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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멈춰진 진실: 대한민국의 123일과 AI의 교훈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4년 12월초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뒤이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 소추 발의,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다다르는 123일 동안 대한민국은 극도의 혼란과 법적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대중의 불안과 추측이 난무하는 사회적 긴장과 금융 및 경제의 침체속에 정치적 분위기는 극도로 얼어 붙었다, 한국 현대사의 이 모호한 시기에, 하나의 질문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사회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멈추어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I am stopped, but what shall happen around us?)" 한국이 민주주의 제도의 역할과 법적 해석을 둘러싼 내부 논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글로벌 인공지능(AI)은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OpenAI가 다중모달 기능을 크게 개선한 언어모델을 발표했고, 유럽은 'AI법(AI Act)'을 제정하며 글로벌 규제를 선도했으며, 중국 등 여러 나라는 국가 차원의 AI 거버넌스 체계를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산업 자동화와 정책 수립에서 AI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며 혁신을 이어갔지만, 한국은 내부 논쟁과 사회적 양극화에 휩싸여 한발짝도 꼼짝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멈춰진 상황은 우리 사회가 가졌던 기존 제도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진실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래를 되찾기 위하여 시민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게 하였다. 모든 AI 연구자들이 알고 있듯이, 대형 언어모델은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일으킨다. 이 모델들은 사실과 다른 정보를 거침없이 자신있게 생성한다. 이는 모델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학습 데이터에 기반하여 개연성 높은 다음 단어들을 예측한 결과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역시 스트레스 상황에서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이를 '기억의 혼동(confabulation)'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외상, 불확실성, 상충되는 정보에 직면했을 때, 심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123일 동안 양극화된 해석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어떤 이들은 탄핵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들은 대통령직의 법적 근거 자체를 문제 삼았다.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긴장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결국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 시점에는 이미 여론이 확고하게 양분된 상태였다. 객관적 사실(facts)은 감정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narratives)들과 경쟁해야 했다. AI의 환각과 인간의 기억 혼동은 발생 원인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위험을 갖는다. 둘 다 진실 그 자체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AI 연구 공동체는 '환각' 현상을 줄이는 데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사회적 진실 관리 측면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모델이 문제를 단계별로 사고하도록 유도하면 정확성과 일관성이 향상된다(Chain-of-Thought Prompting)든가, 검증된 외부 데이터베이스와 모델의 출력을 연결하면 사실 기반의 정보를 더욱 견고히 확보할 수 있다(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또한 모델이 지나친 확신을 피하고 불확실성을 명확히 표현하도록 훈련시키면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Calibration). 이외에도 극단적이고 의도적인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모델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전체 시스템의 강인성을 개선할 수 있다(Adversarial Testing)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접근법은 단순한 기술적 기법을 넘어, 하나의 철학을 나타낸다. 즉, 지능의 목표는 단순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추론'(verifiable reasoning)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계의 오류가 설계를 통해 줄어들 수 있다면, 인간의 인지적 편향도 유사한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집단적 추론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를 통해 '시민적 기억(civic memory)'을 개선할 수 있다. AI 연구에서 얻은 영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공공기관은 의사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판결, 정책 변화, 제도 개편 등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가능한 한 공개해야 하며(시민 사고의 연쇄 유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와 공개 증언, 연대표,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아야 한다(기억 검색 시스템 구축). 또한 교육을 통해 인식론적 겸손을 장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얼마나 확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확신 조절 교육). 나아가 공공 담론에서 대중의 서사를 구조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조직된 반론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집단 레드 팀 운영). 이러한 원칙들은 추상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적 인식 회복을 위한 실천적 설계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AI 기술을 선도할 역량이 충분하다. 그러나 진정한 선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공동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기반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비전을 제안한다. (1) 국가 기억 관측소 구축: AI를 활용해 허위 정보의 유통 경로와 집단 기억 왜곡을 추적하는 공공 플랫폼 마련 (2) 인지 건강 지표 도입: 경제적 사회적 지표와 함께 대중의 신뢰도, 믿음의 정확성, 사회적 양극화 정도 등을 정기적으로 측정하여 관리한다. (3) 대화형 시민 AI 시스템 운영: 국가의 사법·역사·행정 데이터에 기반한 대형 언어모델을 활용하여 시민 교육과 공공 담론을 강화한다. (4) 기억의 성찰을 위한 국가적 의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참여 할 수 있도록 AI 도구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행사와 다중 관점의 디지털 플랫폼을 운영한다. 이러한 노력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 “기억"은 곧 국가 기반 시설(epistemic infrastructure)이다. 김한성

[신연수 칼럼] 대한국민, 폭싹 속았수다

