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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이제는 구조개혁이 답이다

우리 경제에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 지속된 불황으로 국내 경기가 살아날 전망이 없는 와중에 방산과 조선이 선방을 하고 있지만 철강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부진이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트럼프가 시작한 관세전쟁은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서도 답답한 모습은 계속되고 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표를 의식해 억누르기만 하던 에너지 가격규제의 모습은 2011년 9·15 순환정전이 발생했을 때와 거의 달라진 바 없다. 오히려 이런 가격규제로 한전과 가스공사와 같은 대표적인 에너지 공기업은 골병이 들었다. 한전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LNG 등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을 때에도 전기를 원가 이하로 팔아 적자가 43조원대에 이르렀다. 지난해 전기요금 인상으로 수익성을 조금 회복했으나, 이는 코끼리 비스킷에 지나지 않아 총부채는 오히려 205조를 넘어서서 역대 최고치에 달했다. 올해 안에 갚아야 할 빚만 64조원에 달한다. 유동성이 고갈되어서 100대 상장사들 가운데 단기 유동성 지표가 최하위에 머물렀다. 가스공사도 민수용 도시가스 요금 미수금이 14조원을 넘어섰고 총부채는 47조원에, 부채비율은 400%에 달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알래스카 가스관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고 있지만 총 사업비 440억달러 짜리 거대한 인프라 건설에 가스공사가 이런 재무구조를 갖고 선뜻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질적인 교차보조는 우리의 산업경쟁력을 깎아 먹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부가 주택용과 일반용은 동결하고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산업용(을) 전기요금을 10.2%, 중소기업이 주로 쓰는 산업용(갑) 전기요금은 5.2%를 인상하였다. 지난달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백악관에서 루이지애나주에 제철소를 짓겠다고 한 것은 kWh당 78원 정도로 국내 산업용 요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값싼 전기요금 때문이라고 한다. 표를 의식해 동결한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 대신 올라간 산업용 전기요금은 이제 국내 주요 기업체를 해외로 내모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전력망을 건설하고 운영하며 이를 통해 전기를 판매하는 한전의 경쟁력도 의심스럽다. 전국 곳곳에서 전력망 건설이 늦어져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 불과 45km 떨어진 북당진-신탕정의 345kV급 송전선로가 12년 지각 끝에 21년이나 걸려 작년 말 개통되었다. 동해안에 건설된 3개의 석탄발전소와 1개의 원전이 송전선 건설이 늦어져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전국 31곳의 송전 건설 현장 중 25곳이 지연 중이다. 최근 전력망 특별법이 입법화되었지만 과연 법 통과로 송전망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공기업 특성상 재량껏 주민들을 설득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에너지 산업은 경제개발기의 정부규제와 독점 공기업을 통한 운영을 이제 10대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다 큰 대학생을 아직도 유모차에 태워서 키우고 있는 셈이다. 이창용 총재는 낮아진 우리 경제의 경제성장률 전망의 이유로 구조조정을 안 하고 기존 산업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산업을 도입하지 않은 점을 뼈아프게 느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한계가 바로 우리 실력이라고 꼬집고 있다. 조동철 KDI 원장도 최근 여러 포럼에서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 체력 저하라고 진단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기 처방이 아닌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 경제는 잠재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세를 지속해 왔으며, 생산성 정체와 기술혁신 지체가 구조적으로 누적돼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런 상태에서 외부 충격이 오면 그 충격을 회복할 체력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두 경제학자의 지적처럼 에너지 분야에서도 이제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너무 문제가 커졌다. 이제는 구조개혁이 답이다. 조성봉

[특별 기고] 이젠 전문화 된 항공 안전 전담 기관을 생각해야 할 때다

