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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성 칼럼] 정부주도의 국가 AI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최근 몇 년간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AI모델의 출시 주기가 분기별 또는 연간 단위를 넘어 주간 단위로 좁혀지고 있다. 한편 미국과 중국은 AI 기술 그 자체의 우위를 경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번영과 국가 안보,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활용하고 있어, AI 역량이 미래 국가권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의료, 금융,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AI 기술을 개발, 채택, 선도할 수 있는 능력이 “국가 AI 경쟁력"이라고 할 때, 세계 주요 선진국들은 각각 독특한 전략을 통해 AI 경쟁 구도를 주도하고 있다. 2024년에 출범한 국제통화기금(IMF)의 'AI 준비도 지수(AIPI)'는 디지털 인프라, 인적 자본 및 노동시장 정책, 혁신과 경제 통합, 규제라는 네 가지 차원에서 174개국을 평가한다. 최근 공개된 IMF AI 준비 지수 대시보드에 따르면, 2023년 최고 성과를 보인 나라는 싱가포르(점수 0.80), 덴마크(0.78), 미국(0.77)이며, 스탠포드 HAI 글로벌 AI순위 보고서에서도 미국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와 같은 빅테크 기업과 강력한 벤처캐피털 생태계에 힘입어 AI 연구 및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한편 중국(AIPI 0.63, 31위)은 방대한 데이터 자원과 국가 주도 이니셔티브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AI 법령을 통해 “윤리적 AI"의 글로벌 표준을 설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IMF가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한 한국의 경우, 2023년 데이터를 토대로 추정한 결과 AIPI 0.73(약 15위) 수준으로 상위권에 해당하지만, 세계 최상위 수준 국가들과 비교하면 경쟁에서 한 발 뒤쳐져 있다. 다만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세계 DRAM 시장의 47%를 차지(2023년 기준)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하드웨어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AI 연산에 필수적인 GPU 및 AI 전용 칩셋 개발에서는 엔비디아(미국), 화웨이(중국) 등과 비교할 때 국내의 GPU나 AI 전용 칩셋 개발역량은 취약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지적재산기구(WIPO)에 따르면, 한국은 AI 관련 특허 출원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고, KAIST와 같은 주요 연구기관들도 로봇공학, 컴퓨터 비젼, 자연어 처리, 기계 학습 분야에서 활발한 논문을 발표 중이다. 그럼에도 딥러닝이나 생성형 AI와 같은 핵심 알고리즘 연구에서 독자적,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2019년에 시작된 정부의 “AI 국가전략"은 2027년까지 70억 달러를 투자하여 2030년 AI 초강대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미국, 중국 등 경쟁국의 단일 연간 투자 규모에도 미치지 못한 점이 문제다. 예컨대 미국은 2022년 제정된 “CHIPS 법안"을 통해 2,800억 달러를 투자하며, 이 가운데 상당부분을 AI 및 반도체 R&D에 배정했다. 중국도 2017년 “차세대 AI발전 계획"을 발표하여 2030년까지 1,400억 달러 투자목표와 함께, 2025년까지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을 AI에 투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디지털 유럽 프로그램"을 통해 2021~2027년간 년매 100억 달러 이상의 AI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현재 초기 단계의 AI 투자 생태계, 숙련된 인재 부족, 미완성 규제 프레임워크라는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등 첨단 제조 인프라, 대기업 중심의 R&D 역량, 빠르게 확충 중인 AI 교육 프로그램 등이 뒷받침 된다면 충분히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잠재력을 현실화 하려면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안한다. 먼저 AI 투자 생태계의 고도화를 위해 대규모 AI 펀드를 조성하고 규제 샌드박스·세제 혜택 등을 도입하여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해야한다. 투자-연구-사업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통합 플랫폼 구축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AI 인재 양성 및 확보도 필요하다. 초·중·고 및 대학 교육과정을 AI 중심으로 재설계하여 이론과 실무 역량을 겸비한 인재를 키우고 대기업·공공기관·스타트업 간 협력 트랙을 마련하고, 해외 우수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비자제도 개선과 연구개발 특별구역 내 장학금·연구비 확충도 추진해야한다. 아울러 규제 및 윤리 프레임워크 정립하는일도 중요하다. AI 기본법을 속도감 있게 마련해 윤리·투명성·책임 기준을 확립하되, 혁신 성장을 저해하지 않도록 탄력적인 규제 모델을 적용하고 기업의 투자·적용을 가로막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 반도체·제조 등 전략 산업과 AI 융합 가속화하는것도 매우 중요하다. 신경형 칩, AI 가속기와 같은 AI 특화 하드웨어 R&D에 집중 투자하여,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을 AI 분야로 확장하고 제조·물류·의료 등 다양한 산업에 AI를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발굴하는 한편 중소기업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대폭 강화해야한다. 끝으로 글로벌 인공지능 파트너십(GPAI) 등 국제협의체에서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한국형 AI 모델'과 이에 기반한 가치관을 전세계에 확산해야한다. 글로벌 군사·산업 포럼에서는 안보와 윤리, 산업 표준을 망라하는 AI 거버넌스를 함께 구축해 국제무대의 표준화 경쟁에서도 우위를 선점할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정부 주도의 AI 전략이 체계적으로 실행된다면, 한국은 초기 투자 생태계 미비와 인재 부족, 규제 불확실성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반도체 • 대기업 R&D • 차세대 교육 프로그램을 앞세워 세계적인 AI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한성

