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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헌재는 답하라, 선관위가 치외법권 지대인가

지난 2월 27일, 헌법재판소(헌재)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감사원을 상대로 제기한 권한쟁의 심판에서 “감사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인력관리에 대한 직무감찰을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근거는 '감사원이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라는 점에서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은 통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헌법 및 선거관리위원회법에 의해 부여받은 선관위의 독립적인 업무 수행을 침해한 것'이란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이 선관위를 감찰할 수 있다면, '선거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고도 했다. 과연 그런가.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등 고위간부 자녀들의 경력직 특혜채용 의혹에서 비롯됐다. 의혹이 제기되자 선관위는 자체감사를 통해 5급 이상 간부들의 자녀에 대한 경력채용을 점검하고, 사무총장 등 4명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이와 별도로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자 선관위는 이에 반발해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다. 감사원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실시된 선관위의 모든 경력채용에서 다양한 비리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주장도 나왔고, 심사위원 부당 위촉이나 심사결과의 수정 등 공무원 인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비리가 발견됐다. 과연 누가 선관위의 신뢰를 훼손했는가. 선거관리는 본래 내무부의 업무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선거관리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중요해져 1962년 제5차 개헌 때 선관위는 헌법기관이 됐다. 그러나 감사원법은 헌법기관인 국회와 법원, 헌법재판소의 공무원을 명시적으로 감사원의 직무감찰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을 뿐, 선관위는 포함하지 않았다(제24조③항). 선관위도 헌법기관인데 명시적으로 제외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감사원의 감찰대상에 포함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는 이 조항을 아무 근거도 없이 '예시적 규정'으로 오독했다. 이는 헌재가 사실상의 입법권을 행사한 것으로 심각한 권한남용에 해당한다. 행정의 기본 원리를 고려해도 이번 헌재의 결정은 심각한 오판이다.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모든 조직이나 활동은 반드시 공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 민간조직도 한 푼이라도 세금을 쓰면 예외 없이 통제 대상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이 옳다면 막대한 세금을 쓰는 선관위가 공적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적절히 통제하지 않은 결과, 선관위는 자기들끼리 지위를 세습하는 '가족회사'가 되고 말았다. 헌재는 실정법의 규정을 오독하고 행정의 기본 원리까지 무시하면서 선관위를 치외법권 지대로 만들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가. 더불어민주당은 선관위가 국회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어도 공적 통제를 받는 것이란다. 정말 그런가. 국회의 국정감사는 1년에 한 번 사실상 시늉만 내는 것에 불과하고, 지금까지 자료 요구에 대해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기 일쑤였다. 만일 민주당의 주장처럼 국회에 의한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졌다면 선관위의 온갖 채용 비리나 부실한 선거관리는 왜 발생했나. 한두 번도 아니고 지난 10년간 진행된 모든 경력채용에서 예외 없이 비리가 발생했다는 것은 아예 통제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회가 있으니 공적 통제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헌재가 법의 해석을 넘어 만들어 가면서까지 선관위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채용 비리나 각종 인사부정을 넘어 부정선거 의혹 규명 요구로부터 선관위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선관위를 치외법권 지대로 만들어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홍성걸

