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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 시대, ‘한국형 ODA’의 새 기회

지난달 정부가 주관한 '2025 개발협력주간' 행사에서 한 국내 벤처창업가는 대표적 저개발국인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깜짝 놀랐던 경험을 전했다. 1인당 GDP가 세계 150위권인 이 나라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농업용 관개수로나 식수용 상하수도 시설은 없어도 현지 주민의 스마트폰과 이를 위한 통신망 인프라는 생각보다 잘 갖춰져 있어 놀랐다는 것이다. 저개발국에서 식수 및 위생 개선사업을 하는 이 창업가는 높은 현지 스마트폰 보급률을 활용해 비용은 물론 시간, 공간, 인간의 제약조건을 극복한 새로운 개발협력 사업 기회를 봤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자리바꿈한 모범적인 국가로 꼽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상원조 규모는 미국, 독일, 일본 등 기존 공여국(선진국)에 비해 10~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고안한 원조 방식이 '프로젝트 원조'였다. 선진국처럼 도로, 철도, 항만, 발전소 등 대규모 원조(공적개발원조·ODA)를 무상으로 제공할 순 없지만, 학교, 병원 등 비교적 소규모 시설을 무상으로 지어주면서 동시에 한국의 강점인 '맨 파워'를 결합해 교사, 의사 등 봉사자를 파견하고 현지인을 국내로 초청 연수해 주는 '물적+인적 결합 패키지' 원조 방식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이는 교육, 의료, 위생 등 저개발국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도움을 주고 한국 봉사자와 현지 주민간 스킨십을 가능케 해 동남아시아는 물론 우리나라와 지리적·역사적 연관이 별로 없던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에서도 '글로벌 프렌드 코리아'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가성비 좋은' 무상 ODA 사업방식에 또다른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ODA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 저개발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하나는 식량부족이다. 이는 저개발국의 높은 인구증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증가와 농작물 수확량 감소가 더 큰 요인으로 꼽힌다. 기후위기 대응은 글로벌 공통 과제지만 특히 저개발국은 대응 능력이 부족하고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도 더 크게 받는 것으로 평가된다. 무상 ODA 대표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AI를 활용한 기후위기 대응 사업을 미래 ODA의 핵심 사업으로 꼽고 있다. 저개발국의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과 한국의 IT 및 AI 역량을 결합해 막대한 원조자금을 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기후변화 피해를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라오스의 특정 농경지역에서 단기(10일) 및 중장기(3개월) 강수량 예보, 지하수 정보, 토양수분 실시간 정보 등을 AI로 분석해 현지 농민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제공함으로써 가뭄·홍수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솔루션 개발 및 보급 사업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이 아이디어는 코이카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이 공동 주관하는 AI 기반 기술 공모전인 'AI for Climate Action Awards 2025(2025 AICA 어워즈)'에서 최우수 아이디어로 선정된 바 있다. 나아가 코이카는 기존 코이카가 직접 주도하던 원조 방식을 넘어, 민간 대기업, 스타트업, 소셜벤처, 수혜국 현지기업들이 서로 협업해 개발협력사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에 초점을 맞춘 '혁신적 기술 프로그램(CTS)', '포용적 비즈니스 프로그램(IBS)' 등 신개념 개발협력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코이카의 새로운 ODA 전략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에 한국형 AI 모델을 보급하고 현지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우리 AI 기업이 활용함으로써 우리 정부가 내걸은 '세계 3대 AI 강국' 목표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AI 시대에 다시 한번 ODA 모범 국가로 자리잡을지 주목되는 이유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아직도 요원한 윤석열 청산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특검이 오는 14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이 느닷없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상식적 차원에서 너무나도 명백한 위헌, 위법적인 범죄다. 그런데 내란 재판은 1년 넘게 어이지고 있다. 이러다가 윤석열이 다시 풀려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책임이 막중한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반성과 사과는커녕 모든 잘못이 민주당에 있다고 강변한다. '친윤'이 말려도 막무가내다. 국민의힘 당원 중에는 불법 계엄을 옹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모습은 대다수 국민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남긴 폐단은 한둘이 아니다. 부자 감세로 세수 부족 사태를 유발했고, 연구개발(R&D) 예산을 깎는 바람에 인재가 이탈하며 과학기술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국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극우 세력의 발호다. 