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다 탄소에 49℃ 폭염 우려까지…2026 월드컵의 ‘위험한 실험’

오는 11일부터 다음달 19일까지 열리는 2026년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다. 미국·캐나다·멕시코가 공동 개최하는 이번 대회는 참가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난 최초의 월드컵이자, 첨단 공학과 기후위기, 경제 효과와 환경 부담, 선수 건강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거대한 사회 실험이다. 경기장의 승패만 본다면 절반만 보는 셈이다. 월드컵 뒤에 숨겨진 다양한 이면을 살펴본다. ◇월드컵의 공학…축구공 하나에 담긴 최첨단 과학 2026년 월드컵의 가장 큰 기술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공인구 '트리온다(Trionda)'다. 스페인어로 '세 개의 파도'를 뜻하는 이름은 미국·캐나다·멕시코의 공동 개최를 상징한다. 가장 놀라운 특징은 패널(panel· 가죽 조각) 수다. 트리온다는 단 4개의 패널로 제작됐다. 이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적은 숫자다. 5각형과 6각형 조각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축구공은 패널이 32개이고, 지난 2006 독일 월드컵 공인구인 팀가이스트(Teamgeist)는 패널이 14개, 2022 카타르 월드컵 공인구 알 리흘라가 20개 패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혁신적인 변화다. 문제는 패널이 적을수록 공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진다는 점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불라니(Jabulani)'가 대표적 사례다. 8개의 패널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골키퍼들은 “공이 살아 움직인다"고 불평할 정도로 비행 궤적이 불규칙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깊은 이음새와 미세한 홈, 특수 표면 질감을 넣었다. 일본 츠쿠바대학교 연구진의 풍동(風洞·바람 터널) 실험 결과, 트리온다는 시속 약 43㎞ 수준에서 항력 위기에 도달해 프리킥이나 코너킥 상황에서 보다 안정적인 비행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풍동은 인공적으로 바람을 만들어 물체 주변의 공기 흐름과 저항을 측정하는 연구 장비다. 항력 위기(抗力危機·Drag Crisis)란 공이 일정 속도에 도달했을 때 공기 흐름의 성질이 바뀌면서 공기저항이 갑자기 감소하는 현상으로, 축구공의 비행 거리와 궤적을 결정하는 중요한 공기역학적 특성이다.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불라니는 공 표면이 너무 매끄러워 항력 위기가 높은 속도에서 발생했고, 공기 흐름이 불안정해져 공이 갑자기 흔들리거나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 논란이 됐다. 반면 무회전 킥에서는 또 다른 변수가 생긴다. 트리온다의 사면체 구조는 낮은 대칭성 때문에 공기 저항이 일정하지 않게 작용할 수 있다. 야구의 너클볼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공 내부에는 '커넥티드 볼(Connected Ball)' 기술도 탑재된다. 초당 수백 차례 공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센서가 내장돼 공이 선수 발에 닿는 순간을 감지하고, 반자동 오프사이드 시스템에 실시간 데이터를 전송한다. 심판보다 공이 먼저 상황을 판단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월드컵의 기상학…가장 강력한 상대는 폭염 2026년 월드컵에서 가장 우려되는 변수는 브라질도, 프랑스도, 아르헨티나도 아니다. 바로 폭염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개최 도시 16곳 가운데 14곳이 경기 중 위험 수준의 열 스트레스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 기온이 아니라 '습구흑구온도(Wet Bulb Globe Temperature, WBGT)'를 사용해 위험성을 평가한다. 이는 기온뿐 아니라 습도·태양복사·풍속까지 반영한 체감 열지수다. 국제축구선수협회(FIFPRO)는 WBGT 28℃를 경기 연기 검토 기준으로 본다. 그러나 FIFA는 현재 WBGT 32℃를 초과해야 추가 조치를 검토한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과 의료 전문가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독일 공격수였던 위르겐 클린스만은 댈러스 경기 후 “(체감온도가) 화씨 120도(49℃)에 이르는 기온 속에서 뛰었을 때 죽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2025년 북미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에서도 선수들은 “사우나에서 막 나온 것처럼 땀이 난다"고 불평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전·후반 중간에 각각 3분씩 주어지는 수분 보충 시간을 6분으로 늘리고, 경기 연기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 코네티컷대학 더글러스 카사 박사는 얼음물 타월과 냉수욕을 활용한 '공격적 냉각 전략'을 FIFA에 권고했다. ◇월드컵의 보건학…선수의 생명과 뇌를 지켜라 축구는 신체 접촉이 많은 스포츠다. 최근에는 뇌진탕 문제가 중요한 보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이란 골키퍼 알리레자 베이란반드가 심각한 충돌 후에도 경기를 계속 뛰게 된 사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스포츠 의학계에서는 '임시 뇌진탕 교체(concussion substitute)'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핵심 원칙은 “의심스러우면 빼라(If in doubt, sit them out)"이다. 경기보다 선수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폭염 역시 의료 문제다. 연구에 따르면 고온 환경에서는 선수들의 활동량과 스프린트 횟수가 감소하고 부상 위험이 증가한다. 심한 경우 열탈진과 열사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월드컵의 경제학…개최국은 손해, 우승국은 이익? 많은 사람은 월드컵을 개최하면 막대한 경제효과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의외다. 영국 서리대학교의 경제학자 마르코 멜로는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데이터를 분석해 월드컵 우승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대회 후 두 분기 동안 최대 0.25%포인트 상승한다고 밝혔다. 2022년 11월 '응용 경제학 회보(Applied Economics Letters'에 게재된 논문 내용이다. 그 이유는 소비 증가가 아니라 수출 증가다. 월드컵 우승으로 국가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면서 해당 국가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개최국은 이야기가 다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경우 개최 도시들은 당초 수십억 달러의 경제효과를 기대했지만, 사후 분석에서는 최대 93억 달러의 누적 손실을 기록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경기장 건설과 교통 인프라, 보안 비용 등이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미국 미시건대학교 경제학자인 스테판 시만스키는 축구계에도 '중진국 함정'이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지난 2019년 국제학술지인 '응용 경제학'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선진 축구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성장하고 있지만, 유럽과 남미의 엘리트 클럽 네트워크가 형성한 최상위권 벽은 여전히 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30년 이후 남자 월드컵 우승국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단 8개국뿐이다. 유럽과 남미 이외 지역에서는 아직 월드컵 우승은 물론 결승 진출조차 없다. 시만스키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축구 중진국 함정'을 상당 부분 극복했지만, 아직 최상위권 국가의 벽은 넘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국가 브랜드 효과 컸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에 매우 특별한 사례로 평가된다. 단순히 4강 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 효과와 국가 이미지 효과가 동시에 나타난 보기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정부와 연구기관들은 경기장 건설, 관광객 소비, 교통·숙박·유통 산업 활성화 등을 통해 상당한 경제 파급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양대와 대구가톨릭대 연구진이 2002년 발표한 다지역 산업연관(MRIO) 분석에 따르면, 월드컵 경기장 건설과 관광 소비는 전국적으로 약 6조5200억 원의 생산 유발 효과와 3조 원 이상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됐다. 또한 약 9만1700명의 신규 고용 효과도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장기적인 GDP 성장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경제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관광 수입보다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 효과다. 2002년 월드컵 이전 한국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의 신흥 공업국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월드컵을 계기로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를 생중계 화면으로 보게 됐다. 붉은 악마 응원 문화와 거리 응원은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경기장 건설과 관광 수입이라는 직접 경제효과보다도, 국가 이미지 향상과 국제 인지도 상승, 스포츠 인프라 확충, 그리고 국민적 자신감 회복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훨씬 더 큰 유산으로 남았다는 평가가 많다. ◇월드컵의 환경학…가장 큰 탄소 발자국을 남길 월드컵 2026년 월드컵은 역대 최대 규모인 동시에 역대 최대 탄소배출 행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탄소배출량을 분석해 논문으로 발표했던 스위스 로잔대의 스포츠 지속가능성 연구자 마틴 뮐러 연구진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2026 북중미 월드컵의 탄소배출량이 500만~900만 톤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2024 파리올림픽의 약 세 배에서 다섯 배 수준이다. 