기우였다. 헌법재판소가 5대 3으로 갈려 탄핵 선고를 하지 못한다는 우려, 4대 4로 기각되리라는 예상, 모두 빗나갔다. 재판관 8명의 성향은 각기 달랐지만, 윤석열이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해 파면해야 한다는 결론은 전원일치였다. 돌아보면 헌재의 선고가 늦어지면서 재판관들이 진영으로 갈렸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헌재 폐지론까지 나왔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보다 공적 책임과 법리를 우선했고,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 중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가 사법체계에 대한 조롱과 불신이었다. 대한민국 검찰총장 출신인 대통령 윤석열의 헌법 무시와 아전인수식 법 해석은 심각했다. 법치주의를 제일 중시해야 할 보수정당 국민의힘은 대놓고 법원과 판사를 공격했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재판을 지연시키고, '정치 검찰'이란 비판 뒤에 숨어 여러 가지 범죄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치인들의 이런 행동은 국민들에게까지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헌재의 이번 선고로 가장 첨예했던 불신이 해소됐다고 해서, 모든 걸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흔들었던 정치인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논란이 많은 헌재 재판관 임명 제도나, 문재인 정부 시절 졸속한 공수처 입법으로 대통령 수사와 기소에 혼란을 일으킨 사법체계도 세심하게 손봐야 할 것이다. 123일간 드러난 우리 사회의 아픔 두 번째는 극단적인 사회 분열이다. 헌재 근처와 용산, 광화문 일대는 날마다 찬반 집회로 몸살을 앓았고, 부모 자식 간에도 정치적 견해 차이로 등을 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당시엔 회복하기 어려워 보이던 극심한 갈등도 다행히 선고 이후엔 잦아들고 있다. 아직 일부 극단층이 현실을 부정하지만 대부분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조사한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겠느냐"는 질문에 국민의 77% 라는 압도적 다수가 “수용하겠다"고 답했다. 그동안 불거진 분열과 갈등을 긍정적 참여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일만 남았다. 세 번째로 아픈 부분은 정당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대한 깊은 회의다. 정당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은 법치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삼각대다. 그러나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발목을 잡는 지옥도를 우리는 3년 가까이 지켜봤다. 민주당과 국힘은 내가 잘해서 표를 얻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에서 이득을 얻는 '적대적 공생'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관용과 자제, 타협이 없는 양당 대립이 줄탄핵과 줄거부권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이없는 파국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부정선거론 같은 가짜뉴스들이 언론자유의 틈새를 비집고 독버섯처럼 기생했다. 얻은 것도 있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 줄 알았던 젊은이들이 광장 전면으로 나왔다. 계엄령 시행에 소극적이었던 군인들, 그리고 촛불혁명을 '빛의 혁명'으로 이어받은 청년들은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체득한 MZ세대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청년들의 참여를 좋은 정치 문화로 이어갈 책임이 기성세대에게 있다. 유튜버나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어지럽히고 단물만 빼먹는 가짜뉴스에는 책임을 묻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도 있다. 탄핵 전과 후는 달라야 한다. 정책이 아니라 정당과 인물에 대한 호감도로 뽑는 미인대회 식 선거제도와 정치체제를 보완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뽑았다가 다시 파면시키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는가. 아픔을 도약의 기회로 전환할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MIT 교수는 저서 에서 독재 국가와 무정부 상태 사이에 '자유로 가는 좁은 회랑'이 있다고 했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지만, 강력한 국가를 통제하려면 강력한 시민사회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1987년 민주화를 이루고도 계속 고단한 길을 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강한 회복력을 가진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동안 동네 식당들은 텅텅 비고 직장인들은 불안감에 일손을 놓았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고통과 갈등, 눈물과 환호를 거치며 우리는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맬 힘을 얻었다. 최근 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폭싹 속았수다'(제주도 사투리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위로다. 신연수 기자 ysshin@ekn.kr

[이슈&인사이트]트럼프 관세 드라이브, 미국에 부메랑 될 것

전통적으로 미국은 '위대하고 특별한 나라'라는 신념에 입각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 이타적인 정책을 전개해 왔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관세 드라이브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다. 우방국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공세적인 정책을 전개해고 있는데, 먼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위반하면서까지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다. 더구나, 불법이민자 축소 등 특정 정책목표와 연계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는데, 콜롬비아에 대한 관세부과는 대표적인 예다.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에 이어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드디어 2일(미국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했다. 발효일인 9일부터 실질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국가별 상호 관세율은 한국 25%, 중국 34%, 유럽연합(EU) 20%, 일본 24%, 인도 26%, 베트남 46%, 대만 32%이다. 또 태국에는 36%, 스위스 31%, 인도네시아 32%, 말레이시아 24%, 캄보디아 49%, 영국 10%, 남아프리카공화국 30% 등이 적용된다. 중국, EU 등이 맞대응을 예고하면서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했던 글로벌 통상 질서가 급변할 전망이다. 관세 부과는 미국에 이득이 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데,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선거 운동 중 '임기 첫날'에 물가를 잡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이 공염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관세를 매기는 목적은 제조업·첨단산업 등을 육성하고 관세를 통해 증가된 세수는 법인세 인하 등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는 것이라고 하나, 벌써 경제 침체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상대 국가들이 맞대응하게 되면서 수출 타격을 불러오게 된다. 결국, 트럼프의 관세 드라이브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미국 경제는 나쁘지 않다.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고용지수도 좋으며, 주가는 매우 높다. 