예전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극우주의자들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서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무자격자가 권력을 잡아 국가 위기를 초래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은 주나라(서주) 말기 여왕, 유왕과 많이 닮았다. 여왕은 '입틀막'의 고사를 남겼고 유왕은 애첩을 위해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여왕은 비밀경찰을 대거 풀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 죽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길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눈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는 고사가 나온 연유다. 지난해 2월 한국과학기술원 학위 수여식에서 윤석열이 축사하는 도중에 한 졸업생이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항의했다. 경호원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고 팔다리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 '입틀막' 장면은 윤석열의 불통과 언론 탄압의 상징이 됐다. 김건희 방탄을 위한 '권력 사유화'는 더 심각한 문제다. 이는 서주를 망하게 한 유왕을 연상케 한다. 유왕은 후궁인 포사를 위해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웃지 않는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를 올렸다. 당시 봉화는 국가 존립의 최후 보루였다. 이민족이 침입했을 때 지방에 있는 제후국 군대를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귀중한 공적 자산을 연인의 미소를 보려고 남용한 것이다. 윤석열은 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변호인에게 김건희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특검은 불법 계엄의 동기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뇌물 수수 등으로 처벌 위기에 처한 김건희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비상계엄은 유왕이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올린 것과 다름없다. 유왕은 또 후궁인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적장자를 제거하려 했다. 이는 윤석열이 정권 초기에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을 몰아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당대표를 바꾼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여왕과 유왕의 말로는 비참했다. 여왕의 폭정에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주나라판 '빛의 혁명'이었다. 여왕은 수도에서 탈출해 '체'라는 지역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유왕은 전쟁 중에 비명횡사했다. 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의 군대는 오지 않았다. 포사를 위해 봉화를 올린 장난이 부메랑이 됐다. 주나라판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윤석열의 끝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지도자의 몰락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왕이 권좌에서 쫓겨난 이후 주나라는 14년 동안 군주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를 '공화'라고 한다. 이때 주나라의 정통성과 국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그 이후 여왕의 아들 선왕이 쇠락한 국가를 다시 살리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죽고 권력을 잡은 이가 바로 유왕이다. 우리 국민은 목숨을 걸고 불법 계엄을 막았다. 하지만 내란의 후유증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두고두고 국가를 쇠락시키는 독소가 될 게 분명하다. 윤석열 청산은 사법적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국가 시스템을 바꿔놓아야 가능하다.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극단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 낡은 규제와 제도에 포획된 경제 체제를 극복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기자의 눈] 개미 1500만명 시대, 증권사 규제·처벌은 구시대

주문이 먹지 않고, 잔고가 갑자기 수천만원씩 튀어 오르고, 전혀 모르는 사람의 체결 내역이 내 휴대폰에 뜨는 일. 증권사 전산사고 얘기다. 이제는 놀라울 것도 없다. 개인투자자 1500만명 시대라고 하지만, 이 거대한 투자 기반을 받쳐줄 '인프라와 규율'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이달에만 벌써 두 건의 사고가 연달아 터졌다. 지난 2일 메리츠증권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에서 타인의 미국 주식 체결 알림이 사용자들에게 그대로 전송됐다. 실명부터 종목, 수량, 매수가, 체결 시각까지 고스란히 노출됐다. 회사는 '단순 오발송'이라고 설명했지만, 알림을 받은 투자자들에게는 '내 정보도 누군가에게 넘어갔을지 모른다'는 근본적 불신만 남겼다. 이어 4일에는 한화투자증권 퇴직연금 계좌에서 잔고와 수익률이 비정상적으로 부풀려 표시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최대 수천만원 단위로 잔고가 늘어났고, 회사는 과대 계산된 이자를 수정하면서 “실제 손실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 발생 여부가 아니라, 시스템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다. 증권사 전산사고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회 정무위원회 추경호 의원실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5월까지 집계된 증권사 전산장애는 497건. 사실상 '월 10건' 꼴이다. 증권사들이 자체 산정한 피해액은 267억여원에 달한다. 