주된 증가 원인은 참가국 확대와 장거리 항공 이동 증가로 분석된다. 미국 마이애미와 캐나다 밴쿠버의 거리는 4500㎞가 넘는다. 팀과 관계자, 언론인, 그리고 FIFA가 기대하는 5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항공기를 이용하면서 막대한 탄소가 발생한다. 스위스 로잔대학교의 데이비드 고기슈빌리는 AFP 인터뷰에서 “국제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탄소발자국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스포츠 생태학·지속가능성 연구 그룹에서 활동하며,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탄소발자국과 환경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2030년 월드컵은 6개국, 3개 대륙에서 열린다. 규모 확대가 계속된다면 탄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월드컵의 사회학…왜 사람들은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월드컵은 과학과 경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축구는 사냥꾼 DNA를 자극하는 스포츠"라고 설명했다. 인류가 야생에서 먹이를 추적하던 원시적 본능이 축구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냥에 나서던 그룹의 숫자도 보통 10명 안팎일 때가 많았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세계화를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받아들인 사회학자들은 월드컵과 유럽 축구 리그를 이러한 세계화의 대표 사례로 꼽는다. 실제로 축구는 선수 이적, 글로벌 방송, 다국적 스폰서, 국제 팬덤이 결합된 가장 상징적인 세계화 산업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사회가 보여준 열광 역시 단순한 스포츠 응원이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로 상처받은 국민들이 집단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제 2026년 월드컵은 단순히 누가 우승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공 하나를 설계하는 공학, 선수 생명을 지키는 보건학,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상학, 개최 효과를 따지는 경제학, 탄소배출을 고민하는 환경학, 그리고 인간의 집단심리를 설명하는 사회학이 모두 얽혀 있다. 먼 훗날 2026년 월드컵의 주인공으로 6번째 월드컵 무대를 밟는 리오넬 메시나 네 번째 참가하는 손흥민을 기억하는 대신에 폭염과 탄소 배출,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사이언스가 주목한 1180만 건의 경고…“인간의 발길이 야생동물을 멈추게 한다”[환경포커스]

도로나 건물을 덜 지으면 야생동물은 더 안전해질까. 지금까지 생태 보전 정책은 대체로 이런 전제 위에 서 있었다. 도로와 건물, 농경지 같은 물리적 개발이 얼마나 자연을 훼손했는지를 중심으로 서식 환경을 평가해온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예일대와 스미스소니언, 캐나다·유럽 등 국제연구팀이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대규모 분석 결과는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야생동물이 단지 인간이 남긴 구조물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언제 어디에 나타나는지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행동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존을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언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사람이 드나들 것인가"라는 이야기다. ◇미국 전역 야생동물 4581마리 추적 연구진은 미국 전역에서 위성 위치 확인시스템(GPS) 추적기를 부착한 포유류와 조류 37종, 4581개체의 이동 기록 약 1180만 건을 분석했다. 대상에는 회색늑대·코요테·퓨마·흰꼬리사슴·무스 같은 포유류와 큰까마귀·캐나다두루미·대백로 같은 조류가 포함됐다. 도시 주변에서 인간과 자주 마주치는 종부터 비교적 자연성이 높은 지역에 사는 종까지 다양하게 포함됐다. 핵심은 이 동물들의 이동 정보와 인간의 활동 정보를 따로 확보한 뒤, 이를 같은 공간과 시간 축 위에 올려 비교했다는 점이다. 동물의 경우 GPS 추적기를 통해 '이 개체가 언제 어디 있었는가'를 정밀하게 기록했다. 이를 통해 동물이 하루나 일주일 동안 얼마나 넓은 영역을 움직였는지, 어떤 환경을 선택해 이용했는지를 계산했다. 인간 활동 정보는 위치정보 분석 기업 세이프그래프(SafeGraph)가 제공한 스마트폰 이동 통계를 활용했다. 개별 사람을 추적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 하루 동안 스마트폰 이용자가 얼마나 머물렀는지를 익명화된 집계 자료로 정리한 것이다. 쉽게 말해 연구진은 '어느 늑대가 어느 날 어느 지역을 이용했는가'와 '그날 그 지역에 사람이 평소보다 얼마나 더 있었는가'를 비교한 셈이다. ◇'개발 정도'와 '실제 사람 출현'을 분리했다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인간 영향의 두 요소를 분리해서 분석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형 개조인데, 도시화, 도로, 농경지, 에너지 시설처럼 인간이 장기적으로 자연을 바꿔놓은 흔적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 출현으로, 특정 시점에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그곳에 나타났는지를 뜻한다. 기존 연구는 대개 이 둘을 하나로 봤다. 도로나 건물이 많으면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논문에서 연구진은 코로나19 시기의 특수한 상황을 활용했다. 2019년과 2020년 미국에서는 이동 제한으로 사람들의 외출이 급감했다. 도시와 도로는 그대로였지만 사람의 움직임만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 덕분에 연구진은 '동물이 반응한 이유가 개발된 환경 때문인지, 실제 인간 출현 때문인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었다. ◇야생동물 65% 이상이 인간 존재에 반응 분석 결과, 전체 종의 65% 이상이 인간 출현 자체에 반응했다. 포유류의 67%, 조류의 68%가 인간이 많이 나타나는 시기에 활동 영역이나 자원 이용 방식을 바꿨다. 포유류는 대체로 더 민감했다. 인간 활동이 많아질수록 활동 반경이 중앙값 기준으로 11%나 줄었다. 코요테의 경우 인간 출현이 늘어나면 활동 범위를 평균 11.3㎢ 줄였다. 인간이 남긴 음식물 같은 자원을 이용하면서도 인간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좁은 안전권 안에서 움직인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회색늑대는 오히려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인간을 피해 더 멀리 우회하거나 새로운 이동 경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류는 더 다양하게 반응했다. 큰까마귀는 인간 활동이 늘어날수록 활동 범위를 약 26㎢ 넓혔다. 인간이 남긴 음식물이나 도로변 사체 같은 자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결과다. 같은 인간 적응형 동물이라도 어떤 종은 숨었고, 어떤 종은 기회를 찾아 움직인 것이다. ◇더 자연스러운 곳일수록 더 민감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동물의 반응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다. 전체 종의 약 60%에서 인간 출현 효과가 서식지의 개발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상호작용이 확인됐다. 같은 수준으로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이미 도시화된 지역보다 자연성이 높은 숲과 초원에서 동물의 행동 변화 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를 인간에 대한 '익숙함'의 차이로 해석했다. 인간과 자주 접촉하는 도시 주변 동물은 어느 정도 인간에 익숙해져 반응 폭이 작지만, 사람과 마주칠 일이 드문 야생 지역의 동물은 인간 출현을 더 강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 즉각적으로 이동 경로와 활동 범위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호구역 관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자연이 잘 보존된 지역일수록 출입 관리가 더 정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존의 해법은 “언제 들어갈 것인가" 이번 연구 결과, 야생동물은 우리 인간이 남긴 도로나 건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지하고 살아간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려면 '어디까지 개발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가 언제 자연 속에 들어갈 것인가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야생동물 보호가 단순한 출입 금지나 상시 개방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대신 시간과 빈도를 조절하는 '동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번식기 특정 시간대에는 탐방객 출입을 제한하고, 야행성 동물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에는 차량 통행을 줄이는 식이다.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는 대신 서로 다른 시간대를 쓰도록 조정하는 방식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AI 데이터센터는 초대형 전기난로”…도시열섬 현상 실제 입증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급증하는 데이터센터가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기는 새로운 환경 위험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 지리과학-도시계획대학원의 데이비드 J. 세일러 교수 연구팀은 최근 미국기계학회(ASME)가 발행하는 학술지 '지속가능한 빌딩과 도시를 위한 공학 저널 (Journal of Engineering for Sustainable Buildings and Cities)'에 발표한 논문에서 데이터센터에서 배출되는 폐열이 인근 주거지역의 기온을 실제로 상승시킨다는 사실을 현장 관측을 통해 최초로 입증했다. 