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실험실이 연상됐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연구원들은 배터리를 분석하고 있다. 단순히 배터리 성능을 점검하는 것을 넘어 기본 소재단위로 이를 모두 쪼개 하나하나 살폈다. 한쪽에서는 로봇이 자동차 문 열고 닫기를 '무제한' 반복하고 있다. 거대한 실험실 안을 수소전기트럭이 달리는 장면도 눈길을 잡았다. 내부에는 극한의 고온과 세찬 바람이 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27일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기아 남양기술연구소에서 본 것들이다. 이 곳은 1995년 출범한 종합기술연구소다. 신차 및 신기술 개발은 물론 디자인, 설계, 시험, 평가 등 기반 연구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현대차·기아 승용·상용 등 전 차종에 대한 연구개발을 책임지고 있다. 외부에 최초로 공개된 전기차 동력계 시험실에서는 연구원들이 아이오닉 5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전동화시험센터는 현대차그룹의 전동화 체제 전환에 따라 기존 파워트레인 개발 조직이 전동화 조직으로 개편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차가 양산에 이르기 전까지 충분한 성능 개발을 통해 EV 품질을 개선하고 확보하는 활동을 담당한다. 시험실은 실도로에서 이뤄지는 주행 테스트와는 달리 실내 시험 공간 내에서 가혹한 테스트를 반복해서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양한 상황과 조건을 모사해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신속한 원인 파악과 개선이 가능한 셈이다. 좌우에 위치한 여러 개의 시험실 유리창 너머로 '위이잉' 대는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총 3곳으로 이루어진 시험실 내부에는 모터와 인버터를 측정하는 커다란 장비들이, 한쪽에는 현대차 아이오닉 5 차량이 장비에 맞물려 있었다. 곽호철 전동화구동시험3팀 책임연구원은 “모터 단품 시험부터 차량 양산까지 종합적인 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대표적인 3가지 동력계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며 “동력계 장비의 개수에 따라 크게 1축과 2축, 그리고 4축 동력계 실험실로 나눠 운영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원들은 모니터를 통해 방금 시험된 모터의 토크, 전력, 전류 맵, 구동 및 시험 효율 특성에 대한 결과를 확인했다. 동력계 시험실에서는 로봇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로봇이 기어, 액셀, 브레이크 등을 조작하고 있다. 운전자의 역할을 대체하는 이 로봇은 가속과 제동을 위해 페달을 밟는 동작을 사람과 유사하게 따라 하고, 심지어 자동으로 변속까지 할 수 있다. 연구원이 장비를 가동하자 실제 아이오닉 5 차량 구동축에 연결된 장비가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속에 따른 토크, 모터 온도, 소음진동(NVH) 파형 등이 그래프로 나타났다. 차량 이용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운전 영역에 대한 효율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모습에서 차량 품질 확보를 향한 의지가 느껴졌다. '배터리 분석실' 역시 이번에 최초로 공개됐다. 기초소재연구센터 소속 배터리 분석실은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를 분석해 세부 구성 물질을 연구하는 곳이다. 배터리 셀을 구성하는 소재에 대한 정밀 분석을 통해 셀의 성능, 내구성, 안정성 등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 이재욱 재료분석팀 팀장은 “전기차 배터리는 소재 특성상 수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일정 온도와 습도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드라이룸이라는 특수환경에서 셀을 해체하고 분석을 진행해야 신뢰성 있는 분석 결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분석을 위해 배터리가 처음 옮겨지는 장소는 '셀 해체실'이다. 배터리 셀의 구조 파악과 구성 소재 분석을 위한 시료 채취 작업이 진행된다. 셀 해체실 공간은 혹시 모를 화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 벽면, 천장을 비롯해 테이블과 같은 기본 설비 모두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마감돼 있다. 또 해체실 한편에는 자동소화 설비가 적용된 흄후드와 각종 화재 차단 설비가 곳곳에 비치돼 있다. 현대차·기아가 배터리 소재 기술을 집중 연구하는 것은 차세대 배터리 개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소재 단계에서 그 특성을 이해하고 개선하면 문제점을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으며, 최적의 소재 개발을 통한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일 수 있다. 다음으로 방문한 '상용시스템시험동'은 차량 개발 및 평가에 필요한 300여가지 시험을 한 곳에서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상용시스템시험동에서는 상용차의 특수성을 반영한 환경 및 성능 조건의 시스템 단위 평가를 통해 자동차의 내구성을 시험하고 최적화한다. 