2025 을사년 새해 설 명절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28일, 김해국제공항에서 아찔한 에어부산 391편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후미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번져 승무원 포함 총 176명의 탑승 인원이 비상 탈출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소방 당국의 침착한 대응과 적극적인 진화 노력으로 항공기만 소실되는 선에서 인명 피해 없이 참극을 막은 건 정말 기적이다. 그러나 작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에서는 제주항공 2216편 활주로 이탈 사고로 무고한 179명이 희생된 참사가 벌어졌다. 이처럼 연달아 발생한 대형 항공 사고에 모든 국민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초동 조사 결과 조류 충돌 등 여러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됐고, 에어부산 화재 사고의 발화점은 승객의 짐 속에 있었던 보조 배터리인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두 건의 공통점은 항공사의 통제 가능 범위 밖의 요소가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같은 일이 다른 항공사에서 일어났다고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나 확신이 없다. 항공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제반 정책이 적용될 수 없는 사각지대가 아직도 존재하고, 이들의 위험성 정도는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위험 요소를 제거·통제가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발생 시 필연적으로 규모가 클 수 밖에 없는 항공 사고의 속성에 비춰 볼 때 매우 우려되는 대목이다. 필자가 종사하고 있는 항공업계의 경제적 규모는 현재 36조원 수준이나, 2030년 경 58조원으로 급성장하고 2만5000개 이상의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돼 전망이 밝다. 그런 만큼 생태적으로 구조가 매우 복잡해 톱니 바퀴가 매우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듯 참여자들의 높은 이해도와 안전 의식, 국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매우 중요한 분야다. 바로 이 부분이 국토교통부를 위시한 모든 업계 관계들이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는 마음으로 항공 산업과 안전을 위해 힘을 모아 나아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작금의 사고들을 바라보며 항공 산업의 중요한 요소인 안전에 대한 접근 방법과 시각을 새로이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간 양적 팽창에 치중했던 업계 전반을 돌아보고 이번 사고들로 드러난 여러 불안전한 요소들을 저인망식으로 점검해 국제 기준에 비해 미비했던 부분을 찾아 시정함에 적극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현재 국토부 산하로 집중된 항공 관련 조직들의 구성과 기능, 독립성·전문성을 점검해 부족했던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전문 인력의 양성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여 업계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 현장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항공 사고의 위험 요소는 현장 최일선의 종사자가 가장 잘 안다. 정책을 입안하는 조직들은 인지하기 어려운 위험 요소들을 현업자들과 '안전 보고 제도의 운영'이라는 상호 작용을 통해 공유하고, 정책화하는 공고하고도 선진적인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항공 안전 보고 제도 자체는 존재하지만 항공사나 업계 종사자의 신뢰와 참여가 결여된 속 빈 강정이다. 국내 현장에서는 보고하면 조직에서 찍힌다거나 관리 조직으로부터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현장을 지키는 종사자는 안전 문화 창달을 위한 참여자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라는 수동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또한 보고를 한다고 해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없을진대, 하물며 굳이 처벌받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경험담과 위험 요소를 보고할 분위기 형성이 안 돼있어서다. 종사자의 실수를 숨기게 만드는 종래의 폐쇄적이고 고압적인 조직 문화를 바꾸고, 현업자들과 신뢰를 구축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노력은 항공 안전 시스템 개선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실질적이고 강력한 면책 기반의 보고 제도 운용과 자발적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항공 안전 정책으로의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도 이러한 비 처벌 공정 문화(Just Culture)와 신뢰에 기초한 보고 체계의 안전 문화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항공 안전 대책이라고 강조한다. ICAO 36개 이사국 중 33개국은 이미 별도의 항공 안전 관리와 사고 조사에 관한 전문 기관을 독립 운영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없다. 항공 사고 조사 전문 기구의 독립과 함께 전문 인력이 항공 안전 정책을 총괄할 수 있는 '항공안전청' 설립은 한시가 급하다. 여러 사고로 혼란스러운 지금이야말로 항공 산업에 대한 정책적인 이해와 종사자 간 신뢰를 바탕으로 현장을 잘 이해하고 전문 지식을 겸비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새 독립 기관을 설립하기 좋은 때다. 또한 항공 안전을 위한 총체적인 점검과 과감한 제도 정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또 항공 안전 문화가 정착돼 '누가 했느냐?'는 추궁보다는 '무엇이 부족했나?' 하는 자성에 가까운 질문이 먼저 나오는 항공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데스크칼럼] 한덕수 대행체제의 ‘모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4일 헌번재판소로부터 탄핵 인용 선고를 받고 파면된 지 열흘이 지났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제 21대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해 오는 6월 3일을 대통령선거일로 잡았다. 