연구진은 애리조나주 피닉스 대도시권의 대형 데이터센터 4곳 주변을 차량 이동식 정밀 온도센서로 측정해 주변 지역 기온 변화를 분석했다. ◇근처에선 한낮 태양보다 2~6배 강한 열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데이터센터의 엄청난 폐열 밀도다. 일반적으로 도시 전체의 인위적 열 배출량은 ㎡당 10~75와트(W) 수준이다. 도쿄 도심의 최고 밀집지역조차 약 1600W/㎡ 수준이다. 반면 이번에 측정된 애리조나의 주도(州都) 피닉스 대도시권의 최신 공랭식 데이터센터들은 2000~6000W/㎡의 열을 뿜어냈다. 이는 한낮 태양 복사열(약 1000W/㎡)의 2~6배에 달한다. 예를 들어 피닉스의 위성도시인 메사(Mesa)시에 위치한 NTT PH1 데이터센터는 36㎿ IT 부하(데이터센터 안에서 서버·저장장치·네트워크 장비 같은 핵심 IT 장비들이 실제로 소비하는 전력 용량이 36㎿(메가와트)라는 뜻)를 처리하는데, 전체 소비전력은 약 47㎿에 이른다. 이는 미국 가정 약 4만 가구가 동시에 쓰는 전력과 맞먹는 열을 한곳에 집중 배출하는 셈이다. 같은 피닉스의 위성도시인 챈들러에 위치한 사이러스원(CyrusOne)이란 업체의 대형 캠퍼스형 시설은 더 크다. 총 169㎿ IT 용량에, 전체 소비전력은 약 220㎿나 된다. 18만 가구 이상이 내는 것과 같은 규모의 열을 단일 부지에서 방출한다. 쉽게 말해 데이터센터는 '초대형 전기난로 수십만 대를 한 블록에 몰아놓은 것'과 비슷하다. ◇최대 500m 떨어진 주택가까지 영향 측정 결과는 예상보다 뚜렷했다. 데이터센터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의 주거지역 기온은 반대편보다 평균 0.7~0.9℃ 높았다. 최대 상승폭은 2.2℃에 달했다. 영향 범위는 시설 경계에서 100~500m까지 확인됐다. 일부 지역은 아파트 단지와 데이터센터가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시설별로 보면 △사이러스원(챈들러 시) 약 0.5~0.8℃도 상승, 최대 500m 확산 △얼라인드 (챈들러) 약 0.7℃ 상승 △디지털 리얼티 (챈들러) 평균 1℃, 최대 2℃ 상승 △NTT PH1 (메사) 0.9℃ 상승, 300~500m 범위 영향 등이다. 연구진은 “폐열 플룸(plume), 데이터센터가 품어내는 뜨거운 공기 덩어리는 바람 방향과 정확히 일치해 이동했다"면서 “주변 기온 상승은 데이터센터가 직접 원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이 배출된 폐열 플룸은 주변 공기보다 8~14℃ 더 뜨겁고, 피닉스 여름에는 50℃를 넘기도 했다. 이 공기가 초속 2~4m 속도로 밀려 나오면서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퍼진다.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겨 데이터센터는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긴다. 다만 전통적 열섬과는 다른 '국지적 열섬'이다. 기존 도시 열섬은 아스팔트, 콘크리트, 자동차, 건물 축열 등이 복합적으로 도시 전체를 덥힌다. 반면 데이터센터는 특정 지점에서 매우 강한 열을 집중 배출해 '포켓형 열섬(data center heat island)'을 만든다. 연구진은 피닉스에 이미 이런 포켓형 열섬이 다수 형성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향후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면 도시 전체 열환경을 재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연구진은 흥미롭게도 도시 열섬 현상의 완화 가능성도 포착했다. 챈들러의 한 데이터센터 주변에서는 물이 흐르는 공원과 수목지대가 폐열 일부를 상쇄하는 냉각 효과를 보였다. 즉, 충분한 녹지와 물순환 설계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한계도 있다. 데이터센터 폐열은 워낙 강해 단순한 잔디 조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민건강·생태계 피해 가능성도 현재까지 직접적인 건강 피해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진은 폭염 지역에서는 1~2℃의 추가 상승만으로도 냉방 전력 수요와 열 스트레스 위험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피닉스처럼 여름철 낮 기온이 43℃를 넘는 지역에서는 △실외 체감온도 악화 △열사병 위험 증가 △야간 냉방 부담 확대 △전기요금 상승 △저소득층 에너지 빈곤 심화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연구진은 이를 “데이터센터가 주변 가정의 냉방비를 올리는 역설적 피드백 루프"라고 표현했다. 논문에서는 생태계 직접 영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 생태학 관점에서는 우려할 만하다. 기온이 지속적으로 1~2℃ 상승하면 △곤충 활동 주기 변화 △야간 냉각 감소 △토양 수분 증발 증가 △도시 조류·식물 생육 교란 △미(微)기후 의존 생물 서식지 악화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도시 녹지 가장자리나 소규모 습지는 이런 미세 기온 변화에 민감하다. ◇“AI 인프라 확장, 열관리도 함께 설계해야" 데이터센터로 인한 도시 열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배출구를 상향 설계해 뜨거운 공기를 위로 분산할 필요가 있다. 배출 속도·각도를 최적화해 열기가 지면 근처를 따라 확산하는 것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는 건물 간격을 확대해 열기 데이터센터 부근에 정체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더워진 냉각수를 회수해 지역난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폐열을 에너지로 재사용하자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데이터센터 근처에 완충 녹지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 녹지를 통해 열을 흡수하고, 증발산을 강화해 열을 식히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입지 규제 강화다. 주거지와 최소의 이격거리를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은 2024년 약 415TWh(테라와트시, 1TWh=10억k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연구진은 “AI 시대 데이터센터는 디지털 인프라이자 동시에 새로운 도시 기후 인프라"라며 “전력망 영향만 볼 것이 아니라 도시 미기후까지 포함한 환경영향평가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환경포커스] 대기오염이 곤충의 사랑 신호를 지운다

인간이 배출한 대기오염 물질이 곤충들의 '사랑의 언어'를 방해하고, 그 결과로 생태계 붕괴와 식량 부족에 이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생태·수문학센터의 벤 랭포드 박사와 독일 막스 플랑크 화학연구소의 조너선 윌리엄스 교수, 프랑스 투르대학교의 제롬 카사스 교수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특히 산업화 이후 증가한 대기오염이 곤충의 화학적 의사소통 체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연구진은 곤충이 사용하는 성 페로몬(pheromone)과 알람 페로몬이 대기 중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지, 또 오염 조건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물리화학 모델로 계산했다. 페로몬은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짝짓기, 경고, 먹이 탐색, 집단 행동 같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몸 밖으로 분비하는 화학 신호물질을 말한다. 분석 결과, 특히 밤에 활동하는 나방류가 사용하는 성 페로몬의 수명(공기 중에서 신호 역할을 유지하는 시간)이 심하게 오염된 환경에서는 수십 시간에서 단 몇 분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곤충의 짝짓기 성공률을 급격히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성 페로몬은 더 취약하다 곤충이 위험을 알릴 때 사용하는 알람 페로몬은 대체로 분자량이 작고 휘발성이 높다. 쉽게 증발해 공기 중으로 빠르게 퍼지고, 오염 입자에도 잘 달라붙지 않는다. 반면 성 페로몬은 대부분 분자량이 크고 휘발성이 낮은 반휘발성 유기화합물(SVOC)이다. 공기 중에 오래 머물며 멀리 퍼져 짝에게 도달해야 하는 만큼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특히 이중결합을 여러 개 가진 복잡한 구조가 많아 산화 반응으로 쉽게 파괴된다. 연구진은 대기오염이 성 페로몬을 무력화하는 두 가지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① 산화제가 페로몬을 파괴한다 대기 중에는 강력한 산화제인 오존(O₃), 수산화 라디칼(OH), 질산염 라디칼(NO₃)이 존재한다. 라디칼은 전자를 하나 잃거나 얻어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다른 분자와 쉽게 반응힌다. 낮에는 OH와 오존이 활발히 작동하지만, 밤이 되면 햇빛이 사라져 OH 생성이 줄어들고 질산염 라디칼이 지배적 산화제로 등장한다. 문제는 많은 성 페로몬이 질산염 라디칼과 매우 빠르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오염이 심한 도시의 밤에는 질산염 라디칼 농도가 청정 지역보다 최대 100배 높아질 수 있다. 이 경우 성 페로몬 분자는 방출 직후 산화돼 구조가 변형되고, 수컷 곤충의 더듬이는 이를 더 이상 짝짓기 신호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쉽게 말해 상대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글자가 번져 읽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② 미세먼지가 신호를 가로챈다 성 페로몬은 원래 기체 상태로 공기 중에 퍼져야 한다. 그런데 대기 중에 미세먼지나 유기 에어로졸이 많으면 페로몬 분자가 이 입자 표면에 흡착되거나 내부로 스며든다. 그러면 더 이상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체 신호가 아니라 입자 속에 갇힌 비활성 물질이 된다. 곤충의 후각 수용기는 이런 상태의 페로몬을 감지하기 어렵다. 연구 모델에 따르면 고농도 오염 조건(유기 에어로졸 m³당 50 ㎍(마이크로그램, 1㎍=100만분의 1g))에서는 일부 성 페로몬의 60~90%가 에어로졸에 흡수될 수 있다. 즉 신호가 화학적으로 파괴되지 않더라도 전달되기 전에 '납치'당하는 것이다. ◇추운 밤일수록 피해가 커진다 연구진은 특히 기온이 낮은 밤시간대일수록 성 페로몬 신호가 더 빠르게 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핵심은 온도가 낮아질수록 화합물의 증기압(vapor pressure)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증기압은 물질이 기체 상태로 존재하려는 성질을 뜻하는데, 온도가 내려가면 이 힘이 약해지면서 공기 중에 떠 있으려는 능력이 감소한다. 분자량이 크고 휘발성이 낮은 반휘발성 유기화합물인 성 페로몬은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기체 상태를 유지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결국 공기 중을 자유롭게 떠다니기보다 주변의 미세먼지나 유기 에어로졸 입자 표면에 달라붙거나 내부로 흡수된다. 