[EE칼럼] 에너지 위기에서 배워야

강현국 미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에 세계 경제와 정치가 안정화되면서 에너지 위기라는 단어를 못 들어본지 한참인 것 같은데, 요즘은 거의 매일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이미 위기의 모든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교훈을 찾아야 한다. 집에 불이 나기 전에 가연성 재료를 잘 치워둬야 하듯이, 이런 에너지 위기도 미리 그 조건을 해소할 수 있어야만 궁극적으로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로 인한 기후변화의 폐해에 놀란 전 세계가 재생에너지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가스 보급선을 확충하였다. 특히 부유한 유럽 국가들과 일본이 그 중심에 있었다. 유럽의 경우 전체 수입량의 40%를 러시아로부터 파이프라인을 통해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우크라이나가 그 파이프라인을 폭파했을 때 에너지 비용이 몇 배로 치솟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풍력과 태양력 등의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에너지 같은 탄소중립 에너지원은 공급망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아서 에너지 자급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았는데, 재생에너지의 경우 어쩔 수 없는 간헐성 때문에 전력망 안정성을 고려할 때 현재 수준 이상으로 비중을 높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 국가들이 지금의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자급 가능한 재생에너지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였을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에너지 위기로부터 우리가 배워할 것은 무엇일까? 영국은 북해 유전 등을 소유한 에너지 부국이라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니, 한국과 비슷한 에너지 빈국인 프랑스를 보자. 1970년대에 프랑스의 에너지 자급률은 26%에 불과했으나 적극적인 원자력발전의 도입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50%대의 에너지 자급률을 안정적으로 달성하였다. 이번 에너지 위기에서 프랑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 했던 이유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오일 쇼크 이후 자국 내의 풍부한 석탄을 이용해 자급률을 유지하였는데, 여러 번 국내 언론에서도 보도된 것과 같이 이것이 EU의 환경 규제 등과 많은 문제를 발생시킴에 따라 점차로 석탄 이용을 억제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국내 정치적인 이유로 원자력 발전을 폐지하는 정책추진을 하였고, 그 통에 대체 전원 확보를 위한 에너지 자원 수입이 증가하는 상황을 맞게 되어, 재생 에너지 활용을 높여서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려 하였으나,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수입에너지 가격 폭등과 신재생의 높은 경비가 동시에 닥쳐서 국가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024년 독일의 전기 요금은 MWh당 69유로로 프랑스의 46유로와 큰 차이가 있다. 단순히 경쟁력이 없을 뿐 아니라 에너지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않아 에너지 안보 수준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돌아보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상황은 정리해 보면, 고도로 발달된 중화학공업위주의 산업구조로 인해 세계 8위의 에너지 소비 국가이면서도 전체 에너지의 96%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이라 단순히 에너지의 원활한 공급이 에너지 안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안보를 좌우할 상황이다. 그러면 어떻게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어떤 에너지 문제도 없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고 지금의 공업 강대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유무역과 에너지공급을 보장했던 안정된 국제 체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전 세계의 보안관 역할을 해 주었던 미국 주도의 안보 체제 하에서 큰 위험부담 없이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공업생산품을 수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로 이런 모든 상황이 변화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실익이 없는 보안관 노릇을 거부하고 있고, 해당 국가가 개별적으로 그 부담을 져야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수입해 오는 화석에너지원에는 위험부담이 추가될 것이고, 이런 상황이 지금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가 주요 에너지 수입국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선박수송로가 얼마나 위험한 지역을 통과하는 지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한전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제철,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S-OIL, LG화학 순서로 전기를 많이 소비한다. 에너지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안보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큰 일이다. 재생에너지는 국내 자급 에너지이다. 에너지 안정성에서는 미흡하지만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는 매우 소중한 자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안정성과 안보 이 두 가지 모두에서 가장 이상적인 자원이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는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에너지를 강화함으로서만 달성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원자력 이용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걸 상기해야 한다.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전형적인 경우이지만, 최근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정 과정도 걱정스럽게 보인다. 강현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박원주 칼럼]중도 유감(中道 遺憾)

