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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노인을 위한’ 정부는 없나

정년 나이인 만 60세를 넘겼다. 정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몸과 마음의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정규직 급여를 받는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또한 우리 사회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멀지 않은 시점에 정규직에서 물러난 이후 어떻게 노후생활을 건강하게, 소박하게 영위해 나갈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 시행하거나 사라지는 노인 복지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종종 발견한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시내 서점에서 숱한 서적들 가운데 책 한 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는 제목의 책으로, 표지를 둘러싼 띠지의 광고 문구 중 '현명하게 나이 드는 법', '자신의 나이를 잘 사용할 줄 안다면 즐거움이 가득 찰 것이다'는 내용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72세에 이 책을 집필했다는 스위스 태생 저자는 서문에서 '나는 이 나이에도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바라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노년기의 자유'라고 갈파했다. 또한, 자신을 65세에서 84세 사이인 제3의 인생기에 속하는 '젊은 노인'이라고 정의했고, 70대가 인생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시기라고 말했다. 아직 책장의 절반도 넘기지 못한 수준이지만, 책을 언급한 이유는 간단하다. 올해부터 초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 이상를 차지한 사회)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젊은 노인들 가운데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정신적, 신체적 만족도를 차치하더라도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발표 2023년 기준 40.4%(66세 이상), 우리나라 국가통계연구원 지속가능발전목표(SDG) 보고서(2025년 3월)의 2023년 기준 39.8%로 조사될 정도로 매우 심각하다. OECD 38개 회원국 노인빈곤율 순위 1위, 세계 평균 노인빈곤율(16.1%)보다 약 2.5배 높다. 그렇다보니 정년 이후에도 안정된 노후를 즐기지 못하고 저임금 단순직의 일터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의 노인 경제활동 참가율이 2023년 37.3%로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지난주 '먹사니즘'을 표방한 이재명 정부가 처음으로 편성한 2026년도 정부 예산안이 공개됐다. 하지만, 고령층 복지 예산을 찾아본 결과 '곁다리식' 시혜성으로 와 닿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기껏해야 노인 일자리를 올해 110만개에서 5만 4000개 더 늘리는데 2004억원, 신규 예산인 어르신 스포츠강좌 프로그램 지원 75억원 증액한 내용이 눈에 뛸 정도였다. 5년 뒤인 2030년에는 국내 노인 인구 비중이 약 25%에 육박할 전망이다. 전체 인구에서 4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출생률 저하, 인구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노인 인구의 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책이 절실하다. 정책입안 과정이나 사회 통념에서 여전히 '나이 듦'의 잣대로 노인 문제를 사회적 비용 요소로 고려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저출산에 치중돼 있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에서 고령화 정책기구를 분리해 별도기구로 신설해야 한다. 더이상 노인 정책을 시혜성 시각이 아닌 생산성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책에서 피력한 '노인세대의 유연성과 창의성'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진우 기자 jinulee6464@ekn.kr

[윤석헌 시평] 금융감독체계 개편 마무리해야

“이번엔 되는 줄 알았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금융감독체계 개편에 대해 한 말이다. 새 정부 출범으로 기대를 모았던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대통령의 주담대 6억원 규제 칭찬 후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 인사 후엔 방향성과 추진 여부까지 헷갈린다. 핵심인 금융위 해체설은 약화되고 소비자보호기구 분리설만 명맥을 유지하면서, 초심이 흔들리는 모습이다. 수차례 반복된 금융감독개편 논의가 빛을 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모피아(재무부+마피아의 약자를 합성한 조어)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금융사고와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던 이유 역시 모피아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금융위를 해체하여 관치금융을 단절하고 모피아 낙하산을 중지하는 것이 소비자보호 강화 및 금융산업 발전의 첩경이라 할 것이다. 금융위 체제를 유지하면서 소비자보호기구만 분리하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격으로 소비자보호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번 금융감독체계 개편에 대해 기대가 높았던 데는 새 정부 역량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몇 가지 배경논리가 작용했다. 