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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친환경차 보급 확대, 전기차 외 선택지도 있다

우리나라 도로 위 '공기 질'이 점점 개선되고 있다. 국토교통부 자동차 등록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국내에 등록된 전기차(EV)는 총 82만2081대로 집계됐다. 작년 같은 시점(63만5847대)과 비교해 30% 가량 증가한 수치다. 하이브리드차(HEV) 누적 등록 대수(237만5009대) 역시 전년 대비 30% 가까이 늘었다. 경유차(876만8995대)는 작년보다 5% 넘게 줄었다. 국내에 등록된 자동차 중 EV·HEV 비중은 지난 2015년 0.9%에 불과했다. 올해 8월 기준으로는 12.1%까지 올랐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제조사들도 적극적으로 신모델을 개발한 결과다. 문제는 정부의 친환경차 보급 정책이 지나치게 'EV 위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조금, 인프라 투자, 세제 혜택 등 대부분 측면에서 그렇다. HEV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 구매 보조금은 없애면서 EV 지원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있다. 상용 부문에서는 혈세로 마련한 재원 중 상당수가 외국 기업에게 흘러간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서는 EV가 내연기관차를 대체해야 하는 게 사실이다. 다만 이는 '탄소배출이 적은 전기'를 사용할 때 얘기다. 아직 화석연료 발전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EV도 탄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배출가스도 상당하다. HEV와 PHEV는 기존 내연기관 기술과 전기구동을 혼합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특히 장거리 운전이 많은 지역,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농어촌, 겨울철 배터리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후 등에서는 이들이 EV보다 친환경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 주요국도 친환경차 '황금 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양한 정책을 도입·폐기하고 실험적인 시도도 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EV에 올인'한 경우는 드물다. 일본은 HEV에 대한 세금 감면 혜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PHEV를 'EV 시대 교두보'로 여기며 관련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는 PHEV가 EV보다 대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했다. 미국 역시 일부 주에서 PHEV에 EV에 버금가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산업의 관점에서도 기술의 전면 교체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EV에만 초점을 둘 경우 기존 내연기관 기반 부품업체·중소 협력사가 급격히 몰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HEV와 PHEV가 EV와 함께 육성될 경우에는 이같은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정부는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수송부문 토론회를 여는 등 앞으로 친환경차 보급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아예 제한하는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친환경차 보급 확대에 혈세를 과감하게 투입하는 이유는 '탄소 저감'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목적은 분명하지만 그 수단이 EV 뿐이라는 답은 아직 못 찾았다. 중장기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EV=친환경'이라는 단순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이슈&인사이트] 보이스피싱이 만든 모두의 지옥

기나긴 추석 연휴가 끝나갈 무렵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납치된 대학생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는데 시신을 한국으로 옮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에서 기존에 보이스피싱으로 많은 피해 사례가 발생했기에 기사를 접한 국민의 관심도 뜨거웠다. 이런 국민적 관심을 인식해서인지 정치권에서 나오는 타국 영토에 군대를 파견하자는 도를 넘어선 주장은 차치하고라도 왜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차분한 성찰이 필요하다. 국내에선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른바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으로 인한 피해가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음성(voice), 개인정보(private data) 및 낚시(fishing)가 결합해 미리 파악한 개인정보와 전화를 이용한 사기라는 의미로, 현대적 의미의 보이스피싱은 대만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도 겪었던 1997년 외환위기가 아시아를 휩쓸 당시 대만에서 실업률이 급증하자 취업할 곳을 잃은 청년들이 쉽게 이익을 얻는 범죄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만 경찰의 단속을 피해 한국, 중국 등 주변 국가로 도피한 사기범들이 보이스피싱 기법을 전파했고, 시대 변화와 각국의 환경에 맞춰 진화를 거듭했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오레오레 사기'라는 친인척 빙자 사기가 지속됐고, 한국에서는 경찰, 검찰, 금융감독원 등 관공서 사칭부터 투자 정보 링크를 포함한 문자 메시지나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연애 사기로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2010년대 이후 피싱 사기가 증가했는데 발신자 전화번호 변경,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얼굴, 목소리 변조 등 첨단기술까지 동원한 사기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보이스피싱이 점차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양산하자, 2020년대 들어 한국, 중국, 일본 정부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엄중히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강경 엄벌 기조에 따라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은 본거지를 감시의 눈이 소홀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옮기며 세를 확장했고, 그렇게 기업화된 범죄 조직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는 사실 이전부터 많이 있었으나 정부의 대책은 항상 한 발짝 늦곤 했다. 