무리하게 관세라는 구닥다리 무기를 휘두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싸구려 부동산 업자 출신 트럼프의 보여주기식 과시욕 때문이다. 우방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 반미 정서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미국으로 가는 여행객이 감소하고 있어, 여행수지가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지도적 위치가 흔들릴 것이다. 그로 이로 인한 빈자리를 중국이 노릴 것이다. 지난 3일 세종연구소 개최 포럼에 참석한 찰슨 플린 전 미대평양육군사령관이 트럼프 정책으로 “America is not alone."(미국이 외토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세계 지도 국가에게 이러한 우려가 제기된 것만 해도 심각한 것이다. 우리가 더 걱정이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이 글로벌 수준으로 확대되고 국제 교역은 '빙하기'에 진입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수출 중심의 경제체제인 한국으로서는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다. 가장 직접적 영향으로는 대미 수출 타격이 우려된다. 주요 대미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반도체, 석유제품, 배터리 등인데, 특히 자동차 수출이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멕시코·캐나다·베트남 등 한국기업이 다수 진출한 지역에 고관세가 부과되어 한국 기업 수출에 영향을 받음은 물론, 중간재 수요 감소에 따른 한국산 중간재 수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국가적 리더십 공백인 상황에서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로 인해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미국과의 새로운 통상 규칙을 수립해야 하는 동시에, 글로벌 관세전쟁 격화 대응에 비상이 걸리게 됐다. 상호관세율이 일본은 24%인 데 비해 한국은 25%로서 1% 더 높다. 관세전쟁 상황에서 리더십 부재는 뼈아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 업계, 노동계 모두가 비상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야당 등 정계도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이강국

[EE칼럼] 기본에 투자 없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한된 재화를 많은 사람이 동시에 원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예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서는 긴급성과 파급효과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서 일의 우선순위와 예산 투입의 규모를 정한다. 선정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정량화 지표를 사용하여 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평가되는 분야인 상위 1~3등에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아래 넘치는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문제점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매년 반복되면 4등 이하는 수십년이 지나도 선정되지 못해 예산 배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어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정량화 지표를 믿는다고 치다. 그럼 4등을 하면 4년 뒤에 예산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매년 4등에 해당하는 예산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 과연 어떻게 소중한 국가 예산을 할당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처럼 선택과 집중으로 1~3등에게만 예산과 관심을 주면 항상 일정한 비율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당장 급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10년이 지나도 예산과 관심은 받을 수 없다. 여기엔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획일주의도 한몫한다. 10가지 분야와 주제가 정해지면 1/N 나누어 배분하는 식이다.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배분하면 된다. 이렇다 보니 장기적으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매번 같은 중요도로 낮은 순위로 평가되는 분야는 수십 년이 지나도 관심과 지원을 받을 기회가 없을 수 있다. 이런 분야가 바로 국가 에너지자원 분야이다. 당장은 지원이나 관심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 결과가 쌓이고 싸이면 훗날에 큰 문제가 되는 분야이다. 이런 평가 때문에 일의 본질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정치적인 곳에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과학기술 연구 분야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권에 따라 각광받는 연구 분야가 다르고 이에 따라 연구비 쏠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연구과제 제목도 정권의 입맛에 맟춰 선호하는 주제어가 많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녹색이라는 단어가, 박근혜 정부에서는 창조라는 말이 들어가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신재생이라는 말이, 윤석열 정부에서는 원자력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0년 이상의 긴 기간이 필요한 연구분야에서 조차도 정권교체에 따라 연구 분야별로 부침이 있으니 씁쑬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사람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만 하지 끝맺을 줄 모르고, 시작한 것을 잘 가꾸어 지속적인 성과를 내는 것에 인색하게 되는 현상이 고착화 되고 있다. 연구 분야와 유사하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한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인력양성과 에너지자원 분야이다. 국가의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자원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민간기업은 손실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기업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에 초점을 맞춰 투자할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석유가스 및 각종 광물을 포함한 자원가격은 15년 내외의 긴 가격변동 주기를 갖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자원빈국은 민간기업보다는 공기업을 내세워 에너지자원의 확보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 보여주기식 성과와 인내심 부족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해외자원개발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공기업의 실력도 외부 요인도 아닌 정부의 보여주기식 성과주의에 있다. 앞으로의 성패도 이런 유혹을 어떻게 없애느냐에 달려있다. 기본에 투자 없이는 국가의 밝은 미래는 없다. 신현돈

[기자의 눈] 우리는 산불을 진정 심각하게 여기는가

