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을 위해 수도권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가운데 전력망이 통과하는 지역의 주민과 자치단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 2월 제정되고, 지난달 26일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이하 전력망법)'에서 주민의견수렴 절차 등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20일 국회에서는 서왕진(조국혁신당)·박지혜(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국환경연구원, 프리드리히애버트재단, 기후시민프로젝트 등이 주최하고 주한 독일대사관이 후원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독일 전력망 정책의 시사점과 한국의 전력망 갈등 해법'이 심포지엄 주제였다. 이날 발제는 독일 연방네트워크청(FNA) 소속으로 연방부문 계획 승인 및 전력망 확장 부서장인 보도 헤르만 박사가 맡았고, 그는 FNA의 전력망 확충 사업을 소개했다. FNA는 전기(전력망)뿐만 아니라 가스·통신·우편·철도까지 담당하는 독립된 연방기관이다. 독일에서는 '연방요구사항계획법(BBPlG)'에 따라 전력망 확충과 관련한 97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 가운데 주 경계를 넘는 36개 프로젝트를 FNA이 관할하고 있다. ◇독일, 원전 폐쇄한 남쪽으로 전력공급 헤르만 박사는 “독일에서는 에너지 전환이 2010년 시작됐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가속화됐다"면서 “원자력 발전소 폐쇄로 전력이 부족해진 남쪽으로 북쪽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전력망 보강과 확장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2037년까지 3000억유로(약 500조원), 2045년까지 모두 6000억유로에 이르는 투자가 필요하다. 헤르만 박사는 “독일에서는 전력망(주로 고압 송전망) 확충 과정에서 시민·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네트워크 확장의 5단계'라는 체계를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5단계는 ▶장기적 전망을 통해 수요를 예측하는 시나리오 프레임 단계 ▶전력망 개발계획 및 환경보고서 작성 단계 ▶BBPlG법에 프로젝트를 반영하는 단계 ▶노선에 대한 공간적·환경적 타당성 평가 단계 ▶구체적인 허가·승인 절차 단계 등이다. 의회에서 진행하는 3번째 단계를 제외한 나머지 단계에서는 모두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된다. 헤르만 박사는 BBPlG법 프로젝트 1호인 '엠덴/오스트-오스테라트' 프로젝트 사례를 소개했다. 해상풍력 전력을 서부 및 남부 독일에 공급할 이 전력망은 2027년 가동 예정이며, 직선거리는 300㎞에 이르는 고압 직류 송전망이다. 2018년 처음 계획이 신청된 이래 2020년까지 4차례 설명회, 4차례 공개 청문회가 열렸다. 지금은 계획 승인 절차가 완료됐다. 헤르만 박사는 “소통이 신뢰를 창출하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가져온다"면서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지만, 설득을 통해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의견수렴 절차 법률에 담아야 두 번째 발제는 독일 에너지 분야 씽크탱크인 '아고라 에너르기벤데'의 선임연구원인 염광희 박사가 맡았다. 염 박사는 “독일은 산업구조나 에너지 해외의존도 등에서 한국과 비슷하기 때문에 독일의 에너지 전환에 대해 한국이 배울 점이 많다"면서 “전력망 확충과 관련해 독일은 시행령이 아닌 법률에 구체적인 사항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의회 의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권한을 행사하고, 재량권이란 명목으로 행정기관에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염 박사는 “BBPlG법에서는 이 법에 포함된 전력망 프로젝트를 공익사업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신속한 절차가 가능하다"면서 “이에 따라 지역 주민 등이 소송을 제기해도 프로젝트 추진이 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노선을 정할 때 사전에 주민 의견을 수렴하도록 법률로 정해 놓아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염 박사는 “한국의 경우 한국전력이 제안하고 전기위원회가 승인하면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이 확정되는 시스템이라 국회의 통제가 불가능하다"면서 “계획 확정 뒤에야 주민 의견수렴을 진행하는데, 공청회도 생략이 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사업이 확정된 후에 지자체와 주민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염 박사는 “개별 보상을 뛰어넘는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전력망이 통과하는 지역 지자체에 수수료를 납부하고, 지역별 차등 전력 요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인 전력망 설치 국민 부담 가중 우려 이날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국회입법조사처 유재국 입법조사관은 용인 전력망 추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유 조사관은 “수도권 좁은 부지에 많은 전력망 회선과 대규모 변전설비를 설치하면 과밀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다"면서 “전력망 지중화를 진행할 경우 공사기간과 비용이 늘어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용인 전력망은 전력망법에 따라 국가 재정이 투입되고 결국은 국민 세금으로 충당될 것인데, 편익과 수익은 전력망 끝단의 산업체가 모두 가져가는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원인자 부담 원칙과도 상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 조사관은 “용인반도체산업단지 조성은 에너지 정책과 공공자산 운영 정책, 공공기관 운영 정책, 지방자치제도, 산업정책, 기후정책 등 모든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제각각 추진되는 대표적인 국가사업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 측에서 나온 기후에너지환경부 전력망정책과 유용상 사무관은 “전력망법은 독일 사례를 반영했고, 국무총리 주재로 범부처 관계자와 전문가, 지자체가 참여하는 전력망위원회가 기본계획을 심의 의결하도록 하고 주민 의견을 더 듣는 식으로 개선했다"면서 “부족한 부분은 소통을 통해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전력망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개선된 점은 있다는 것이다. 유 사무관은 “한전의 경우도 업무 관성이나 인력 부족 때문에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데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점차 그런 관성도 깨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