첫째, 한국경제 선진화 과정에서 국내 금융권은 중개역량을 키워 경제 선진화를 지원할 소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된 관치금융과 모피아 낙하산 등은 경제 성장기 역할에 불구하고 국내금융에 무능력과 무책임이라는 후과를 남겼다. 금융사는 정부 보호막 뒤에 숨어 위험을 부담하지 않았고 중개역할 수행보다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다. 부실 상품을 불완전 판매하면서 정부의 허가를 핑계댔다. 감독당국은 자신들의 집행책임은 제한적일 뿐이란다. 금융위는 산업진흥과 감독 간 최적 선택을 했다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금융권에 책임지지 않는 문화가 자리잡았는데, 이를 개혁하지 않고 경쟁력 강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국내 금융산업은 IMF 체제 이전에는 정부 지시로 기업금융을 수행했고, 이후에는 정부의 금융산업 건전성 우선 정책 하에 위험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면서 위험관리 역량이 자라지 못했다. 그 결과 카드사태, 저축은행사태, DLF사태, 사모펀드사태 및 최근 홍콩ELS사태 등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계속됐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부의 산업진흥정책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데, 감독체계 개편 반대론자들은 하드웨어를 건드리면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불필요한 혼란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앞뒤가 바뀐 논리다. 또한 반대론자들은 자동차의 액셀과 브레이크 비유가 견제와 균형을 의미함에도, 운전자 입장에서 둘을 함께 운영하는게 편리하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소비자 피해의 지속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글로벌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금융의 지나친 양적성장이 위험을 크게 확대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한국경제도 관치 덕분에 양적성장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질적성숙이 필요하고 민간금융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정부의 역할 변화가 필요하다. 즉 앞으로 정부는 시장에 직접 개입과 참여를 자제하고 금융제도와 정책 수립 등으로 시장의 예측가능성 제고에 주력해야 한다. 이제 민간 중심 금융감독체계 전환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민간기구의 공권력 행사 문제다. 금융위설치법상 금융위사무처는 '금융위원회의 사무 처리 및 설치법에 규정된 업무'를 수행한다. 금감원은 '금융위원회 소속기관에 대한 업무 지원'과 더불어 '검사 및 제재업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검사 및 제재 업무'는 금감원의 고유업무이고, 그 외는 양자간에 실질적 차이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금융위사무처 업무를 금감원으로 합치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음, 감독정책의 공적 민간기구 이양 과정에서 시장의 불안정 발생을 우려한다. 그러나 이는 법과 제도로 꼼꼼히 준비하여 시행하면 문제될 게 없고 이행과정에서 금융선진화의 물꼬가 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국, 호주, 네델란드 등 공적 민간감독기구 운영 국가들의 사례를 참조할 수도 있겠다. 이제와 개편작업을 접는 것은 관치금융 지속을 시그널하는 의미가 있다. 금융소비자 피해가 지속되면 금융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바닥날 가능성도 우려된다. 국회 산하에 TF를 구성하고 그간 제시된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여 올바른 개편방향을 찾는 노력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서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계기로 한국금융이 관치를 벗고 한국경제 선진화 동력으로 거듭나기 바란다. 윤석헌

[이슈&인사이트] 국익 외교의 성과, 이제는 경제에 올인할 때

우려와 걱정이 많았던 한-미 정상회담이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났다. 젤렌스키 등 트럼프와 만났던 세계 정상들이 그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한국과 특히 한국 좌파 정권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가 우리 대통령을 홀대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무사히 성공적으로 첫 상견례를 마쳤다. 우리와 미국은 동맹이지만 여전히 사대주의가 우리 몸에 배여 있어 기성세대와 보수 세력들의 시각은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회담 분위기와 성과를 마치 과거 조선 시대 왕들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 의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회담을 앞두고 우리가 걱정했던 것들은 우리 대통령이 홀대를 받지 않을까였고 한미 방위분담금을 GDP 대비 5%까지 올리라고 요구할 지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다시 우리에게 추가적인 투자와 관세협상 시 우리가 제시한 3,500억 달러의 구체적 명세표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였다. 특히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트럼프가 트루스 소셜에 올린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숙청 또는 혁명같이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고, 거기서 사업할 수 없다"라는 글로 인해 한미 정상의 만남이 무산 내지 파투가 나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런 오해는 정상간의 만남에서 풀렸다. 