일단 입자에 포획되면 곤충의 더듬이가 이를 감지하기 어려워져 사실상 신호 기능을 잃게 된다. 연구팀의 계산에 따르면 밤 기온이 15℃ 이하로 떨어질 경우 성 페로몬의 에어로졸 흡착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으며, 특히 5℃의 심한 오염 환경에서는 공기 중에서 유효한 신호로 남아 있는 시간이 90% 이상 줄어들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정한 환경에서는 수십 시간 동안 유지되던 짝짓기 신호가, 오염되고 차가운 밤에는 불과 몇 분 만에 사실상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온대 지역의 봄·가을철 밤, 고산지대, 숲 가장자리처럼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야행성 곤충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지역은 동시에 도시나 산업지대에서 날아온 미세먼지가 축적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어, 차가운 공기와 높은 에어로졸 농도가 겹치며 성 페로몬 교란 효과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다. ◇생태계와 경제에도 큰 파장 이같은 현상은 곤충의 짝짓기 범위를 극적으로 좁힌다. 원래 수 ㎞ 떨어진 상대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신호가 수백 m도 가지 못하고 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컷은 암컷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암컷이 어렵게 방출한 신호도 허공에서 사라진다. 연구진은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번식 성공률 저하와 개체군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더 큰 문제는 단순히 곤충 몇 종의 번식 실패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곤충은 전 세계 농작물 수분(꽃가루받이)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다. 곤충 매개 수분의 경제적 가치는 연간 수천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만약 페로몬 교란으로 수분 매개 곤충 개체군이 줄어들면 과일·채소·견과류 생산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새와 박쥐 등은 화학 신호를 감지해 천척 곤충을 찾아 잡아먹는다. 이 시스템이 붕괴되면 해충 개체 수가 증가하고, 농가는 더 많은 살충제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생산비 상승과 추가 환경오염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더 근본적으로 곤충은 먹이사슬의 기초를 이룬다. 곤충 감소는 새와 박쥐, 양서류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생태계 전체 안정성을 흔들 수 있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를 '인류세의 숨겨진 생태학적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는 인간 활동이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 지질 환경을 지배적으로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미치면서 20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지질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대기질 개선이 인간 건강뿐 아니라 지구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통신망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환경포커스] 호르무즈 막히면 폐플라스틱 더미는 ‘유전’이 된다

최근 미국와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원유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유·석유화학·플라스틱 원료 공급망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계가 주목하는 대안이 있다. 버려진 플라스틱을 다시 '석유'처럼 쓰는 기술이다. 플라스틱은 본질적으로 석유에서 만든 탄소와 수소의 저장고다. 다시 말해, 이미 땅 위로 꺼내 쓴 탄화수소 자원이다. 이를 태워 없애는 대신 햇빛이나 미생물을 이용해 분해하면 수소와 합성가스, 액체연료, 고부가 화학원료를 얻을 수 있다.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두 편의 연구는 이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햇빛으로 플라스틱을 연료로 바꾸는 광촉매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미생물이 스스로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리빙 플라스틱' 기술이다. 두 기술 모두 플라스틱 오염과 에너지 위기를 동시에 해결할 카드로 평가받는다. ◇햇빛 한 줄기로 수소와 디젤 생산 첫 번째 연구는 호주 애들레이드대학교 화학공학과의 샤오광 두안 교수와 샤오 루 등 연구진이 최근 국제 촉매 분야 저널 '화학 촉매반응(Chem Catalysis)' 에 발표한 것이다. 연구의 핵심은 '광촉매 플라스틱 광개질(photoreforming)'이다. 쉽게 말해, 폐플라스틱을 물속에 넣고 특수 나노 촉매를 더한 뒤 햇빛을 비추면 촉매가 빛 에너지를 흡수해 전자를 들뜨게 만든다. 이 전자가 플라스틱의 탄소-탄소(C-C), 탄소-수소(C-H) 결합을 끊는다. 플라스틱 사슬이 잘게 쪼개지면서 수소(H₂)가 발생하고, 남은 탄소는 유용한 연료나 화학 원료로 전환된다. 기존 물 분해 수소 생산은 물 분자의 산소 결합을 끊어야 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반면 플라스틱은 이미 에너지가 높은 유기 결합을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쉽게 분해된다. 연구진이 개발한 비결정질 니켈-인-황 기반 촉매(d-NiPS₃)와 황화 카드뮴(Cadmium Sulfide)을 결합한 시스템은 촉매 1g이 1시간에 약 0.08g(80mg)의 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이 반응을 100시간 이상 유지했다. 실험실 수준으로는 매우 높은 효율이다. 플라스틱 종류에 따라 생성물도 달랐다. 폴리에틸렌으로는 디젤 범위(C15~C18)의 올레핀 연료를, 페트(PET)로는 아세트산 등 화학 원료를, 혼합 폐플라스틱으로는 수소와 합성가스(Syngas)를 생산할 수 있다. 이는 비상시 도시에서 수거한 폐플라스틱을 현장에서 바로 연료 전환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연구진은 2030년까지 겉보기 양자수율(AQY) 10% 달성, 즉 들어온 햇빛 에너지의 10%를 실제 연료 생산에 활용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2040년까지 파일럿 플랜트 구축, 2050년 산업 상용화를 목표로 제시했다. ◇미생물이 먹어 치우는 리빙 플라스틱 두 번째 연구는 제시하신 중국과학원 산하 선전 고급기술연구원(SIAT)의 주오준 다이 교수팀이 지난달 'ACS 응용 폴리머 재료(ACS Applied Polymer Materials)'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기술은 플라스틱 내부에 살아 있는 미생물 포자(spore)를 넣어두는 방식이다. 평소에는 휴면 상태라 일반 플라스틱처럼 안정적이다. 그러나 폐기 후 48~50도 환경에 놓이면 플라스틱이 부드러워지고 포자가 깨어난다. 이후 미생물이 효소를 분비해 플라스틱을 스스로 분해한다. 연구진은 특히 고초균(Bacillus subtilis)이란 세균을 활용했다. 이 균은 안전성이 높고 내열성이 강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미생물 팀플레이'다. 한 균주는 플라스틱 사슬을 무작위로 절단하고, 다른 균주는 절단된 말단부터 차례로 분해한다. 마치 한 팀이 벽을 부수고, 다른 팀이 잔해를 치우는 식이다. 이 방식으로 연구팀은 생분해성 플라스틱인 폴리카프로락톤(Polycaprolactone, PCL)을 4~6일 만에 98% 이상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 분해 후 남는 물질은 대부분 저분자 화합물이라 미세플라스틱 축적 위험도 낮다. 이 기술은 웨어러블 센서, 의료기기, 일회용 전자소자처럼 사용 후 회수가 어려운 제품군에 특히 유망하다. ◇한국은 이미 '원료'를 갖고 있다… 문제는 전환 기술 한국은 매년 수백만 톤의 폐플라스틱을 배출한다. 분리배출 체계도 세계적 수준이다. 문제는 상당량이 저품질 재활용이나 소각으로 처리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에너지 안보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엄청난 전략 자원이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황에서는 폐플라스틱 기반 연료 생산이 긴급 대체 자원이 될 수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도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 보고한 '탈플라스틱 순환경제 전환 추진계획'에서 폐플라스틱 재활용을 높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플라스틱 1kg은 대략 10~12kWh 수준의 화학 에너지를 저장한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폐플라스틱은 사실상 거대한 '도시형 유전'이다. 정유시설이 멈춰도 지방 산업단지나 항만 인근에서 소규모 태양광 광촉매 반응기를 돌리면 수소와 액체 연료를 생산할 수 있다. 여기에 미생물 기반 분해 플랫폼을 결합하면 플라스틱 회수-분해-연료화의 순환 시스템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광촉매는 실제 폐플라스틱 속 색소와 첨가제에 약할 수 있고, 장기 내구성이 검증돼야 한다. 미생물 기술은 아직 범용 플라스틱(PE·PP) 적용성이 제한적이다. 경제성 분석과 전과정평가(LCA)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석유를 수입해 플라스틱을 만들고 버리는 시대에서, 버린 플라스틱을 다시 연료와 원료로 돌려쓰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햇빛과 미생물은 그 쓰레기를 다시 에너지로 깨우는 열쇠가 되고 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환경포커스] 플라스틱 일주일 멀리했더니 화학물질 수치 절반으로 뚝