특히 한국투자증권(65억5472만원), 키움증권(60억8105만원), 미래에셋증권(41억672만원) 등 대형사에 피해가 집중됐다. 장애 원인을 뜯어보면 문제는 더 구조적이다. 프로그램 오류가 194건으로 가장 많았지만, 진짜 리스크는 시스템·설비 장애였다. 건수는 128건이었지만 피해액은 무려 145억4640만원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하드웨어·인프라 차원의 문제가 한번 터지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가 드러난다. 이처럼 사고는 누적되는데 정작 감독당국의 제재는 미미하다. 최근 5년간 금융감독원이 내린 제재는 7건. 대부분 '주의' 또는 '견책' 수준이었다. 과태료 총액도 5억원 남짓으로 수백억원대 피해 규모와 괴리가 크다. 심지어 제재까지 걸리는 시간도 지나치게 길다. 미래에셋증권 전산사고에 대한 과태료 처분은 확정까지 5년 가까이 걸렸다. 모바일 거래는 초 단위로 움직이는데, 감독의 시계는 여전히 연 단위로 돌아간다. 보상 체계도 허점투성이다. 시스템이 멈춘 순간에는 로그인 기록조차 남지 않아 피해를 입증하기 어렵다. 잔고·체결 정보 오류는 더 복잡하다.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고, 보상 기준도 모호하다. '전산 장애 가이드라인'만으로는 1500만 투자자를 지키기 어려운 이유다. 투자자 기반이 커진 만큼 시스템과 규제도 그 규모에 맞게 확장돼야 한다. 문제를 설명하는 데서 끝낼 것이 아니라, 사고를 막는 구조와 책임 체계부터 다시 짜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사건 처리'가 아니라 '시스템 개혁'이다. 장하은 기자 lamen910@ekn.kr

[기자의 눈] ‘무안공항참사 조사위’ 독립성을 흔드는 건 누구인가

지난 4일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가 개최할 예정이던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2216편 참사 중간보고·공청회를 무기한 연기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유가족협의회와 국회 12·29 특별위원회의 공식적인 연기 요청과 공청회장의 안전 우려였다. 그러나, 사조위의 연기 결정은 독립성이 생명인 조사기구가 스스로 정치권의 압박과 피해자단체의 실력행사에 백기투항한 것이자 대한민국 항공안전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연기 사태의 비판점은 명확하다. 국토교통부 장관의 리더십 부재가 사조위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는 점, 유가족과 정치권의 '선 넘는 개입'이 공청회를 무산시켰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대상은 국토부 장관이다. 참사 초기부터 콘크리트 둔덕 설치·관리 등 국토부 책임론이 불거졌음에도 장관은 “법적 권한이 없다"는 말 뒤에 숨어 사조위가 '셀프 조사' 논란에 휩싸이도록 방치했다. 주무부서의 비겁한 회피는 유가족들에게 '국토부는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결과적으로 사조위를 여론의 광장 한복판에 고립시켜 동네북이 되도록 만든 꼴이 됐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유가족 협의회와 국회 12·29 특위의 행보다. 이들은 현재 △공청회·중간 보고 중단 △참사 진상 규명 과정에서의 피해자 참여 보장 △이재명 대통령 면담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사조위의 소속을 총리실로 옮기는 법 개정 논의는 입법부의 권한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머지 요구 사항들은 명백히 국제 기준을 위반하고 과학적 조사를 무력화하는 '외압'이다. 대통령과의 면담을 추하는 움직임은 결국 이 사고를 기술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끌고 가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유가족들은 대놓고 “우리가 추천하는 전문가를 조사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슬픔은 이해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는 국제민간항공기구 부속서(ICAO Annex) 13과 사조위 운영 규정 제29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다. 해당 규정들은 사고 조사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이해 관계자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고, 독립적인 전문가들이 오직 데이터에 기반해 원인을 분석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피해자가 조사관이 되는 순간 조사는 '원인 규명'이 아닌 '책임 추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유가족이 재판관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작금의 상황은 과거 농민 백남기 씨 사망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우리는 전문가인 의사의 의학적 판단인 사망 진단서가 정치적 외압과 여론에 의해 수정되는 과정을 목도했다. 그 방향이 옳았든 틀렸든, 전문가의 영역이 '목소리 큰 진영'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무안공항 참사 조사에서도 유가족들은 블랙박스가 가리키는 '잘못된 엔진을 정지한 조종사 과실 가능성'을 믿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있다. 만약 유가족의 압력에 밀려 사조위가 데이터가 가리키는 진실을 외면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보잉의 기체 시스템 결함'이나 '시설 책임'으로 결론을 수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2의 백남기 진단서 사태'가 될 것이다. 과거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 사고나 아시아나항공 214편 샌프란시스코 사고 때도 유가족들은 기체 결함을 주장하며 조종사 과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가족의 눈물 대신 차가운 팩트를 선택했기에 전 세계 항공업계는 훈련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더 안전한 하늘을 만들 수 있었다. 국회 12·29 특위와 유가족에게 묻는다. 사조위가 국무총리실로 가든 대통령 직속이 되든, 사고 당시 조종사가 멀쩡한 엔진을 껐다는 블랙박스의 기록이 바뀔 수 있는가? 국내 항공 사고 처리 인력풀은 매우 협소한데 그 어디에도 전문가가 없어 결국 국토부에서 조사관들을 파견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생겨났던 항공사고 조사 결과들은 어떻게 수긍해 왔나? 