트럼프가 항상 정상들과 만남 전에 쓰는 고도의 전술인지 모르지만 평택 기지 소유권을 얘기하려고 밑밥을 깔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트럼프가 우리 조선산업에 관심을 보여주면서 미국내에서 제조한 군함 외에도 한국에서 제조한 배를 사 주기로 한 것은 영내 건조를 원칙으로 하는 미국의 법 개정과 동시에 좀 더 많은 배를 우리 땅에서 만들 수 있게 해 줘 우리 조선 업계에게는 커다란 선물을 준 셈이다. 앞으로도 조선 산업은 우리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계속해서 사용할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보잉 항공기 100대 추가 구입과 한국 기업들의 1,500억 달러 투자를 선물로 가지고 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또 다시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을 위한 조인트 벤처를 트럼프가 다시 꺼내 어떻게든 일본과 같이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에 발을 담가야 할 것이다. 현재는 경제성이 떨어지지만 앞으로 열릴 북극항로와 연계한 사업으로 발전시킨다면 새옹지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농수산물 추가 개방과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관세협상 타결 시 우리가 제안한 3,500억 달러에 대한 구체적 명세표 요구를 받지 않은 것도 크나큰 성과다. 우리도 일본처럼 투자금 중 상당부분은 금융과 담보 제공의 형식으로 끌고 갈 예정인데 이번에 미국이 이런 간접투자 말고 공장을 세우는 것과 같은 직접 투자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과 EU와 동조를 맞출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고 이 또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과 부를 가지고 있는 정통 보수 세력들이 우려하는 것은 변치 않는 한미 동맹과 결속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라는 찬사를 받고 미국의 완전한 지원을 받을 거라는 트럼프이 말을 듣게 된 이상 정통 보수 세력들의 우려와 걱정도 한꺼번에 날려 버린 성과가 되었다. 정치적 변수를 제거했으니 이제 다시 경제에 올인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민생지원금 지급에도 불구하고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은 0.8-0.9%로 끝날 거라 예상된다.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AI 산업에서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 성장율은 주변국인 대만과 일본 그리고 OECD 평균에도 많이 뒤쳐진다. 내수를 진작시켜야 성장율을 높일 수 있다. 가처분 소득을 끌어 올려야 한다. 결국은 부동산이 해결의 열쇠다. 최용

[EE칼럼] 알뜰폰처럼 ‘알뜰전기’? 전력시장 혁신이 열어갈 길

전력 구매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독점적 공급 구조에 길들여져 있던 기업들이 더 이상 안주하지 않고, 직접 거래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LG화학이 여수공장에서 도매시장을 통해 전기를 사들였고, SK어드밴스드가 제도 첫 신청자가 되면서 포문을 열었다. 세아베스틸은 한화큐셀과 20년 계약을 맺어 장기 직거래의 신호를 보냈다. 한화솔루션이 뒤를 따를 기세이고, 코레일 같은 공기업까지 눈길을 주니, 변화는 산업 전반으로 번질 태세다. 이는 단순히 거래 방식의 변주가 아니라, 전력시장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웅변하는 장면이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의 시선은 여전히 '전기요금 인상 여부'라는 눈앞의 변수에만 매달려 있다. 그러나 요금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 본질은 전력시장의 지배구조다. 독점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요금만 억지로 눌러 놓는 방식은 손해 보는 집단과 이익을 챙기는 집단을 갈라치기 하는 단순한 제로섬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이제는 일반 소비자의 차례다. 통신시장을 떠올려보자. 한때 KT의 독점이 굳건했던 통신산업은 이동통신 도입과 함께 SKT·KT·LG의 경쟁 구도로 재편됐다. 알뜰폰 사업자들이 우후죽순 뛰어들면서 소비자는 요금을 스스로 고를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요금은 내려갔고, 서비스는 개선됐으며, 시장은 혁신의 길로 들어섰다. 전력시장도 예외일 수 없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소비자 선택권 확대라는 종착역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통신도 애초에 국영 독점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KT가 사실상 전 영역을 지배했지만, 1990년대 들어 국제 압력과 국내 규제 완화의 흐름이 맞물리면서 균열이 생겼다. 1991년 다콤, 1997년 온세텔레콤 같은 신생 사업자들이 등장하며 국제전화 시장에 경쟁이 열렸고, 이어 장거리와 시내전화까지 개방이 확산됐다. 독점이 무너지고 다층적 경쟁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치며, 통신시장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경쟁 사업자의 진입이 곧장 효율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1997년 개인휴대통신 사업자들이 출범하면서 이동통신 시장은 단숨에 다섯 개 업체가 뒤엉켜 경쟁하는 구조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지국을 비롯한 인프라가 과도하게 증설되며 중복투자와 과잉투자 논란이 불거졌다. 고용 불안정 문제까지 뒤따르며 산업 전반이 흔들렸다. KT 역시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민영화라는 길로 들어섰지만, 기존 지위를 지키려는 저항은 완강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통신시장의 경쟁 체제는 이런 난관을 뚫고서야 비로소 뿌리를 내렸다. 