피해자들이 보이스피싱임을 깨닫고 피해금을 이체한 계좌 정지를 신청해도 실제 정지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어 환급이 어렵거나 심지어 추가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수사기관이 범인을 검거하더라도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은 해외에 있고, 검거되는 것은 주로 현금 인출책이나 통장 명의자에 불과해 발본색원이 되지 않았다. 수사기관에서도 국제형사사법 공조를 통한 주범을 검거하는데 한계가 있다 보니, 피해 신고를 받아도 현실적으로 처벌이 어렵다는 말만 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수사기관이 잡지 못한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을 개인이 직접 검거하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국가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나 추락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게 해외에 있는 총책 등 주범은 처벌하지 못하면서 국내에서 검거된 방조범들만 엄벌에 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장 명의를 빌려주거나 현금을 대신 인출해 보이스피싱 범죄를 돕는 것은 분명 비난받을 행위다. 하지만 속았거나 협박을 당하는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런 행위에 이르게 된 경우도 보게 된다. 차명 계좌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정상적인 상품권 거래나 대출 컨설팅으로 위장해 피해금을 자금 세탁하는 등 나날이 사기 기법이 발전한다. 이런 과정에 연루되어 상품권 거래나 대출 컨설팅을 통해 계좌를 개설했다고 보이스피싱의 고의를 인정해 보이스피싱 범죄로 처벌되고 있다. 주범을 처벌할 수 없으니, 종범들이라도 최대한 대신 엄벌하겠다는 정책적 고려로도 보이지만 형사 정책이 형법의 자기 책임원칙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소위 '피라미드'란 유사수신행위 범죄와 비슷한 상황도 생긴다. 이렇게 보이스피싱이 만연하다 보니 실제 수사기관이나 은행이 전화해도 믿지 못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앞으로 딥페이크를 활용한 보이스피싱이 더 빈번해지면 가족들이나 지인들의 전화나 메시지도 신원 확인을 해야 할 판이다.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가 저하되게 되고, 그로 인한 비용은 우리 사회 전체가 부담하게 된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현지에 전담 수사팀을 파견하는 등 범죄의 뿌리를 뽑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 사회도 왜 젊은 피해자가 멀리 캄보디아까지 갔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양희철

[EE칼럼] 에너지 고속도로와 남동발전의 에너지 신작로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함께 탈세계화 및 자국 우선주의 확대 등으로 세계 경제 질서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특히 러-우 전쟁 이후 에너지와 자원의 무기화가 본격화되며 세계 각국은 공급망 안정화와 에너지 안보 확보를 국가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세계 주요국들은 청정에너지 기반 경제구조로의 선제적 전환과 헤게모니 선점을 위해 에너지 안보를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 제고의 핵심 목표로 삼고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7위의 에너지 다소비 국가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2024년 기준 93.7%이며, 에너지 수입액은 약 230조 원으로 국제 에너지 시장 변동성에 매우 취약하다. 특히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등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상 안정적·경제적인 에너지 공급이 산업의 근본이자 경쟁력의 핵심으로 에너지 안보는 한국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직결되는 전략 과제이다. 전 세계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산업·수송·건물 등 부문별 사용 에너지원을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등 전기화 가속화에 따른 전력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에너지 소비량은 2025년부터 2027년까지 연평균 약 4%의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3년간 총 3,500TWh 증가할 전망이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확보 등을 위해 에너지 고속도로를 건설키로 했다. 구체적으로 수도권과 서남해 해상풍력, 동남권 산업단지를 잇는 에너지 고속도로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 수행을 위해 국내 최대 발전공기업인 한국남동발전(이하 남동발전)이 야심차게 내놓은 “남동 에너지 신작로(고속도로) 2040" 프로젝트가 전력 산업계에 큰 화제가 되고 있어 소개한다. 남동발전은 2040년까지 태양광,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와 수소 등 무탄소 전원을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획기적으로 재편하여 총 발전 설비 용량 24GW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더해 20대부터 40대까지 신규 청년 일자리를 약 50만 개 만들고, 3,800억 원의 햇빛 및 바람 연금을 바탕으로 주민 소득을 증대한다. 