사조위의 상급 기관이 바뀐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사고 조사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의 영역이다. 피해자가 조사관이 되는 순간 사조위는 '원인 규명'이 아닌 '책임 추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배가 산으로 가는 우'를 범할까 우려스럽다. 유가족이 사건사고의 재판관이 될 순 없지 않은가. 전문가를 배척하고 감성이 과학을 지배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사조위의 독립성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가장 원한다는 유가족들과 그들 곁에 선 정치인들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김한성의 AI시대] AI 활용 국가, 한국이 만들어야 할 제3의 길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5년, 글로벌 기술 생태계를 가장 크게 뒤흔든 변화는 단순히 성능이 향상된 AI가 아니었다. 인간의 의도를 이해하고 목표를 재구성하며 상황에 따라 절차를 스스로 설계하는 새로운 유형의 '에이전트형 AI(Agentic AI)'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AI가 더 이상 우리가 묻고 이에 대한 응답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협력적 존재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의 위상이 바뀌면, 인간이 AI와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국가가 AI를 사회에 통합하는 전략 역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각국은 저마다의 여건에 맞춘 AI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중이다. 미국은 초거대 모델 경쟁을 기반으로 명령형(Command-Based) AI 전략을 강화한다. 우수한 모델을 만들고,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AI가 수행하는 구조다. 한편 중국은 방대한 데이터와 통합적 국가 시스템을 기반으로 관리형(Manager-Based) AI를 구축시킨다. 도시 운영, 사회관리, 산업 정책까지 AI가 집단적 효율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두 모델 모두 강력하지만, 공통점으로 인간과 AI가 함께 사고를 확장하는 구조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한국은 이 두 모델과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미국처럼 막대한 원천기술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고, 중국처럼 국가 단위로 데이터를 일원화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AI 기술이 고도화된 지금, 경쟁의 중심은 “누가 더 큰 기술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사회와 결합시키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즉, 서열 경쟁이 아니라 문명적 선택의 경쟁, 다시 말해 새로운 형태인 제3의 길이 열리고 있다. 한국이 선택할 전략적 방향은 협력형(Cooperative) AI 패러다임이다. 한국 사회는 높은 문해력, 빠른 적응력, 촘촘한 소통 구조 등 협업 중심의 문제 해결 방식에 익숙하다. 이는 인간과 AI가 판단을 나누고 서로를 보완하는 Agentic AI의 작동 원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한 디지털 행정, 의료보험, 교육 인프라 등 한국의 전 국민적 표준화 경험은 AI 협업 체계를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 즉, 한국은 초거대 모델 경쟁보다 기술을 사회운영 방식과 결합해 구조를 재설계하는 데 강점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다. 이 협력형 패러다임을 국가 전략으로 실체화하려면 개인 → 조직 → 데이터 → 신뢰로 이어지는 단계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첫 정책과제는 전 국민 AI 협업역량 표준(K-AI Collaboration Standard)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코딩 교육의 확장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AI와 어떻게 대화하고 판단하며 공동 작업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적 기준이다. 예컨대 공공기관은 문서작성 과정에 AI 협업 절차를 도입하고, 교육 현장은 'AI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핵심 역량으로 채택할 수 있다. 이는 AI 리터러시를 단순한 교육 과제가 아니라 국가 인적자본 전략의 중심 축으로 재정의하는 일이다. 이러한 협업 역량의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산업·행정·의료·교육 등 각 분야의 업무 구조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 둘째 정책과제는 산업·행정·의료·교육 등 주요 영역의 업무 구조를 AI 협업 프로세스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이는 기존 업무에 AI를 단순히 덧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업무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각 부문마다 역할·책임·안전장치를 함께 설계하는 일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를 조정할 상시적·전문적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국가 AI의 비전과 원칙을 정하는 전략·심의 기능을 담당한다면, 실제 행정·산업 현장에서 AI 협업 프로세스를 구현·조정할 풀타임 전담 실행조직—'AI 활용 전략본부(가칭)'—이 별도로 필요하다. 부처 단위의 분절된 정책 체계만으로는 협력형 AI 패러다임의 구조적 확장을 감당하기 어렵다. 셋째 정책과제는 데이터 신뢰 프레임워크(K-Data Trust Framework)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국가가 데이터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기관·기업이 데이터를 안전하게 공유하고 교환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협력형 AI는 정답형 데이터보다 맥락형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이 데이터가 안전하고 투명하게 흐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수다. 