전력시장 개방을 둘러싼 논의에서 늘 방어 논리로 제기되는 망 중복투자 문제, 기존 독점 사업자의 저항, 기술적·비용적 부담을 이미 통신산업은 고스란히 겪고 극복해낸 셈이다. 그 결과 소비자는 요금 선택권과 서비스 다양성이라는 실질적 혜택을 손에 넣었고, 산업은 경쟁을 통해 혁신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특히 알뜰폰(MVNO: 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 제도는 통신시장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 MVNO는 자체 망을 보유하지 않고 기존 이동통신사의 망을 임대해 독자적인 요금제와 서비스를 설계해 제공한다. 막대한 망 투자 비용을 감당하지 않고도 서비스 혁신과 가격 경쟁을 촉진할 수 있었기에, 소비자는 SKT·KT·LGU+라는 3대 이동통신사의 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수십 개 알뜰폰 사업자가 내놓는 다양한 요금제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소비자 권리를 확장하고 시장 효율성을 높인 대표적 성과였다. 전력망은 물리적으로 중복 구축이 불가능하다. 송전과 배전은 국가 차원에서 통합 운영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전형적인 자연독점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 송배전망을 토대로 공급과 판매 주체를 다양화한다면, 통신시장의 MVNO 구조와 유사한 경쟁 원리를 전력시장에도 도입할 수 있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력중개사업자(aggregator)다. 다수의 발전사업자와 신재생에너지 설비, 가정용 태양광이나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분산형 전원을 하나의 '가상발전소(VPP)'로 묶어 전력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소매시장에 공급하는 구조다. 개별 소규모 전원이 시장에 직접 참여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중개사업자가 대신 메워주는 것이다. 둘째, 소매사업자(retailer)다. 이들은 송배전망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전력 도매시장에서 확보한 전력을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친환경 인증 전력 상품, 시간대별 차등 요금제, 맞춤형 요금제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설계해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한다. 즉, 송배전망은 공공적 독점으로 두되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개방하고, 그 위에서 전력중개사업자와 소매사업자가 경쟁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비자는 지금처럼 한전만 상대하는 획일적 구조에서 벗어나, 통신시장에서 알뜰폰을 고르듯 자신에게 맞는 전력 공급자와 요금제를 고를 수 있다. 이는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 혁신적 서비스의 도입을 촉진할 뿐 아니라, 소비자와 공급자 모두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새로운 전력시장 질서를 열게 될 것이다. 전력시장 거버넌스를 개혁하지 않는 한, 요금 논란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정부는 전기료 조정이라는 미봉책에 머물 것이 아니라, 전력시장에 아예 공을 넘겨 스스로 그 책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소비자들도 더이상 '전기세'라며 인상 마다 정부를 탓할리도 없고, 원자재 가격 하락때는 전기료도 하락하는 난생 겪어보지도 못한 호사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에너지 위기와 요금 갈등을 동시에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유종민

[EE칼럼] 정답을 찾는 사람 vs 좋은 질문을 만드는 사람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지난 8월 18일자 영국 가디언지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일본의 34세 소설가 리에 쿠단이 ChatGPT를 활용해 쓴 소설 『심파시 타워 도쿄』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작품의 5% 정도가 AI로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작가 스스로가 알리면서 일본 문단은 물론 전 세계에서 텍스트 문예 전문가 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 상황을 보며 나는 다른 질문을 하게 됐다. 관심의 초점이 “AI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맞춰져 있는 동안,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가 AI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였다. 리에 쿠단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I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 과정을 반영할 수 있다." 그녀는 AI를 단순한 글쓰기 도구가 아닌, 사고를 확장하는 대화 상대로 활용했던 것이다. 나아가 리에 쿠단은 더 이상 출판사나 평론가가 원하는 답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현대 일본 사회의 동정심 문화, 언어 변화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AI와 함께 탐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질문들이 수상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AI 시대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지식을 쌓는 것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은 온통 '정답 찾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이 문제의 답이 뭐지?" 