남동발전이 계획하고 있는 “에너지 신작로 2040"에는 석탄발전을 넘어 재생에너지와 수소 등 무탄소 전원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겠다는 전 임직원의 의지가 담겨 있다. 특히 남동 신작로 프로젝트는 단기적 전략 수립 차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더 주목받고 있다. 남동발전은 재생에너지 신작로와 수소 신작로 등 두 가지 전략을 중심으로 해상풍력 기반 재생에너지 10GW와 수소·암모니아 혼·전소 7GW를 구축해 전체 발전 설비 비중 70%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구성한다. 또한 경기권, 충청권, 전라권, 경상권, 강원권을 잇는 해상풍력 신작로와 수소에너지 신작로를 구축함으로써 정부의 한반도 U자형 고속도로 정책과 일치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전역을 아우르는 친환경 에너지 발전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남동발전은 이러한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투자 규모를 27조 원까지 확대하며, 이를 통해 50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와 농어촌 소득 증대, 기자재 국산화, 수소 생태계 활성화 등 국가 에너지 산업 육성과 안보에도 적극 동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남동발전이 전남 신안에서 시행하고 있는 “햇빛 연금" 프로젝트를 “바람 연금"까지 확대해 매년 3,800억 원을 조성, 최대 14만 명의 지역 주민과 이익을 공유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이는 2인 가족 기준, 월 45만 원씩의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남동발전의 첫 에너지 신작로 계획은 수도권 최대 전력 생산기지인 인천 영흥화력발전소를 전면 개편해 무탄소 에너지 랜드마크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9월 인천시, 옹진군 등 지자체와 한국석유공사, 인천도시개발공사 등 공공기관 5곳, 삼성물산, 현대산업개발, GS에너지 등 4곳의 민간기업 등 총 11개 기관 및 기업이 참여하는 “영흥 미래 에너지 파크 조성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인천 영흥 미래 에너지 파크 사업은 인천시 옹진군 소재의 영흥도에 친환경 무탄소 발전, 수소 및 해상풍력 클러스터, ESS(에너지 저장 장치), 스마트 등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친환경 에너지 랜드마크를 조성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남동발전뿐 아니라 발전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경제성 있는 청정에너지를 생산해 에너지 고속도로를 통하여 에너지가 필요한 곳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술, 제도, 시장의 조화로운 생태계가 갖춰져야 하며 이것이 국가 에너지 전환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길이다. 강천구

[데스크칼럼] 산업재해, 정부·기업만으로 근절되지 않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 “후진적 산업재해 공화국 반드시 벗어나야"(이재명 대통령), “산업재해 예방은 국가의 제1책무…범정부적 역량을 집중해 안전한 일터를 만들겠다"(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과 주무장관의 강도 높은 비판과 해결 의지 발언에도 불구하고 산업현장에서 인명사상 재해사고가 멈추지 않고 있다. 바로 얼마 전인 지난 17일 KG스틸 인천공장에서 추락한 중량물에 맞은 하청업체 노동자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같은 날 한화오션 경남 거제사업장에서 철제 구조물 설치 작업 중 구조물이 넘어져 60대 노동자가 머리를 다쳐 병원에 이송됐지만 끝내 숨졌다. 앞서 지난 3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철거작업을 하던 하청노동자가 아래로 떨어져 추락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대통령이 언급한 '후진적 산업재해 공화국'이라는 지적이 단순히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강조하려 수사적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산업재해 공화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건설업의 사고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발생하는 사고사망자 수를 의미하는 통계지표)은 2023년 기준 1.59로 OECD 10대 경제권 평균(0.78)의 2배 이상이며, 이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건설업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138명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6.15% 더 늘어났다. 이같은 산업재해 발생 건수와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 3년 동안 사망자 수는 일부 줄었지만(2021년 683명→2023년 598명), 재해자 수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2021년 12만2713명→13만 6796명). 이런 현실은 우리나라의 산업안전 관리체계의 근본적 재설계라는 구조적 해법 수준을 못지 않게 산업현장 주체들의 안전인식도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업현장이 '위험'과 '익숙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비유하곤 한다. 즉, 산업현장의 위험은 언제, 어디서든 상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구조적, 제도적 대책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강구되고 구현돼 왔다. 그러나, 이같은 구조적, 제도적 대책의 실효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산업현장의 익숙함이다. 익숙함에는 작업공사의 비용 효율화만 앞세운 불합리한 원하청거래, 산업안전 관리감독의 무사안일주의, 현장작업자의 안전수칙 경시문화 등이 다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익숙함은 재해 사고 발생 시 원인과 책임을 물어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산업현장 종사자의 안전 불감증은 딱히 사회적 지탄은 받을지언정 법적 제재에서 벗어나 있는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산업현장 노동자들의 산업안전 인식은 '후진적'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많은 노동자들이 안전수칙을 '형식적인 절차'로 인식하거나, '일의 속도'와 '성과'에 밀려 안전을 후순위로 두는 경향성을 강했다. 