넷째 정책과제는 AI 자율성 증가에 대응하는 책임성·투명성 체계(Algorithm Accountability System)를 구축해야 한다. 알고리즘 감사, 설명 가능한 AI 기준, 시민 참여형 평가 시스템 등은 한국형 협력 패러다임을 국제적 신뢰 기준으로 발전시키는 핵심 토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정책들이 결합되면 한국은 원천기술 경쟁에서 1·2위를 다투지 않더라도, AI 활용의 질과 사회적 수용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기술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라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AI는 이제 자율적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 구조를 실현할 사회적 기반과 정책적 의지를 모두 갖춘 드문 나라다. 제3의 길은 선택지가 아니라, 한국이 갖춘 조건을 현실로 전환하는 전략적 방향이다. AI 시대의 경쟁은 서열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이며, 한국은 그 설계를 통해 미래 문명의 새로운 기준을 세울 수 있다. 김한성

[EE칼럼] 한전홀딩스, 개혁을 가장한 시대역행

최근 전력산업의 논의 지형에 가칭 한국통합발전공사 혹은 '한전홀딩스'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일부 관계자들이 ㈜한국전력(이하 한전)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한전과 발전 자회사의 역할을 재배열하자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발전 등 발전 자회사들 사이의 역할 중복, 100% 모회사로서 한전이 행사해온 수직적 지배구조, 중복된 연구개발(R&D) 투자가 비효율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이를 지주회사라는 새로운 틀 아래서 단번에 정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다. 얼핏 보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구조개편처럼 들린다. 조직을 다시 배열해 기능을 명확히 하고, 한전은 전력공급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며, 발전 자회사들은 지주회사 산하에서 보다 자율적인 체계로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도 덧붙는다. 2001년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한전의 수직적 독점 체제를 해체하고, 발전·송전·소매 기능을 분리해 경쟁과 중립성을 도입하려는 미완의 개혁의 첫걸음이었다. 발전부문을 6개 자회사로 나누고, 계통 운영을 한전으로부터 떼어내 전력거래소를 설립한 조치는 장기적으로 송전망 운영의 독립성과 소매시장 경쟁 도입까지 바라본 분권·경쟁 지향의 로드맵이었다. 그러나 최근 제기되는 한전홀딩스 구상은 이러한 개혁의 방향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발전·송전·판매·신재생을 다시 지주회사라는 단일한 우산 아래 묶으려는 시도는, 기능을 분리해 전력시장을 시장답게 만들고자 했던 과거 개혁의 취지를 되돌리는 조치다. 그럼에도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앞세우니, 전력시장이나 지주회사 제도 중 하나라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쉽게 호도되고 만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재벌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면, 순환출자와 복잡하게 얽힌 지배고리는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불투명한 지배 구조를 끊어내기 위해 도입된 장치가 바로 지주회사 제도다. 소유와 지배의 흐름을 드러내고, 얽힌 고리를 정리해 책임의 방향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가 그 출발점이었다. 지주회사 체제는 얼핏 보면 구조개편의 강한 신호처럼 보인다. 조직을 다시 묶고 역할을 재조정하며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는 상징적 제스처는 언제나 '개혁'이라는 단어와 결합해 대중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빛은 얕고 표면적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지주회사라는 장치는 구조개편의 본질적 문제를 피해가며, 기존 질서에 다시 성벽을 세우는 일종의 복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 대기업이나 금융지주회사에서는 지주회사 체제가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업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지배구조를 정비하며, 자본을 효율적으로 재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성패가 끊임없이 갈리는 그들에게 지주회사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위험을 분산하고 성장동력을 재조정하기 위한 조직적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명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전은 다르다. 공익성을 본질로 삼는 국가 단위의 독점 기업에 지주회사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전력산업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외형적 논리만 빌려오는 셈이다. 한전이 직면한 문제는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문제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지금 필요한 개혁은 지배구조를 하나로 묶는 일이 아니라, 운영의 독립성, 시장 참여의 다양성, 계통과 가격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가 전력체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이며, 지주회사 모델은 그 어떤 부분도 해결하지 못한다. 지주회사는 흔히 '컨트롤타워'로 불린다. 거대한 기업집단을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 세밀하게 조정하는 브레인 같은 존재다. 