주요 정당들은 일제히 대선 모드로 돌입했고, 각당 유력 정치인들은 앞다퉈 대선후보 출사표를 던지고 세 결집과 정책 아젠더 선점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지난 11일 윤 전 대통령은 파면 일주일만에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나와 서초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렇듯 겉으로 보기엔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대한민국은 탄핵정국을 일단락 짓고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온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헌법과 상식을 파괴한 최고 통수권자를 일개 범부(凡夫)로 내침으로써 대한민국과 대한국민의 현재와 미래는 '희망과 행복의 나라'로 달려갈 것인가. 그러기엔 계엄령 선포부터 새 대통령 선출 때까지 나라와 국민에게 가해진 무려 일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잃어버린 182일'의 상흔은 너무 아프고 깊다. 계엄령 내란 시도를 단죄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치유와 회복의 정상화 작업은 '대통령 파면'으로 이제 첫 걸음을 내디뎠을뿐이다. 사실 대통령의 탄핵은 개인의 파면으로 끝날 성격이 아니다. 탄핵 당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인데다 윤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동조한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는 사실상 '한 통속'으로 봐야 한다. 한 권한대행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추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대통령의 귀책사유에 따른 파면은 대통령과 공동운명체인 행정부 내각에도 '미필적 고의'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국정운영의 정당성이 결여됐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한 권한대행 체제도 탄핵선고와 함께 물러나는 게 도리이고 상식이었다. 우려되는 국정 공백은 여야 합의로 비상내각을 구성해 오는 6월 3일 새 대통령 선출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면 된다. 급변하고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통상 환경을 앞두고 비상내각을 꾸릴 여력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한 권한대행 체제가 국내외 정치 현안을 결정할 수 있는 운신의 여력 역시 비상내각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매우 제한일 수밖에 없다. 아니, 제한적이어야 한다. 국내외 경제 및 외교 통상 현안들을 마치 '알박이'식으로 대못을 박아 60일 뒤에 출발한 새 정부에 올가미를 씌워선 안될 것이다. 만일 한 권한대행체제로 6월 초 대선까지 어쩔 수 없이 끌고가야 한다면, 한 권한대행은 국민과 정치권에 제한된 국정 역할 수행과 공정한 대선관리를 약속하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게 마땅하다. 이같은 여건 속에서 탄생할 새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국정 철학이 '소통'이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계엄령 사태와 탄핵정국을 보면서 지지든 반대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점이 윤 전 대통령의 '불통'이었기 때문이다. 집권 2년 10개월여 동안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주요 분야에서 '치우친 노선(이념)'과 '일방적 권위'를 내세워 국정을 밀어부쳤다. 그 정점이 지난 12.3 계엄령 파동이었다. 정치를 비롯해 경제, 외교 어느 분야든 국가, 지역, 계급, 계층 불문하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복잡한 게 현대사회다. 아무리 사회가 양육강식 생존게임으로 치닫는다 할 지라도 일방적 승리는 결국 자멸의 지름길이다. 차기 대통령과 정부를 어느 쪽이 잡든 '윤석열 정부의 과오'를 반면교사 삼아야 하고, 계엄령 내란 관련 진실 규명과 단죄도 이뤄내야 한다. 잘못된 역사를 제 때, 제대로 바로 잡는 '정도(正道) 정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부정이 반복되는 '패도(覇道) 정치'로 이어졌음을 우리 역사에서 똑똑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진우 기자 jinulee6464@ekn.kr

[EE칼럼] 혁신 기술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강현국 미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1865년 영국에서 제정된 기관차 법은 “자기 동력으로 주행하는 탈것(초기의 자동차를 일컫는다)은 시내에서는 시속 2마일(3.2킬로미터) 이내, 시외에서는 시속 3마일 이내로 주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시내에서는 사람이 걷는 것보다도 느리게 주행해야 한다는 것이니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법이다. 이 법이 붉은 깃발 법이라는 조롱조의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 추가로 “붉은 깃발을 흔들며 자동차에 앞서 걷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이 생긴 공식적인 이유는 초기 자동차의 거대한 크기로 인해 도로가 파손될 수도 있고, 지나는 말들이 놀라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대중의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발굽이 없는 자동차가 오히려 도로의 손상을 덜 일으킨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말을 보호하기 위해 차가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막상 당시의 주류 운송수단인 마차에게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은 기존 기술과 신기술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규제가 생긴 것이다. 