조사에서 약 40%의 노동자가 “작업 중 위험을 느껴도 보고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35%는 “보호구 착용이 불편하거나 귀찮다"고 여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재해의 인과관계에서 정부의 감독 소홀, 기업의 안전조치 불이행은 즉각 제재와 개선의 효과로 이어지는 성격인 반면, 노동자의 안전 불감증은 개인의 인식 문제로 치부되면서 '산업안전 문화 정착'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무리 산업재해 예방의 제도와 안전장비가 선진적일지라도 집행자나 수용자의 실제 운용이 선진적이지 않다면 '산업재해 후진국'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제도 선진화 못지 않게 인식의 선진화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진우 기자 jinulee6464@ekn.kr

[EE칼럼] 우리에게 원자력 기술이 의미하는 것

강현국 미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향방이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된 것 같다. 국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새 정부가 이러한 국가적 기간산업에 대해 새로운 틀을 짜고 추진하는 것은 민주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수립하고자 하는 계획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경우에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과학에 입각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순이라는 것은 자타가 동의하는 바이니 여기서 다시 반복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특히 이 결정의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오는 것인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거대 국가 담론에 있어서 실제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방법이 없다. 결국 국민의 책임이 된다. 따라서 국민들이 당면한 현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현재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이고 외부 환경은 어떤 상황에 와 있는 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내부자의 시각에서는 전체를 조망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으니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일부 의도된 주장에 현혹되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수 국민들이 복잡한 사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회피하게 되면, 여론을 자기편으로 끌고 오고 싶은 입장에서는 자기 쪽으로 편향된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이 유혹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원자력이라는 중요한 산업분야가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소비되는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국가와 국민에게 미래가 없다. 원자력 기술과 산업이 우리나라에 과연 필요한지 어떻게 기여하는지부터 차분히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가 점차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경제 규모가 커지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지만, 이런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외부 경제와의 협력과 경쟁을 불러오게 된다. 국내 산업만으로는 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게임의 룰과 국제 무대의 게임의 룰은 당연히 다르다. 상대를 도태시켜야 할 상황이라면 무서운 경쟁을 하지만 그게 아니라 상호 유익이 있다면 협력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받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는 규칙이 적용된다. 원자력 산업에 대해 짚어 볼 때에도 이런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원자력이 국제 무대에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인가? 본원 경쟁력은 무엇인가? 어떻게 협력하고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 먼저, 우리나라가 강력한 원자력 기술 능력을 보유할 이유가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단순히 저렴한 전기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북한이 핵실험을 거듭하고 핵보유를 공인받고 싶어하는 현 상황에서, 고도의 원자력 산업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미래에 만약 필요한 경우가 생기고 국민이 결정을 내리게 되면, 즉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수조원 수십조원의 대형 사업을 추진할 때, 원자력은 패키지 바구니의 제일 위에 놓이는 얼굴 상품이 된다. 대표 상품이 경쟁력이 있어야 거래가 성립될 테고, 일단 성사되면 수많은 교류가 함께 일어나게 되고, 그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입지는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UAE에 원자력이 수출된 이후, 한국 외교관이 한국 기업들의 건설 수주를 늘여주도록 부탁했더니 '이미 팔구십 퍼센트는 한국기업에게 주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늘일 수가 있습니까'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체코 원자력 프로젝트를 통해 EU에서 우리나라의 입지를 크게 확장하고 다른 산업들도 함께 진출할 호기를 맞았다. 