이 체제 아래에서 인사권, 특히 CEO와 임원 선임권은 지주 본사에 집중되고, 중장기 전략도 각 회사의 판단을 넘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인다. 자회사들은 성과평가와 자본 배분, 투자 승인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으며, 리스크 관리와 준법감시 역시 지주사가 설정한 틀 속에서만 가능하다. 기업집단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몸체로 바라보는 사고에서 나온 체계로, 목표는 언제나 부분의 성과가 아니라 전체의 최적화에 맞춰져 있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금융지주— 모두 지주회사는 지배와 감독을 맡고, 자회사는 은행과 보험, 증권을 각자 전문적으로 운영한다. 하지만 예산과 인사, 전략이라는 조직의 심장부가 모두 지주 본사에 소재한다. CEO 및 임원 인선, 중장기 경영전략, 리스크 관리 모두 통합된 지주의 계획대로 운영된다. 이런 구조에서 자회사 간에 '경쟁'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에서 겨루는 독립된 기업이 아니라, 그룹 전략이라는 큰 지붕 아래서 역할을 분점받은 단위에 가깝다. 지주사가 본래 추구하는 가치 역시 혁신보다 건전성 확보에 더 무게가 실린다. 위험을 분산하고 비용을 통제하며 중복투자를 제거하는 데 주력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격적 혁신이나 시장을 흔드는 모험은 위축된다. 그 결과 지주회사는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권력의 중심을 더 단단히 고정하는 장치가 되곤 한다. 분권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 정교한 중앙집권의 기술에 가깝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역시 전력산업의 근본적 개편을 요구받았다. 그 흐름 속에서 도쿄전력은 2016년, 개혁의 깃발을 들고 지주회사 체제인 Tepco Holdings로 전환했다. 경영 효율화와 사업 부문별 책임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막상 내부의 작동 원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국민들이 원래 의도했던 건 독점화된 제국을 공고화하는게 아니라, 시장을 시장답게 만들자는 것인데 말이다. 전력산업이 마주한 진짜 개혁은 송전망의 중립성, 계통 운영의 독립, 소매시장 개방, 분권적 에너지 시스템 구축 같은 구조적 변화에 있다. 그러나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이러한 본질적 질문을 비껴간 채, 변화하는 듯한 제스처만 취하는 데 그친다. 이름을 바꾸고 조직도를 고쳐 그럴듯한 외형을 갖추지만, 실상은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문제를 가리는 방식에 가깝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개혁을 가장한 포장의 두께만큼, 현상유지는 오히려 더 단단히 고착될 것이다. 유종민

[데스크 칼럼] BNK, 변화의 리더십 세울 때

BNK금융지주가 차기 회장 후보를 4인으로 압축한 숏리스트를 내놨다. BNK가 그룹과 지역의 미래를 건 중대 기로에 섰다. 이번 회장 인선은 단순한 리더 교체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부울경 해양·물류 허브' 전략에 발맞춰, 부·울·경을 아우를 지역금융의 컨트롤타워를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현재 후보군은 ▲현 빈대인 회장 ▲방성빈 부산은행장 ▲김성주 BNK캐피탈 대표 ▲안감찬 전 부산은행장 등 4명이다. 지난달 27일 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는 1차 7인에서 2차 후보군 4인으로 후보자를 압축했다고 발표했다. 임추위는 외부 전문가 블라인드 면접과 PT 심사 과정을 거쳐 산업·지역에 대한 식견, 금융철학, 조직 리더십, 테크 대응 역량 등을 종합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숏리스트를 뜯어봤다. 현직인 빈대인 회장의 연임은 연속성에 따른 안정감을 주나 리스크도 크다. 빈 회장은 자본건전성 관리와 조직 연속성 면에서 장점이 크다. 그러나 도이치은행 관련 대출 의혹과, 일부에서 제기되는 '셀프 연임용' 시간표 설계 비판을 받아 지배구조 리스크를 키운다. 금융당국이 “필요 시 수시검사"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감독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전략적 리더십과 변화 대응력이 필요한 시점에 '안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방성빈 부산은행장은 그룹 안정에 유리하다. 그러나 변화 카드로는 부족한 것이 단점이다. 방 행장은 현역 CEO로서 안정성과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는 기업여신과 리스크 관리, 은행 운영 기반에서 강점을 가진다. 그러나 해양금융, IB, 대형 국책 프로젝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부울경 초광역 금융 전략을 추진해야 할 BNK에는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틀을 유지하는 경영'에는 적합하지만, '판을 바꾸는 리더'가 필요한 지금엔 아쉬운 카드다. 김성주 BNK캐피탈 대표는 비은행·자산관리 쪽 성장엔 적합하다. 그러나 지주 전체 리더로는 검증 부족한 편이다. 김 대표는 그룹의 비은행 사업 확장과 자산관리 역량 강화에 강점이 있다. 그는 실무 중심, 수익성 중심의 경영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은행장 경험이 없고, 지역사회·정치권 네트워크도 약하다는 점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로서 한계를 드러낸다. 특히 부울경의 금융 허브 구축, 해양·물류금융처럼 지역과 연계된 대전략은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 많다. 안감찬 전 부산은행장은 부울경 금융 대전환을 이끌 전략 카드이긴 하나 전임(前任)이라는 것이 약점이다. 안 전 행장은 해양금융·IB·전략 기획을 두루 경험했다. 그는 지역금융과 본사의 조직 구조, 비은행 포트폴리오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 이번 부울경 해양·물류 금융 허브 구상, 북극항로 연계, 항만재개발 등 국가 전략 과제와의 정합성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행장 시절 내부 파벌에 치우치지 않는 인사로, 직원 및 지역사회의 신뢰도 높았다. 다만 복귀형이라는 점이 그룹 사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은행을 비운 이후 이미 많은 기획과 사업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행 중인 사업을 뒤엎어야 하는 것이 지주 전체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 BNK가 가야 할 길에는 '전략·실행·신뢰' 3박자가 중요하다. 내부 통합과 지주-은행-캐피탈 간 협력 체계를 복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도이치 관련 의혹을 포함한 지배구조 리스크 해소, 마지막으로 정부 국책 과제인 부울경 해양금융 허브 구축의 컨트롤타워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 누가 셋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는지 BNK의 결심이 궁금해진다. 박상주 기자 redphoto@ekn.kr

