로 급감했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른 경제적 비용도 증가하고 있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보고서 “The Economic Case for Nature"에 따르면 전 세계가 생물다양성 손실과 자연자본의 손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2030년까지 연간 2.7조 달러 규모의 손실이 예상된다. 이외에도 생물다양성이 새로운 경제 이슈로 부각되면서 기업의 생물다양성 관련 ESG 노력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 국가들 중심으로 생물다양성 관련 사항을 규제에 추가하여 기업들이 생물다양성과 관련된 내용을 공시하고 직접 관리하도록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일까? 우리나라 역시 생물다양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요 생물서식지인 산림과 농경지 면적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정책적으로 보호 관리가 필요한 멸종위기 야생동물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다섯 번째 '국가생물다양성전략'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은 생물다양성과 생물자원의 보전과 이용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생물다양성을 보전해야 하는 주체라는 인식은 7%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특히, 기업이 생물다양성 보전의 주체라는 인식은 단 4%에 그치고 있다. 국제사회는 생물다양성 손실을 멈추기 위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육상과 해양의 30%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고 훼손된 생태계의 30%를 복원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겠지만, 사실상 이해당사자인 시민과 기업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실천은 간단하다. 생물다양성 보호에 기여하는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고, 동식물의 서식지를 위협하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줍는 것도 작지만 울림있는 행동이다. '세계 생물다양성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자연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균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그 누구도 자연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릴 자격이 없다는 점을 되새겨 봤으면 한다. 조용성

[EE칼럼] 익숙해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의 소중함

“연로하신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에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도시락이 아니라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계신 것에 행복해야 합니다." 최근 퇴근길에 우연히 시청한 유튜브에서 들은 대화다. 늘 함께 있어 그 소중함을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가르쳐준 죽비였다. 우리는 오랜 기간 값싼 전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나를 새삼 깨닫는다. 최근 산업용 전기요금이 급격히 올랐다. 2010년까지만 해도 산업용 전기요금은 주택용 전기요금의 60% 수준에 불과했으나, 2020년 이후 급상승했다. 현재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83원으로, 주택용보다 비싸졌다. 전기요금 인상은 '그리드플래이션(Gridflation)'을 유발한다. 이는 전기요금 등 에너지 요금 상승이 다른 상품들의 가격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쳐, 소비자 물가를 끌어올리는 현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3.6%로, 2023년 12월 이후 가장 많이 올랐고, 외식 물가도 2개월 연속 3%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리드플래이션'은 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높은 에너지 비용은 기업의 운영 경비를 증가시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지난 3월 연간 1조 원 이상의 전기요금을 내던 현대제철이 제철소를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전기요금 인상으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산업용 전기 요금이 10% 상승하면, 설비투자는 1.41% 감소하고 GDP는 0.18% 줄어든다"고 분석한 바 있다.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 값싼 발전원 중 하나인 원전을 자체 설계‧건설‧운영할 역량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이 다가오면서 탈원전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와 이를 위한 전력망 확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실제 그렇게 됐을 때, 대다수 국민과 기업이 얼마나 큰 부담을 져야 하는지를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우리가 값싼 전기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원전이다. 1978년부터 이어온 원전 건설 덕분에 품질 좋은 전기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원전 공급망을 구축했고 우수한 인력을 양성했다. 이들은 국내 원전을 설계‧건설‧운영하는 것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원전을 개발해 냈다. 그 결과, 연구로와 상용 원전을 수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지난달에는 미국에 차세대연구로 설계를 수출하였다. 66년 전 우리나라에 연구로를 공급하고 기술을 전수했던, 원전 기술의 종주국 미국에 역수출하는 쾌거였다. 