원자력 에너지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해 주면서 국산 에너지 수급을 높이고 온실가스 배출을 없애는 최상이자 유일한 옵션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수입한 가스와 석유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언제부터인지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마치 대결구도인 것처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과학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것 또한 프레임 씌우기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가 모두 반드시 필요한 국산 에너지원이다. 지금 한국의 원자력 설계 능력과 제조 능력이 서방세계에서 최상의 위치에 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기술을 한국기업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에서 이미 다 개발한 기술을 우리가 처음부터 개발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다. 산업계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주고 받는 협력이 얼마나 경쟁력을 높여주는지 잘 알 것이다. 이것은 효율의 문제일 뿐이고 계약의 문제일 뿐이다. 만약 우리 기업이 새로운 원자로를 개발한다면 이건 당연히 기존 도입 계약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ARP1400이나 APR1000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처럼 프레임을 고정할 필요가 없고, 다음 수준의 협력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신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원자력 산업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AI로 촉발된 전력난과 에너지 분야 투자 열기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동력을 얻고 있다. 유럽에서도 대부분의 국가가 친 원자력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런 대외적인 환경 변화도 우리 국민이 판단을 내릴 때 제대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 기회의 문이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외 여건상 지금이 중요한 타이밍이다. 국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우리 원자력산업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밤낮으로 온갖 방면으로 노력할 때이다. 이런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애국자이다. 강현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기자의 눈] 이재명 정부,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정책 환경 만들어야

정권 교체와 기후에너지환경부 신설 이후로 발생한 이재명 대통령과 김성환 장관의 신규원전 재검토 발언, 청정수소발전시장(CHPS) 입찰 취소 등으로 발전업계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일련의 사태들은 단순한 정치권의 의지나 행정 조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어떤 에너지원이든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지키지 못하면, 산업 전반의 투자 의지가 급속히 위축되고 이는 전력수급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원전이냐, 석탄이냐, 액화천연가스(LNG)냐, 재생에너지냐의 선택이 아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방향이 급격히 뒤집히고, 이미 세워진 계획이 흔들리는 정책 불확실성 그 자체가 더 큰 리스크다. CHPS 입찰 취소로 입찰에 나섰던 기업들은 소위 '멘붕' 상태다. 사업자들은 정부 계획을 믿고 장기적인 투자와 준비를 한다. 발전소 하나를 짓기 위해 수년간의 인허가, 수천억 원의 자금 조달, 수백 명의 인력이 투입된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으니 방향을 바꾸겠다"는 이유로 정책이 철회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과 국민에게 돌아온다. 특히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올해 2월 여야 합의를 거쳐 확정된 국가 에너지 로드맵이다. 이 계획에는 신규 원전 2기 건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사업마저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이는 겨우 회복세를 보이던 국내 원전 생태계에 다시 냉기를 불어넣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원전 기자재 업체와 인력풀, 협력 중소기업들은 수년 만에 활기를 되찾았지만 정부가 신호를 흔들면 산업 기반은 또다시 무너질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전력수요 증가로 대형 원전은 물론 SMR(소형모듈원전) 수요까지 급격히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원전 기업들은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 재평가받고, 주가 역시 고공행진 중이다. 그런데 정책 신호가 불투명해지면 이 상승 흐름의 동력이 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책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이다.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전력수요 폭증이 예상되고 있다. 청정수소이든, LNG이든, 원전이든, 에너지원의 종류를 가리지 말고 정부는 기업이 믿고 투자할 수 있는 '신뢰 가능한 정책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지금 정부가 해야할 일은 급격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일관성과 신뢰성이 담보된 에너지 수급 환경 조성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김병헌의 체인지] 캄보디아 사태···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서울 강남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하지만 그 불빛 속에 앉은 청년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월수입 1000만 원 가능'이라는 문장이 반짝인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손끝이 '지원하기'를 눌렀다. 