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국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차별 관세전쟁으로 안전자산으로서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훼손되면서 미 국채가 주식 등 위험자산과 동조화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뉴욕증시를 대표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별 상호관세를 발표한 지난 2일부터 이날까지 7% 가량 하락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30년 국채 수익률(채권 금리)은 40bp(1bp=0.01%)포인트 가량 급등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가 발효한 9일 0시 1분 직후 아시아 시장에서 10년물 금리가 4.51%까지, 30년물 금리가 5.02%까지 상승하기도 했었다. 채권 수익률과 채권 가격은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채권 금리의 빠른 상승은 채권 가격의 급락을 의미한다. 통상 주식시장이 급락할 때 투자자들은 미 국채나 금과 같은 대표 안전자산에 눈길을 돌린다. 글로벌 금융시장에 공포감을 촉발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9·11 테러, 2011년 S&P의 미 신용등급 강등(AAA→AA+) 등에도 미 국채 가격은 상승했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강행하자 주식과 미 국채 가격이 동시에 떨어지는 이례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지난 2일부터 주식, 가상자산 등이 반등할 때 미 국채 가격도 덩달아 올라 위험자산과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미 국채가 신흥국 채권과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ING의 파드레익 가비 금리 전략가는 “미 국채가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미 국채 시장은 시가총액이 28조 달러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중요한 시장인 데다 수많은 금융거래의 담보자산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근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 국채가 더 이상 안전자산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경우 세계 경제 전체에 중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미 국채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할 경우 투자자들은 국채 보유에 대한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데 이는 곧 글로벌 채권금리의 벤치마크인 10년물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럴 경우 대출 금리가 동반 상승해 신용경색이 일어날 수 있고 각국 정부의 부채 부담도 커진다. 미 달러화 가치가 국채 가격과 동반 하락하고 있는 점도 미국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했음을 보여준다. 10일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1.83% 내린 101.02를 나타내 2022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급락했다. 11일에는 2023년 7월 18일 이후 처음으로 장중 100선을 밑돌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자산시장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투자자들의 '탈출 러시'가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알레인 보코브자 글로벌 자산 배분 총괄은 “미 국채에서 돈을 잃고 달러화에서 돈을 잃고 주식 시장에서 돈을 잃고 있다"며 “이는 모든 글로벌 운용사들에게 포트폴리오 재각화가 필요하다는 경종을 울린다"고 주장했다. 호주 커먼웰스 은행의 캐롤 콩 전략가는 “트럼프의 오락가락한 관세 정책에 미국 정부와 경제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손상됐다"며 “미 주식, 달러화, 국채에서 매도세는 투자자들이 달러 기반 자산에서 탈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국채 가격 급락과 관련해 “나는 이것이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불편하긴 하지만 채권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상적인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현상으로 본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대규모 차입 거래를 동원한 헤지펀드들의 '베이시스 트레이드' 청산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미국 자산에 대한 신뢰도가 실추됐고 신뢰 회복 또한 어려울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매뉴라이프 투자관리의 네이선 투프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이 겪었던 어려움 중 상당 부분은 대외적, 지정학적 요인이 발생했기 때문"이라며 “이번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 주식과 채권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다. 아마도 영구적인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록의 러셀 브라운백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미 장기체는 더 이상 헤지수단이 아니다"며 “이것이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채권 시스템"이라고 했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