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한달 반 가량 앞둔 가운데 한·미 반도체·배터리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국 대선 결과가 해당 산업에 미칠 영향을 전망하고 그에 따른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23일 대한상공회의소와 한미협회는 이날 '한미 산업 협력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미국의 두 후보 모두 한국을 외교·안보 분야는 물론 경제·산업의 중요한 파트너로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산업 협력은 안보 동맹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라며 “한·미 양국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야 하고 특히 미국의 기술력과 한국의 제조 역량이 결합되면 긍정의 시너지 효과가 창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은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미국의 중국 견제와 자국 내 투자 확대 기조는 계속될 것이라며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위기·기회 요인을 간파해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부 주제 발표에 나선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는 “누가 당선되든 미·중 패권 경쟁은 반도체를 넘어 AI·양자 컴퓨터 등으로 확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의 대응 방안에 관해 그는 “고성능 AI 전용 메모리칩과 선행 기술, 표준·로드맵 설정 등 제반 분야에서 미국의 대체 불가능한 핵심 파트너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국내 메가 클러스터 생태계 확충과 차세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R&D)·인력 투자 등 중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화상 연결로 패널 토론에 참여한 게리 클라이드 허프바우어 피터슨 국제 경제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 대선에서 누가 되든 미국 내 반도체 투자에 크게 기여한 칩스법은 바뀌지 않겠지만, 다음 대통령 임기 중 반도체 산업의 주요 관심사는 AI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터슨 연구원은 “고성능 반도체와 인재 확보가 필수적인데 만일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 두 가지를 중국으로부터 철저히 차단시키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미 양국의 윈윈 전략으로는 “중국에 어떤 반도체를 수출 또는 생산 못하게 할지 양국 간 합의가 있으면 좋은데, 특히 그래픽 처리 장치(GPU)와 3D 메모리칩이 중점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국내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주요국처럼 직접 보조금이 필요하다"며 “반도체 특별법 등 관련 법안들이 국회 내에서 신속히 검토되고 통과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창환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도 “미국의 반도체 투자와 R&D 정책은 어느 후보가 당선되든 국가 안보와 경제력 향상이라는 큰 틀에서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누가 당선되든 미국의 초격차 반도체 개발을 위해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 동맹국과의 연합을 유지·강화시켜나가겠지만 특정 분야에 있어 뜻밖에 중국과 화해하는 시나리오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신 교수는 “특히 칩렛 기술을 중심으로 미중 간 기술 교류·공동 표준 개발 등 선별적 협력 체제가 구축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봤다. 2부 배터리 분야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 축소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화상 연결로 주제 발표에 나선 '배터리 전쟁'의 저자 루카스 베드나르스키는 “해리스가 당선되면 IRA를 포함한 배터리 정책 전반의 기조가 유지될 것이지만, 트럼프가 된다면 IRA 혜택이 축소돼 한국 배터리 기업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양국 협력 방안에 대해 그는 “한국 배터리 산업은 미국 기업들이 채굴한 리튬을 활용할 수 있고, 양국 기업과 대학 간 공동 R&D 추진은 물론 한국 배터리 연관 스타트업들이 미국 벤처 자본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종서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총괄본부장은 “트럼프 재집권 시 행정부 권한을 활용해 IRA 지원 규모를 축소할 경우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공급망 내재화가 시급해 질 수 있어 올해 시행된 '공급망 기본법' 등을 활용해 중국산 저가 제품과의 가격 차이를 좁히고, 국내 배터리 소재 사업을 육성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도 “트럼프가 당선 시 행정 권한으로 IRA가 후퇴한다면 미래 이익을 기대하며 단행했던 국내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들이 전면 재조정될 것"이라며 “배터리 원료·소재의 내재화와 조달처 다각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가치 사슬(GVC)에서 신뢰 가치 사슬(TVC)로의 전환이 필요한데 한국은 광물 가공-소재-배터리-전기차 전체 밸류 체인에서 중국의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국가"라고 말했다. 박 수석은 “정부 차원에서 한국 기업들의 광물 자원 확보, 소재 가공·생산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중국 공급망 의존에서 벗어나고 미국 공급망 분야의 핵심 파트너가 돼야 한다"며 “동시에 미국은 한국 기업들이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한 투자에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IRA·외국 우려 기업(FEOC) 변화 가능성 등의 정책 불확실성을 제거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경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지속가능미래기술연구본부장은 “미국은 자국 기업 이익을 우선시 하므로, 올해 초 포드가 IRA를 우회해 CATL과 합작한 것처럼, 중국산 배터리를 완전 배제하진 않을 것"이라며 “기업과 정부가 집중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중국과의 경쟁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패널 토론의 좌장을 맡은 서정건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로 한 결정 자체에 대한 이견은 이제 미국 내에 없다"며 “다만 미국이 중국을 어떻게 견제할지에 대한 문제는 양당의 입장이 다르고, 의회 다수당 여하나 의회 내 규칙·절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미국의 중국 견제에 대한 정치적 디테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