그 선택이 인생의 경계선을 바꾸어 놓았다. 몇 달 뒤, 그는 캄보디아의 범죄단지에서 구조 요청 메일을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짧은 문장이 지금 이 나라 청년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한 사회의 무관심이 낳은 기록이었다. 캄보디아 사태는 단순한 외교 실패가 아니다. 그건 국가가 청년의 절박함을 외면해온 세월의 결과다. 정부는 “현지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는 한국 사회의 무책임과 체념이 응축돼 있다. 외교의 실패는 사건으로 남지만, 청년의 방치는 구조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건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들의 절규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청년 취업자는 1년 새 10만 명 넘게 줄었고, 비정규직 비율은 38%를 넘어섰다. 제조업 일자리는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청년 네 명 중 한 명이 계약직으로 사회에 들어선다. 면접장은 점점 좁아지고, 합격 통보는 희귀해졌다. “경험이 없어서 탈락했습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기회를 막아온 사회의 책임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언제까지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하라 강요할 것인가. 대학은 여전히 이론의 섬 위에 있고, 기업은 즉시 쓸 수 있는 인재만 원한다. 정규직은 과보호되고, 비정규직은 버려진다. 청년이 정규직 문을 두드릴수록 그 문틈은 더 좁아진다. 정부는 매년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을 발표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이름만 달라질 뿐 본질은 늘 제자리다. 정책은 소리만 요란하고,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 정년 연장과 주4.5일제는 이미 자리를 가진 세대의 안락을 위한 제도일 뿐, 아직 자리를 얻지 못한 세대의 구명줄이 아니다. 캄보디아로 떠난 청년들이 그토록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시도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불안이 남고, 그 불안은 다시 누군가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순환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한 세대 전체가 '패배의 감정'에 익숙해진다. 독일은 대학과 기업이 함께 설계한 도제 시스템으로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현장 경험자'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위스는 청년 인턴의 임금을 정부가 일정 부분 보조하고, 정규직 전환 시 세제 혜택을 준다. 일본은 지방 중소도시에 청년 고용과 창업 클러스터를 만들어 수도권 집중을 완화했다. 그들은 청년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경제의 주체'로 다뤘다. 청년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국가가 설계해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단기 알바성 대책과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구조다.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사회와 이어지는 통로, 기업이 청년을 채용할 이유가 생기는 인센티브, 지역이 청년을 품을 수 있는 생태계,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일자리 정책의 일관성이다. 기회의 문을 여는 일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상식을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간 청년의 메일은 외교부의 스팸함에 묻혔다. 지금 이 땅에서도 수많은 청년이 매일 이력서라는 이름의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절박한 신호에 국가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직접 신고하라"는 말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가. 청년의 절망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무능이 낳은 결과다. 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위험이 기다린다.우리가 외면한 청년의 메일이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 메일을 읽을 시간이다. 그리고 응답할 시간이다. 청년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미래를 구조할 수 없다. 변화는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타인의 절망을 읽어내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기자의 눈] 日관광객까지 위축시키는 ‘혐중 시위’ 이대로 괜찮나

“서울 어디에 숙소를 잡아야 안전해?" 내달 한국 여행을 앞두고 있는 일본인 친구에게서 지난 15일 받은 메시지다. 이 친구는 2010년대 일본 내 한류 열풍의 주역 걸그룹 카라를 통해 K-팝에 눈을 뜨고 현재 뉴진스에 푹 빠져 있다. K-컬처에 대한 오랜 애정으로 이제 우리나라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 서울 명동 일대와 대림동에서는 '혐중(중국인·중국 혐오)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극우 성향 단체가 중국인 관광객과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향해 비하 발언을 쏟아내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대만 네티즌이 SNS에 “최근 한국에서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이런 배지를 달아야 할까?"