[신율의 정치 칼럼]관저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석방됐다. 석방될때, 윤 대통령은 약 100미터 가량을 걸어 나오면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석방 직후 발표한 메시지에서, “그동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응원을 보내주신 많은 국민들, 그리고 우리 미래세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해당 메시지를 보면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석방되는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강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응원해 준 국민에게 감사드린다“라는 메시지를 발표했으니, 응원하지 않은 국민들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나라는 둘로 갈렸다. 비상계엄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최소한 자신의 행위에 의해 발생한 사회적 균열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메시지를 발표했으니, 이른바 '관저 정치'에 대한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석방 이후 국민의힘 지도부와 '차담(茶啖)'을 가졌고, 일부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찬이 아닌 차담을 가진 것은, 국민의힘과 대통령 서로를 위해 그나마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만찬을 가졌더라면, 윤 대통령이 관저 정치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더 본격적으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그립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저 정치 같은 말들이 나올 경우, 국민의힘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3월 10일 18세 이상 50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ARS 방식의 여론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나타난 중도층의 대통령 탄핵 찬성 비율은 65.8%에 달했다. 중도층이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대통령이 관저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에 긍정적일 수가 없다. 또한, 관저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조기 대선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아직은 조기 대선이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없지만, 정치는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존재라는 차원에서 보면, 여당과 대통령은 탄핵 인용 시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런 대비 차원에서도, 강성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또다시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면 좋을 것이 없다. 더구나 대선 잠룡들이 대통령 눈치를 본다는 식의 인상을 주게 되면, 잠룡들에게 중도층의 관심이 가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대통령 탄핵이 기각돼 윤 대통령이 다시 복귀한다는 시나리오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도. 관저 정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뜩이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던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기 전부터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개헌 등 국가적 대사에 전념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것이 반성하는 모습일 것이다. 결국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봐도. 대통령이 관저 정치를 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을 더욱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 탄핵 결정이 임박한 시점에, 대통령은 또다시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를 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간접적으로나마 대통령이 메시지를 흘리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에, 강성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를 결정적인 순간에 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만일 또다시 강성 지지층에게 메시지를 낸다면, 대통령은 진영 논리에 편승하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국가와 '국민 전체'만을 생각하는 대통령이 보고 싶다. 신율

[이슈&인사이트]젤렌스키가 당시 트럼프에 보다 절실하게 임했다면...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11일(이하 현지시간) 러시아의 침공 이후 3년여 계속 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30일 휴전'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평화 협상 중재자로 나선 미국이 러시아와 금명간 당국자간 협의, 주중 정상간 전화 통화 등을 통해 러시아의 휴전안 수용을 설득할 예정인 가운데, 러시아가 휴전안에 동의하면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잠정적으로나마 처음 포성이 멎게 된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안전보장 문제 등을 두고 충돌하면서 종전을 위한 정상회담이 파행으로 끝났던 대목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며 불쾌감을 표한 뒤 자리를 떴고, 소셜미디어에 “젤렌스키는 평화를 위해 준비가 됐을 때 다시 오는 게 좋겠다"고 적었다. 오찬과 공동 기자회견도 취소됐고 광물협정 서명식은 미뤄졌다. 급기야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려면 멀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가 한 발언 중 최악의 발언이며 미국은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군사지원 중단을 지시했었다.정상회담이 이렇게 파국으로 끝난 사례는 찾아보기는 힘들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이 '외교적 매복(diplomatic ambush)'을 꾀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에 넘어갔다는 분석이 있지만, 회담 과정을 들여다보면 약자인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을 자극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킨 면이 크다. 첫째, 젤렌스키 대통령 복장 문제이다. 의전에서 복장도 중요하다. 미국측은 사전에 우크라이나측에 군복을 입지 말 것을 수차례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장을 하지 않고 검은색 셔츠를 입고 나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옷차림이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평화협상으로 속히 전쟁을 끝내려고 하는 트럼프로서는 항전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나온 젤렌스키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둘째,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을 저격하고 안전보장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밴스 부통령에게 “어떤 외교를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뭘 의미하는 것인가요?" 물었고, 밴스 부통령이 “무례하다"고 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팔짱을 끼고 말싸움을 이어갔다. 