플라스틱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다. 생수병과 음식 용기, 전자레인지용 식품 포장재, 샴푸와 화장품 용기까지 하루 24시간 대부분 플라스틱과 맞대고 산다. 플라스틱 과다 사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만 문제가 되는것은 아니다. 플라스틱 속에 들어 있는 프탈레이트, 비스페놀 같은 화학물질이 음식과 음료, 피부 접촉, 공기 흡입 등을 통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들 물질은 대표적인 내분비계 교란물질, 즉 환경호르몬으로 분류된다. 심혈관 질환, 대사증후군, 염증 증가, 인슐린 저항성, 호르몬 교란 등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꾸준히 보고돼 왔다. 그렇다면 정말 일상 속 플라스틱 노출을 줄이면 이러한 화학물질의 체내 농도도 빠르게 낮아질 수 있을까. 최근 호주 서호주대학교 연구팀이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국제 의학 저널인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연구진은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플라스틱 관련 화학물질을 생활 습관 변화만으로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검증했다. 그 결과, 단 7일 동안 '저(低)플라스틱 생활'을 실천한 결과, 소변 속 비스페놀A(BPA) 농도가 최대 60% 가까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참가자 전원에게서 플라스틱 화학물질 검출 연구진은 논문에서 “플라스틱 관련 화학물질은 거의 모든 사람의 체내에서 검출되고 있고, 음식은 가장 중요한 조절 가능한 노출 경로"라고 설명했다 . 연구팀은 먼저 호주 성인 211명을 대상으로 관찰 코호트(동일 집단) 연구를 진행했다. 참가자의 평균 연령은 43.1세였고 여성 비율은 58.3%였다. 모두 특별한 질환이 없는 건강한 성인이었다. 연구진은 참가자의 소변과 콧구멍 안 세척 시료를 분석해 플라스틱 관련 화학물질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모든 참가자가 최소 6종 이상의 플라스틱 관련 화학물질을 매일 배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요 노출원으로는 고도로 가공된 식품, 플라스틱 포장 식품, 통조림과 캔 음료, 샴푸와 화장품, 스킨케어 제품, 플라스틱 조리기구 사용 등이 확인됐다. 플라스틱(에폭시)으로 내부가 코팅된 통조림 식품을 하나 더 섭취할 때마다 소변 내 BPA 농도는 평균 14.3%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이후 연구진은 이들 중 60명을 선발해 본격적인 무작위 대조시험을 진행했다. 평균 연령은 47.6세, 여성 비율은 60%였고, 실험 기간 동안 탈락자는 한 명도 없었다 . 참가자를 총 5개 그룹으로 나누었고, 실험은 7일간 진행됐다. 첫번째 그룹은 저플라스틱 식단만 제공받았다. 두 번째 그룹은 저플라스틱 식단과 함께 유리·스테인리스·금속·나무 소재의 주방 도구만 사용했다. 세 번째 그룹은 평소 식단을 유지하되 샴푸·화장품·치약 등 개인 위생용품만 저플라스틱 제품으로 교체했다. 네 번째 그룹은 식단·주방도구·위생용품을 모두 저플라스틱 제품으로 바꿨다. 다섯 번째 그룹은 대조군으로 평소 생활을 그대로 유지했다 . 연구진은 실험 전과 실험 중, 종료 시점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소변 샘플을 채취해 프탈레이트와 비스페놀 농도를 정밀 측정했다. ◇'저플라스틱 식단'은 무엇이 달랐나 이번 연구의 핵심은 '저플라스틱 식단'이었다. 이는 단순히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연구진은 이를 '농장에서 식탁까지' 전 과정에서 플라스틱 접촉을 최소화한 식단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100명 이상의 농부와 식품 생산자가 참여했다. 우선 비닐 포장이 없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산지에서 직접 공급받았다. 플라스틱 포장이 된 식품은 최대한 배제했다. 통조림과 캔 음료는 완전히 제외했다. 연구진은 캔 내부 에폭시 코팅이 BPA 노출의 핵심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초가공식품도 제한했다. 패스트푸드·즉석식품·개별포장식품처럼 여러 단계의 가공과 포장을 거친 식품은 프탈레이트 노출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조리 환경도 바꿨다. 플라스틱 조리도구 대신 유리·스테인리스·금속 도구와 코팅되지 않은 나무 도구만 사용했다. 전자레인지 가열 역시 플라스틱 용기 대신 유리 용기로만 허용했다. 샴푸·바디워시·자외선차단제·립밤·면도기·치약 등 개인 위생용품도 저플라스틱 제품으로 교체했고, 메이크업 사용도 최소화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의 하루 총 칼로리 섭취량은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했다. 즉 '건강식 효과'가 아니라 플라스틱 노출 감소 자체의 영향을 보기 위한 설계였다. ◇단 7일 만에 BPA 59.7% 감소 결과는 뚜렷했다. 특히 저플라스틱 식단과 주방도구 교체를 함께 시행한 두 번째 그룹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났다. 소변 내 프탈레이트 대사체인 모노-n-부틸프탈레이트(MnBP)는 37.5% 감소했고, 모노벤질프탈레이트(MBzP)는 53.5%가 줄었다. BPA는 59.7%나 줄었다. 식단과 위생용품까지 모두 바꾼 네 번째 그룹에서는 MnBP가 44.1% 감소했고, 총 비스페놀 농도는 50.5% 줄어 종합적으로는 가장 큰 효과를 보였다. 반면 위생용품만 교체한 세 번째 그룹에서는 일부 프탈레이트만 감소했고, 비스페놀 변화는 크지 않았다. 연구진은 “식단 변화가 가장 강력한 개입 효과를 보였으며, 음식이 플라스틱 노출의 핵심 경로임을 확인했다"고 결론 내렸다 . 흥미로운 점은 체중·체성분·혈압·혈당·혈중지질·염증지표 등 주요 임상 바이오마커는 7일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번 실험이 다이어트나 체중 감량이 아니라, 체내 화학물질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단기간의 변화만으로 심혈관 질환 예방 효과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노출을 줄이면 염증 반응과 대사질환 위험 감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저플라스틱 습관 연구진은 완벽한 '플라스틱 프리' 생활보다 현실적인 노출 감소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선 통조림과 캔 음료를 줄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신선 식품이나 유리병 제품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BPA 노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가공식품 섭취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즉석식품, 패스트푸드, 개별 포장 식품은 프탈레이트 노출을 높인다. 전자레인지에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는 습관도 바꿔야 한다. 가열은 화학물질 이행을 촉진하기 때문에 반드시 유리 용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주방에서는 플라스틱 조리도구와 보관용기를 유리, 스테인리스, 나무 제품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 샴푸, 메이크업, 스킨케어 제품 역시 프탈레이트 노출과 밀접하다. 성분을 확인하고 사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연구진은 “완벽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줄이는 것만으로도 몸은 반응한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환경포커스] 동유럽에서 핵전쟁 벌어지면…전 지구 식량시스템 붕괴

지난 26일은 40년 전인 1986년 4월 26일 구소련(현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곳은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범하면서 벌어진 러-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러-우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때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지금까지 핵무기의 사용을 억제해 왔지만,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유럽이 핵 충돌의 위험지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술핵이나 소규모 핵 사용을 '제한적 핵전쟁'으로 표현하며, 그 피해가 특정 지역에 국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신 과학 연구는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를 보여준다. 핵전쟁은 결코 국지전에 머물지 않으며, 단 몇 개의 핵탄두만으로도 전 지구적 기후 붕괴와 식량 위기, 장기적인 방사능 오염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엑서터대학 수학·통계학과와 물리·천문학과 연구진은 지난 22일 동유럽 핵분쟁이 전 지구 기후와 방사능 확산에 미치는 영향을 정밀 분석한 논문을 네이처 계열의 국제저널인 'njp 클린 에너지'에 발표했다. ◇태양빛 잃은 지구, 핵겨울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연구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서 15킬로톤(kt)급 핵폭탄 100개가 폭발하는 시나리오를 설정했다. 15kt이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비슷한 규모다. 이 경우 약 5테라그램(Tg), 즉 약 500만 톤의 검은 탄소(Black Carbon)가 성층권으로 유입된다. 이 검은 탄소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다. 태양빛을 흡수하고 지구의 복사 균형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기후 교란 물질이다. 성층권에 도달한 검은 탄소는 태양광을 흡수해 주변 공기를 가열하고, 그 열로 인해 연기 구름은 더욱 높은 고도로 상승한다. 이렇게 올라간 입자는 비에 씻겨 내려오지 않고 수년 동안 대기 중에 머물며 지구 전체를 뒤덮는다. 그 결과 북반구 평균 기온은 사고 발생 1년 안에 약 1℃ 하락한다. 특히 대륙 내부 지역의 충격은 훨씬 크다. 러시아는 평균 5℃, 미국은 약 4℃의 급격한 기온 하락을 겪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겨울이 길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농업 생산, 수자원 공급, 생태계 안정성이 동시에 흔들리는 구조적 기후 위기다. ◇식량 시스템의 붕괴, 핵전쟁은 기근으로 이어진다 기온 하락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햇빛과 비가 줄어드는 것이다.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 복사 에너지는 미국 전역에서 ㎡당 약 30W가 감소한다. 햇빛이 줄어들면 작물의 광합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곡물 생산량은 빠르게 감소한다. 강수량 감소는 더욱 심각하다. 북반구 중위도 농경지의 강수량은 평균 40% 감소하며, 일부 지역은 최대 80%까지 줄어든다. 특히 아시아와 서아프리카 지역은 농업 기반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흉작이 아니라 전 세계 식량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한다. 