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지난 7월 22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민수 원자력 협력 협정인 이른바 '123 협정'에 서명하면서 세계 원자력계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이번 협정에는 자국 내 농축과 재처리를 포기한 2009년 미·UAE 협정의 '골드 스탠더드'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주목을 받았다. 사우디와의 협정을 계기로 중동의 비확산 규범뿐 아니라 신규 원전 시장의 판도가 영향을 받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데 협정의 정치적 앞날은 아직 불투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 직후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해야만 협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우디는 공식적인 수용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어, 123 협정과 아브라함 협정이 어떤 방식으로 정리될지는 아직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 원전 사업의 향방은 세계 원자력 지도를 다시 그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에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우디는 전력 생산을 거의 전적으로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산업화와 담수화, 인공지능 및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라 전력수요도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사우디는 첫 대형 원전 사업으로 UAE와 카타르 국경 인근인 코르 두와이힌(Khor Duwaiheen)에 약 1.4GW급 원자로 2기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은 123 협정 체결이 곧 미국 원자로 수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23 협정은 미국의 핵물질과 기술을 이전할 수 있도록 법적 문을 여는 장치일 뿐, 원자로 구매계약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 비가입국임에도 미국과 2008년 123 협정을 맺었지만, 그 이후에도 쿠단쿨람(Kudankulam) 원전 후속 사업을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확대해 왔다. 국제정치적 관계와 원전 공급자의 선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원전을 처음 도입하는 국가는 원자로의 성능만 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건설비와 금융 조건, 정해진 공기를 지킬 능력, 연료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공급, 현지 산업 및 인력 참여, 운영과 정비, 사용후핵연료 관리까지 모두 검토할 수밖에 없다. 원전은 건설에서부터 수십 년간의 가동, 폐쇄 후에도 해체와 폐기물 관리까지 포함하면 한 세기에 걸친 국가사업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판단은 크지만 절대적이지도 않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튀르키예는 첫 원전인 아쿠유(Akkuyu)에 러시아 원자로 4기를 도입해 건설 중이다. 미국 및 서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이집트도 엘다바(El Dabaa) 원전 4기 건설을 러시아에 맡겼으나, 한국수력원자력도 터빈 아일랜드(Turbine Island, 2차측)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원전 수출 경쟁력이 단순히 정치적 영향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규 도입국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금융·연료·운영·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를 하나의 국가 패키지로 묶어 제공한다는 것이 러시아 경쟁력의 핵심이다. 역으로 위 나라들이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다 해서 러시아 진영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도 아니다. 사우디의 선택은 한 국가의 신규 원전 사업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우디는 걸프 지역 최대 경제권 중 하나이며, 국부펀드와 개발금융을 통해 중동과 아프리카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우디가 어떤 원자로와 금융·연료주기 모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향후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 신규 원전국들의 선택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원자력계도 사우디 사업의 향방을 면밀히 주시하며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미·사우디 123 협정이 체결됐다고 해서 미국이 사업을 가져가는 게 보장되지 않듯이, 반대로 아브라함 협정과의 연계가 꼬인다고 해서 미국의 수주 가능성이 약해졌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이다. UAE 바라카(Barakah) 원전에서 입증한 건설 능력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라카 원자로 4기를 성공적으로 건설·상업 운전한 경험을 객관적인 수치와 함께 제시하되, 현지 인력과 산업을 얼마나 육성할 수 있는지도 제안해야 한다. 또한 국제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연료 조달 방안과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해서도 발주국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프랑스 등 우방국 기업과 경쟁하면서도 필요할 경우 공급망 차원의 협력 모델을 만드는 유연성도 요구된다. 사우디의 선택은 중동 나아가 글로벌 사우스의 원자력 지도를 바꿀 수 있다. 한국도 사우디 원전 사업을 향후 세계 원전 시장의 주도권을 좌우할 전략사업으로 보고 구체적인 계획들을 마련해야 한다. bienns@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