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란 전쟁과 예멘 후티 반군의 사우디아라비아 공격 등으로 중동산 석유·가스 공급에 차질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 지정학 위기로 석유·가스 공급망이 마비될 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중대한 문제도 함께 터진다. 바로 석유와 가스를 땅에서 뽑아내고 운송하는 '업스트림(Upstream, 상류)' 단계에서 탄소 배출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유와 천연가스의 업스트림 배출(채굴, 정제, 수송)은 연료 전과정(Life-cycle) 온실가스 배출량의 15~40%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에너지 원자재 자체가 더 '더러워진' 상태로 수입된다면, 이를 가져다 쓰는 제조업(미드스트림, 중류)과 최종 소비(다운스트림, 하류) 단계에서는 기존보다 훨씬 더 혹독한 탈탄소 노력을 기울여야만 기후 목표를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 ◇ 지정학적 위기가 만든 '업스트림 탄소 폭탄'의 실체 중국 인민대학과 칭화대 등의 연구팀은 최근 국제 학술지 '환경 과학 기술 (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에 발표한 연구에서 지정학적 분쟁이 지속돼 전 세계 석유·가스 수송 경로가 봉쇄되는 고위험 상황이 될 경우 2050년까지 업스트림 단계에서만 누적 18억 톤(CO2 환산량)의 온실가스가 추가 배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유럽연합(EU) 전체의 1년 온실가스 배출량과 맞먹는 규모다.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업스트림의 탄소 배출이 급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저탄소 유전의 매장과 고탄소 대체 자원 개발이다. 중동 유전은 추출 과정의 에너지 효율이 높고 플래어링(가스 태우기) 비율이 낮아 탄소 배출 강도가 매우 낮다. 하지만 전쟁 등으로 중동 공급망이 막히면 저비용·저탄소 자원인 석유 72억 톤과 천연가스 3조 3000억 ㎥가 땅속에 묶이게(Stranded) 된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캐나다 오일샌드, 아프리카 심해 가스, 미주 해상 유전 등 상대적으로 탄소 배출 강도가 높고 생산 비용이 비싼 대체 자원이 무더기로 개발된다. 두 번째 이유는 수송 거리의 연장이다. 안전한 우회 수송 경로를 찾다 보니 해상 수송 거리가 길어져 수송 부문에서만 약 1억 2,700만 톤의 온실가스가 추가 배출된다. 이로 인해 지구 온난화를 1.5°C 이내로 제한하기 위한 전 세계 잔여 탄소 예산(1700억 톤) 중 약 1.1%가 순식간에 소모된다. 이는 시멘트나 철강 같은 대표적 감축 난이도 높은 산업군 전체에 남은 탄소 예산과 맞먹는 비중이다. ◇“원자재가 더러워졌다"… 제조·다운스트림 감축 부담의 가중 원유와 천연가스는 플라스틱·화학제품·철강·전력 등 모든 산업 제조 공정의 핵심 원자재이자 연료다. 업스트림에서 탄소 배출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 전체 산업에 들어오는 수입 원자재의 '내재 탄소 발자국(Embedded Carbon)'이 커진다는 뜻이다. 내재 탄소발자국이 큰 원유와 가스를 기초 원료 및 연료로 사용하는 국내 석유화학, 철강, 제조업체들은 제품 전과정평가(LCA) 및 공급망 전체(스코프 3) 배출량 관리 비용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 공급망 상류에서 탄소발자국이 크면, 철강·화학 등 감축이 어려운 제조업 부문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감축 여유 공간(Flexibility)이 크게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제조 기업들은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자체 공정 효율화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거나 높은 가격으로 탄소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는 가혹한 감축 압박을 받게 된다. 따라서 공급망 위기 시기에는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때나 전기를 쓰고 기름을 소비할 때, 배출량을 대폭 줄이지 않으면 국가 탄소중립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진다. 연구진은 수입국들이 단순 수입선 전환에 그치지 않고 재생에너지 대체, 산업 전력화, 소비 감축 정책을 적극 시행할 경우, 고위험 상황 대비 69억 톤(CO2 환산량)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특히 전체 감축량 69억 톤 중 수송·공급망 효율화(26억 톤)보다 재생에너지 전환 및 소비 절감(43억 톤)이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국내 산업계와 정부에 주는 명확한 인사이트 논문에서는 한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속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중동 분쟁 발생 시 석유 수입의 중동 의존도가 67%에서 50%로, 가스는 64%에서 42%로 급감하면서 가장 큰 수급 충격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됐다. 부족분은 미국산 LNG나 러시아산 원유 등 타 지역 물량으로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아프리카 등지에서 들어오는 대체 물량은 운임 상승(약 30% 증가)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은 탄소 배출 강도를 안고 있다. 이는 석유화학·반도체·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들에게 원가 상승과 더불어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같은 탄소 규제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안기게 된다. CBAM의 경우 수입 원자재의 업스트림 배출량이 높으면 최종 수출 제품의 탄소 함유량이 높게 산정이 되고, 이는 한국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수출할 때 탄소 국경세 추가 납부나 검증·인증 비용 상승이라는 직접적인 재정적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연구진은 “아시아 지역이 적극적 수요 감축을 추진하면 석유 안보 수준(자급률)은 49%, 가스 안보 수준은 25% 향상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나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수입선 우회'가 임시 방편일 뿐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미국이나 타 지역으로 공급선을 바꾸는 것은 물리적 물량을 확보하는 임시방편일 뿐이고, 고탄소 원자재 도입에 따른 경제적·환경적 손실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해결책은 다운스트림(공장 및 소비) 전력화·효율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공장 가동에 쓰이는 화석연료 유틸리티를 전기화하고, 재생에너지 보급을 확대하여 화석연료 소비 자체를 신속히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탄소 배출 강도(CI) 기반의 수입 평가를 도입할 것을 연구진은 제안했다. 대체 석유·가스 물량을 계약할 때 단순 가격뿐만 아니라 유전별 탄소 배출 강도와 메탄 관리 수준을 평가해 상대적으로 깨끗한 자원을 우선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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