푸틴은 25번이나 자신의 서명을 어겼다면서 단순한 휴전 협상은 수용할 수 없고, 안전보장이 없으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러시아가 자국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체결된 협정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2022년 전면전을 일으켰다는 점을 재차 지적했다. 셋째, 나아가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미래에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자극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감정이 격해지게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 말하지 말라"라고 발끈한 뒤, “당신은 좋은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은 스스로 그렇게 나쁜 위치에 있게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당신은 수백만 목숨, 3차 세계대전으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통역을 쓰지 않았다는 부분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젤렌스키가 영어를 잘 한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나 밴스 부통령보다 잘 할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하고 민감한 회담일수록 통역을 써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특히, 순차 통역을 쓰게 되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감정 격화를 막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고, 궁지에 몰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럴 때에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사정하듯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마치 뭐든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전쟁을 해 오면서 여러 정상들을 만나 스스로 업(UP)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지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안전보장이 당연한 요구인 듯이 말했으나, 상대는 거래의 달인이자 괴짜 트럼프 대통령이다. 이러한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외교적 방식을 언급한 밴스 부통령에게 외교를 아느냐고 무시하듯이 말했고, 미국이 미래에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 강대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정상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을 지시한 것도 지나치다. 침략자 푸틴에 대항하여 막대한 지원을 해 온 미국이 오히려 우크라이나에 타격을 가하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 모두가 젤렌스키 때문에 초래됐던건 아니지만 “백척간두에 있는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보다 절실한 자세를 취했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이강국

[신연수 칼럼] 헌법을 바꾸면 극한 대립이 사라질까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대선 주자들이 앞 다퉈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야 원로 정치인들의 단체인 대한민국 헌정회는 대국민 서명운동까지 시작했다. 여야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개헌이 실현될 수 있을까? 헌정회는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분산 개헌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고 했다. 여야의 극한 대립과 계엄령, 둘로 쪼개진 나라가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고도 했다. 그래서 정치적 타협을 강제하도록 헌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나 4년 중임제는 문제가 없나 그러나 대안으로 나오는 개헌안들을 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통령 4년 중임제안을 보자.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면 대통령의 권한이 줄어들까. 오히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대통령의 권한이 분산되기보다 집중 강화될 우려가 있다(제20대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활동결과 보고서' 2018)"고 정치인들 스스로 지적한 바 있다. 다음 대통령은 3년만 하고 2028년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르자는 방안은 더 위험해 보인다. 대선과 총선을 같이 실시하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국회에서도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권력 분산이 아니라 권력 독점이 더 심해지고 국회의 견제 기능은 마비될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나 이원집정부제는 어떤가.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임명하는 현행 헌법과 달리, 국회에서 총리를 추천하거나 선출하는 방안이다. 대통령은 외교 통일 국방만 담당하고 내정은 총리가 맡는 방법이 많이 거론된다. 대통령에 쏠린 권력을 분산할 좋은 방법 같아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이 되면 정부마저 둘로 쪼개져 아무 일도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미국과의 통상 문제는 경제인가 외교인가? 대통령과 총리가 영역 다툼을 하며 대립할지도 모른다. ◇제도가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개헌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는데, 개헌만 하면 여야 대립이 사라지고 정치가 발전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같은 체제에서도 29번의 탄핵, 38번의 거부권은 다른 정부, 다른 국회에서는 없었다. 현행 헌법으로도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 출신 인사를 총리로 임명해 연합정부를 꾸렸다. 우리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잘못 뽑은 건지, 제도가 잘못된 건지는 좀 더 따져봐야 알 일이다. 여야가 개헌에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제각각이다. 권력 구조만 해도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대통령에 국회 해산권 부여, 상하 양원제처럼 중구난방이다. 소득대체율 1%포인트 차이를 좁히지 못해 국민연금 제도를 못 바꾸는 여야가 이런 복잡한 문제를 단기간에 합의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치인들은 개헌을 진정성 없이 국면 전환용으로 사용해왔다는 의혹이 짙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몰리자 마지막 변론에서 개헌을 제안했다. 국민의힘 역시 개헌에 반대하다가 대통령 탄핵 이후 당에 개헌특위를 꾸렸다. 반대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대선 때부터 줄곧 개헌을 주장했지만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다. 2014년 헌법 불합치로 무효가 된 국민투표법을, 정치권이 10년 넘게 개정하지 않고 방치한 것을 보면 개헌에 진심인지 의문이다.