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지정학 위기가 원유와 가스 등 전통적인 에너지 수급 불안으로 이어지는 현실에 대처하려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인공지능(AI) 시대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유연한 전원 공급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1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에너지·기후·번영의 미래를 그리다'를 주제로 개원 40주년 기념 정책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기조연설에 나서 “원유와 가스, 우라늄, 코발트, 구리 등 여러 에너지원 중 오늘날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신뢰'라고 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신뢰가 부족하지만, 한국은 전세계 모두가 신뢰할 만한 국가이자 교역 상대국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은 위기 중에 올바른 공급망 방향을 선택한다면 향후 몇 년 동안 에너지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정학, 기후변화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주제로 진행된 오전 세션에서 사카모토 도시유키(Toshiyuki Sakamoto) 일본에너지경제연구소(IEEJ) 전무이사는 에너지 안보 측면이 경제성이나 환경보다 정책적 우선 순위에 있는 방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봤다. 사카모토 전무는 '글로벌 에너지시장, 기후정책 및 공급망 안보 전망'을 주제로 발표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기존 탄소감축 목표 경로를 따라가기 어려워져 에너지 안보가 경제적 효율성, 환경 등 전통적 요인에 비해 우선 요인이 됐다"며 “또한 화석연료와 희토류를 비축하거나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등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녹색전환(GX) 정책이 최근 에너지 안보를 고려한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지난 2023년 2월 출범한 GX 정책은 지난달 에너지 자원 회복력을 위한 정책 패키지로 성격이 변화했다. 화석연료 조달 다변화와 위험 축소, 석유 수입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과 다원화, 나프타 비축 정책 부활 등의 내용을 담았다. 페로브스카이트 등 재생에너지 기술부터 원자력 등으로 GX를 가속화하고 AI 데이터센터 전력수요에 대응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태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안보정책연구실장은 '물량에서 권리로, 연료에서 시스템으로: 지정학 시대 에너지안보의 재정의' 주제 발표를 통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올해 초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를 계기로 바뀐 에너지 안보 전략을 진단했다. 이 실장은 “공급자가 아니라 공급망에서 에너지 안보 위기가 오고, 기존에는 연료라는 유연한 자본 형태에서 광물과 소재라는 고정된 자본으로 에너지 안보의 중심 축이 이동했다"며 “에너지 물량 뿐만 아니라 물량 권리까지 확보해야 한다는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체 공급망만이 아니라, 자원 수송로와 (정제 등의) 공정에 대한 병목지점(chokepoint) 지도를 보고 에너지 안보를 판단해야 한다"며 “아무리 리튬 자원 물량을 개발해도 정제하고 수입하는 국가 단계에서 막히면 공정이 막히면 국내로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고, 별도의 응축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우라늄처럼 중간 계약이 막혀도 못 들여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에너지 안보 프리미엄은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므로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잘 지불할 수 있어야 위험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다"며 “자원 비축과 수입선 다변화, 해외 광산 개발 같은 일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위기 상황에는 큰 혜택으로 돌아오고 장기적으로 우상향된다"고 강조했다. '회복력 있고 경쟁력 있는 에너지시스템 구축(Building Resilient and Competitive Energy Systems)'을 주제로 한 오후 세션에서는 인공지능(AI) 시대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는 동시에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을 같이 확보할 에너지 솔루션에 관해 논의했다. 굴샨 바시스타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 재무전략협력부장은 AI 시대의 데이터센터 전력수요를 단순히 수용해야 할 부하가 아니라 계획·관리하고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전력수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연결된 그리드들을 잘 조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고, 그리드 유연성을 확보해야 AI로 인한 전력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며 “유연한 수요 대응으로 재생에너지를 아주 신뢰도 높은 전력 공급원으로 바꾸고 기저발전도 유연한 수요 조절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며, AI 기술은 이런 과정에서 정밀도를 높이는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현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수급통계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AI 시대를 위한 전력 공급: 지속가능한 데이터센터와 글로벌 AI 경쟁력 확보 전략'을 주제로 발표하며 AI 산업의 성장과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라는 두 과제를 조화롭게 풀어갈 것을 주문했다. 김 위원은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막대한 인프라 투자 경쟁이 필요한 초거대 기반 파운데이션 모델에 집중하기보다는 특정 산업에 특화된 AI 모델과 AI 인프라의 핵심 기술을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에너지 분야의 AI 기술 표준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며 “에너지 분야의 AI 데이터 인터페이스 성능과 안전 보안에 관한 공통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전력계통이나 전력 시장 참여, 공공 데이터 접근, 공공 조달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한편, 이날 에너지경제연구원은 개원 40주년 기념식도 진행했다. 김현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지난 40년간 우리나라의 에너지 여건과 정책환경 변화에 따라 연구원이 마주해 온 과제는 달라져 왔다"면서도 “객관적인 사실과 전문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에너지정책 수립을 뒷받침하고 국가와 사회가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연구원의 기본적 책무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과 기후변화 대응, 지속적인 번영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과제이며, 지정학적 불안과 기후위기, AI·디지털 전환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한주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환영사를 했고, 이회성 에너지경제연구원 초대원장과 우원식 국회의원,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