역대 가장 큰 산불로 기록될 '경북산불'이 지난달 진압된 이후 산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여러 주장이 나온다. 일부 환경단체선 산림청이 불에 잘타는 소나무를 인위적으로 심어서 문제라고 한다. 반대쪽에선 환경단체 반대로 산림의 길인 임도를 못 만들어서 산불을 끄기 힘들었다고 한다. 인력·장비 부족은 고질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다. 잔가지 등 산불을 키우는 연료들이 산림에 즐비해 숲가꾸기로 제거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리는 있어 보이나 주장을 계속 듣다보면 자신들과 관련된 조직의 영향력을 키워달라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산림청을 부로 승격해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 임도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는 산림부가 된다고 환경단체 반대를 뚫고 임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산림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 공감대와 산림청 위상이 함께 커지면 저절로 부 승격으로 이어질 것이다. 산림청의 산불 진화 업무를 소방청으로 이관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는 산림청 규모를 축소시키고 대신 소방청 힘을 키울 수 있다. 산불 진화의 주인공을 두고 벌이는 신경전 아닌가. 일부 환경단체는 임도 건설, 숲가꾸기, 인공 산림조성 등으로 생태계를 건들지 말고 최대한 보전하자며 산림청을 압박하는 시도도 보인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산불의 외부효과, 즉 탄소배출에 따른 피해가 제대로 파악 및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산불로 희생된 주민, 동물과 고생하는 공무원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연예인들의 기부행렬에 박수를 친다. 그러나 대도시에 거주하는 대다수 국민에게 산불은 나와 상관 없는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산불은 결코 우리와 상관 없지 않고 한반도 온실가스 농도를 높인다. 유럽연합(EU)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연구소의 글로벌 산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3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산불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약 230만톤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는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정했고, NDC 달성을 위해 탄소배출권 제도를 운영 중이다. 온실가스 한톤이 아쉬운 상황이다. 산불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발전(전환), 산업, 건물, 교통 등에서 배출량을 더 줄여야 한다. 현재 국내 배출권 가격대인 톤당 만원을 적용하면 230만톤은 약 230억원의 가치를 갖는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배출권 가격이 유럽연합(EU)처럼 10만원대로 오른다하면 230만톤은 2300억원가량이다. 박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일 대표발의한 탄소중립법 개정안이 눈에 들어온다. 개정안은 온실가스 배출의 사회적 손실을 정부가 산출해 공시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산불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손해액이 집계되고 이를 온 국민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면, 지금보다 산불 대응을 위한 논의가 더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다. 장마철까지는 멀었고, 산불 위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원희 기자 wonhee4544@ekn.kr

[이슈&인사이트] 성조기를 흔든다고 해서 미국이 손을 내밀지 않는다

광장에서 그들은 외쳤다. “대통령을 지켜라!"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구하자!" 그들의 손에는 두 개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한쪽에는 태극기, 다른 한쪽에는 성조기. 그 깃발이 흔들릴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논리는 더욱 허약해졌다. 극우는 늘 그랬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도덕적 자산이 없을 때, 외세의 이름을 빌린다. 그것이 1980년 광주 학살 당시 '반공'을 외치던 전두환의 논리였고, 2025년 탄핵 직전 계엄령을 검토한 윤석열의 마지막 언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에 그 손에 들린 성조기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백악관은 말했다. “미국은 한국의 헌법기관이 내린 결정을 존중한다." 국무부는 덧붙였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헌정 절차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확고하다." 즉, 미국은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헌법재판소 파면 사태를 두고 어느 한 인물이 아닌, 대한민국 헌법과 제도, 그 민주적 절차를 지지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성조기를 휘두르는 군중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 깃발은 더 이상 광장의 선동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1961년, 1980년, 2025년,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 세 명의 권력자는 공통된 궤적을 그린다. 자유와 정의, 반공을 기치로 등장했으나,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헌법을 짓밟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며, 군 혹은 검찰 권력을 동원해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박정희는 1961년, 장면 내각을 탱크로 밀어버렸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고 1980년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하며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윤석열은 2025년, 자신의 일방적인 독주에 브레이크를 건 거대 야당을 손보고, 자신의 범법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계엄령 선포와 군 동원을 은밀히 논의했다. 그들의 언어는 항상 비슷했다. “혼란을 수습하겠다."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그러나 그 실체는 헌법의 절차를 부정하고, 권력 연장을 위한 체제 전복 시도였다. 미국은 항상 그들을 지지했는가? 박정희 쿠데타 당시 미국은 분명히 반대했다. 매그루더 장군은 한국군에 장면 총리 정부만을 따르라고 명령했고,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헌정질서를 지지하는 공개 성명을 냈다. 그러나 냉전 속에서 미국은 곧 박정희 정권과 손을 잡았다. 원칙과 현실 사이의 타협이었다. 1980년,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했을 때, 미국은 침묵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을 중시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정권 안정이라는 명분에 밀려 비극을 묵인했다. 그 침묵은 미국의 오점으로 남아 지금도 비판받는다. 그리고 2025년,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검토한 사실이 드러나고, 헌법재판소가 그의 탄핵을 결정하자, 미국은 이번엔 확실히 말했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닌, 헌법의 편에 서겠다고. 이는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침묵과 타협을 반성한 메시지이며, 한국의 시민들이 세운 민주주의의 진화에 대한 존중이다. 윤석열을 지지한 극우 군중은, 자신의 주장이 미국의 가치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들고 흔든 성조기는, 사실상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 깃발이 상징하는 것은 헌정질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이 아닌, 민주주의와 절차에 대한 신뢰였기 때문이다. 성조기를 흔든다고 미국이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태극기를 두른다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헌법을 지키고, 국민의 뜻을 따르며, 법과 제도에 따라 권력을 이양하는 것. 그것이 미국이 한국에게 바라는 동맹의 조건이며, 대한민국이 스스로 쟁취한 민주공화국의 핵심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윤석열까지 헌법을 파괴한 자들은 권력을 가졌을지언정, 역사의 편에 서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제, 그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성일권