식량 부족은 곧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빈곤 국가의 기근, 대규모 난민 발생, 국제 분쟁 확산으로 연결된다. 핵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전장이 아니라 식탁이 될 수 있다. 연구진은 이러한 기후 교란이 열대수렴대(ITCZ)를 남쪽으로 밀어내며 전 지구적 물 순환을 왜곡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후 시스템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데는 최소 6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핵전쟁은 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수년간 이어지는 느린 붕괴다. ◇방사능은 국경을 넘는다…즉각적 피폭과 장기 오염 핵폭발 직후의 방사능 피해는 더욱 직접적이고 치명적이다. 이번 연구에 따르면 폭발 후 48시간 이내에 약 100만 명이 급성 방사선 증후군을 유발하는 1시버트(Sv, 방사능 단위) 이상의 고선량 방사선에 노출된다. 이 가운데 약 17만 명은 중증 방사선 질환을 겪게 되며, 특히 10시버트 이상의 치명적인 선량을 직접 받는 약 8만 명은 적절한 의료 조치가 없을 경우 사실상 생존이 어렵다. 치명적 수준인 5시버트 이상의 방사능 오염 구역은 약 3500㎢에 달한다. 이 지역은 장기간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방사성 물질은 성층권의 대기 순환을 타고 적도를 넘어 남반구까지 확산된다. 연구진은 사고 발생 10년 후 방출된 낙진의 약 40%가 남반구에 퇴적될 것으로 분석했다. 핵전쟁은 특정 국가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오염시키는 장치다. 일반적으로 흉부 X-레이 1회 촬영할 때 노출되는 방사능은 약 0.1 mSv(밀리시버트(1 mSv = 1000분의 1 Sv)이고, CT 촬영도 1회 당 수 mSv~수십 mSv 정도에 노출된다. 일반인(방사선 작업자가 아닌 사람)의 경우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가 제시한 권고 기준은 연간 1다. X선·CT 검사처럼 의료 목적으로 노출되는것 외에 추가로 노출되는 방사능 수준을 말하고, 보통 이 기준 이하일 경우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보통 한 번에 약 1시버트(Sv), 즉 1000mSv 이상에 노출되면 급성 방사선 증후군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한적 핵전쟁'이라는 착각…핵무기는 결코 국지적이지 않다 이번 엑스터대학 연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제한적 핵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유럽에서 핵탄두 100개가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특정 국가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감당해야 할 기후 재난이 된다는 것이다. 식량 안보는 무너지고, 기후 시스템은 흔들리며, 방사능 오염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경제적 충격과 정치적 불안정까지 고려하면 피해는 사실상 문명 전체의 위기로 확장된다. 핵무기는 군사적 수단이 아니라 문명 파괴 장치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핵 억제와 군비 통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핵무기의 사용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반인류적 행위다. 40년 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재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비극을 단순히 과거의 역사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얻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건강한 생태계가 기업 자산”…정부, 생태계 계정 구축에 나선다

글로벌 생활소비재 기업 유니레버는 지난 2018년 이후 팜유 공급망에 위성 추적 시스템과 '산림 파괴 금지' 정책을 도입했다. 2020년 기준 약 95%의 원료를 추적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해 열대우림 훼손 논란을 줄였다. 글로벌 식품·음료 기업인 네슬레 역시 지난 2019년 '산림 파괴 제로'를 선언한 뒤, 커피·코코아 재배지에 재생농업과 혼농임업을 도입했다. 재생농업은 토양 건강과 생태계 기능을 회복하는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이고, 혼농임업은 농작물과 나무를 함께 재배해 생물다양성과 탄소 흡수를 높이는 토지 이용 방식이다. 네슬레는 이를 통해 2022년까지 주요 공급망의 90% 이상을 모니터링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 실제로 생물다양성이 회복된 성과도 확인했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들이 자연자본(Natural Capital) 관리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후 리스크와 생물다양성 손실이 기업 경영에 막대한 영향을 주면서 자연을 더 이상 외부 변수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자본은 숲·토양·물·생물다양성 등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과 생태계 서비스의 총합으로, 인간의 경제 활동과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는 자산이다. 국내에서도 자연자본을 정량화해 경제 시스템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국가 정책과 기업 경영 모두에서 '생태계 계정(Ecosystem Accounting)'이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생태계 계정' 구축 추진…자연을 경제 지표로 통합 최근 한국환경연구원(KEI)은 이현우·이승준 선임연구위원 등 연구팀이 작성한 '생태계 계정 구축 및 생물다양성 주류화 정책 개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국가 차원의 생태계 계정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생물다양성 가치를 정책 전반에 반영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특히, 자연의 비(非)시장적 가치를 정량화해 경제 지표와 연계함으로써, 환경과 경제를 통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통계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연구팀은 2030년까지 단계별로 진행될 생태계 계정 구축 로드맵을 수립하고, 생태계의 규모, 상태, 서비스, 자산을 아우르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안했다. 보고서에서 말하는 생태계 계정은 생태계의 규모(extent), 상태(condition), 서비스(service), 자산(asset)을 포괄적으로 측정해서 이를 경제 지표와 연계하는 '공간 기반' 통합 통계 체계다. 이 보고서는 기존 국민계정체계(SNA)가 반영하지 못했던 공기 정화, 수질 개선, 홍수 조절과 같은 비시장적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를 계량화하는 데 생태계 계정의 본질적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보고서는 생태계 계정이 단순한 환경 통계를 넘어 정책 의사결정의 핵심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자본과 생물다양성 정보를 경제 활동과 연계함으로써, 개발과 보전 사이의 의사결정을 보다 정량적이고 객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2030년 완성 목표…3단계 로드맵 추진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생태계 계정 구축 사업은 '제5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2024~2028)'에 근거해 2030년까지 완성을 목표로 추진된다. 우선 1단계(2025~2027년)는 실험 단계로, 계정 구축 로드맵을 수립하고 일부 계정을 시범적으로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이 과정에서 관계부처 협의체 구성과 플랫폼 설계가 병행된다. 2단계(2028~2030년)는 본 구축 단계로, 규모·상태·서비스·자산 계정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통합하는 국가 생태계 계정 플랫폼이 완성된다. 이 단계에서는 생물다양성이나 탄소 저장량 등 주제별 계정도 함께 구축된다. 마지막 3단계(2031~2033년)는 고도화 단계로, 계정의 정밀도를 높이고 이를 국가 승인 통계로 전환하는 한편, 제도적 활용 기반을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정책 추진의 법적 근거는 '환경정책기본법' 제9조인데, 정부가 환경과 경제를 통합적으로 평가하는 지표를 개발하고 정책에 활용해야 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생태자산 종합평가' 기법을 중요한 정책 도구로 제시한다. 이는 토지피복 기반 데이터를 활용해 사업 전후 생태자산의 변화를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종 중심 평가를 넘어 생태계 기능과 서비스까지 포함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방식은 환경영향평가나 개발사업 타당성 검토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으며, 자연자본의 총량 유지라는 정책 목표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으로 평가된다. ◇해외에서는 기업의 의사결정 도구로 활용 해외 주요 국가들도 생태계 계정을 정책·재정·기업 의사결정에 직접 활용하는 도구로 발전시키고 있다. 생태계 계정을 공공·기업·금융이 함께 활용하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자연자본을 정책 평가 체계에 통합한 대표적 사례로 영국을 들 수 있다. 재무부의 공공사업 평가 지침인 '그린북(Green Book)'에 자연자본 개념을 반영, 개발사업의 비용·편익 분석에 생태계 서비스 가치를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매년 자연자본 계정을 발표해 대기 정화, 탄소 저장 등 서비스 가치 변화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생태계 계정을 제도적으로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통합 자연자본 계정(INCA)을 통해 생태계 서비스 변화의 원인을 분석하고 정책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최근에는 회원국에 관련 통계 제출을 요구하는 규정을 도입해 사실상 '자연자본 회계의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자연자본을 국가 경제 통계에 포함시키는 전략을 추진 중이고, 호주는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등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생태계 계정을 구축한 뒤 이를 국가 단위로 확장하고 있다. 