[기자의 눈] 혁신신약 생태계, 약가개편안 속 공백부터 메꿔야

제약업계의 근심이 한층 커졌다. 보건복지부가 제네릭(복제약)의 약가산정률을 현행 오리지널 대비 53.55%에서 40%대까지 인하하는 내용의 약가개편안을 지난달 28일 공개하면서다. 복지부의 목표는 뚜렷하다. 산업계에 '혁신 신약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혁신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궁극적 목표는 복지부와 업계 모두 동일하다. 앞서 한국제약바이오협회도 지난 10월 창립 80주년 기념식에서 오는 2030년까지 매출의 15%를 R&D에 투자하는 '신약 개발 선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문제는 복지부의 방법론에서 발생한다. 제네릭 약가산정률이 과도하게 높으니, 이를 낮춰 제네릭 사업의 매력도를 떨어뜨리고 업계가 신약 개발에 뛰어들도록 유도한다는 방식이다. 매출 대비 R&D 비율 경쟁에 기반한 기업간 줄세우기식 '혁신형 제약기업' 약가우대 장치는 덤이다. 이는 한 가지 근본적인 맹점을 가지고 있다. '제네릭 매출 감소'와 '혁신신약을 통한 매출' 사이 공백을 메꿀 정책적 대안이 사실상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오늘 몇백억 때려넣으면, 내일 신약 개발이 완료되나"라며 코웃음을 쳤다. 신약 개발은 천문학적 투자 규모만큼이나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농담 섞인 설명이었다. 실제 가장 최근 국내 출시된 국산 신약 세노바메이트(SK바이오팜)은 미국식품의약국(FDA) 임상시험계획(IND) 승인부터 품목허가까지 14년이 소요됐다. 기술이전으로 공백을 메꾸면 된다지만, 후보물질 발굴과 경제성을 입증할 비임상 연구도 최소 연(年)단위 기간이 소요된다. 매출 감소에 따른 재무악화는 온전히 기업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셈이다. 이러한 부작용은 중소제약사에서 더 크게 발생한다. 본지 집계에 따르면 국내 14개 상장 중소제약사의 올 1~3분기 누적 매출은 평균 534억원, 영업실적은 10억원 손실로 적자 환경이다. 중소제약사 평균 제네릭 매출은 전체 매출의 70%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감안하면 제네릭 약가 인하가 현실화했을 때 중소업계는 혁신 시도는 고사하고 적자 심화로 존폐 기로에 서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복지부가 진정 산업계의 혁신 생태계 대전환을 원한다면, 최소한 이 같은 공백을 메꿀 실질적 대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황금 찾자고 거위의 배만 갈라선 안된다. 박주성 기자 wn107@ekn.kr

[김병헌의 체인지] 성장통인가 위기인가···롯데 대전환의 시작

서프라이즈였다. 12월 초 롯데그룹이 내놓은 인사 발표를 보고 재계는 잠시 술렁였다. 4명의 부회장단 전원 용퇴, CEO 20명 교체 등 한 번도 본 적 없던 '파격'이었다. 수십 년간 안정과 관료적 체계를 상징했던 롯데가, 스스로의 피부를 벗겨내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방향은 옳고 정확하다. 롯데그룹은 오랜 기간 '보수적이고 신중한 조직'으로 인식돼 왔다. 1960~199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이 꼼꼼함이 강점이었다. 껌 몇 개에서 출발해 재계 5위 기업으로 올라선 신격호 창업주의 DNA는, 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관리형 경영이었다. 그 철저함 덕분에 롯데는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도 비교적 흔들림이 적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에 123층 롯데월드타워를 세운 것도, 신중하지만 확실한 추진력의 산물이었다. 세계의 속도는 더 빨랐다. AI·양자·신에너지 산업이 역사를 다시 쓰는 시대,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늦어진 롯데는 미래로 가는 시계가 잠시 멈춰 있었을 따름이다. 이번 인사는 그 시간을 되돌리는 '빅뱅'이었다. 특히 화학군에서 13명 중 10명을 교체하고, 9년 지속된 HQ(헤드쿼터) 체제를 폐지한 것은 단순한 인사 조정이 아니다. '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개편이다. 지주사 공동대표 체제가 도입되고, 60대 임원의 절반이 물러나며 조직의 평균 연령도 크게 낮아졌다. 기업이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최대치에 가깝다. 지금은 경기 순환적 불황이 아니라 산업 패러다임 자체가 재편되는 국면이다. 미·중 패권 경쟁 장기화와 우크라이나 전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물론이고 중국 제조업의 절대적 추격도 무섭다. 엔비디아·TPU 전쟁으로 더욱 두드러지는 AI 기술의 빅뱅 등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KFI) 분석에 따르면 한국 10대 주력산업 모두가 향후 5년 내 중국에 경쟁력에서 밀릴 위험이 있다고 한다. 롯데의 화학 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행, 산업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석유화학 업종의 수익성은 글로벌 공급과잉과 중국 중심의 수요 위축으로 지난 5년간 구조적으로 하락했다. 여기에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등 대규모 투자 부담이 겹치며 화학군 EBITDA도 흔들렸다. 유통도 쉽지 않다. 이커머스·플랫폼기업과의 경쟁은 과거와 차원이 다르다. 오프라인 기반의 고정비 구조는 과감한 혁신 없이는 미래가 없다. 롯데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부사장의 전면 등판이다. 