처음 보는 자동차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로비를 했었거나 아니면 어떤 눈치를 보느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법에서 정한 제한 속도는 1896년에 새 법이 제정되어 시속 14마일(23킬로미터)로 상향조정 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좋은 말을 유지하는 데에 점점 비용이 많이 들게 되고 자동차관련 기술은 계속 개발되어 경제성이 더 높아지게 되면서 서서히 자동차라는 새로운 탈것에 대한 사회 대중의 수용성이 올라가게 되고 붉은 깃발 법 같은 비현실적인 규제는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 속도 규제와 제한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는 미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가 팽배한 미국에서는 서부와 동부의 차이가 극명했다. 동부의 오래된 주인 코네티컷에서는 1901년에 영국과 비슷한 시속 12-15마일 제한속도를 도입했고 그 후로도 계속 제한 속도를 엄격하게 유지하는데 반해 몬태나, 네바다, 텍사스 같은 주에서는 제한 속도를 두는 것 자체에 반대하는 경향이 커서 지금도 제한속도가 동부에 비해 현저히 높다. 그리고 석유파동을 겪던 1970년대에 경제적인 이유로 전국적인 제한속도 시속 55마일을 도입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시행이후 교통사고 사망률이 백만 마일당 4.28명에서 2.73명으로 감소하는 추가적인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기에 1990년대에 각 주의 자율 규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사회의 수용과 규제는 언제나 이렇게 변해 왔다. 때로는 근거 없는 공포심을 자극하여 규제가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생기며, 그리고 어떤 때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근거하여 생기기도 한다.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가 국가의 규칙에 반영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이용해서 특정 집단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공포심을 자극하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음해를 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바이오 신약, 인공지능, 로봇기술 같은 혁신 기술이 끊임없이 개발되는 현대에는 어떻게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회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기에 과학과 합리에 근거한 대중의 판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자력 분야에서도 혁신 기술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한수원에서 유럽과 아시아 수출을 목표로 개발한 APR-1000에는 피동형 냉각장치가 부착되어 외부 전력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도 발전소의 안전이 보장되어 후쿠시마 사고 같은 일이 원천적으로 방지되도록 하는 신기술이 도입되었다. 펌프로 냉각수를 강제 주입하는 대신 증기를 응축시킨 물이 자연적으로 재순환하도록 하는 것인데, 강력한 펌프의 힘이 없이도 충분히 냉각이 확보되는지가 규제의 쟁점이 될 수가 있다. 만약에 “모든 원자로는 초당 1톤 이상의 냉각수 공급이 가능한 펌프를 적용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규정이 되어 있고 규제기관이 이를 적용하겠다고 나선다면 펌프가 없는 이 혁신기술은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펌프의 힘이 얼마나 센지가 아니고 원자로심의 잔열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냉각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냉각 성능이 충분한지, 필요한 시점에 냉각이 수행될 수 있도록 운전 규칙이 수립되어 있는지, 혹시 모를 대형 지진 등에 대비해서 어떤 대비를 하였는지 등을 규제 항목으로 삼는 것이 바른 규제이다. 최근 개발되고 있는 소형모듈원전이나 차세대원전에는 더 많은 혁신기술이 포함되게 된다. 그 달라진 정도가 매우 커서 기존의 규정집을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아예 발전소 범위 밖으로 대량 방사선 누출이 불가능하도록 한다면 그런 사건에 대비한 비상계획은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설계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법률에는 “방사선 비상계획구역은 반경 20-30킬로미터로 한다"라고 아예 정해서 못을 박아 두고 있으니, 아무리 좋은 혁신 기술을 개발하여도 적용이 난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붉은 깃발 법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무분별한 규제는 혁신을 가로막고, 안전망 없는 혁신은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 규제와 발전의 제대로 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버려야 할 것, 고쳐야 할 것, 더 강력히 지켜야 할 것을 제대로 분간해야 한다. 우리나라 규제기관이 그런 혜안이 있기를 기대한다. 강현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기자의 눈] 기후는 생존 문제…차기 정권은 전담부처 만들어야