그러나 원전 산업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지나치게 늘고 있다. 일부는 우리 원전 산업을 폄훼하고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원전 산업이 붕괴한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3월 서울에서 열린 한-영 청정에너지 워크숍에서 만난 영국 원자력 전문가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현재 영국은 원자력 전공 교수 인력이 부족해 대학별로 독립적인 원자력공학과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대학별로 분산된 교수진을 모아 온라인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기대만큼 인력 양성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956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칼더홀(Calder Hall) 원전을 운영한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 강국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시즈웰 B 원전 운영을 시작한 1995년부터 힝클리 포인트 C 원전 건설을 시작한 2017년까지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서, 원전산업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했다. 결국 힝클리 포인트 C 원전 건설은 프랑스 기업에 맡겨야 했고, 원자력 전공을 가르칠 교수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정치의 과도한 개입으로 원전산업 생태계를 붕괴시킨다면. 우리나라도 결국 영국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정치권은 원전 문제를 단순히 '줄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활성화하여 국가 전력 공급에 더욱 기여하게 할 것인지', '세계 원전 시장에 어떻게 더 많이 진출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원전 산업이 살아야,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온 값싼 고품질 전기의 혜택을 미래에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주현

[EE칼럼] 대선 공약의 불편한 진실: 폐플라스틱은 ‘도시 유전(油田)’인데, 왜 금맥을 끊나

유종민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 겸임교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플라스틱 제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국가 차원의 탈(脫)플라스틱 로드맵 수립을 발표했다. 구체적으로는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다회용 용기 보급을 확대하며, 궁극적으로 플라스틱 사용을 제로(0)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플라스틱 제로' 정책은 기후위기 대응과 환경 선진국 도약을 위한 친환경 공약의 하나로 등장했다. 하지만, 공약 의도와 달리, 해당 정책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진정한 친환경 정책은 경제성과 사용자 편의성을 모두 고려할 때 지속가능 해진다. 환경을 생각한 정책이라도 소비자와 산업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용을 수반하거나 대체물의 환경효과가 불투명하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적이고 강경한 탈레반 식의 환경 우선주의가 얼마나 일반 국민들의 원망을 들었는지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러니 심지어 정치 이념화되면서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보수층 유권자 전체가 묻지마 반대 식으로 친환경정책 자체에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를 낳았다. 그러니 결국엔 집권하더라도 환경부 장관은 전문성이 없더라도 경제적 균형감각이 있는 외부 수혈만 있는 게 아닌가. 국가 통수권자 입장에서 표 깎아먹는 환경 탈레반을 부처 장관으로 임명하기엔 당연히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국무회의에서도 다른 장관들과는 달리 항상 분위기와 겉도는 보고만 할테고 안 봐도 뻔하다. 아무튼 본 사안과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플라스틱을 대체할 대안 소재의 실효성이다. 예를 들어 일회용 플라스틱을 특수 코팅 종이로 대체하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이러한 코팅지 역시 친환경적이지 않을 수 있는 과학적 이유가 있다. 코팅 처리된 종이는 표면에 얇은 플라스틱 층(비닐류)을 입혀 방수성을 확보한 것으로, 재활용 공정에서 일반 종이와 함께 처리하기 어렵다. 실제 제지업계에 따르면 “종이류는 물에 젖으면 잘 녹아내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종이에는 비닐 성분이 함유된 것"이라고 한다. 즉,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종이는 물에 잘 풀어지지 않아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한 해리 공정(물에 불려 섬유질을 분리하는 단계)을 방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코팅지 대부분은 일반 종이처럼 재활용되지 못하고 선별 과정에서 걸러져 소각 처리되고 만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가정에서 배출되는 종이 폐기물 중 재활용이 불가능한 코팅지 등 혼합물의 비중이 약 6%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따라서 아예 재활용 자체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플라스틱 제로' 정책 발표는 의외의 곳에서 즉각적인 파급 효과를 낳기도 했다. 공약 발표 직후 증권시장에서는 관련 업종으로 분류되는 일부 기업들의 주가가 급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2025년 4월 공약 공개 당일 세림B&G, 삼륭물산, 진영, 한국팩키지 등의 이른바 '탈플라스틱' 관련주들이 나란히 상한가를 기록했고, 에코플라스틱과 코오롱ENP 등도 15~22%대 급등을 보였다. 