아이들은 선생님이 원하는 정답을 맞히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문제집을 푼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더 치열해진다. 대학 입시라는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실에 앉아 있다. 대학에 들어가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지만, 이번엔 취업이라는 새로운 정답을 찾아야 한다. “면접관이 원하는 답이 뭘까?" 자기소개서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작성되고, 면접 답변은 인터넷에 떠도는 '모범 답안'을 외우느라 바쁘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원하는 게 뭘까?" “이 프로젝트의 성공 기준은 뭘까?"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MBA를 밟고, 각종 자격증을 따고, 업무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다. 퇴근 후 시간과 주말까지 반납하며 끊임없이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는 지식을 쌓아간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또 다른 정답 찾기가 시작된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육아서를 읽고, 부모 교육을 받고, 아이 교육비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아이에게도 같은 길을 걷게 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는 정답을 향해.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10년 전 열심히 딴 컴퓨터활용 자격증, 지금은 쓸 일이 없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 지식의 70%는 실무와 거리가 멀다. 몇 백만원을 들여 수강한 마케팅 과정에서 배운 내용들, 요즘 트렌드와는 맞지 않는다. 더 충격적인 건 AI의 등장이다. 미국에서 ChatGPT는 변호사 시험에서 상위 10% 성적을 기록했고, GPT-4는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했다. 우리가 밤새워 외운 지식들을 AI는 몇 초 만에 더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제공한다. AI 시대의 전문성은 더 이상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리에 쿠단이 아쿠타가와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 문학 지식을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의사도 이제 의학 지식을 많이 외우는 것보다, 환자의 복잡한 상황을 AI가 이해할 수 있는 정교한 질문으로 변환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변호사도 판례를 많이 암기하는 것보다, 복잡한 법적 상황을 AI와 함께 분석할 수 있는 질문 설계 능력이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수동적 학습에서 능동적 질문 창조로 전환할 수 있을까? 첫째, 나만의 궁금증을 찾아라. “취업에 도움이 되려면 뭘 배워야 할까?" 대신 “내가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엇일까?"를 물어보자. 리에 쿠단처럼 자신만의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한 질문이 가장 강력하다. 둘째, 구체적 맥락을 더하라. “성공 방법을 알려주세요" 같은 추상적 질문이 아니라, 나의 상황, 제약 조건, 목표를 구체적으로 담은 질문을 만들어라. 그래야 내게 맞는 맞춤형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셋째, AI와 대화하듯 질문하라.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 같나요?" “제가 놓치고 있는 관점이 있을까요?" 같은 식으로 협력자로서 AI의 다양한 관점을 활용하라. 넷째, 질문을 계속 발전시켜라. 첫 번째 답변에 만족하지 말고,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같은 후속 질문으로 탐구를 심화하라. 80년간 지속된 '정답 찾기 경쟁'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수동적으로 지식을 쌓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을 위해 능동적으로 질문을 만들고, AI와 함께 답을 찾아가는 시대가 왔다. 오늘부터 우리도 시작해보자. “남들이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대신 “정말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이를 위해 어떤 질문을 만들어야 할까?"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쌓인 나만의 질문들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전문성이 되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질문하는 자가 미래를 주도하는 시대, 이제 시작이다. 김한성

[기자의 눈] 새로울 것 없는 유통 트렌드 ‘도긴개긴’