현대차·기아의 모든 상용차는 이곳에서 혹독한 시험을 거쳐 개발된다. 평가 조건은 일부 다르겠지만 구조적으로는 승용차 시험 연구와 거의 동일한 프로세스로 볼 수 있다. 4400여 평에 달하는 면적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시험동에서는 실차 거동 재현과 필드 환경을 반영한 차량 평가 검증이 한창이었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시험동 내부는 차체·안전, 조향·현가, 구동·제동, 품질·내구, NVH 등 크게 다섯 가지 구역으로 이뤄졌다. 차체·안전 구역에서는 차량 내외부의 안전을 테스트하는 충돌 시험과 기후환경을 재현한 시험 장비들을 볼 수 있었다. 로봇시험실에 들어서자 로봇 팔이 차 문을 일정한 강도로 열고 닫기를 반복하며 부품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담당 연구원에 따르면 문을 여닫는 강도는 실제 사람의 힘과 동일하다. 충분한 내구성 데이터 확보를 위해 로봇이 24시간 내내 몇 달간 시험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상용시스템시험동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시험은 이처럼 필드 조사 결과에 기반해 실제와 비슷한 조건으로 진행된다. 이어 방문한 BSR(Buzz, Squeak, Rattle) 시험실은 사방이 삼각뿔 모양의 흡음재로 둘러 쌓여 있었다. 차량 부품간 발생하는 민감한 소음까지 잡아내기 위해 시험실 내부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음이 없는 공간이었다. 차량에서 발생하는 이음은 다양한 온도와 진동 조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 조건까지 구현이 가능했다. 이진원 상용내구시험팀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모빌리티의 발전방향이 전기차와 같이 점점 더 조용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BSR 소음을 평가하는 시험이 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양연구소 투어의 대미를 장식한 곳은 압도적 스케일을 자랑하는 상용환경 풍동실이었다. 상용환경시험동내 3개 시험실 중 하나인 상용환경풍동실은 내연기관 및 친환경 상용차(전기차, 수소차 등)를 연구하고 테스트하는 곳이다. 주행 환경시험을 위한 다양한 융복합 연구 장비들이 대거 설치돼 있다. 환경풍동시험실에서는 냉각, 열해, 연비, 냉시동, 히터·에어컨, 충·방전, 동력, 모드 주행, 배기가스인증 등 실차 주행 성능시험을 종합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실내 온도를 –40℃~ 60℃까지, 습도를 5%~ 95%까지 조절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의 날씨는 물론, 극한 환경까지 재현 가능하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3.3m의 대형 팬으로 시속 120km에 달하는 기류를 만들어 실제 주행 조건과 동일한 시험도 할 수 있다. 제어실로 입장하자 엑시언트 수소전기 트럭이 비치된 환경풍동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환경풍동실 내부 공간은 길이 20m, 너비 10m, 높이 6.6m에 달할 정도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유로 시스템까지 포함하면 시설 규모는 더욱 커진다. 풍동실 내부 천장 및 측면에 태양광(Solar) 장비가 설치돼 있어 마치 화창한 여름날 야외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풍동실 안에 들어가 보니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시험실 온도가 중동 지역 테스트 기준 온도인 45℃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풍동시험실은 상용 전기차 개발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온도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는 전기차의 특성상 배터리 충·방전 및 냉각 성능 등 각종 성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험실에는 400kW급 초고속 충전기 3대가 마련돼 있었다. 언제든지 혹서, 혹한의 상태에서의 배터리 충전 효율을 점검할 수 있는 셈이다 이날 현장에서는 고온 조건 테스트 시연과 함께 유동 가시화 시험을 실제로 지켜볼 수 있었다. 유동 가시화 시험은 풍동 내부에 가스를 분사시켜 차량 주변의 공기 흐름을 확인함으로써 공력성능 향상에 기여하는 테스트이다. 이강웅 상용연비운전성시험팀 책임연구원은 “희소성과 기술력 덕분에 국내 정부부처·학계·자동차업계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수많은 기업과 정부 기관이 연구 및 비즈니스 협업을 위해 계속해서 환경풍동실을 방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라인업은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각지 영향력 있는 자동차 기관과 매체가 주관하는 시상식을 석권하며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E-GMP' 기반의 전기차들이 세계 3대 올해의 차를 모두 휩쓰는 등 남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저력엔 국내 최대 전기차 핵심 기지인 남양연구소가 있었다. 현대차·기아는 기술 혁신과 경쟁력 향상을 통해 '글로벌 게임체인저'로 거듭나고 있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