이들 기업은 생분해성 수지로 만든 필름을 생산하거나 플라스틱을 대체할 종이 카톤팩 등을 제조하는 업체들로 분류되어 테마주로 부각된 것이다.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 기대감에 기업과 투자자가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 열기와 달리 정작 해당 정책의 환경적 타당성에는 의문 부호가 붙는다. 코팅 종이 용기나 생분해 플라스틱 같은 대안 제품이 생산·폐기 과정에서의 환경 영향이나 탄소발자국 면에서 기존 플라스틱보다 반드시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친환경 정책의 목표와 시장 기대 사이의 괴리가 드러난 셈인데, 이는 공약의 현실성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이는 과거 환경부에서 추진했다가 미운오리 새끼가 되었던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 금지 → 종이 빨대 전환' 사업을 떠올리게 한다. 종이 빨대는 생산·매립·소각 전 과정에서 플라스틱 빨대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9~5.5배 높고, 독성물질 배출도 더 많다 결론 나서, 정부 발표에 맞춰 설비 투자와 생산 준비를 해온 종이 빨대 제조사만 낭패를 본 사례가 생생하다. 한편 정책이 간과한 현실 중 하나는 기존 플라스틱 폐기물의 가치 재평가이다. 최근 폐플라스틱이 단순한 환경오염원이 아니라 유용한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열분해유 기술이란 폐플라스틱을 무산소 고온 환경에서 가열해 유증기를 만들고, 이를 응축하여 합성 오일을 추출하는 공정이다. 이렇게 얻은 열분해유는 성상에 따라 산업용 중유(벙커C유 등)나 경유로 활용되며, 추가 정제를 거치면 나프타 등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열분해유 기술은 흔히 '도시유전' 사업으로 불릴 정도이다. 실제로 폐플라스틱 1톤으로 약 0.7톤의 열분해유를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석유 수입을 대체하고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양이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경제성의 급격한 개선이다. 과거에는 생산 단가와 기술 제약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열분해유가, 최근 들어 국제 유가 상승과 기술 효율 향상을 배경으로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초기엔 판매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과 탄소중립 정책 연계로 경제성이 확보되고 있다. 환경부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석유 대체 원료로 활용할 경우 탄소 배출 저감 실적으로 인정하는 방법론을 국내 최초로 승인하였는데, 이에 따라 기업들은 열분해유 사용 시 탄소배출권 혜택을 얻거나 재활용 의무 이행 실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생산시설 투자에 대한 보조금, 세제 혜택 등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면서 열분해유 산업의 경제적 채산성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즉 폐플라스틱을 원료로 한 열분해유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플라스틱 자체에 대한 인식도 '없애야 할 폐기물'에서 '돈이 되는 자원'으로 바뀌고 있다. 플라스틱의 자원화 가치가 부각되면서, 폐플라스틱을 둘러싼 산업계의 경쟁도 뜨거워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시멘트업계와 재활용업계 간의 폐자원 확보 경쟁이다. 시멘트 공장이 폐플라스틱을 연료로 대량 소비하면서, 정작 재활용 업계에는 플라스틱 원료 공급이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재활용·소각업계는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마저 SRF로 몰려 시멘트 공장에서 태워지고 있다"며 시멘트 업계를 그린워싱이라고 비판하고, 시멘트 업계는 “석탄 대신 폐기물을 연료로 쓰는 것이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는 순환경제"라고 반박하는 등 갈등도 표출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폐플라스틱 확보 경쟁은 이제 소규모 재활용 업체와 시멘트 공장 간의 다툼을 넘어 정유·석유화학 대기업까지 참여하는 전방위적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플라스틱이 완전히 퇴출되기는 커녕 오히려 산업적 수요를 촉발하며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플라스틱 저감 역시 일방적인 사용 금지나 단순한 대체에 머물 경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대신 플라스틱의 순환경제를 구축하고, 신기술 투자로 폐플라스틱을 자원화하며, 소비자에게 편리한 재사용 시스템을 마련하는 접근이 실효성을 가질 것이다. 결국 환경 정책은 이상과 현실의 균형 위에서 추진되어야 하며, 지속가능성은 그 균형을 맞출 때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유력 대선 후보의 공약이 이러한 방향으로 보완되어 실행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우려를 넘어 실질적인 친환경 전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종민