유통업계 기사를 쓸 때 지겹도록 마주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트렌드'이다. 유행에 민감한 업계인 만큼 시류를 잘 포착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반복돼 진부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팝업이 대표 사례다. 짧은 시간 내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어 팝업은 갈수록 유통가의 주요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팝업스토어 전문 업체 스위트스팟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운영된 팝업 스토어 수는 1488건으로 전년동기 680건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만큼 식상하다는 평도 많다. 천편일률적 구성으로 새로운 느낌을 주는 척하는 팝업들이 쏟아져서다. 공간 전환이 용이한 백화점업계만 봐도 팬덤이 두터운 인기 IP(지적 재산권) 위주로 팝업 경쟁을 벌이고 있다. IP 관련 굿즈 전시·판매, 포토존 구성의 팝업 수준이지만, 팬덤 충성도를 발판으로 '행사 기간 기대치 이상의 모객 효과를 거뒀다'는 소식이 흔하게 들린다. 상품 판매 전략도 닮음꼴이 많다. 앞서 다이소가 저가 뷰티·건강기능식품 시장을 개척한 이래 올 들어 일부 편의점·대형마트도 관련 사업을 본격화했다. 가격대마저 5000원 이하 균일가를 앞세운 다이소를 벤치마킹한 듯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하며 견제에 나섰다. 전통적으로 식품에 강점을 보였던 이들 유통업체가 '다이소 따라잡기'라는 수식어를 불사하고 유사한 전략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돈이 돼서다. 특정 제품군에 집중하는 '카테고리 킬러' 전략을 벗어나 사업성 높은 품목으로 상품 다각화에 나선 것이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가 짙어지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업계 중론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내외 경영 환경이 악화일로로 치닫으면서 유통업계도 사업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시간 대비 인지도 제고 효과가 높은 팝업을 택하거나, 공들인 제품 연구개발보다 박리다매형 초저가 건기식·뷰티에 눈을 돌린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트렌드를 빌미로 흥행 보증된 것만 시도하는 속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만큼 특색 있는 콘텐츠가 주목받을 가능성도 높다. 갈수록 트렌드 수명이 짧아짐에 따라 독창적인 콘텐츠를 적극 육성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성장 열쇠로 연결짓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이슈&인사이트] 러-우 휴전과 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의 고민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15일에 미국 트럼프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알래스카에서 회담한 이후 휴전 조건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푸틴은 현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 전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면 즉시 휴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전혀 좋지 않은 조건이다. 도네츠크는 첨단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지하자원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다. 이미 크림반도를 상실한 우크라이나가 이 조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는 국토 완전 수복을 전제로 많은 희생을 초래하며 긴 전쟁을 지휘해 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전쟁 지속 당위성을 약화하고 정치지도자로서 입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어려운 선택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휴전을 성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와 경제 지원 단절을 압박할 수 있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 미국이 미래 안전보장 없이 휴전을 수용하라고 우크라이나를 윽박지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가장 안 좋은 시나리오다. 안전보장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휴전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도 어렵게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러시아 땅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어 양국 간 항구적인 평화 구축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정신을 차렸다고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유럽의 태도 변화와 대응도 불확실하다. 유럽이 전쟁 기간 우크라이나를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했다지만 부족했다. 유럽 일부 국가가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게 냉정한 판단이다. 미국은 유럽에 러시아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방위비를 5%로 인상하라고 했지만, 유럽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다. 스페인 등 일부 국가는 이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의 안보 위기가 현실이 되었지만, 유럽의 결속력은 여전히 느슨하다. 지금까지 전개 상황을 보면 결국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할 것으로 예상한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 또는 유럽이 안전보장을 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정상적인 국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유럽과 러시아 사이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반쪽 국가로 남을 것이다. 