세계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그의 2004년도 역작 '파시즘의 해부'에서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로서 공동체가 겪고 있는 퇴행, 굴욕, (부당한) 피해 등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바탕으로 집단 행동, 세력, (집단적) 순수성 등을 과시하는 보상적 의식을 벌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대놓고 폭력을 자행하기로 마음먹은 국가주의 무장세력 - 그 뿌리는 일반 대중 - 들이 전통적 엘리트들과 불편하면서도 효율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 민주적 자유(라는 명분)를 집어 치우고, 도덕이나 법적 제약 없이, 폭력을 주된 구제 수단으로 삼아, 공동체의 내부 청소(외국인 또는 반대 집단 제거)와 외적 확장(침략전쟁)을 꾀하게 된다. 사실 나치나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반대 정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공연하게 쓰여왔던 비속어에 가깝다. 그래서, 파시즘을 정의한 팩스턴조차 특정 개인이나 정치적 조류, 특히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대해, 파시즘이란 말을 쓰는 것을 극히 꺼려 왔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2021년 1월 6일 흥분한 폭도들이 빨간색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가 쓰여진 야구 모자를 쓰고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던 사건이었다. 1922년 로마 시내를 행진했던 무솔리니의 블랙셔츠나 1934년 좌파 정부의 취임을 가로막으려 난동을 부렸던 프랑스 극우세력들의 폭력 사태 등과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사건이었지만 팩스턴은 그보다는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시민들의 폭력을 부추기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부분을 더 주목했다. 그는 '트럼프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고, 이후로 그는 트럼프가 파시스트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 배제하는 정치 없어져야...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 지금,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대국인 미국이 파시스트 국가가 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지만, 그보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 지난 1월 19일 새벽, 내란혐의자인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분노한 폭도들이 떼를 지어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여 법원의 외벽을 파손하고 내부 기물을 부수는 기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법 질서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황당한 일이었고, 태권도 발차기 품새로 현란하게 사무실 유리를 깨부수고 방화를 시도하는 폭도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태를 유발한 특정 정치인이 파시스트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회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과했던 것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를 통해 배제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정치인들이 만들어지고 세를 과시할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더 큰 문제다. 민심의 저변을 오염시키고 있는 폭력과 불법, 전체주의적 정서를 어떻게 극복하여 피땀 흘려 일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시즘의 유혹에 빠진 나라들, 예컨데 독일, 이태리, 군국주의 일본 등 모두 종국에는 망했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 불안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나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다양성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 법의 존엄성을 부정하며, 국가가 경제 전반을 통제하여 군수물자 생산에 열을 올리는 국가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북한의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상대로 싸우자고 덤비는 막장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비상한 사회현실도 제 역할 못한 우리 정치의 책임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정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비상한 사회적 흐름이 뜬금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급격하게 진행된 고령화와 만성적 노동력 부족, 보호무역주의 조류 확대와 글로벌 기술분쟁 격화에 따른 시장 잠식, 내수 침체와 서민경제의 파탄, 과도한 규제로 인한 투자 위축과 일자리 소멸 등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경제 현상 속에서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피폐해졌는지 여실히 읽을 수 있다. 작년 대다수 대기업들이 신규채용에 나서지 못하고 일부 경력직 직원들을 채용하는데 그쳤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국의 이대남들이 기성 세대에 치이고, 외국인 근로자에 치이고, 성별에 치여 숨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비이성적이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현실이 너무 심각하다. 그들이 느낄 불안과 분노에 정부나 정치권은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법치를 폭력으로, 합리를 격정으로 대체하는 도도한 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대책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이 이 모든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만들었다고 말하면 간단해서 좋겠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파시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누구든 대중선동의 깃발을 든 자가 승리해서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파시즘은 정치가 국민들의 불안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풀어주지 못할 때 집단적 정서불안을 모태로 태어나는 괴물이다. 아무리 신박한 논리 또는 궤변으로 치장을 해도 그 바탕은 기댈 곳 없는 대중들의 분노를 폭력적 수단으로 풀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곪을 때까지 도그마와 정쟁에 빠져 현실을 외면했던 우리 정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진작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풀어주려 노력하는 정치가 있었다면, 국민들은 이를 지지하고 그 주장을 국정에 반영시키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불안과 불만을 해소했을 것이다. 우리 정치가 그런 역할을 했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정치는 정말 무책임하고 정말 나쁘다. 진영간의 노선 논쟁으로 소외당한 국민들이 중도이다 이런 와중에 거대 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여당이 법치와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손에서 놔버렸다는 비난을 받는 지금, 야당마저 국민들의 아픈 부분을 감싸주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자리와 차가운 자리를 피해서 앉겠다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그들은 아는 것일까? 지금 상황 그대로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국민들의 불안의 불씨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파국의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 커져 나갈 것이다. 이 지점에서 1960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처절한 항쟁으로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던 4.19혁명의 결실을 불과 11개월만에 군사정권에 고스란히 빼앗겼던 제2공화국 정부의 무능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여당과 야당이 우와 좌의 깃발을 들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이와 전혀 상관없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변방에 위치한' '중도'라는 격오지에서 외면당하며 지내왔다. 그 소외와 무시가 겹겹이 쌓여 폭동과 방화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현상까지 벌어지는 지금, 중도의 국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구가 그렇게 과한 것인가? 그럴 거라면 권력은 왜 탐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인권과 법치가 사라진 범죄도시에서 가난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정치 정신 좀 차리자. 박원주