[EE칼럼]中 ‘자원무기화’ 대비해 우크라이나 광물개발 참여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의 대가로 희토류 등 광물개발 지분 50%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외교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NBC, NYT 등 외신에 따르면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2월 10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의 침공 이후 그 동안 미국의 군사 지원을 해준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매장되어 있는 희토류 등 광물 소유권 절반을 요구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약 5,000억 달러(약 720조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희토류를 갖기 원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그토록 희토류를 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희토류는 대중 관계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약점으로 거론 된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희토류 매장량과 생산량은 각각 4400만톤, 27만톤이다. 모두 세계 1위다. 반면 같은 해 미국의 매장량은 190만톤(세계 6위), 생산량은 4만5000톤(세계 5위)이다. 2020~2023년 미국의 희토류 수입량의 70%가 중국산이다. 그래서 희토류 부문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과제가 미국에 시급한 이유다. 현재 전 세계 흐름은 전기화이고 전기화는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기차의 모터 및 배터리 같은 핵심 기술개발에 희토류의 사용이 불가피해 졌다. 하지만 희토류 채굴은 환경파괴, 자원고갈, 매장지역의 편재성, 국제적 갈등 등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오고 있다. 특히, 희토류 영구자석은 전기차, 풍력터빈, 로봇공학, 드롯, 방위산업 등의 다양한 기술에 사용되며 대부분이 희토류에 의존하고 있다. 2023년 유럽연합(EU) 보고서에 따르면 희토류에 대한 수요는 유럽에서만 2030년까지 지금보다 5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희토류를 대체할 광물이 없다는 것이다. 희토류에 대해서도 영구자석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희토류는 중국에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다. 이로 인해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게임임을 세계가 깨닫고 있다. 결국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필요한 희토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희토류 및 광물자원 지분의 절반을 요구하는 제안서를 냈다. 제안서는 “재건 투자기금 협정" 초안이다. 우크라이나는 EU가 지정한 34개 핵심광물 중 희토류, 리튬, 티타늄, 천연흑연 등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광물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광물 생산 기준 24위, 생산 가치 210억 7300만 달러(약 30조원)로 전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전체 석탄 매장지의 63%, 석유 매장지의 11%, 가스 매장지의 20%, 금속광물 매장지의 42%, 희토류. 리튬을 포함한 주요 광물의 33%가 전쟁 지역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자원개발과 관련해 광물자원 채권 수입의 50%, 자원 수익화와 관련해 제3자에게 부여되는 모든 신규 허가가 지닌 경제적 가치의 50%, 해당 수입에 대한 유치권 등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수출 가능한 광물에 대한 우선 매수 청구권도 요구사항에 포함되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협약에 따른 채무나 가압류 조치에 대해 국가 면세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은 우크라이나 방위에 기여하지 않은 국가는 재건기금을 통한 투자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재건 사업비 배분을 총괄 관리 하겠다고도 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는 기금의 목적이 뚜렷하다면 고용을 창출하는 측면에서 이익이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점에서 재건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우리 입장에선 미국과 함께 우크라이나 재건사업과 광물개발에 참여하는 것이다.한국과 미국이 서로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맡아 우크라니아 광물개발에 뛰어 든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와 미국의 최대 과제는 중국의 자원 무기화를 넘어서는 일이다. 중국은 희소광물을 무기 삼아 무역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이 우방국인 캐나다에 관세 부과를 예고하는 이유는 희토류 등 핵심광물 확보를 위한 전략이다. 따라서 우리도 핵심광물의 확보는 국가안보에 직결 된다. 미국과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보여주는 자원 확보 경쟁은 각국이 생존과 직결된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원이 없는 우리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을 할려면 반드시 자원 확보가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광물개발은 우리 산업 발전에 있어 다시없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민간과 공기업, 정부가 함께 우크라이나 광물개발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강천구

[데스크 칼럼] 일곱 번째 거부권…기업의 봉건제 언제까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는 오랫동안 '왕과 신하'의 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소유지분이 미미한 총수 일가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다수의 일반 주주들은 그저 '납세하는 백성'에 불과했다. 이사회는 총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채워졌고,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주주 전체가 아닌 지배주주의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법 개정안은 이러한 봉건적 지배구조에 '주주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려는 시도였다. 윤석열 정부 들어 41번째, 한덕수 권한대행 개인으로는 7번째 거부권이 상법 개정안을 향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이 개정안은 지배주주 중심의 기업 운영에 견제를 가하고 일반 주주의 권익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 대행은 “기업 경영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국회의 결정을 뒤집었다. 한 대행의 거부 논리는 재계와 국민의힘이 줄곧 주장해온 것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여기에 “일반 주주 보호에 역행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상법 개정의의 본질이 바로 '일반 주주 보호'임을 고려하면,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재계는 늘 개혁에 저항해왔다. 중소기업적합업종 지정, 일감몰아주기 규제, 소비자 피해구제 확대 등 모든 개혁조치에 “경영 위축"과 “투자 감소"를 우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이루어진 후에도 한국 경제는 성장을 지속했고, 기업들은 적응하며 발전했다. 