이런 현실은 한국에 큰 교훈이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달리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이라는 확실한 안전보장 장치를 확보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미동맹이 지금의 부강한 한국을 만든 여러 배경 중 하나다. 주한미군의 핵심 기능은 북한 도발 억제다. 최근 이런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고조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세력이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급성장한 중국의 경제·군사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역할 변경을 수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대북 억제와 한국의 방위는 한국이 전담하고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면 한국이 미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등 만약 동북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대결의 최전선이 된다. 북한도 참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강력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고 있어 우크라이나같이 군사적 열세에 놓이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볼 것이다. 한국을 지탱하는 제조업과 무역 기반은 타격을 받을 것이고 한국 경제와 사회는 파탄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Bloomberg Economics)는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하면 한국의 GDP가 23% 이상 감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한국 경제를 파괴할 수 있는 치명적인 수준의 피해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의 새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보면 미국이 한국의 미국과 중국 사이 줄타기 시도를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과 중국에 유화적인 한국이 이런 외통수 상황에서 대안을 찾아보려고 무리수를 두게 되면 미국과 중국 모두에 외면당하고 고립되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초래할 수 있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의 선택은 언제나 한국의 안전이어야 한다. 한국의 체급 및 지정학적 한계 때문에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다. 그래도 이번 정부는 한국을 위한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호

[장박원 칼럼] MAGA의 역설

기원전 454년 아테네 몰락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델로스 동맹의 공동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금고를 좀 더 안전한 곳에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진짜 목적은 동맹의 자산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 이후 금고 자금은 파르테논 신전 건설을 비롯한 아테네 공공사업에 유용됐다. 동맹국 기여금이 본래 목적인 페르시아 제국 방어가 아닌 아테네 정부의 쌈짓돈으로 전락한 셈이다. 더 나아가 아테네는 공납금을 증액했다. 기원전 43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재정난에 처하자 동맹국의 팔을 비틀었다. 그렇게 전쟁으로 구멍 난 재정을 충당하려고 했다. 아테네의 갑질에 동맹국들의 분노와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은 공동 안보와 협력을 위해 결정됐다. 공동 금고를 중립 지대인 델로스 섬에 놓기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아테네가 강력한 해군력으로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대신 동맹국들은 함선이나 공납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아테네가 '제국의 본성'을 드러내기 전까지 델로스 동맹은 굳건했다. 하지만 '아테네를 위대하게' 만들려는 페리클레스 등장 이후 균열이 생겼다.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파트너십에서 예속 관계로 바뀌었다. 그 결과 자발적 참여와 협력이 강점이었던 델로스 동맹의 경쟁력이 사라졌다. 권위주의 체제인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다를 바 없었다. 동맹의 붕괴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쇠퇴한 결과이기도 했다. 기득권 세력과 사익만을 추구하는 선동가들이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며 아테네 민주주의는 길을 잃었다. 국가와 시민에 대한 지도자들의 애국심과 책임은 실종됐다. 동맹국에 대한 예의도 사라졌다. 아테네 유력 가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의 배신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아테네의 역사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비슷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시장과 자유 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국가 동맹을 이끌었다. 미국이 손해를 보더라도 동맹국을 위한 공동 안보와 협력에 희생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구호 아래 동맹국에게도 무리한 요구서를 내민다. 