[데스크 칼럼] ESTP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

어린이집에 가보면 유독 에너지가 넘치고 즉흥적이며 현실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어린이가 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하기로 했던 일보다 바로 하고 싶은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나는 자라서 대통령이 될 거야' 같은 허황된 꿈을 입 밖으론 내지 않는다. 당장에 치토스 한 봉지를 먹기 위해 어떻게든 친구를 꼬드겨 낸다. 말싸움으로 이길 재간이 없다. 무엇에든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 전략적이고 상당히 똑똑하다. 교사 입장에서 보면 좀 피곤한 아이다. MBTI로 보면 ESTP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 이후 연일 전 세계를 들어다 놨다 한다. 관세를 부담스러운 수준까지 올리는 건 예사다. 이민 장벽을 높게 치면서도 올리가르히에게도 영주권을 팔겠다고 선언한다. 이전 정부가 시행했던 각종 보조금 정책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거대한 미국 재정으로 암호화폐를 비축자산에 편입할까한다는 혼란스런 메시지로 비트코인 가격을 흔들어 댄다. 군비 지원 중단으로 우크라이나를 압박해 자원을 미국 수중에 넣어버린다. MBTI로 보면 ESTP에 가깝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광인 전략'을 최근 잠시 멈춘다. 멕시코와 캐나다에 25%의 관세부과를 추진하다 지난 4일 돌연 관세를 한 달 연기한다. 그 중심에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이 있다. '얼음여왕'이라 불리는 셰인바움은 계산적이고 기술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스타일의 트럼프를 대했다. 트럼프가 멕시코의 '펜타닐 공급'을 비난하자 미국의 멕시코 상대 '무기 공급'을 문제 삼으며 되받아쳤다. 관세 폭탄에 대해 '캐나다와 같은 다른 무역 파트너를 찾을 것'이라고 적극 응수했다.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 정상간 통화가 이어지자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트럼프와의 통화해서 욕설을 주고받으며 설전을 벌였다. 전화를 함께 듣고 있던 셰인바움은 온화한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트럼프는 트뤼도에 대해선 '멍청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혹평했지만, 셰인바움에겐 '존경'의 뜻을 밝혔다. 관세가 유예되는 동안 멕시코는 협상의 여지와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확보했다. 외교가는 트럼프를 들었다 놨다한 셰인바움이 '2승을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다. 노련한 어린이집 교사는 ESTP 어린이를 보고 있다 결심이 서면 옹호자형(INFJ)이나 선도자형(ENFJ)으로 변신한다. 옹호자형으로 변신하면 차분하게 인내심을 보여준다. 즉흥성과 감정의 기복을 이해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해 준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자연스레 옳은 방향으로 유도한다. 감정적인 공감을 통해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만든다. 실수할 기회를 주고 그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유도한다. 자연히 존경을 불러일으켜 아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선도자형으로 변신한 교사는 ESTP 아이의 높은 에너지 레벨을 맞춰준다.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행동하면 긍정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끌어준다. 아이들의 사회적 욕구를 이해하고 협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리더십의 기회를 줘봐서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멕시코 교사가 INFJ나 ENFJ를 적절히 오가는 능숙한 교사라면, 아직 어린이집에 출근하지 않은 한국인 교사는 어떤 유형의 성격이어야 할까. 박상주 기자 redphoto@ekn.kr

