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자본시장 개편안이 본격 시행되기도 전에 벤처투자 현장이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규제 불확실성에 벤처캐피탈(VC)이 진행하던 투자를 잇따라 접고, 시가총액 기준에 근접한 코스닥 기업들은 '상장폐지 우려 기업'으로 낙인찍혀 선제 매도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당국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공식 대화 테이블은 없다는 것이 벤처업계의 호소다. 벤처기업협회(회장 송병준)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회장 김학균),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장 김재원) 등 벤처 3개 단체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혁신경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자본시장'을 주제로 공동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당국에 자본시장 개편과 관련한 5대 정책과제를 제안했다. ◇ “방향엔 공감하나 속도·균형이 문제" 앞서 이재명 정부는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 간담회'를 갖고 코스닥 세그먼트 분리, 중복상장 금지, 상장폐지요건 강화 등 자본시장 체질 개선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일련의 정책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벤처 단체들이 마련한 간담회의 배경에는 정부 개편안을 둘러싼 금융당국과 벤처업계간의 미묘한 온도차가 깔려 있다. 벤처 단체들은 부실기업의 신속한 퇴출과 일반주주 보호,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개편의 큰 방향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코스닥을 자본시장 개혁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린 데 대해서도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이 아니라 세부 제도 설계의 '속도와 균형'이라는 게 이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시장 정화에 초점을 맞춘 규제는 비교적 구체화되고 있는 반면, 유망 혁신기업의 발굴·상장·성장·회수로 이어지는 '성장 사다리' 측면의 보완장치는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서 송병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지난해 '코스닥 3000 시대'를 제안했던 점을 거론하며 “1년이 지난 지금도 근본적 변화는 체감되지 않고, 오히려 코스피·코스닥 간 양극화는 더 심화됐다. 지수는 올랐지만 모두가 오른 것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반도체·AI 등 일부 대형주로 자금이 쏠리는 사이 다수 중소형 벤처기업은 그 온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 시행 전부터 멈춰선 투자… “검토하던 딜도 접었다" 이런 상황에서 벤처 단체들이 가장 무겁게 제기한 문제는 규제가 시행되기도 전에 시장이 먼저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학균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은 “지금 관련 투자가 대부분 보류되거나 멈춰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벤처캐피탈들도 검토하던 딜 몇 건을 접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VC는 리스크가 생기면 일단 멈추는 게 원칙인 만큼, 규제의 불명확성이 결국 시장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장이 단순한 투자 보류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벤처 생태계는 모험자본이 초기 기업에 투자하고, 그 기업이 성장해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자금을 회수하고, 회수한 돈이 다시 새로운 창업에 투입되는 선순환 구조로 돌아간다. 벤처투자 회수의 절반 이상이 기업공개(IPO)로 이뤄지는 만큼 코스닥은 이 순환의 핵심 길목이다. 출구인 코스닥이 막히면 회수가 늦어지고, 이는 곧 초기 단계 투자까지 얼어붙게 만든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상장폐지 요건 강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감지된다. 송 회장은 “기준선에 근접한 기업에 낙인 효과가 발생해 선제적 매도로 주가가 폭락하는 악순환이 이미 시작됐다"며 “제도 발표 이후 오히려 시가총액 미달 기업이 크게 늘어난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오는 2027년 1월 시행 예정인 '시가총액 300억원 미달 상장폐지' 기준이 대표적이다. 