오히려 개혁의 지연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권한대행'이라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권한대행은 차기 정부 출범까지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민생 현안을 챙기는 '관리자'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국회가 숙고 끝에 통과시킨 법안, 특히 오랜 개혁 과제와 맞닿아 있는 법안에 대해 선뜻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그 역할에 부합하는 모습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혹자는 이번 결정을 '원칙과 소신에 따른 결단'이라 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원칙이 과연 누구를 위한 원칙이며, 그 소신이 시대정신과 얼마나 발을 맞추고 있는지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이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특정 이해관계자의 목소리에 과도하게 귀 기울인 나머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개혁의 방향키를 되돌리려 한 것은 아닌가. 한 대행의 논리에서 너무나 익숙한 기득권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 대행의 이번 결정은 당장의 파도를 잠재우는 미풍(微風)처럼 보일지 모르나, 역사는 이를 개혁의 흐름을 거스른 역풍(逆風)으로 기록할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이번 거부권 행사가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하고 성숙한 논의를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 대행의 '신중함'이 향후 국정 운영에서는 '시대의 요구에 대한 깊은 통찰'로 발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찻잔 속 미풍이 역사의 역풍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박원주 칼럼]관세 폭탄, 대한민국이 트럼프에 대처하는 법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쏘아 올린 관세 폭탄이 드디어 터졌다. 2025년 4월 5일부로 모든 수입 대상국에 적용되는10%의 기본관세가 시행되었다. 9일부터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소위 '최악의 침해국'으로 분류된 60 여개국에 국가별 상호 관세가 발효된다. 우리나라가 적용 받게 되는 최종 관세율은 25%, 미국과 FTA가 체결된 국가중에선 최고 수준이다. 2012년 한미 FTA가 체결된 이후 양국간 교역 품목에 대한 관세는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한국이 비관세 장벽과 환율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무역 흑자를 유지해 왔다며, 한국이 사실상 미국에 대해 50%의 관세율을 유지해 왔지만 이중 절반만을 이번 관세율 계산에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에 부과했다는 50% 관세율의 계산 근거를 보면 좀 어이가 없다. 실제 우리나라의 비관세 장벽이 수출입에 미친 영향을 본 것도 아니고, 대한무역적자 총액을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총금액으로 나눈 것을 관세율이라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에게 미국을 상대로는 무역흑자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관세가 아니라 '흑자세(Trade Surplus Tax)'이다. 이렇게 해서 2012년 FTA 체결 이후 활발하게 성장해 온 한미간 교역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더해서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세계 인류가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물질적 성장을 구가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의 역사와 상호신뢰에도 치유하기 어려운 금이 갔다. 2차 세계대전 후 솔선해서 전 세계의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고 지켜왔던 그 미국이 바로 그 파괴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장 미국이 직면한 어마어마한 재정적자와 누적부채, 미국 제조업벨트 근로자들의 일자리 등 지금까지 쌓여 온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미국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번 조치가 미국 경제에 미칠 악영향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미국 국민들은 관세로 인해서 높아진 수입 물가를 직면해야 한다. 관세가 직접 원인은 아니라지만 이미 계란값을 비롯한 필수 소비재 가격이 급격하게 올라 고통받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수입 원자재를 생산에 투입하는 미국 기업들도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이는 수요 위축으로 이어진다. 비즈니스에 악영향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주가도 큰 폭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가 하락은 미국 소비자들의 씀씀이를 더 위축시킬 것이고 기업들은 더 어려워 질 것이다.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과거 대공황 때처럼 교역 상대국들도 보복 관세로 대응한다면 전 세계가 심각한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없다. 뻔한 스토리다. 트럼프도 바보가 아닌데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자국민 상대 모종의 딜(Deal)을 건 트럼프 당장 드는 생각은 트럼프가 전 세계, 그리고 미국 국민들을 상대로 모종의 딜(Deal)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예전 경험 한 자락을 꺼내 보려 한다. 1996년 산업부의 에너지 정책 부서 실무자였던 필자는 연 2조원 규모에 약간 못 미쳤던 에너지특별회계 예산의 편성을 맡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규모를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돈인데, 늘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사업이라서 그런지 업무를 맡게 된 첫 주 필자에게 와서 자기 사업예산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와 달라 해도 다들 바쁘다며 소식이 없었다. 사업비를 적정 수준으로 조정하고 세출과 세입의 아귀도 맞추어야 하는데 아무도 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협상도 불가능. 답답할 지경이었다. 생각 끝에 각 기관에 통보했다. 세입 여건이 좋지 않아 다음해 각 기관의 사업비 예산을 일률적으로 절반씩 삭감하겠노라고. 다음 날 아침, 일요일이었는데, 출근하면서 보니 필자가 일하는 사무실 바깥 복도까지 사람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사무실 안쪽으로도 필자의 책상앞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모두 자기 기관의 예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반을 삭감하면 어떤 큰 일이 나는지 절절하게 설명하러 온 분들이었다. 의도치 않았던 갑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덕분에 몇 주만에 깔끔하게 차년도 예산편성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증액 요구를 거절 당했어도 감액 안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다들 안심하는 분위기라 고객 만족도가 의외로 높았다는 것은 덤이었다. 일대다의 협상에서 막무가내 전략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럼프는 이번에 막무가내식 관세 폭탄을 던져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관세를 많이 거둬 재정을 충실하게 해서 미국인들이 내는 세금을 줄여준다는 거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다 망할 거라는 걸 트럼프도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 투자다.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 영토에 공장을 짓고 근로자들을 고용해서 생산 활동을 하면 된다. 