기후위기 대응이 더 이상 '선의의 정책'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시대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기후 정책의 방향이 크게 바뀌는 현실은 이제 제도적 기반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의 사례가 그렇다. 문재인 정부 말기, 국가 탄소정책의 핵심 기구로 출범했지만 초기부터 실질적인 조정 권한이나 실행력을 갖추지 못한 채 형식적인 역할에 그쳤고, 윤석열 정부 3년 동안에도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대한민국의 기후정책은 분기점에 서 있다. 윤 전 대통령 탄핵으로 6월 3일 조기대선이 실시되면서 한국 사회가 기후위기 대응의 컨트롤타워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가 본격적인 핵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환경부 한 부처만으로는 역부족인 시대다. 산업·에너지·재정·복지를 아우르는 '기후에너지부' 또는 '기후경제부' 신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이미 미국, 독일, 영국 등은 기후와 에너지 정책을 포괄하는 정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은 청정에너지에만 1000조원 넘는 투자를 쏟아붓고 있으며, 탄소중립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지만, 2022년 기준 2018년 대비 7.6% 줄이는 데 그쳤다. 지금처럼 가면 국제적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경제 전반의 전환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국회 세미나에서는 탄녹위를 독립성과 대표성이 보장된 행정기구로 개편하고, 기후시민의회 같은 참여형 거버넌스를 신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정권이 바뀐다면 탄녹위의 기능과 위상을 되살리고 기후위기 대응을 뒷받침할 정책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기후 전담부처 신설은 단순히 정부 조직 하나 늘리는 게 아니다. 산업계에는 명확한 탄소중립 로드맵을 제공하고, 국민에게는 에너지비용 절감과 기후재난 대응이라는 실질적인 대책을 제공한다. 지금처럼 환경·산업·재정 부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로는 총체적인 대응이 어렵다. 기후위기를 단지 환경 이슈로만 보지 않고, 산업·경제·복지 전반과 연결된 문제로 접근하는 '정부의 역할 재정의'가 필요한 때다. 기후는 이제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정치의 영역이 됐다. 기후정책은 생존의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다. 어떤 정치세력이 권한을 가지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과 실행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가 공허한 구호로 남지 않으려면 이를 뒷받침할 정부 조직과 제도부터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윤수현 기자 ysh@ekn.kr

[기자의 눈] AI 가전의 시대, 소비자 마음은 어디에 있나

결혼 준비로 최근 가전제품에 유독 관심이 많아졌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까지 신혼집 곳곳을 어떻게 꾸밀지 상상하며 다양한 제품을 비교해봤다. 제조사별 스펙과 디자인, 가격을 꼼꼼히 따져가며 고르던 중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수십 가지 모델을 살펴봤지만, 제품 선택 기준에 '인공지능(AI)'은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자업계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AI는 빠지지 않는 핵심 키워드다. 국내 주요 가전기업들은 AI를 제품 곳곳에 탑재해 혁신을 이루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 흐름은 해마다 업계 전략의 중심이 된다. 기자 시선으로 보면 'AI는 필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소비자로 돌아서니 이야기는 달랐다. 현실에서는 AI보다 디자인, 가격, 브랜드 신뢰도 같은 요소가 더 중요했다. 기자일 땐 보이지 않던 간극이, 소비자가 되어보니 오히려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물론 AI 기능이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세탁기의 '자동 세제 투입', 에어컨의 '사용자 맞춤 온도 조절' 같은 기능은 분명 편리하다. 하지만 'AI를 넣었으니 혁신'이라는 전제는 소비자에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서 AI는 여전히 '체감하기 어려운 기술'인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크게 느껴지지 않다 보니, 구매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AI가 잘 팔린다고 항변한다. 전년 대비 AI 가전 판매가 몇 % 늘었다는 식의 자료를 앞다퉈 내놓는다. 하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한 가전매장 관계자는 “어찌 보면 눈속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엔 대부분 제품에 AI가 기본처럼 들어가 있어서, 소비자 입장에선 결국 이름만 다른 AI 가전들 사이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며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반 가전보다 AI 제품의 판매 비중이 높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자인, 성능 등 전통적인 요소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은 글로벌 히트 제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이슨의 무선청소기, 발뮤다의 토스터 등은 복잡한 AI 없이도 소비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강력한 흡입력, 직관적인 사용성, 감성적인 디자인 등 본질적인 가치를 얼마나 정교하게 구현했는지가 성공 요인이었다. AI는 분명 하나의 차별화 포인트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은 아니다. 기능을 추가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기능이 어떤 '가치'를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술을 소비자 삶과 연결시키는 진정성, 그리고 제품 본질에 대한 꾸준한 고민. 그것이 지금 가전 브랜드들이 되새겨야 할 지점이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이슈&인사이트] 이상한 나라, 이해할 수 없는 국민

