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이민정책은 시급한 국가 생존전략입니다. 이민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단순히 많은 외국인을 입국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질의 이민자 유입을 유도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최근 서울 강남구 통일문화연구원에서 본지와 대면 인터뷰를 갖고, 체계적인 이민정책을 서둘러 추진하기 위해 범정부 컨트롤타워 수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라 이사장은 중장기 이민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구 소련 국가에 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국내 유입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이주 이후 90년간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최근에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동경과 한국으로의 이주 희망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현지에서 이들을 충분히 교육해 양질의 인력으로 키운 후 국내 유입을 유도하면 사회적 포용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선친 영향 받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고려인 지원 헌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라종억 이사장은 탈북민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전파하는데 평생을 헌신해 온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1960년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백봉 라용균 선생의 차남인 라 이사장은 중국 상해임시정부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친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에 남다른 애착을 가져왔다. 라 이사장은 남북관계의 문화적 접근을 통해 통일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98년 사재를 털어 순수 민간 비영리단체인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했다. 통일문화연구원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배제한 채 순수 민간 후원을 통해 교육사업 및 봉사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특히, 통일문화연구원이 제정한 '백봉신사상'은 가장 신사적인 언행과 모범적 의정활동을 보이는 현역 국회의원에게 시상하는 상으로, 정파를 초월한 권위있는 상으로 여겨져 국회의원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상 중 하나로 꼽힌다.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우리나라 국민과 북한 주민이 융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 단초는 결국 문화적 접근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켜 통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한 동기였죠." 통일문화연구원 설립 초기는 탈북민이 증가하던 시절로, 라 이사장은 탈북민들을 우리나라에 잘 정착시키는 것이 통일 기반 조성의 초석이라 여기고 탈북민의 정착 지원에 힘써왔다. 연구원이 설립된 1998년 450명이던 탈북민 수는 현재 4만명, 가족까지 더하면 10만명 정도로 늘어났다. 이후 라 이사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지원과 다문화인 지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의 열악한 거주환경을 목격한 라 이사장은 고려인 추모공원 건립 등에 힘썼고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과 현지 청년층을 위한 교육 및 직업훈련, 의료봉사 활동에 주력함으로써 한민족 정체성 보존과 한국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내년 고려인 정주 90주년…국적없이 떠도는 고려인 아직도 많아 지난달 라 이사장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정주 89주년을 맞아 한글 백일장과 한식요리 경연대회 등을 개최해 고려인과 현지 청년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지난달 22일 통일문화연구원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1 세종학당에서 고려인 정주 89주년 기념 한글 백일장 및 한식 요리 경연대회를 개최해 성황리에 마쳤으며, 함께 열린 K-팝 댄스 경연대회에서는 8개 팀이 K-팝 아이돌 뺨치는 댄스실력을 선보여 K-팝에 대한 현지 청년층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같은 날 통일문화연구원이 주선해 현지를 방문한 대한정형외과의사회 소속 한국 의료진은 타슈켄트 기묘국제대학병원에서 현지 어깨 회전근개 파열 환자의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다. 이번 현지 방문에서 통일문화연구원은 교육기업 에듀윌 및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세르겔리 직업훈련원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청년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비롯해 용접·전기설비·자동화·IT 기술교육을 제공하는 3자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최근 K-POP 등 한류 콘텐츠의 글로벌 열풍이 중앙아시아 청년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한류 열풍에 앞서 라 이사장이 펼쳐 온 카자흐스탄 고려인 추모공원(묘지) 정비사업, 국내 병원들과 협업한 의료봉사단 파견사업, 다양한 한글·기술교육 사업 등이 지금의 '코리아 열풍'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실제로 통일문화연구원이 경기 남양주 현대병원 등과 함께 펼쳐 온 의료봉사단 사업은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민간외교의 모범 사례로 찬사를 받았으며, 라 이사장은 지난해 6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우즈베키스탄 북서부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에서 한-우즈베키스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려인은 물론 우즈베키스탄 현지 청년들도 한국에 대한 호감과 동경심이 상당해요. 