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려면 개헌은 필요하다. 1987년 마지막 개헌 이후 4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이 변했다.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21세기 시대정신을 담아낼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 변화에 맞게 다문화 가족에게도 더 많은 인권을 보장하고, 지방자치단체를 실질적인 지방정부로 바꾸며, 감사원은 독립기구화 하는 방안을 검토하면 좋겠다. 그러나 여야 정치인들이 개헌을 정략적으로, 빛깔 좋은 구호로만 이용해서는 오히려 국가대계를 망칠 우려가 있다. 정치인들은 왜 개헌 논의가 국민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서민들은 '계엄보다 더 무서운 불황'에 고통 받고 있다.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려면 그 효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개헌을 하면 국민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이슈&인사이트]석방 … 아무도 말하지 않는 헌재 이후

이강윤 정치평론가 2025년 3월 8일. 대통령이자 내란혐의 피고인인 윤석열이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석방됐다. 물론 무죄석방은 아니다. “구속만료 시점을 지나 기소했으니 위법"이라는 법원 결정에 따른 석방이다. 검찰은 법원결정이 정당한지 따져달라는 상급심 항고 없이 석방했다. 정치가 법원 문지방을 자주 넘나들수록 판사는 신이 되어간다, 되어야만 한다. 이 또한 우려할 일이다. 의사처럼 고도로 훈련받은 직업인일뿐인데 정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그들은 곧바로 '정권 시녀'나 '빨가족족한 사상 불온자'로 매도당한다. “대통령, 탈옥같은 출옥" 대통령 석방 뉴스는 대통령 처벌을 주장해온 시민들을 충격과 분노에 빠트렸다. 전국에서 집회를 열어 법원과 검찰, 내란을 규탄했다. 한 시민은 “탈옥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탈옥같은 출옥. 반면 대통령 지지자들은 환영 집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가 구치소를 나와 웃으며 주먹을 흔들고 폴더 인사를 한다. 그의 활보와 독립영웅 귀환같은 환영행렬을 보며 정의를 다시 생각한다. 하나의 팩트가 진영에 따라 완전히 달리 해석되는 이 가치 전도. 가치 전도-대립 조장 국힘, 명백한 잘못 계엄발령과 군 투입은 전 국민이 동시에 지켜본, 이론의 여지가 없는 팩트이자 내란 증거였다. 그런데도 진영에 따라 '헌법파괴 내란'과 '국민 계몽'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팩트는 하나인데 해석은 정반대다.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 수학공식도 아닌데. 계몽이나 인원-요원-의원 발음 얘기는 상식조차 갖추지 못한 억지이자 국민 우롱이다. 그런 말장난은 국민 수준 얕보는 '국어 계엄'이자 모욕이고, 정신파탄 상태라는 자백이다. 사정이 급해 이것저것 다 주워삼긴다 하더라도 유만부동이지…. 대통령이나 변호인들은 자기 집에서도 계몽이나 인원이란 말을 그런 뜻으로 쓰나? 아닐 것 아닌가. 자해적 망발, 그만 두라. 계엄 해제 이후 여당은 겸손하게 법원 결정을 기다린 게 아니라, 지지자들을 부추겨 가치 전도와 대립을 극대화시켰다. 적반하장이고 내란 연장이다. 석방된 내란피고인의 활보를 TV로 보는 동안 한 국가의 정기와 위엄, 정의가 짓밟히는 정신적 고통이 엄습했다. 수 십년 전 '반민특위' 해체가 어른거렸다. 尹 활보, '반민특위' 해체 연상 검찰은 내란사건 기소 주체로서, 형사소송법 절차 실수에 대한 설명과 함께, 국민 과반 다수(여론조사를 종합하면 응답자의 약 60%가 대통령파면과 처벌에 찬성)에게 사과해야 한다. 국가공무원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설명과 복종의무가 있다. 국가는 주권을 위임한 국민의 또다른 이름이다. 대통령석방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시민들은 검찰의 날짜계산 실수라는 업무과실보다는, 정의와 국가 정기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을 규탄했다. 계엄 사태 이후로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호외급 기사가 며칠 걸러로 쏟아진다. 계엄의 파장과 불안이 그만큼 크고 많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언제 안정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걱정만 할 뿐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선거에서 이기면 해결하겠다는 막연한 다짐 뿐이다. 다짐으로 해결될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다. 갈등이 아니라 내전 수준이고, 냉전일지 열전일지만 남은 듯하다. 헌재에서 대통령파면이 결정된다면 곧 선거가 치러지고 새 정부가 출범하겠지만, 어느 쪽이 이기건 이미 돌입 상태인 정치적 내전은 격화될 게 확실시된다. 이대로 계속 가면 파국일 걸 뻔히 알면서도 두 열차는 브레이크 없이 돌진중이다. 헌재 결정, 내란 종착점 아닌 제2출발점 가능성 농후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내란이 남긴 상처와 왜곡을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당연 조치다. 국힘은 정치보복이라며 저항할 것이다. 반대로, 국힘이 승리하면 내란은 '정당한 국민계몽'이 되고 강압통치가 심화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윤석열과 이재명이 사활을 걸었던 2022년 대선전이 공수만 교대된 채 연장전에 돌입하고, 경기 양상은 전보다 훨씬 거칠 것이다. 곧 있을 것으로 보이는 헌재 결정은 계엄내란의 종착점이자 해결점이 아니라 제2출발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선이 문제해결의 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란 주동측, 사과와 법원결정승복 선언해야 걱정만 할 뿐 해결책은 불투명한 이 상태의 선택지는 오직 하나, 결자해지다. 공허하게 들리겠지만 이것밖에는 없다(내란 관련자 처벌은 너무 당연하니 따로 적지 않는다). 여당인 국힘은 내란을 사과하고 벌을 기다려야 한다. 그게 상식이자 정의다. 모든 정파는 헌재 결정 전 미리 승복선언을 함으로써 내전 비화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의원이건 자칭 목사건 폭력을 부추기는 자는 의법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멸이다. 상식과 합리의 회복이 결국 정의고 공정이다. 정의와 공정은 진영 불문 공통 가치이자 공동 선(善)이다. 이강윤

[이슈&인사이트] 헌재는 답하라, 선관위가 치외법권 지대인가