송 회장은 “바이오 신약이나 딥테크 기업은 매출이 나기까지 5년, 10년이 걸린다"며 “단기 시총 하나로 퇴출 여부를 가르면 충분히 성장할 기술기업까지 낙인 때문에 시장에서 사장된다"고 우려했다. 벤처 단체들은 이런 기업에 대해선 시총·주가 같은 단일 지표가 아니라 매출 성장성과 기술개발 마일스톤 달성 여부를 함께 보는 복합 평가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 우려 쌓이는데…당국과 논의할 창구가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우려를 당국에 전달하고 조율할 공식 창구가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김 회장은 중복상장 규제의 예외 기준을 묻는 질문에 “이 사안에 대해 협회나 업계와 정부 간 공식 소통 채널은 현재 없다"며 “여러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송 회장도 “실무진 차원에서 우려를 전하고는 있지만, 공식 테이블에 앉아 벤처기업의 특수성을 반영하겠다는 명확한 시그널이나 가이드라인을 받은 적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3개 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한 목소리를 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다. 송 회장은 “하반기 법령·규정 개정이 본격화되기 전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논의를 시작하자는 의미"라고 했다. 실제로 이날 제시된 5대 과제 가운데 하나가 '생산적금융 정책협의체 상설화'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 부처와 벤처업계가 상시로 참여하는 협의 기구를 두자는 것으로, 뒤집어 보면 현재 그런 상설 채널이 부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단체들은 제도 설계 첫 단추부터 현장과 소통해야 불필요한 규제 저항과 시장 혼란을 줄이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간담회 직후 공문을 통해 당국에 협의체 구성을 공식 요청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 “시장 쪼개면 자금은 프리미엄으로만 쏠려" 이날 벤처 단체들이 제안한 5대 과제는 △코스닥 세그먼트(프리미엄·스탠다드 분리) 시행 유예 및 재검토 △중복상장 금지 규제의 벤처기업 예외 적용 △상장폐지 요건 시행 유예 및 기준 재검토 △생산적금융 정책협의체 상설화 △기술특례상장 제도 보완 등이다. 쟁점은 크게 둘로 모인다. 우선 코스닥을 '프리미엄'과 '스탠다드'로 나누는 세그먼트 도입이다. 단체들은 2022년 시장을 3개(프라임·스탠다드·그로스)로 재편한 일본 도쿄증권거래소(JPX) 사례를 들어 “하위 시장에 '비우량 기업' 낙인이 찍히고 자금이 상위 시장으로만 쏠리는 서열화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코스닥의 기관투자자 비중이 6%로 일본 그로스 시장(7%)과 비슷한 수준인 상황에서 시장을 쪼개면, 기관 자금이 프리미엄에만 몰리고 스탠다드로 분류된 다수 벤처기업은 유동성 절벽에 내몰릴 수 있다는 논리다. 다른 하나는 중복상장 규제다. 단체들은 대기업이 알짜 사업부만 떼어내는 '쪼개기 상장'과, 벤처기업이 신사업·신기술 확보를 위해 자회사를 키워 상장시키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자는 후속 성장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정상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에 규제의 잣대를 '중복상장 여부'가 아니라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여부'와 '일반주주 보호장치 확보 여부'로 바꾸고, 국가전략산업이나 VC가 투자한 기업에는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 “코스닥 80%가 벤처… 흔들리면 시장 전체 흔들려" 벤처 단체들이 코스닥 제도 개편을 '시장 관리'가 아닌 '혁신경제의 미래' 문제로 규정하는 데는 코스닥에서 벤처기업이 차지하는 절대적 비중이 자리한다.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4월 말 기준 코스닥 상장사 1603개사 중 벤처이력기업이 1274개사로 79.5%를 차지한다. 시가총액 비중은 81.1%(516조원)에 이르며, 최근 4년간 기술특례상장 기업 127개사 중 벤처기업이 89.8%(114개사)다. 벤처기업이 흔들리면 코스닥 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단체들의 설명이다. 김재원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의장은 “퇴출과 규제에만 무게가 실리면 자금이 절실한 혁신 스타트업까지 위축된다"며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둑이지만 너무 높이 쌓으면 물길마저 마른다. 부실은 정리하되 혁신기업의 자금조달 통로는 지켜달라"고 말했다. 공은 이제 업계의 협의체 구성 요청에 금융당국이 어떻게 응답하느냐로 넘어가게 됐다. 송민규 기자 songmg@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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