[기자의 눈] 크립토 서밋, 기대와 다른 현실

지난 7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크립토 서밋'은 미 정부가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본격적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바이든 정부의 가상자산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연방 정부 차원에서 비트코인을 전략적 자산으로 지정하고 매입할 가능성을 재차 확인했다. 주요 가상자산 기업 대표들도 참석해 정부와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며 시장의 기대감을 키웠다. 그러나 서밋에서 발표된 내용은 기대만큼 구체적이지 않았다. 정부는 비트코인을 어떤 규모로, 어떤 빈도로 매입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자본이득세 면제 논의도 모든 프로젝트가 아닌 일부 미국 기반 프로젝트로 제한될 가능성이 제기돼 글로벌 시장에서 공정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결국 정부의 발표가 실질적인 정책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에 불과하다는 실망감과 함께 시장 불확실성만 확대됐다. 서밋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오히려 5% 이상 하락하는 등 시장의 실망감을 반영했다. 최근 벌어졌던 50억달러 규모의 옵션 만기, 11억달러 규모의 상장지수펀드(ETF) 자금 유출, 바이비트(Bybit) 거래소의 대규모 해킹 사건 등 악재들로 변동성이 커진 가운데, 흐름을 뒤바꿀 호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연방준비제도(Fed)의 긴축 기조로 인한 금리 인상 우려까지 겹치면서 위험자산인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흔들렸다. 이번 서밋을 통해 트럼프가 가상자산 산업 발전을 위한 혁신적이고 명확한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던 업계의 실망감도 컸다. 정부는 구체적인 규제 완화나 투자자 보호 대책 없이 원론적이고 모호한 메시지만 반복했다. 이는 트럼프가 가상자산 산업의 현실적 필요성이나 글로벌 경쟁력을 위한 지원책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크립토 서밋은 정부의 진정한 의지를 보여주기에는 미흡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앞으로 정부가 시장의 기대와 현실적인 요구를 반영한 명확한 로드맵과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가상자산 시장의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 백악관의 다음 행보에 시장의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성우창 기자 suc@ekn.kr

[기자의 눈] 다이소 영양제로 드러난 약사-제약사 ‘갑을 관계’

대웅제약과 일양약품이 지난달 24일 균일가 생활용품점 다이소에 3000~5000원짜리 건강기능식품을 출시하자 아니나 다를까 약사들 반발이 거세다. 오는 11일 취임하는 권영희 대한약사회 회장 당선인은 지난달 26~27일 다이소에 영양제를 공급한 대웅제약·일양약품과 이달 중 출시 예정인 종근당건강 등 제약사 관계자들과 잇따라 면담을 가졌다. 이어 다음날 28일 대한약사회는 성명을 통해 제약사들이 약국보다 저렴하게 생활용품점에 공급하는 것처럼 마케팅을 펼치는 것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약사들은 제약사의 다이소 건기식 출시 자체보다 마케팅 방식을 문제삼고 있다. 해당 제약사들이 고품질의 건기식을 생활용품점에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처럼 마케팅을 해 그동안 약국이 폭리를 취해 온 것처럼 소비자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제약사의 마케팅 방식에 대한 약사업계의 반발이 사실상 제약사에게 사업 철수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사업 철수를 결정한 제약사도 생겼다는 점이다. 일양약품은 대한약사회가 성명을 발표한 지난달 28일 현재 출시된 제품 외에 더이상 다이소에 제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일양약품은 공급 중단 이유를 밝히지 않았고, 대한약사회도 사업 철수 압박이 없었음을 강조했지만 일련의 사태가 전개된 정황을 보면 약사들의 반발이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반면에 대웅제약과 종근당건강은 현재 사업 철수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두 제약사 역시 약사업계 집단반발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제약사의 다이소 건기식 사업 철수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개월치에 수만원대 하는 약국 제품 구매를 주저하던 소비자가 필요에 따라 부담없이 다이소 제품을 먹어보고 효과가 있다고 느끼면 약국에서 더 좋은 제품을 구매해 먹어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선택권을 박탈당하는 셈이다. 약사들은 '그동안 약국이 폭리를 취해 왔다는 오해'를 걱정하기보다 '그동안 약사들이 제약사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해 왔다는 인식'을 해소시켜주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제약사 역시 단순히 '고품질'을 강조하기보다는 약국에 공급하는 제품과 다이소에 공급하는 제품이 어떻게 다른지 소비자에게 정확히 알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윤홍근 BBQ회장,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장 연임