지난 2월 27일, 헌법재판소(헌재)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감사원을 상대로 제기한 권한쟁의 심판에서 “감사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인력관리에 대한 직무감찰을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근거는 '감사원이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라는 점에서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은 통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헌법 및 선거관리위원회법에 의해 부여받은 선관위의 독립적인 업무 수행을 침해한 것'이란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이 선관위를 감찰할 수 있다면, '선거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고도 했다. 과연 그런가.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등 고위간부 자녀들의 경력직 특혜채용 의혹에서 비롯됐다. 의혹이 제기되자 선관위는 자체감사를 통해 5급 이상 간부들의 자녀에 대한 경력채용을 점검하고, 사무총장 등 4명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이와 별도로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자 선관위는 이에 반발해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다. 감사원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실시된 선관위의 모든 경력채용에서 다양한 비리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주장도 나왔고, 심사위원 부당 위촉이나 심사결과의 수정 등 공무원 인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비리가 발견됐다. 과연 누가 선관위의 신뢰를 훼손했는가. 선거관리는 본래 내무부의 업무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선거관리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중요해져 1962년 제5차 개헌 때 선관위는 헌법기관이 됐다. 그러나 감사원법은 헌법기관인 국회와 법원, 헌법재판소의 공무원을 명시적으로 감사원의 직무감찰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을 뿐, 선관위는 포함하지 않았다(제24조③항). 선관위도 헌법기관인데 명시적으로 제외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감사원의 감찰대상에 포함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는 이 조항을 아무 근거도 없이 '예시적 규정'으로 오독했다. 이는 헌재가 사실상의 입법권을 행사한 것으로 심각한 권한남용에 해당한다. 행정의 기본 원리를 고려해도 이번 헌재의 결정은 심각한 오판이다.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모든 조직이나 활동은 반드시 공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 민간조직도 한 푼이라도 세금을 쓰면 예외 없이 통제 대상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이 옳다면 막대한 세금을 쓰는 선관위가 공적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적절히 통제하지 않은 결과, 선관위는 자기들끼리 지위를 세습하는 '가족회사'가 되고 말았다. 헌재는 실정법의 규정을 오독하고 행정의 기본 원리까지 무시하면서 선관위를 치외법권 지대로 만들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가. 더불어민주당은 선관위가 국회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어도 공적 통제를 받는 것이란다. 정말 그런가. 국회의 국정감사는 1년에 한 번 사실상 시늉만 내는 것에 불과하고, 지금까지 자료 요구에 대해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기 일쑤였다. 만일 민주당의 주장처럼 국회에 의한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졌다면 선관위의 온갖 채용 비리나 부실한 선거관리는 왜 발생했나. 한두 번도 아니고 지난 10년간 진행된 모든 경력채용에서 예외 없이 비리가 발생했다는 것은 아예 통제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회가 있으니 공적 통제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헌재가 법의 해석을 넘어 만들어 가면서까지 선관위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채용 비리나 각종 인사부정을 넘어 부정선거 의혹 규명 요구로부터 선관위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선관위를 치외법권 지대로 만들어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홍성걸

[박원주 칼럼]중도 유감(中道 遺憾)

세계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그의 2004년도 역작 '파시즘의 해부'에서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로서 공동체가 겪고 있는 퇴행, 굴욕, (부당한) 피해 등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바탕으로 집단 행동, 세력, (집단적) 순수성 등을 과시하는 보상적 의식을 벌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대놓고 폭력을 자행하기로 마음먹은 국가주의 무장세력 - 그 뿌리는 일반 대중 - 들이 전통적 엘리트들과 불편하면서도 효율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 민주적 자유(라는 명분)를 집어 치우고, 도덕이나 법적 제약 없이, 폭력을 주된 구제 수단으로 삼아, 공동체의 내부 청소(외국인 또는 반대 집단 제거)와 외적 확장(침략전쟁)을 꾀하게 된다. 사실 나치나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반대 정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공연하게 쓰여왔던 비속어에 가깝다. 그래서, 파시즘을 정의한 팩스턴조차 특정 개인이나 정치적 조류, 특히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대해, 파시즘이란 말을 쓰는 것을 극히 꺼려 왔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2021년 1월 6일 흥분한 폭도들이 빨간색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가 쓰여진 야구 모자를 쓰고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던 사건이었다. 1922년 로마 시내를 행진했던 무솔리니의 블랙셔츠나 1934년 좌파 정부의 취임을 가로막으려 난동을 부렸던 프랑스 극우세력들의 폭력 사태 등과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사건이었지만 팩스턴은 그보다는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시민들의 폭력을 부추기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부분을 더 주목했다. 그는 '트럼프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고, 이후로 그는 트럼프가 파시스트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 배제하는 정치 없어져야...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 지금,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대국인 미국이 파시스트 국가가 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지만, 그보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 지난 1월 19일 새벽, 내란혐의자인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분노한 폭도들이 떼를 지어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여 법원의 외벽을 파손하고 내부 기물을 부수는 기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법 질서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황당한 일이었고, 태권도 발차기 품새로 현란하게 사무실 유리를 깨부수고 방화를 시도하는 폭도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태를 유발한 특정 정치인이 파시스트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회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과했던 것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를 통해 배제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정치인들이 만들어지고 세를 과시할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더 큰 문제다. 