우리 반도체 기업과 2차전지 업체들이 미국에 투자했고 이번에는 자동차 업체도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에서 생산하면 관세가 없는 게 당연한데 자동차 생산시설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No Tariff'라며 생색내듯 말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참 '거시기'했다. 트럼프는 이렇게 해서 외국의 고부가가치 산업과 일자리를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가져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는 미국산 제품에 대한 시장 수요를 늘리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예의 '상호 관세'를 때려 맞지 않으려면 흑자가 최소화될 필요가 있고 그러려면 미국에서 더 많은 상품을 수입해야 한다. 늘어난 수요는 미국 국내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고, 경제 활동이 늘면 세금도 늘어날 것이니 일석이조처럼 보이기는 한다. 또 하나는 미국의 많은 국제관계 이슈를 푸는 것이다. 멕시코 등으로부터의 고질적인 불법이민과 국경경비 문제, 중국에서 대량으로 밀반입되는 신종마약 펜타닐, 우방국들과의 군사비 분담 문제, 우크라이나나 중동 등의 국제 분쟁, 중국의 반도체 굴기, 그린란드의 희토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국의 버킷 리스트들을 이거 한방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트럼프와 미국이 얻고자 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트럼프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달러만 찍어내도 전 세계가 상품을 만들어서 보내는 나라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물가가 저렴한 나라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고질적인 무역 적자는 이러한 발권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기축 통화국 미국의 위상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것이다. 달러에 대한 수요가 엔이나 위안, 심지어는 금으로 옮겨가는 추세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앞으로 미국인들은 더 비싼 물가를 감수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더 싼 임금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누적된 재정적자의 큰 원인으로 방만한 사회보장지출을 꼽고 있는 트럼프라면 국민들이 놀고 먹는 것을 그대로 둘 생각도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트럼프 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특유의 '예측불가능성'이다. 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부동산 기업인이었고 리얼리티쇼의 쇼호스트이기도 했다. 연간 매출액 6,000만 달러 이상인 트럼프 브랜드의 주인이며 세계 도처에 골프장을 소유한 스포츠 재벌이기도 하다. 요컨데 그는 평생을 딜과 배팅을 통해 성장한 승부사이다. 지금의 관세폭탄 또한 세계를 상대로 한 그의 승부수이며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사방에 관세의 깃발을 휘둘러 댈 것이다. 트럼프발 관세폭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2024년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은 1,280억 달러 수준으로 전체 수출의 18.7%에 달했다. 최대 수출 대상국인 중국에 버금가는 규모이며, 무역수지는 557억 달러 흑자로 우리 전체 흑자보다도 컸다. 이처럼 우리의 거대 무역 파트너인 미국의 시장 문이 닫힌다면 우리 경제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대기업들의 수출 규모가 뭉터기로 깍여 나갈 것이고, 납품 중소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질 것이다. 기업 생태계가 위축되면 그 여파는 내수시장으로 이어져 서민과 소상공인의 삶에도 큰 주름이 잡힐 것이다. 일자리에도 어려움이 커질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시나리오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관세 전쟁이 무역 상대국들의 보복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초래된다면 미국 시장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우리 수출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다. 작은 개방경제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그저 트럼프가 빨리 원하는 것을 이루고 이 광기의 행진을 멈추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다 트럼프는 동맹과 적을 가리지 않고, 친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무역 상대국은 돈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나라가 어려운 만큼 우리 경쟁국들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을 맞춰줄 수 있다면 어느 나라든 그의 공격의 사각(안전지대)에 머무를 수 있다. 트럼프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적아를 구별할 것을 요구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사실상 단절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통해 전략 물자가 아닌 상품이라도 미국 기술이 포함되어 있으면 러시아에 수출하지 못하게 했고, 러시아에서 운영중이던 우리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도 철수해야 했다. 러시아 발주로 짓고 있던 선박들의 인도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외에 중국 내에서 우리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 북한과의 경제 협력 등 많은 잠재적 비즈니스 기회들이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하는 가치동맹의 틀 안에서 심각하게 제약되었다. 반면 트럼프의 미국은 자기가 앞장서서 이러한 국가들과의 협상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의 위기 속에서 미국이 저러고 있다면 우리도 새로운 경제협력의 프론티어를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의 미국은 WTO 상소기구의 위원 임명을 지금까지도 거부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부당무역행위에 대한 국제기구의 중재와 판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자유무역체제의 요람속에서 성장한 우리에게는 뼈아픈 일이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사소한 자유무역으로부터의 일탈이나 중상주의적인 산업정책이 어느 정도는 묵인되는 시대가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유효한 산업정책의 공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에 더해서, 트럼프가 멋대로 관세 폭탄을 던져댈 수 있는 '별의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칼질은 세계시장 만큼이나 미국 경제에도 큰 상처를 내고 있고 결국 언젠가는 그 부작용이 이익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진 카드중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해야 할 일은 발상의 전환이다. 미국은 우리의 비관세 장벽에 대해 핏대를 올리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 비관세 장벽이 수출입 규모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다. 미국산 소고기나 쌀 수입에 대한 규제는 사실상 이를 풀어도 수입 규모가 크게 늘어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쌀 소비량 자체가 크게 줄고 있고, 소고기 월령제한을 푼다 해서 지금보다 미국산 소고기를 더 소비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규제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농민과 축산농가의 우려를 신경쓰는 정무적인 제스쳐에 가깝다. 