치킨 프랜차이즈 제너시스BBQ그룹의 윤홍근 회장이 사단법인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회장에 연임됐다. 제너시스BBQ그룹은 “지난 5일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정기총회 이사회에서 윤홍근 현 회장이 새로 인준을 받고 13대 회장에 추대됐다"고 7일 밝혔다. 윤 회장은 “김상옥 의사의 애국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수 있어 큰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연임 소감을 밝혔다. 이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김상옥 의사와 순국선열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않고 후세에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고 김상옥 의사는 일제 강점에 맞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고, 1923년 1월 22일 서울 시가지에서 일본 군경 1000명과 '일 대 천 전투'를 벌이다 순국했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는 1948년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 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이다. 윤홍근 회장은 지난 2021년 12대 회장으로 취임해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를 비롯해 특별전 '김상옥, 겨레를 깨우다', '항일 서울시가전 승전 기념식' 등 행사들을 후원하고 있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이슈&인사이트]개헌과 양원제 이야기

최근 개헌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단골로 등장하는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정부제 가운데 국민의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도 넘쳐난다. 개헌의 시기도 마치 조기 대통령선거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참에 아예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까지 함께 하자는 의견부터 이번에는 후보들이 개헌을 공약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후보로 언급되는 몇몇은 이번에 당선되는 대통령의 임기를 개헌을 통해 3년으로 줄이고 202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4년 중임제 동시선거를 하자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개헌론에도 꿈쩍하지 않는 이도 있다. 개헌의 단골 주제 가운데 하나는 양원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최근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새헌법안』을 출판했는데 “국회를 양원제(공화원·민주원)"로 바꾸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검찰 출신 전 여당 대표는 “지역구 의원은 그대로 두되 비례대표 의원을 상원으로 전환해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르는 양원제 도입"을 주장한다. 최근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헌법의 순간』이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양원제는 한국에서 1948년 제헌을 할 때부터 아주 고전적인 주제였고 매우 열띤 찬반의 대상이었다. 잠시 시간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하던 시점으로 돌아가자. 유진오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이 제안한 양원제는 “지역대표와 경제, 교육, 종교 등 직능대표들로" 상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헌법기초위원들 사이에는 12대 10으로 단원제 지지가 더 많았다. 양원제를 선호하는 입장은 무엇보다 하원과 상원 사이에 서로 견제가 가능하고 두 번의 절차를 거쳐 신중한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단원제를 고집하는 입장은 양원제에서 의사결정에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고 상원이 귀족제의 유산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대한민국 헌법은 단원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헌 헌법의 잉크가 미처 다 마르기도 전인 1948년 양원제 도입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12월 18일 제1회 국회 폐회식에서 “(다음) 국회에서 작정할 것은 상원법과 규례를 정하여 어떻게 조직하며 어떻게 선거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이에요"라고 발언했다. 195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국회는 이승만을 위한 대통령제 대신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1952년 한국 전쟁 중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군인과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양원제까지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그다음으로 한국에서 양원제가 등장한 것은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 시절이었다.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하원 격인 민의원이 233명, 상원 격인 참의원이 58명 뽑혔다. 민의원은 4년 임기인데 참의원은 6년 임기였다. 참의원은 특별시나 도 단위에서 선출되었고 3년마다 29명씩 뽑는 방식이었다. 권한은 민의원이 더 강했고 양원 사이에 의견이 다를 경우에도 최종 결정은 민의원의 몫이었다. 그나마 실체를 가지고 잠시나마 작동했던 제2공화국의 양원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명목상으로 구분만 이루어졌지 역할의 분담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똑같은 일을 양원에서 두 번씩 반복하고 말았다. 또한 참의원은 우려했듯이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았으며 이른바 고관대작으로 즐비했다. 당시 언론은 이런 참의원을 보고 쓸모없는 장식품이고 세금만 낭비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5.16쿠데타 이후 양원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양원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의 핵심은 똑같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정사의 경험은 양원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국민 사이에 심어주기 충분하다. 학술적인 연구결과는 결코 양원제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이른바 선진 국가에서 작동하는 우월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대신 양원제가 정착된 나라들이란 대체로 인구가 많고 땅덩어리가 큰 연방제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학계의 중론이 모여졌을 뿐이다. 한국과는 먼 이야기인 것이다. 1987년 헌법이 진짜 오늘 한국 위기의 근원일까. 요새 정치인들이 희망하듯이 헌법을 바꾸면 정치 문제가 다 풀릴 것인가. 이준한