라며 '대만 사람이에요'라고 한글과 영어로 적힌 배지 사진을 공개하는 등 방한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혐중' 정서에 대한 우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 '혐중'과 '반중'은 철저히 구분돼야 한다. '반중'은 중국의 어떠한 사안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일어나는 감정이기에 '말'로써 서로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혐중'은 인종주의적 차별이다. 모든 중국인에게 무차별적 혐오와 증오를 덮어씌웠다. 중국인 전체를 일반화해 비난하는 감정을 부추기는 데에는 10~20대의 이용률이 높은 X(구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가짜뉴스'로도 퍼지고 있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았던 전날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이런 일까지 알고 있지?'였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한 뒤 나름 '안전'하고 극우단체가 몰려들기 어려울 만한 장소를 알려줬다. 마지막으로는 “너는 중국인이 아니어서 괜찮아"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 친구에게 이것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2019년 도쿄 여행 당시 외교부로부터 받은 '일본 내 혐한 집회, 시위 장소 방문 자제 및 신변 안전 유의'라는 메시지가 생각나면서 순화한 표현으로 창피함이 몰려왔다. 비단 일본인뿐일까. 한국을 찾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혐중 시위'에 위축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한국에 호기심을 품고 여행 온 외국인 눈에 '혐중 시위'는 어떻게 비쳐질까. 아찔하기만 하다. 백솔미 기자 bsm@ekn.kr

[신율의 정치 내시경] 획일성 강요하는 공천 기준, 정당 민주주의 위협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말까지 지방선거 공천 기준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핵심 기준은 '세 번 이상 탈당 전력자 공천 배제'인데, 범죄 경력이나 음주 운전 같은 기존의 부적격 사유에 더해 탈당과 복당을 반복한 정치인들까지 '예외 없는 부적격자'로 규정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권 재창출보다 자기 정치에만 몰두했던 인사들을 걸러내겠다는 뜻"이라며 “이제는 경력보다 책임, 성과보다 충성이 기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다. 당 충성도를 강조하는 이러한 방침은 표면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리 정치에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철새 정치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표현은, 공정한 공천 규칙과 투명한 경쟁 절차가 보장된 상황에서도 단지 공천 탈락 우려만으로 당을 떠난 경우에 한정해 사용돼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확해진다. 민주당의 과거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현재는 당을 떠났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고자 하는 인사들 전체를 '철새'로 낙인찍고, 이들의 경선 참여를 원천 차단하거나 경선에서 중대한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22대 총선 당시 공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이른바 '비명 횡사, 친명 횡재'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로 공정성 시비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이러한 불공정한 공천을 이유로 탈당한 비명계 인사들의 복당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한다면, 이는 특정 계파를 겨냥한 불이익 조치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공천 기준은 진정한 의미의 당 쇄신이 아니라 특정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계파 정리 수단'으로 활용될 우려가 크다. 유사한 양상은 국민의힘에서도 확인된다. 국민의힘은 탈당 전력보다는 당에 대한 기여도와 충성도를 계량화하여 공천 기준으로 삼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접근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내용을 검토하면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당에 대한 기여도'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다. 보도에 따르면, 당원 모집 실적, 당론 행사 참석률, 정책 홍보 기여도, SNS 활동 등이 기여도 평가의 세부 지표로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론 행사 참석률'이나 '정책 홍보 기여도'는 객관적 측정이 어렵고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다. 예컨대, 얼마 전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시한 '패널 인증제'는, 당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하는 방송 패널의 출연을 제한시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입장을 내놓은 지도부가 당론 행사 참석률이나 정책 홍보 기여도를 공천 기준으로 제시할 경우, 이는 당 지도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민주적 정당이라면 당내 소수 의견과 비판적 목소리 역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충성심 부족으로 규정하고 공천에서 불이익을 가한다면, 이는 민주적 정당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당내 다양성을 억압하는 이러한 방식이 과연 선거 승리를 위한 합리적 전략인지 근본적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당 내 계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민주적 정당에서 계파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계파는 억압해야 할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정당 내부의 다양성과 민주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야 모두가 공천 제도를 통해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정당을 구축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 정당 운영을 통해 구현되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발전이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만큼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경로를 견지해 나가기를 바란다. 신율