[EE칼럼] 균열된 현실, 통합의 가능성: 종교적 지혜와 AI의 만남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우리는 지금, 분열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늘어선 복도 앞에 서있다.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밀밭에서 가자지구의 골목까지 이어지는 있는 전장을 보여주고 남아시아에서는 핵보유국 간의 오래된 갈등이 재점화되면서 새로운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미국의 트럼프 재집권 이후 배제의 정치가 심화되면서 불법이민자로 낙인 찍은 이들을 추방하고, 고율의 관세 부가 정책은 단순한 경제조치를 넘어서 '미국의 경제적 주권 회복'이라는 국가적 정체성 논쟁으로 연결되고 있다. 디지털 공간은 더욱 우려스럽다. 2023년 Pew Research Center 조사에 따르면, 소셜미디어 사용자의 62%가 편향된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고 한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사용자에게 두가지 편향된 정보 환경을 만든다. 자신이 동의하는 의견만 반복해서 듣게 되는 공명실(echo chamber)과 자신의 기존 성향에 맞는 정보만 선별적으로 노출되는 정보 거품(filter bubble)을 만들어 같은 사건에 대해 완전히 다른 사실을 소비케 한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은 공유된 사실 기반 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의 섬에 고립되어, 생산적 대화와 사회적 합의 도출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세계적 분열의 흐름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상황도 성장률 저하, 가계소비 감소, 자영업자 폐업 급증과 같은 경제 불안으로 인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보수-진보의 진영과 MZ-베이비부머의 세대에서 가치 차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최근 의대 정원 문제에서 드러난 의사와 정부의 입장 차이와 같은 또 다른 사회적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난 6개월간 극심한 사회적 분열의 고통을 겪게한 정치적 혼란과 법적 기준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으로 드러난 민주주의 취약성이다. 계엄령 논란은 헌법 해석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파면으로 일단락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권력 공백으로 인한 대행 체제의 역할과 기능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는 가운데, 특히 지난 5월초 대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은 이례적으로 빠른 재판 진행과 함께 2심에서의 무죄 판결을 뒤집은 파기환송으로 법조문과 사실관계에 대해 상반된 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오랜동안 존중해왔던 사법부의 법 해석 태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는 '해석'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같은 가치, 같은 원칙, 같은 법문에 대해서도 상반된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적 해결책으로 AI의 가능성을 주목하면서 '해석'의 본질을 질문해 본다. 해석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기계적 행위가 아니다. 해석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텍스트를 들여다 볼 때,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법문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가치관, 경험, 세계관을 투영하는 과정이다. 아이가 구름에서 다양한 형상을 보듯, 같은 법조문을 두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주관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해석이 절대적 진리가 아닌 하나의 관점임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해석을 경청하고 다양한 시각을 통합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의 문제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어떻게 포용하고 공존의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분열의 시대에 종교적 지혜는 통합적 해석을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경의 '코이노니아(koinonia, 통공)' 개념은 단순한 집단적 연대가 아니라, 깊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을 지향한다. 최근 새로 선출된 레오14세 교황(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이 강조한 '시노달리타스(함께 걸어감)' 정신 역시 교회가 대화와 포용으로 분열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개인적 이익을 위한 독단적인 판단이 아닌 공동체적 이해과 열린 소통의 가치를 강조한다. 법 해석도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해석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더 높은 공익과 공동체의 화합을 향한 열린 대화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교적 지혜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 기술인 AI 역시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는 새로운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즉 AI는 가치, 원칙, 법문을 둘러싼 갈등과 단절의 영역에 중간에 서서, '해석의 조정자'로 작동한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모으고 보여주기: AI 대시보드가 판결문·뉴스·여론을 자동으로 모아 진보·보수·전문가 시각을 한 화면에 나란히 띄운다.(예로써 “의대 정원 갈등에서 AI가 양측 주장 정리") 둘째, 사실 확인하기: 실시간 팩트체커가 각 주장에 판례·통계 링크를 달아 “근거 있는 말인지" 바로 알려 준다. 셋째, 대화 정리·중재하기: 회의나 공청회에서 AI 중재 시스템이 발언을 요약해 쟁점·공통 관심사·타협안을 화면에 정리한다. 넷째, 공존 스토리 만들기: AI 스토리 메이커가 갈등 서사를 재조립해 “서로 수용 가능한 합의문 초안"을 작성한다. 다섯째, 기록 투명화: 모든 프롬프트와 출처 및 결정 과정을 자동 로그로 공개해 시민이 언제든 AI 편향을 체크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AI가 신속한 정보처리와 다각적 관점을 제공하고, 인간이 지금 보다 높은 수준의 공익적 가치 판단과 책임을 맡는다면, 서로 다른 입장의 해석은 더 이상 분열의 거울이 아니라 공동체를 잇는 다리가 될 것이다. 김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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