[EE칼럼] 어렵지만 시급한 시멘트산업의 탄소감축

시멘트에 모래, 자갈, 물을 섞어 만드는 콘크리트는 현대 물질문명의 토대이다. 콘크리트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자재의 80%를 차지한다. 전 세계에 1인당 80톤이 넘는 콘크리트가 존재하는데, 이를 전부 합하면 총 650기가톤에 달한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무게가 나간다. 건축의 세계에서 시멘트는 콘크리트가 서로 단단히 달라붙도록 돕는 마법의 성분이다. 인류는 수천 년간 석회를 구워서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다.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1만 년 전 신석기 유적의 바닥과 기둥에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의 기초를 만들 때 사용한 것도 콘크리트의 일종이다. 현대의 시멘트 제조법은 1824년 영국의 조셉 애스프딘이 특허를 낸 방법이다. 애스프딘은 '포틀랜드시멘트'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시멘트의 색이 영국 포틀랜드섬에서 산출되는 천연석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포틀랜드시멘트는 전체 시멘트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토마스 에디슨은 시멘트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디슨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시멘트 소성로(kiln)를 만들어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정부는 우리나라의 근간이 될 기간산업을 시멘트, 비료, 화학섬유 등으로 정하고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우리나라에 그나마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이 석회석이라, 1960년대부터 국가산업으로 육성했다. 시멘트는 한자로 양회(洋灰)라고도 하는데, 이 무렵부터 여러 시멘트 기업이 탄생했다. 2023년 한국은 연간 5천만톤이 넘는 시멘트를 생산하는 세계 11위의 시멘트 대국이 되었다. 소비량으로는 세계 10위이다. 국내 석회석 매장량은 118억톤이며, 향후 약 200년간 시멘트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시멘트의 제조과정을 살펴보면, 주원료인 석회석과 부원료인 진흙, 모래, 산화철 등을 원료 분쇄기에 투입하여 분쇄한 후 소성로에서 최고 2,000℃의 고열로 가열하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시멘트 반제품인 클링커가 생성된다. 클링커에 석고와 같은 첨가제를 혼합한 후 분쇄기에서 아주 잘게 분쇄하여 시멘트를 만든다. 시멘트산업은 철강, 석유화학과 함께 대표적인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이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7~8%를 차지한다. 석회석(CaCO3)을 가열하면 탈탄산과정에 따라 클링커(CaO)가 생성되면서 이산화탄소(CO2)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전체의 약 60%를 차지한다. 이 외에도 소성로 가열을 위해 유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약 33%, 원료 분쇄기, 냉각기 등 각종 설비에서 전기를 소모하면서 약 7%가 발생한다. 2023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 상위 30위 기업 중에는 시멘트 회사가 5개나 있다. 이들 기업의 배출량은 3천만톤이 넘는다. 국내 배출량의 약 4.7%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시멘트 기업들의 탄소배출량은 제품 생산 단위당 평균 0.83tCO2로 글로벌 평균(0.62tCO2)보다 높다. 영업이익이 많지 않은 시멘트 회사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멘트산업은 전형적인 온실가스 난감축(hard to abate) 분야이다. 에너지 연소 때문이 아닌 공정 배출량이 많기 때문이다. 시멘트산업에서 발생하는 공정배출 감축을 위한 대표적인 수단에는 원료전환이 있다. 석회석을 슬래그, 애시류 같은 비탄산염 원료로 대체하거나, 클링커 비중을 줄이고 석고와 같은 혼합재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또 다른 주요 수단은 연료전환으로, 유연탄 대신 폐플라스틱, 폐타이어, 폐목재, 폐유 등의 순환자원이나 수소, 바이오매스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열기, 냉각기 등의 효율 향상을 통해서도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하다. 이러한 감축기술 도입 이후에도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결국 CCUS 기술을 이용해서 처리해야 한다. 탄소중립의 핵심 수단이지만, 아직은 너무 비싸서 수지를 맞추기가 어렵다. 양은 많고 마진은 박한 시멘트산업은 더욱 그렇다. 기술개발과 상용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과 기업의 투자가 시급하다. 시멘트산업은 전형적인 원료 지향성 제조업이다. 운송비 부담이 커서 원료인 석회석을 채굴하는 광산 인근에 생산 공장을 짓는 편이다. 공장을 해외로 옮길 수도 없고, 해외 수입에 의존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는 비바람을 막아줄 튼튼한 지붕과 벽이 있고, 발밑에 단단한 바닥이 있으면 건축의 중요성을 잊곤 한다. 그러나 주거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의식주 중의 하나이다. 없어선 안 될 시멘트산업이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도 제대로 된 평가를 계속 받으려면 탄소배출 문제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 박성우