민심의 저변을 오염시키고 있는 폭력과 불법, 전체주의적 정서를 어떻게 극복하여 피땀 흘려 일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시즘의 유혹에 빠진 나라들, 예컨데 독일, 이태리, 군국주의 일본 등 모두 종국에는 망했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 불안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나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다양성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 법의 존엄성을 부정하며, 국가가 경제 전반을 통제하여 군수물자 생산에 열을 올리는 국가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북한의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상대로 싸우자고 덤비는 막장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비상한 사회현실도 제 역할 못한 우리 정치의 책임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정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비상한 사회적 흐름이 뜬금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급격하게 진행된 고령화와 만성적 노동력 부족, 보호무역주의 조류 확대와 글로벌 기술분쟁 격화에 따른 시장 잠식, 내수 침체와 서민경제의 파탄, 과도한 규제로 인한 투자 위축과 일자리 소멸 등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경제 현상 속에서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피폐해졌는지 여실히 읽을 수 있다. 작년 대다수 대기업들이 신규채용에 나서지 못하고 일부 경력직 직원들을 채용하는데 그쳤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국의 이대남들이 기성 세대에 치이고, 외국인 근로자에 치이고, 성별에 치여 숨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비이성적이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현실이 너무 심각하다. 그들이 느낄 불안과 분노에 정부나 정치권은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법치를 폭력으로, 합리를 격정으로 대체하는 도도한 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대책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이 이 모든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만들었다고 말하면 간단해서 좋겠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파시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누구든 대중선동의 깃발을 든 자가 승리해서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파시즘은 정치가 국민들의 불안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풀어주지 못할 때 집단적 정서불안을 모태로 태어나는 괴물이다. 아무리 신박한 논리 또는 궤변으로 치장을 해도 그 바탕은 기댈 곳 없는 대중들의 분노를 폭력적 수단으로 풀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곪을 때까지 도그마와 정쟁에 빠져 현실을 외면했던 우리 정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진작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풀어주려 노력하는 정치가 있었다면, 국민들은 이를 지지하고 그 주장을 국정에 반영시키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불안과 불만을 해소했을 것이다. 우리 정치가 그런 역할을 했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정치는 정말 무책임하고 정말 나쁘다. 진영간의 노선 논쟁으로 소외당한 국민들이 중도이다 이런 와중에 거대 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여당이 법치와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손에서 놔버렸다는 비난을 받는 지금, 야당마저 국민들의 아픈 부분을 감싸주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자리와 차가운 자리를 피해서 앉겠다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그들은 아는 것일까? 지금 상황 그대로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국민들의 불안의 불씨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파국의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 커져 나갈 것이다. 이 지점에서 1960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처절한 항쟁으로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던 4.19혁명의 결실을 불과 11개월만에 군사정권에 고스란히 빼앗겼던 제2공화국 정부의 무능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여당과 야당이 우와 좌의 깃발을 들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이와 전혀 상관없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변방에 위치한' '중도'라는 격오지에서 외면당하며 지내왔다. 그 소외와 무시가 겹겹이 쌓여 폭동과 방화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현상까지 벌어지는 지금, 중도의 국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구가 그렇게 과한 것인가? 그럴 거라면 권력은 왜 탐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인권과 법치가 사라진 범죄도시에서 가난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정치 정신 좀 차리자. 박원주

[이슈&인사이트]개헌과 양원제 이야기

최근 개헌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단골로 등장하는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정부제 가운데 국민의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도 넘쳐난다. 개헌의 시기도 마치 조기 대통령선거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참에 아예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까지 함께 하자는 의견부터 이번에는 후보들이 개헌을 공약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후보로 언급되는 몇몇은 이번에 당선되는 대통령의 임기를 개헌을 통해 3년으로 줄이고 202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4년 중임제 동시선거를 하자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개헌론에도 꿈쩍하지 않는 이도 있다. 개헌의 단골 주제 가운데 하나는 양원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최근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새헌법안』을 출판했는데 “국회를 양원제(공화원·민주원)"로 바꾸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검찰 출신 전 여당 대표는 “지역구 의원은 그대로 두되 비례대표 의원을 상원으로 전환해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르는 양원제 도입"을 주장한다. 