한중 FTA 등 여타 양자 무역협상에서도 국내 농어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각종 기금들을 만들었지만 제대로 집행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이제는 업종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그 업종에 속한 사람을 보호하는 쪽으로 초점을 옮길 때가 되었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시장을 열어주고 그 업종에서 피해보는 국민들에겐 충분한 소득 보전을 해준다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문제를 풀 수 있다. 쓸데없이 행정력을 낭비하고 피해 업종의 국민들에게는 보상도 못해 주면서 무역 상대국으로부터는 대단한 보호무역조치라도 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것이 더 손해다. 차제에 무의미한 비관세 장벽들을 정비하고 털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이 무역적자를 신경 쓴다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구매하면 될 일이다. WTO가 제 역할을 하던 때에는 정부 보조금을 통해 교역상대방을 바꾸는 정책이 금기시되었다. 우리의 석유 도입선 전환 보조금이 여러 차례 문제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금은 그런 노력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미국 외 국가로부터 도입하고 있는 에너지, 원자재, 첨단기술 제품 등을 조금 멀더라도 미국에서 사 오게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약간의 물류비 보조만으로도 도입선 전환의 유인은 충분하다. 사실상 우리 정부가 미 국민들의 생산단가를 보조해 주는 셈이지만 그렇게 해서 관세율 산정에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미국외 교역국들과의 협력강화에 주력 미국 이외 교역 상대국들과의 협력을 지금보다 더 심화시켜야 한다. 이번 트럼프 사태의 가장 큰 교훈은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 미국 등 특정 시장을 집중 공략하는 방식으로 수출의 볼륨을 키워왔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가성비가 뛰어난 시장접근 방법이긴 했지만 위험도 적지 않았다. 중국의 한한령 등 해당 국가의 변심만으로도 우리 수출의 규모가 널뛰기를 하는 불안정성을 피할 수 없었다. 당장은 미국 시장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 해야겠지만 미국 이외의 다양한 시장으로 교역의 폭과 깊이를 키우는 노력이 시급하다. 그 한 갈래로서 우리 이웃 국가들, 일본, 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데 지금은 잇몸이 서로 깨무는 모양새라 역내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게 사실상 어렵다. 산업협력과 시장 개방을 매개로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로운 부가가치의 기회를 확산시키는 것이 위기에 대항할 수 있는 유효한 처방이다. 지금 트럼프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립주의에 가깝다. 미국 시장은 앞으로 점차 닫혀갈 것이고 그 시장 잠재력도 더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장을 다각적으로 준비해 두지 않는다면 우리 위기는 단순한 위협이 아닌 파국이 될 것이다. 첨단산업의 대외 이전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들의 수출 시장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생산 거점을 두는 전략은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에 투자한 한국 자동차업체의 제품이 제 3의 시장에서 국내 수출품과 경합하는 구도는 최대한 피해야 한다. 우리 일자리를 미국에 줄 수는 없지 않나? 트럼프가 그토록 원하는 첨단 산업의 미국 투자는 미국 내수용으로 묶어 두는 것이 우리의 생존 전략이 되어야 한다. 글로벌 무역 규제 염두...전략적 전개 필요 반면, 트럼프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장에 묶어 놓을 수 없는 AI, IT, 플랫폼 등 글로벌 네트워크와 빅데이터를 지향하는 산업의 경우 적극적인 미국 진출을 통해 더 큰 시장의 이익을 최대한 누리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도 부합할 것이다. 우리 산업의 주력을 이루어 왔던 중후장대 에너지다소비형 제조업에 대해서는 기후위기, ESG 시대의 글로벌 무역 규제를 염두에 둔 전략적 전개가 필요하다. 최첨단의 친환경 생산인프라는 최대한 국내로 유치하되 과다한 탄소컨텐츠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분야나 설비의 경우 우리보다 저렴한 재생에너지 대안이 풍부하고 기후 변화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트럼프 2.0 시대의 미국을 새로운 비즈니스 무대로 삼는 것도 생각해 볼 만 할 것이다. 14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번지면서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었다. 흑사병에 버틸 수 있는 강건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살아 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사멸을 피할 수 없었다. 트럼프가 시작한 21세기 관세전쟁은 각국 경제의 건실함과 복원력을 시험하는 또 하나의 흑사병이 될 지도 모른다. 강건하게 버티고 살아 남는다면 또 다른 도약의 기회가 올 것이다. 'Perish or Live & prosper'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될까? 박원주

[기자의 눈]사상 두 번째 ‘탄핵’…끝이 아니라 시작

“첫 번째 매듭이 지어졌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후 나오는 말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120여일간 이어진 정치적 혼돈, 사회적 갈등, 경제적 리더십 실종 사태가 이제 막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단계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심리가 길어졌지만 '8대 0' 만장일치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이 인용돼 파면 결정이 내려졌다. 일각에선 헌재 재판관들의 진보-보수 성향에 따라 의견이 갈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결과는 전원일치였다. 12.3 비상계엄 와중에 윤 전 대통령이 저지른 행위의 위헌·위법성이 그만큼 중대했다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 측의 완패였다. 절차상 문제점·검찰 조서의 증거 능력 인정 여부 등은 모조리 반박됐다. 헌재의 만장일치 선고 덕에 찬반 세력간 극단적 대결을 예방할 수 있었다. 실제 선고 당일 찬반 세력 모두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지만 큰 물리적 충돌이 없어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일 당시 4명이나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다행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선 반대 여론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핑계로 든 부정선거론 등 음모론에 자극받아 진영론이 극대화된 덕이었다. 헌재의 전원일치 판결은 자칫 찬반 세력간 폭력 사태로 번질 뻔한 상황을 진정시켰다. 전세계에선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고비를 넘겼다는 평가다. 한때 인구 5000만명 이상·GDP 3만달러 이상 국가 중 1위를 달렸던 K-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각하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원도 때려 부수는 극우 세력이 나타났다. '윤 전 대통령에게만' 너그러운 검찰·법원의 행태로 사법 불신이 최고조다. 경제도 참혹하다. 미국발 '관세전쟁'에 대응할 국가적 리더십이 실종돼 후유증이 심각할 것 같다. 내수 침체에도 제대로 된 추경 조차 편성하지 못했다. 기업은 망해나가고 자영업자들은 파산 행렬이다. 정치권은 벌써 조기 대선 국면이다. 12.3 비상계엄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삼자.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 시대 확 달라진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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