[기자의 눈] 민주당, 진정 중도보수라면 기후에너지정책 다 바꿔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의 이념 정체성을 진정 중도보수라 규정했다면 민주당은 기후에너지정책을 다 바꿔야 한다. 민주당이 조기 대선 대비용으로 풀고 있는 기후에너지정책은 아무리봐도 진보적이다. 중도보수라고 우겨봐야 국민이 납득할까 싶다. 민주당은 지난 22대 총선 이후와 비교할 때 기후에너지정책에서 중도보수로 갔다고 할 만큼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나마 의미있는 변화는 더이상 탈원전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원전 기조 폐기는 민주당이 우클릭을 한 건 맞다. 그러나 에너지 고립섬인 우리나라에서 탈원전을 하겠다는 계획은 원체 실현 가능성 없는 급진적인 정책이었다. 극좌에서 오른쪽으로 한칸 갔다고 중도보수라 할 수 없다. 기후경제부, 기후에너지부는 기후 분야에 힘을 줘서 경제 혹은 에너지 산업을 통제하겠다는 민주당에서 언급된 정부부처 구성안이다. 기후위기 대응에 큰 힘을 쏟겠다는 것인데 중도보수에서는 구상하기 힘든 정부부처다. 윤석열 정부의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는 이미 과감하다. 2030년까지 전체 발전량의 21.6%를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고 했는데 지금이 10% 정도니 두 배나 늘려야 한다. 이 대표가 강조해오던 에너지 고속도로는 본래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을 2035년까지 40%로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도보수가 추진하기엔 너무 과감하지 않나. 현재 정부가 수립 중인 2035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꽤 높게 잡을 생각이 있다면 접어야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달 매출액 기준 1000대 제조기업을 대상으로 NDC에 대해 조사할 결과, 기업 10곳 중 8곳은 정부가 2035 NDC 수립 시 산업부문 감축목표를 현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선언은 국민의힘을 극우로 몰아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기후에너지정책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이 차라리 중도보수에 가까워 보인다. 이 대표는 진보, 보수 상관없이 경제정책을 실용적으로 접근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기후에너지정책은 필요하다면 진보로 가도 괜찮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이념적 기반 없이 쇼핑하듯 골라 쓰는 정책은 혼란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기후를 중시하는 규제정책은 중도보수가 지향하는 자유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통 민주당 지지층이 믿고 있는 이 대표의 이미지는 흔들릴 수 있다. 노동규제는 풀어주면서 기후규제를 옥죄면 지지층이 납득하겠는가. 이러니 이 대표가 대선을 의식해 중도층의 민심을 얻으려 전략적으로 중도보수를 선언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나 싶다. 이원희 기자 wonhee4544@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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