최근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헌법의 순간』이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양원제는 한국에서 1948년 제헌을 할 때부터 아주 고전적인 주제였고 매우 열띤 찬반의 대상이었다. 잠시 시간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하던 시점으로 돌아가자. 유진오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이 제안한 양원제는 “지역대표와 경제, 교육, 종교 등 직능대표들로" 상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헌법기초위원들 사이에는 12대 10으로 단원제 지지가 더 많았다. 양원제를 선호하는 입장은 무엇보다 하원과 상원 사이에 서로 견제가 가능하고 두 번의 절차를 거쳐 신중한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단원제를 고집하는 입장은 양원제에서 의사결정에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고 상원이 귀족제의 유산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대한민국 헌법은 단원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헌 헌법의 잉크가 미처 다 마르기도 전인 1948년 양원제 도입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12월 18일 제1회 국회 폐회식에서 “(다음) 국회에서 작정할 것은 상원법과 규례를 정하여 어떻게 조직하며 어떻게 선거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이에요"라고 발언했다. 195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국회는 이승만을 위한 대통령제 대신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1952년 한국 전쟁 중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군인과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양원제까지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그다음으로 한국에서 양원제가 등장한 것은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 시절이었다.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하원 격인 민의원이 233명, 상원 격인 참의원이 58명 뽑혔다. 민의원은 4년 임기인데 참의원은 6년 임기였다. 참의원은 특별시나 도 단위에서 선출되었고 3년마다 29명씩 뽑는 방식이었다. 권한은 민의원이 더 강했고 양원 사이에 의견이 다를 경우에도 최종 결정은 민의원의 몫이었다. 그나마 실체를 가지고 잠시나마 작동했던 제2공화국의 양원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명목상으로 구분만 이루어졌지 역할의 분담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똑같은 일을 양원에서 두 번씩 반복하고 말았다. 또한 참의원은 우려했듯이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았으며 이른바 고관대작으로 즐비했다. 당시 언론은 이런 참의원을 보고 쓸모없는 장식품이고 세금만 낭비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5.16쿠데타 이후 양원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양원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의 핵심은 똑같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정사의 경험은 양원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국민 사이에 심어주기 충분하다. 학술적인 연구결과는 결코 양원제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이른바 선진 국가에서 작동하는 우월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대신 양원제가 정착된 나라들이란 대체로 인구가 많고 땅덩어리가 큰 연방제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학계의 중론이 모여졌을 뿐이다. 한국과는 먼 이야기인 것이다. 1987년 헌법이 진짜 오늘 한국 위기의 근원일까. 요새 정치인들이 희망하듯이 헌법을 바꾸면 정치 문제가 다 풀릴 것인가. 이준한

[이슈&인사이트] 겁에 질린 고양이 경제(Scared-cat economy)에 빠진 한국과 미국

트럼프의 관세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과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이 앞다퉈가며 금리를 내리고 자국 통화를 절하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우리 금통위도 지난 달 25일 기준금리를 3.0%에서 2.75%로 25bp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수년간 침체되어 있는 내수를 살리고 탄핵 정국으로 막혀 있는 재정정책을 대신하여 금리 인하를 결정한 것이다. 다행히 트럼프의 관세 부과에 대비해 세계 각국이 대부분 통화 가치를 절하한 탓에 우리 원달러는 크게 요동치지 않으면서 달러당 1450원대를 유지하며 아직까지는 잘 버텨주고 있다. 금리인하는 침체되어 있는 내수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시켜 돈맥경화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한은의 목표일 거다. 문제는 우리 경제가 여전히 유동성 함정에 빠져 돈이 돌고 있지 않다는 거다. 게다가 금리 인하의 발표 전인 2월 7일 부동산 매매의 숨통을 틔워 준다는 명목으로 소위 말하는 강남의 '잠삼대청' 지역에 재건축을 제외한 토지거래 허가 규제를 해지하였다. 오비이락일지 모르겠지만 정부의 토지거래허가 해지 뉴스가 발표되고 2주후에 한은이 금리 인하를 결정해 돈이 산업계와 골목 상권이 아닌 부동산으로 몰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도 트럼프가 숨 쉴 틈도 없이 관세, 이민 정책과 함께 정부 공무원들의 해고를 밀어 부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 정부개혁부(DOGE) 창설을 내용으로 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DOGE 수장 머스크에게 합법적으로 정부 기구축소와 정리해고에 나서도록 힘을 실어줬다. 빅테크 금융진출과 가상화폐를 규제했던 1만명이 넘는 직원을 가진 금융소비자보호국(CFPB)를 폐지하고 기상청과 해양대기청에서도 1만 3천 명 중 800 명 이상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국제개발처(USAID)는 15분만에 모든 짐을 가지고 회사를 떠나라는 명령으로 기존 직원 1만 명 중 290명만 남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일주일만에 2만 건이 증가했고 이 숫자는 당분간 계속 증가할 거다. 트럼프는 관세부과와 정부 구조조정을 통해 무역과 재정적자를 줄이고 국가채무도 갚겠다고 한다. 대통령 유세 때는 2조 달러를 줄일 수 있다고 장담했던 일론 머스크는 갑자기 지난 달 27일 백악관 정부 각료회의에서 2026년까지 정부 빚을 1조 줄이겠다고 말을 바꿨다. 문제는 과격한 정책추진으로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관세부과와 불법체류 노동자 추방으로 물가가 상승세를 지속하며 가계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 기업도 경기예측에 자신감을 잃고 투자를 과감히 늘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 또한 '겁에 질린 고양이(scared-cat) 경제'로 추락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도 여전히 불안하다. 다행히 2월 무역수지가 1월의 19억 달러 적자에서 43억 달러 흑자를 보였지만 반도체의 수출이 급격히 줄어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게다가 작년 후반기부터 레거시 반도체의 가격이 하락하고 있고 트럼프의 반도체 관세 부과로 인해 3월 달 무역수지를 낙관할 수는 없는 분위기다. 우리 경제는 작년 12월 계엄 선포 이후 가뜩이나 불황이 진행 중이었던 내수는 회복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기업들도 향후 들어설 수 있는 새정부의 정책 결정시까지 신규 투자를 올 스톱한 상태다. 설상가상 우리나라에 부과될 미국의 관세도 가늠할 수 없기에 우리 경제 또한 미국 관세 부과와 탄핵결과를 기다리며 눈치를 보는 겁에 질린 고양이(scared-cat) 경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건 대통령 대행이자 경제부총리인 최상목 장관이다. 모든 결정을 미루고만 있는 그의 무능이 안타깝고 한심할 뿐이다. 최용