[EE칼럼] 에너지 전환의 성공방정식, ‘분수효과’

윤태환 루트에너지 대표 2008년 MB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 하에 풍력 산업을 '제2의 조선업'으로, 태양광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 일부 선도 기업을 제외하면 기술 격차가 크지 않았고, 한국 기업의 빠른 추격 역량을 고려할 때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실제로 LG, 삼성, 현대 등 주요 대기업부터 웅진, OCI 등 중견기업, 그리고 다수의 벤처기업들이 신성장 동력으로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전략적 투자를 했으며, 정부 역시 다양한 정책 인센티브를 확대하고 있었다. 필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용위기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확산되는 기후변화협약 속에서 '기후위기와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2009년 기후에너지 전문 컨설턴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후에너지 컨설턴트로서 주요 업무는 글로벌 성공·실패 사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핵심 인사이트를 도출하여, 정부와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각국의 성공방정식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장애물이 있었고 어떤 솔루션으로 돌파했는가. 이해관계자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졌고 갈등 조정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는가. 정부·기업·지자체·시민사회의 역할 분담과 협력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러한 전략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분석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 성공방정식이 있었다. 바로 '상향식(Bottom-up) 전환 모델'이었다. 전통적으로 정부와 기업은 '하향식(Top-down) 전환' 방식에 익숙하다. 중앙정부의 정책 결정이 지방정부와 최종 수혜자에게 순차적으로 파급되는 구조이며, 기업 생태계에서는 대기업의 성과가 협력사와 근로자에게 순차적으로 이전된다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 논리다. 그러나 낙수효과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핵심 문제는 구조적 전제의 오류에 있었다. 낙수효과는 시장 안정성과 정책 일관성을 전제로 하는데, 실제 비즈니스 환경에서 글로벌 정세, 경영 여건, 정치적 변수는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시장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기업들은 유동성 확보를 우선시하며 R&D, 설비투자, 신규 채용 등 장기 투자를 축소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변화 없는 안정성이라는 전제 자체가 비현실적이기에, 낙수효과는 제한적 조건에서만 단기적으로 작동할 뿐이었다. 더 중요한 이슈는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변동성이었다. 낙수효과가 실질적 성과를 내려면 최소 10~20년 이상의 정책 일관성이 확보되어야 기업들이 장기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MB정부 시기 태양광·풍력 분야에 진출한 기업들의 현재 생존율을 보면, 정책 불확실성이 산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재생에너지 관련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투자 기피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탈원전이 핵심 에너지 정책으로 추진되면서,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고 재생에너지 시장 전체가 타격을 받았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개선이라는 본질적 목표는 퇴색되고, 에너지 정책이 정치적 공방의 도구로 전락했다. 최종 손실은 산업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 감소, 환경 악화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전가되었다. 10여 년간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민간 투자는 정체되었고, 중국이 글로벌 기술 리더십과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며 한국 기업들의 경쟁 우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기후·환경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산업과 고용은 성장하지 못했으며, 저출생·지역소멸·경제성장률 하락이라는 복합 위기가 가속화되었다. 반면 필자가 발견한 상향식 성공모델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에게 기후에너지 프로젝트 투자 기회를 개방하고, 참여자가 전체 인구의 5~10%를 넘어서자 결정적 '티핑포인트'가 형성되었다. 정치권은 이념을 초월하여 기후에너지 친화적 정책을 입안했고, 정권 변화에도 핵심 정책 기조는 유지되었다. 이는 시장에 명확한 정책 시그널을 제공했고, 안정적 내수 수요를 창출했다. 기업들은 장기 투자 전략을 수립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신규 고용 창출과 GDP 성장,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다층적 성과를 달성했다. 새로운 정부에서 에너지 전환이 성공하려면 과거처럼 낙수효과가 아니라 분수효과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길 기대한다. 윤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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