종합하면 해외 사례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자연자본을 '정책 의사결정 변수'로 편입했다는 점, 둘째, 공간 기반 데이터로 정량화했다는 점, 셋째, 공공·기업·금융이 함께 활용하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 등이다. ◇TNFD 공시와도 연계돼…'데이터 기반 자연 리스크 관리' 이 같은 국가 차원의 생태계 계정 구축은 기업이 직면한 새로운 공시 체계인 '자연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 (Taskforce on Natur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 TNFD)'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생태계 계정이 향후 기업의 TNFD 공시 대응에서도 핵심 인프라로 작용할 수 있다. TNFD는 기업이 자연자본에 대한 의존성과 영향, 그리고 이에 따른 재무적 리스크와 기회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국제 프레임워크로, 2021년 출범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과 규제 환경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보고서에서도 지적하듯, 생태계 계정은 이러한 TNFD 공시에 필요한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게 된다. 국가 단위에서 구축되는 공간 기반 생태계 데이터는 기업이 사업장과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자연 의존성과 영향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TNFD의 핵심 방법론인 LEAP 접근법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 단계는 '자연과의 접점 파악'인데, 이때 국가 생태계 계정 데이터가 사실상 기준점 역할을 하게 된다. LEAP은 Locate(위치 파악, 자연과의 접점 식별), Evaluate (의존도 및 영향 평가), Assess(리스크와 기회 분석), Prepare(대응 전략 수립 및 공시 준비)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신한금융그룹, 포스코홀딩스, SK증권, KB금융그룹 등 선도 기업들이 TNFD 권고안을 반영한 보고서를 발간하며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대신경제연구소가 2024년 12월 발간한 '생물다양성 위험과 기업 공시 현황' 보고서 등에 따르면, 상당수 국내 기업의 공시는 여전히 단순한 친환경 캠페인이나 서식지 복구 활동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도 하다. ◇“자연자본을 재무 리스크로 인식해야" 전문가들은 기업의 대응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활동이 단순한 사회공헌이나 환경 캠페인 수준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자연자본을 재무적 리스크이자 자산으로 인식하고 경영 전략에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우선 자사 사업과 공급망이 어떤 생태계 서비스에 의존하는지 파악해야 하고, 동시에 사업 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계량화해야 한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리스크를 평가하고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또한 국가 생태계 계정 플랫폼에서 제공될 표준화된 지표를 활용하면, 기업은 자연자본 관련 성과를 보다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외부 공시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이는 향후 투자 유치, 글로벌 공급망 참여, 규제 대응 측면에서 중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자연자본과 생물다양성 이슈에 대한 산업계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에너지경제신문과 환경재단은 오는 22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2026 ESG 생물다양성 및 자연자본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포럼은 개막식과 함께 △국립생물자원관이 주관하는 '자연자본 공시와 측정 동향' △국립생태원이 주관하는 '기업과 생물다양성: TNFD와 지속가능경영' △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주관하는 '지속가능성 공시 성공적 안착' 등 3개의 세션이 열려 자연자본 공시(TNFD 공시) 대응 전략을 중심으로 기업과 전문가 간 논의가 진행된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유해중금속 수은 함유 치과 아말감 폐기물 여전히 관리 사각지대

해양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고래와 돌고래 등 해양 포유류에서 수은 농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면서, 전 지구적 수은 오염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유럽 연안의 상괭이를 대상으로 한 장기 조사에서는 간 내 수은 농도가 수십 년간 꾸준히 상승해 면역 기능 저하와 감염 위험 증가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수은은 대기 중으로 배출된 뒤 장거리 이동을 거쳐 해양으로 유입되는 특성이 있어 석탄 연소 등 산업 활동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실제로 태평양 어류에서 검출되는 수은의 상당 부분이 대기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기 배출 못지않게 일상적인 생활·의료 활동에서 발생하는 '비가시적 수은 오염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치과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말감 폐기물이다. ◇“치과 진료실에서 바다로" 이 같은 문제의식은 최근 국내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됐다. 영남대 의대 치과학교실 강소희 교수팀은 최근 '대한구강보건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국내 치과 진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은 배출량을 최초로 정량화했다. 연구팀은 2014~2018년까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 데이터와 실제 아말감 무게 측정값(아말감 1개 평균 무게 0.2g, 수은 함유량 50%)을 결합해 분석한 결과, 국내에서 매년 약 93.4kg의 수은이 아말감 제거 과정에서 환경으로 방출되고 있다고 추정했다. 이는 수은이 포함된 형광등 900만 개에서 최대 1800만 개를 매년 폐기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다. 문제는 이 수은이 대부분 별도의 처리 없이 배출된다는 점이다. 현재 치과에서 제거된 아말감은 미세 입자로 분해돼 하수로 흘러들어가거나, 일반 의료폐기물과 혼합돼 소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수은은 대기 중으로 다시 확산되거나, 수계로 유입돼 메틸수은으로 전환된 뒤 먹이사슬을 따라 축적된다. 결국 인간의 식탁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다. ◇수은, 인체와 생태계에 '지속적 독성' 수은은 대표적인 잔류성 중금속으로, 자연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생물 농축을 통해 점점 농도가 높아지는 특성을 가진다. 특히 유기수은인 메틸수은 형태로 전환될 경우 신경독성이 매우 강해 중추신경계 손상을 유발하며, 태아와 영유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성인의 경우에도 심혈관계 질환, 면역 기능 저하, 발암 가능성 등이 제기된다. 치과용 아말감은 금속 수은이 은·주석 등과 결합된 합금 형태(수은이 약 50% 차지)로 존재하는데, 대부분 고체 상태로 안정화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용 환경에서는 극미량의 수은 증기가 방출될 수 있으나, 현재까지의 의학적 평가에서는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준은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말감에서 떨어져 나온 금속 수은은 체내에서 일부가 무기 수은으로 전환될 수 있지만, 이 역시 통상적인 노출 수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말감 조각을 삼키는 경우에도 대부분 흡수되지 않고 배출되기 때문에 건강 위험은 낮은 편이다. 그러나 아말감 폐기물이 환경으로 방출되면 미생물 작용으로 메틸수은으로 전환되고, 먹이사슬을 따라 농축되어 인체에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수은 관리 정책은 뚜렷한 불균형을 보인다. 정부는 미나마타 협약 이행의 일환으로 수은 함유 의료기기 관리에는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2022년부터 수은 체온계와 혈압계 사용이 전면 금지됐고, 환경부는 '거점 수거' 방식으로 폐기물을 회수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지자체에서는 개별 처리 시 건당 약 200만 원에 달하던 폐기 비용을 약 7만 원 수준으로 낮추며, 최대 96%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치과용 아말감 폐기물은 이러한 체계에서 사실상 제외돼 있다. 형광등이나 배터리처럼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로 관리되지도 않고, 별도의 분리 배출 기준이나 회수 시스템도 마련돼 있지 않다. 연구팀은 “치과 진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은이 상당량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제도적 관리가 전무한 상태"라며 “명백한 환경 관리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사용 줄었지만 배출은 계속"…2030년대까지 위험 지속 일각에서는 아말감 사용이 줄고 있다는 점을 들어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국내 아말감 사용량은 감소 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미 시술된 아말감의 평균 수명이 약 10년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상당 기간 제거 작업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즉, 사용은 줄어도 '배출'은 오히려 장기간 이어지는 구조다. 