우즈베키스탄은 평균 연령이 29세인 청년 국가로, 고령화로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와 인구·상업 측면에서 상호 보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징용 또는 1930년대 스탈린 정권에 의해 옛 소련 지역에 강제이주된 한민족으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배우던 고려인 3~4세들은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언어 및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배우는데 크게 반가워하고 있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동경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 라 이사장의 설명이다.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8만명의 고려인이 있고 카자흐스탄에 10만명, 러시아에도 10만명 정도의 고려인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도 몇 만명이 거주하고 있죠. 구 소련 붕괴 이후 이들 국가들은 다문화 국가로서 각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그대로 존속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앙아시아 국가에는 아직도 국적 없이 이나라 저나라를 떠도는 고려인이 많습니다. 이들은 중국 동포에 비해 현지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지 않고 한국을 동경하는 정서가 매우 강합니다. 이들 고려인들을 적극 흡수하고 국적을 부여하는 이민정책이 필요합니다." 라 이사장에 따르면 2차대전 직후 이스라엘 인구는 80만명에 불과했으나 1950년 귀환법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에게 적극적으로 국적을 부여하는 정책을 펼쳐 현재 이스라엘 인구는 1000만명에 육박한다. ◇ 단순 외국인 유입정책은 지양…현지서 충분히 교육·훈련시켜야 그러나 라 이사장은 단순한 외국인 유입을 허용하는 이민정책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교육 수준이 낮은 외국인의 무분별한 유입은 사회적 포용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라 이사장은 한민족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이 높은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을 현지에서 충분히 교육해 양질의 인력으로 키운 후 국내 유입을 유도하는 이민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한다. “우리나라 이민정책은 국내가 아닌 해외 현지에서부터 한국어와 한국사회의 기본 질서를 가르치고 검증하는 사회통합 프로그램 운영기관의 확대가 우선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거친 후 국내에 유입돼야 이민자 증가로 인한 사회갈등 관리와 사회통합 비용을 줄일 수 있죠." 특히 라 이사장은 해외 유입인구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한글 교육은 물론, 실제 직업 활동에 필수적인 기초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법무부 등 우리 정부가 외국인 대상 한글교육 사업은 많이 펼치고 있지만 수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없어요. 직업교육을 하는데 있어 수학적 소양은 필수인데 말이죠. 저희는 문체부 세종학당재단, 법무부 이민자 사회통합프로그램(KIIP) 등 정부 교육과정에 수학을 넣으려 하고 있어요. 한국식 수학교육을 제도적으로 추진해 'K-매스'를 보급할 필요가 있죠. 그리고 저희는 올해부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우리나라로 이주를 희망하는 고려인과 현지 청년층에게 용접공, 미용사, 제빵사 등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교육·기술 수준을 높인 후 국내 유입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라 이사장은 체계적인 이민정책 수행을 위한 범정부 컨트롤타워 설립도 주문했다.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해 인구문제가 심각한데 현재 재외동포청은 있지만 이민청은 없습니다. 동포청과 이민청은 인바운드냐 아웃바운드냐 차이일 뿐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합쳐야 하는데 지금 정부 부처간 이해관계 때문에 이민정책이 아직도 혼선을 겪고 있어요. 이민정책처럼 여러 부처가 관여된 정책은 범부처 차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독립된 조직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라 이사장은 강제이주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바란다고 밝혔다. “처음 중앙아시아 지역을 방문했을 때 놀랐던 점은 북한은 이미 현지 고려인을 대상으로 관광을 시켜주거나 김장김치를 지원하는 등 우리 문화 전파 사업을 하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융화 정책을 펴고 있었던 것이죠." 라종억 이사장은 통일문화연구원이 순수 민간단체이다 보니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인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현지 주민들의 초기 거부감이나 입국절차 등 행정절차상 어려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기업, 병원, 의료단체 등 민간의 관심과 후원이 계속 이어지기 바란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인생을 살다보니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게 더 어렵더군요. 카자흐스탄 고려인을 도울 때도 처음에는 필요없다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내년이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정주 90주년이 됩니다. 산업화가 진척된 카자흐스탄과 이제 막 산업화 단계로 넘어가는 우즈베키스탄은 청년인구가 많다는 점 말고도 천연자원이 풍부해 우리나라가 적극 진출해야 하는 지역입니다. 우리 기업과 국민, 언론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때입니다." ■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 졸업 △순천향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명예교수 △카자흐스탄 국립예술원 문화콘텐츠 명예박사 △러시아 자연과학 아카데미 정회원 원사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소위원회 위원장 △통일과나눔 아카데미 이사장 △국민훈장 모란장·대통령 표창 수상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고려인협회 훈장 수상.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