이상한 나라, 이해할 수 없는 국민. 외국에서 심심치 않게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평가하는 말이다. 남들은 수백 년 걸린 경제발전을 불과 30년 만에 해치운 나라, 그것도 가진 것이라곤 먹여 살릴 국민밖에 없는 나라,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참혹한 전쟁을 겪어 아무 희망이 없던 나라. 그런 나라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제조업과 첨단산업에 도전했고, 1990년대에는 정보통신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에 우뚝 섰다. 그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시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더니 마침내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적 민주화를 일구어냈다. 이제 세계인은 대한민국을 알고 싶어하고, 이 나라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즉석 라면의 매운 맛에 반해 눈물을 쥐어짜며 불닭볶음면과 신라면을 먹는다. 한글을 공부하고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온다. 입으론 BTS나 블랙핑크 등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으론 그들의 춤을 따라 둠칫거린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의 발달과 유튜브 등 SNS의 보편화에 올라탄 우리의 문화예술가와 창작가들은 세계인을 대한민국의 문화영토에 초대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국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80년을 살아온 우리가 자해를 통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에 빠져 30여 차례 탄핵으로 윤석열 정부를 흔들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 초년생 윤석열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윤석열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다혈질의 고집쟁이였다. 불과 0.73%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야당과의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고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 야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소야대 국회에 지방권력까지 쥐고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첫 시험은 인수위 시절 맞은 지방선거였다. 대선 승리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거돈 부산시장의 성 추문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의 승리로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인구 1,430만 명의 최대 지방자치단체인 경기도지사 선거에 국민의힘에서는 유승민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국힘 후보 중 가장 중도와 청년세대 확장성이 큰 유 후보는 그대로 두면 국힘 후보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용산이 개입해 인수위 대변인이었던 김은혜를 억지로 밀어 후보로 만들었고, 결국 민주당 김동연 후보에 패했다. 누구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유 후보에 씌워진 배신자 프레임으로 윤석열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치명상을 입었다. 만일 유승민 후보를 선택했다면 수도권을 모두 국힘이 가져올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유 후보가 경기도지사가 됐다면 이재명 대표의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날 경기도의 모든 자료가 모두 쉽게 공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국힘 내부의 파워 게임에 어설픈 개입으로 용산은 점점 더 진흙탕 속에 빠져들었다. 이준석 전 대표를 몰아내는 과정이나 당 대표 경선에서 나경원 의원을 주저앉히는 과정, 김기현 대표의 사퇴와 연이은 비대위 체제의 불안정성, 한동훈의 비대위원장 차출과 그와의 끝없는 갈등 등. 윤석열의 선택은 항상 갈등을 잉태했고, 결국 22대 총선은 민주당에 패배하기 전에 이미 내부가 스스로 무너진 결과였다. 국내정치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제2기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를 활용한 국제정치경제체제의 변화 시도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는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다. 세계 일류로 성장한 기업들의 노력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오직 단합된 힘이 필요하지만, 내부는 또 헌법재판소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진흙탕 싸움을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이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저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다. 쓰레기라면 일거에 쓸어버렸을 버러지만도 못한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이 나라를 맡겨 둘 것인가. 우리가 무너진다면 세계인들은 또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토록 잘살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을까. 정말 이상한 나라고 이해할 수 없는 국민이라고. 홍성걸

[EE칼럼] 우리나라에는 아직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없다.