연구팀은 “2030년대까지도 아말감 제거로 인한 수은 배출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지금 관리 체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누적 오염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사회는 이미 보다 강력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미나마타 협약 당사국들은 최근 회의에서 2034년까지 치과용 아말감 사용을 전면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유럽연합(EU)은 어린이와 임산부에 대한 아말감 사용을 금지했고,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치과에 수은 회수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반면 한국은 사용 저감 정책은 일부 진행됐지만, 폐기 단계 관리에서는 여전히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해결 위해 “분리·회수·교육" 3축 필요 전문가들은 아말감 수은 오염을 줄이기 위한 해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치과에서 제거된 아말감을 일반 폐기물과 분리하도록 하는 법적 지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하수로 유입되는 미세 입자를 95% 이상 포집할 수 있는 아말감 분리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거나 강력히 권장해야 한다. 셋째, 의료진을 대상으로 수은 노출 위험과 폐기물 처리 방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의료기기에서 성공을 거둔 '거점 수거' 모델을 아말감에도 적용하는 방안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번 연구는 그동안 간과돼 온 치과 진료실 내 수은 배출을 정량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구팀은 “미나마타 협약의 실질적 이행은 눈에 보이는 산업 배출뿐 아니라, 일상 속 미세 배출원까지 관리할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 미나마타협약 수은과 그 화합물이 인체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마련된 국제 협약이다. 이 협약은 일본의 미나마타병 사건을 계기로 수은 오염의 위험성이 전 세계적으로 인식되면서 추진됐는데, 2013년에 채택되고 2017년에 발효됐다. 협약의 핵심 목적은 수은의 전 생애주기, 즉 채굴·사용·배출·폐기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각국은 수은 채굴을 제한하고, 수은을 포함한 제품과 공정의 사용을 단계적으로 줄이거나 금지하며, 대기와 수질로 배출되는 수은을 감축해야 한다. 특히 치과용 아말감과 같은 수은 함유 제품에 대해서는 사용을 점진적으로 줄이는 '단계적 감축(phase-down)'을 기본 원칙으로 하되, 최근에는 일부 분야에서 '단계적 퇴출(phase-out)'로 강화되는 추세다. 한국은 2014년에 협약에 서명하고 이후 비준을 완료했으며, 수은 함유 의료기기 사용 금지과 배출 관리 강화 등 국내 이행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폭우 감당 못하는 하수도, 공항 날아드는 새떼…“기후·생태 관점 인프라 재설계 필요”

비만 오염 빗물과 오염수가 섞여 하천으로 넘치는 하수도. 철새가 몰려들어 항공기와 조류 충돌 위험이 커지는 공항…. 인프라의 설계와 운영·관리가 부실하면 생태계 피해와 더불어 사람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한다. 지난 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환경연구원(KEI)의 '2026년 국토환경연구본부 성과보고회'에서는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물관리와 인간-자연 공존 전략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 이날 행사는 2025년 한 해 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이를 실제 정책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비 오면 넘치는 하수…도시 인프라의 한계 드러나다 첫 번째 세션 '미래에 대응하는 물관리 전략'에서는 강우 시 합류식 하수도에서 미처리 하수가 하천으로 유입되는 합류식 하수도 월류수(CSOs) 문제가 핵심 의제로 제시됐다. 김호정 KEI 물관리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비 오면 넘치는 하수, 하천으로 흘러들게 둘 것인가'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에서, 국내 주요 도시가 여전히 오수와 빗물을 함께 모으는 합류식 하수도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구조에서는 집중호우 시 하수 처리 용량을 초과한 오염수가 별도의 처리 없이 하천으로 방류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유기물뿐 아니라 의약물질, 미세플라스틱, 타이어 마모 부산물과 같은 미량오염물질이 그대로 하천에 유입되고, 수생태계의 건강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 어류 폐사와 수질 악화는 물론, 시민의 친수 공간 이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수돗물 생산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단순한 시설 부족이 아니라, 과거 강우 패턴을 기준으로 설계된 도시 인프라가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강우를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하수도 정비에서 '통합 수질관리'로의 전환 KEI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하수도 정비 중심 접근을 넘어선 다층적 전략을 제시했다. 우선, 관로 점검과 정비, 준설, 도로 청소 등 유지관리 중심의 비구조적 대책을 통해 오염원의 유출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규모 투자 이전에 가장 효율적으로 오염 부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동시에 CSO 저류시설과 대심도 지하터널 구축과 같은 구조적 대책을 병행해 미처리 하수의 직접 방류를 물리적으로 차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연구위원은 “기존 하수도 시스템의 저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수토실(雨水吐室) 제어 시스템 등 스마트 운영 기술을 도입하고, 도시 전반에는 저영향개발(LID)과 같은 그린 인프라를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빗물의 침투와 지연을 유도해 하수관로의 부담을 분산시키는 방식이다. 우수토실은 합류식 하수도에서 우천시에 일정량의 하수를 모아들여 하수처리장으로 보내고 나머지 하수를 하천 등의 수역으로 방류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물환경보전법 개정을 통해 미처리 하수의 공공수역 배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공공수역으로 배출하더라도 강수량 등 기준에 해당할 때만 배출하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배출 때 생태독성과 미생물까지 포함해 포괄적인 수질관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아울러 기후변화로 인한 불확실성에 대응해 '추가 여유량(Headroom)' 개념을 도입해 인프라 설계 기준 자체를 상향하고, 과학적 재정 추계를 기반으로 단계적 투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제안도 이어졌다. ◇“새를 쫓는 시대는 끝났다"…공항 인프라도 재설계 대상 이날 행사의 두 번째 세션 '인간과 자연의 공존 전략'에서는 인간과 야생동물 간 충돌 문제, 특히 항공기와 조류 충돌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이후승 KEI 자연환경연구실장은 '조류충돌 대응, 생태안전 정책으로 전환하다'라는 발표에서 공항 안전 문제를 단순한 운영 리스크가 아닌 생태계 관리 실패의 결과로 해석했다. 공항 주변 습지와 농경지 감소, 먹이 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조류의 이동 경로와 행동 패턴이 불안정해지면서, 항공기와의 충돌 위험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KEI는 기존의 단순 퇴치 방식에서 벗어나, 공항 외부로 조류의 활동을 유도하는 '단계적 서식지 이주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공항 주변에 임시 서식지를 순차적으로 조성해 조류의 이용 빈도를 점진적으로 공항 밖으로 이동시키자는 것이다. 생태적 특성을 고려한 장기적 관리 전략인 셈이다. 이와 함께 공항 개발 및 운영 과정에서 조류 생태를 정밀하게 조사하고, 환경영향평가에 생태 위험 분석을 포함하는 등 과학적 관리 기준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됐다. ◇갈등에서 공존으로…생태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 같은 세션에서 홍현정 KEI 부연구위원은 “인간과 야생동물 간 갈등이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피해 유형도 농작물에서 인명과 사회 기반시설로 확대되고 있다"고 빍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갈등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축적하는 '갈등 사고 인벤토리' 구축, 보호구역과 완충구역을 구분하는 공간적 관리, 경제적 인센티브 제도 도입, 그리고 인공지능(AI) 기반 감시 기술 활용 등 종합적인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피해를 줄이는 접근을 넘어,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인프라 '보완' 수준이 아니라 '재설계'가 필요 이번 성과보고회는 하수 월류와 조류 충돌이 별개의 문제이지만, 공통적으로 기후변화-생태계변화가 기존 도시 인프라와 일치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인프라는 안정적인 기후와 예측 가능한 환경을 전제로 설계됐지만, 오늘날의 기후위기는 이러한 전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 결과, 잦은 폭우와 극한강우로 하수도는 넘치게 되고, 야생동물은 인간의 공간으로 침투해 공항과 같은 핵심 인프라조차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결국 기후위기 시대에는 기존 인프라를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는 수준을 넘어, 물·생태·도시를 통합적으로 고려한 '인프라의 재설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홍균 KEI 원장은 “기후위기와 생태계 변화, 도시환경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단일 분야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물·자연·도시를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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