[이슈&인사이트] 외환위기 가능성에 대한 고찰

탄탄해 보였던 미국 경제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1년 6개월 만에 다시 4%를 넘어 4.3%에 도달한 반면, 소비자신뢰지수는 전월 대비 큰 폭으로 하락했다. 2024년 미국 경제 성장률은 2.8%였으나, 올해는 2.0%로 둔화될 전망이며, 완전고용 상태로 평가받던 노동시장에서도 실업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인플레이션에 미칠 영향은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여부도 불확실하다. 여기에 국제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경제 불확실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환율시장에도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지난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한 직후에도 원화 환율이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곧 급등하며 1,460원을 상회하고 있다. 지난 1월 중순 이후 약세를 보이던 미 달러화가 다시 강세로 돌아선 것도 영향을 미쳤지만, 우리의 주 무역파트너인 미국의 성장둔화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부과 등이 원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어 원화는 그보다 더 가파른 약세를 나타내고 있다. 국내 경제 상황 역시 원화 약세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내외금리차가 지속되면서 환율상승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내수와 수출 모두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결국 금리인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 경제가 그만큼 취약하며, 기준금리 조정을 통해서라도 경기를 자극해야 하는 상황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에 일각에서는 외환위기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성장둔화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거세질 경우, 미연준은 금리인하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한국의 내외 금리 차는 지속되거나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며, 이는 국제 투자자들에게 한국 시장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반면 일본은 금리를 점진적으로 인상하며 미국과의 금리 차를 좁혀가고 있다. 이는 과거처럼 저렴한 엔화를 통해 공급되던 유동성이 감소하는 효과를 가져오며, 한국으로 유입될 자금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자금 유출 가능성도 높아지는 상황을 초래한다. 급격한 투자자금의 유출이나 유입 중단은 외환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며, 우리처럼 시장 규모가 작은 국가에서는 환율 쏠림 현상이 발생해 급등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외환당국이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환경을 면밀히 주시하는 것이다. 환율이 급등할 조짐이 보이면, 시장개입을 통해 환율 변동성을 완화하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을 시행해 안정을 도모한다. 하지만 환율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외환보유액을 소진하는 방식의 개입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의 외환보유액 상당 부분이 장기채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금성 자산의 비중이 낮아 환율이 급등할 경우 현금성 자산이 빠르게 고갈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장기채를 현금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외환위기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결국 외환위기로 치닫게 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는 맞지만,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 운용 방식을 통해 상당 부분을 수익성을 고려한 중장기 채권으로 보유하고 있음을 밝혀왔으며, 이는 이미 시장에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2009년 환율 급등 당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현금성 자산을 거의 소진했던 전례도 있다. 그러나 장기채권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상당량의 미정부 채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만약 이를 처분해 외환시장을 안정화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미국정부와 연준도 이를 방관할 수 없다. 미국이 정부효율화정책을 통해 지출을 감축하고 금리를 낮게 유지하려는 이유는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함이다. 이는 미국채 발행잔량이 점차 증가하는 반면 미국채 수요는 예전보다 감소하여 미국채 금리가 상승하고, 이자를 지급에 대한 미의회의 승인도 받아내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전 미재무장관이 중국을 직접 방문해 미국채 매입을 요청했던 사례나,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당시 미 재무부가 미국채를 액면가로 매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미국채 시장의 안정과 금리 급등 방지를 위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처럼 미국채를 대량 보유한 동맹국이 대규모 매도를 단행한다면, 이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유례없는 충격을 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의 문제를 넘어 미 국채 투매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고, 미국채 금리 폭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 행정부가 기울이는 경제적 노력이 무력화될 위험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군사적 논리보다 경제적 논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한국이 보유한 미국채의 영향력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환율급등 상황에서도 외환위기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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