모든 국가를 거래상대로 여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면 보복하고 이익이 돼야 상대를 해주는 식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동맹국인데도 관세폭탄을 퍼붓고 과도한 방위비 분담을 압박하고 있다. 2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역시 분위기는 좋았으나 주한미군 부지 소유권을 넘기라는 등 수용하기 힘든 청구서를 내밀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이어질 실무 협상에서 어떤 돌발 변수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한국 기업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좌불안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업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지분을 내놓으라는 기상천외한 제안도 서슴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폭주에 미국 민주주의도 흔들린다. 언론사와 대학, 사법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핵심 가치가 도전받고 있다. 불법 이민자를 단속하겠다며 여러 지역에 주 방위군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야당 지지율이 높은 도시들이 주요 표적이다. 심지어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할 연방준비제도 의장까지 기준금리를 내리라고 겁박하고 있다. 몽테스키외는 로마 제국의 번영이 몰락을 불렀다고 주장했다. 그의 탁견은 지금의 미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미국의 번영을 외치는 트럼프의 'MAGA' 역시 미국의 쇠락을 재촉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경고는 빗나가는 법이 없다. 동맹국에게까지 무리한 청구서를 내밀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관세폭탄을 퍼붓는 갑질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아테네와 로마가 그랬듯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미국의 미래 세대가 받게 될 것이다. 'MAGA의 역설'이 뻔히 보이는데도 트럼프의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현 상황이 당혹스러울 뿐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기자의 눈] 갈 길 잃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정책 신뢰 회복하려면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를 위해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원칙은 뒤로 미뤄야 할까? 대주주 양도소득세 보유 기준을 두고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기획재정부가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을 현행 50억원에서 기존 10억원으로 되돌리는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기획재정부는 '원칙'을 강조했다.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관련 보도자료 소제목은 '응능부담의 원칙에 따른 세 부담 정상화'다. 응능부담(應能負擔)은 모든 납세자가 능력에 맞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소득세가 대표적이다. 모든 직장인은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달리 낸다. 조세 정의와 과세 형평성 관점에서 바람직하다. 주식 투자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국회에 올라온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하향 반대에 관한 청원'에 15만명이 동의했다. 연말에 대주주가 양도소득세를 회피하기 위해 주식을 팔아 물량을 내놓으면 주가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연말에 대주주가 주식을 대거 내다 팔면서 주가가 왜곡되는 경향은 있는 듯하다. 다만 전체 지수의 상승과 하락에도 영향을 주는지 분명하진 않다고 기획재정부는 설명했다. 여론에 민감한 여당은 한발 물러섰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11일 “양도소득세 부과 대주주 기준을 현행 50억원으로 유지하는 안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주주의 매도로 시장이 출렁거리면, 종목당 10억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작은 개미들의 주식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가뜩이나 변동성이 큰 우리 주식시장에는 좋지 않은 신호"라고 말했다. 세금 문제는 과세 그 자체보다 세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다른 말로,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지켜야 세제에 관한 신뢰가 만들어진다.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은 1999년 도입됐다. 지난 20여 년간 계속 대주주 기준을 확대했다. 1999년 100억원에서 시작해 50억, 25억, 10억원으로 금액 기준을 낮췄다. 2020년에는 이를 모든 개인 투자자에게 적용하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도입 논의까지 이르렀다. 결국 문제는 '원칙'과 '현실' 사이의 균형이다. 조세 정의라는 대의명분과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가 충돌할 때, 정부는 어느 한쪽만 붙잡을 수 없다. 투자자들의 신뢰는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대주주 기준을 어디에 두든지, 더 중요한 것은 '일관된 룰'을 세우고 그 룰을 존중하는 자세다. 오락가락하는 기준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세수가 아니라 시장의 신뢰다. 최태현 기자 cth@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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