롯데지주 미래성장·전략컨트롤을 총괄하며 롯데바이오로직스 공동대표까지 맡게 된 그는, 사실상 그룹 신성장동력의 선두에 섰다. 여기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롯데가 필요로 하는 리더는 '창업주의 DNA를 계승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산업 구조를 읽고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향후 기업 생태계의 대표 주자가 되려면 AI, 바이오, 메타버스, 수소·전지 같은 미래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롯데는 이 4대 신성장 동력에 이미 1조~2조원대 투자를 진행 중이다. 송도 CDMO 바이오플랜트, BMS 시러큐스 공장 인수, 칼리버스 메타버스 플랫폼, 전기차·수소 인프라, 배터리 소재 사업 확장 등의 투자는 장기 미래를 향한 투자다. 성장통(成長痛)이다. 아프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몇 달간 롯데를 둘러싼 루머와 과장된 위기설이 떠돌았다. 그룹의 비상경영 체제, 유동성, 계열사 구조조정 등 여러 추측이 있었다. 대부분은 '불확실성 시대'가 만든 그림자였다. 기업이 큰 변화를 앞두고 있을 때 시장은 과민 반응한다. 삼성의 반도체 대전환기, 현대차의 전기차 전환기에도 비슷한 루머가 돌았다. 모두 미래로 가는 '통증의 구간'이었다. 지금 롯데도 마찬가지다. 2025년 겨울의 롯데는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다시 질주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단계다. 전례 없는 인적 쇄신, 조직구조 대개편, 젊은 리더십의 전면 배치 등 이 모든 변화는 기존의 롯데가 아니라 '미래 롯데'를 위한 준비로 여겨진다.롯데가 지금 겪는 흔들림을 위기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성장통이며, 더 큰 미래를 위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다시 비상을 꿈꾸는 롯데의 다음 페이지를 기대한다.

[EE칼럼] 도시의 미래는 건강한 토양에서 시작된다

12월 5일 '세계 토양의 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 기념일이다. 2013년 유엔 총회에서 제정된 이 날은 식량 생산, 생물다양성 보전 등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기반인 토양이 도시화, 산업화 등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경고하며, 건강하게 보전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토양오염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국제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농경지의 약 14~17%가 비소·납과 같은 유해 금속에 오염되어 있으며, 최대 14억 명이 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건강, 식량 그리고 경제 위기로 이어진다. The Economist는 토양을 “인류의 미래 생산 기반"이라고 설명하면서 토양 침식과 오염이 농업 생산 감소와 탄소 저장 능력 약화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전반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지만 지역별로 각기 다른 위험이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심 속 폐주유소의 토양오염이다. 오랜 시간 땅 속에 묻혀있는 유류 저장탱크가 노후화 혹은 지반 침하로 인해 기름이 유출되면서 토양 뿐 만아니라 지하수까지 오염시키게 된다. 특히 배출되는 오염물질은 암을 유발하는 벤젠, 톨루엔 등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반환된 용산 미군기지의 토양오염문제 역시 이와 유사한 사례이다. 이외에도 일부 재개발 지역에서는 중금속이 확인되거나, 폐광 지역에서 비소와 카드뮴이 기준치를 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위험으로 부각되는 것이 토양오염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식량생산의 원천이자 우리 삶의 토대인 토양의 기능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토양 속 유기물 감소, 잔류물 축적, 빗물 흡수 능력 저하는 도시 침수, 열섬, 생태계 약화 등으로 이어진다. 기후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 빨리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토양은 농업뿐 아니라 도시의 안전과도 연결돼 있으며 생태계 전체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토양 문제는 단순히 환경 관리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올해 '세계 토양의 날' 주제는 '건강한 도시를 위한 건강한 토양(Healthy Soils for Healthy Cities)'이다. 해외에서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 도시 토양 교육, 청소년 대상 체험 활동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지만, 우리는 정부 중심의 기념식과 세미나가 주를 이루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국제사회가 토양을 도시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인프라로 바라본다면, 한국은 여전히 '오염관리대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심각한 토양 재난을 겪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토양에 대한 관심과 건강한 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는 미래의 위험을 제거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래된 지하탱크 점검 강화, 재개발 부지 조사 의무화, 도시 토양 정기 점검, 신종 오염물질 관리 등은 지금 시작하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토양은 도시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위험을 미리 점검하는 것이 앞으로의 도시 안전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조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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