지난 3월 18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지만 아직 확보하지 못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찾기 위한 첫걸음을 제대로 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 특별법은 처분장 부지 선정 절차, 처분장 유치 지역에 대한 지원, 전담 조직과 관리사업자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특별법 시행에 앞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없다는 점이다. 처분장에 처분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원자력안전법」제2조제18호에 따르면, '원자력진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폐기하기로 결정된 사용후핵연료만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분류된다. 특별법도 이 정의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원자력진흥위원회'가 폐기를 결정한 사용후핵연료는 단 한 다발도 없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또 다른 발생원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후 폐기물도 없다. 이제라도 처분 대상 폐기물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이는 사용후핵연료 정책과 직결돼 있다. 여기에는 사용후핵연료 관리 단계에 따른 정부의 구체적 결정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원전에 보관 중인 것 이외에 현재 개발 중인 선진원자로에서 배출될 사용후핵연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핵심 결정 중 하나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여부다. 재처리한다면, 국내에서 할 것인지 또는 해외에 위탁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향후 확보해야 할 기반 시설, 처분 대상 폐기물 형태와 처분 시점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직접 처분한다면, 사용후핵연료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분류하는 절차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범정부 차원의 사용후핵연료 정책은 마련돼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사용후핵연료와 관련한 범정부 차원의 결정으로는 2004년 12월 17일 열린 제253차 '원자력위원회'(현 '원자력진흥위원회') 회의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침에 대해서는 국가 정책 방향, 국내외 기술개발 추이 등을 감안하여 중장기적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공감대하에서 추진한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그 이후 범정부 차원의 사용후핵연료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설 때다. 「원자력안전법」 제35조제4항에 따르면, 두 부처 장관은 사용후핵연료의 처리․처분에 관한 사항을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원자력진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결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당 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은 각 부처의 기술개발 계획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례로 2021년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 연구개발 현황 및 방향'을, 2024년 2월 산업자원통상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R&D 로드맵'을 보고했지만, 이들은 각 부처 소관 업무에 대한 계획일 뿐, 범정부 차원의 통합적 정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최근 국제 우라늄 시장 상황은 재처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원전 수요가 늘어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불안한 국제 정세가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면서 우라늄 자원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UxC에 따르면, 2025년 1월 기준 우라늄 농축 서비스 가격은 SWU당 190달러로, 2022년의 약 56달러에 비해 3배 이상 상승했다. 문제는 가격만이 아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장기 전망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시장이 안정적이어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필요성과 경제성이 낮았지만, 지금은 자원 안보 차원에서 핵비확산을 전제로 재처리 여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용후핵연료 정책 결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미룰 문제도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하는 우리로서는 준국산 에너지원인 원자력의 이용 확대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용후핵연료 정책도 필요하다. 특별법 시행을 앞둔 지금이 바로 사용후핵연료 정책 수립의 적기다. 정책 공백이 장기화할수록 사회적 갈등과 비용은 커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가 에너지 주권 차원에서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문주현

[특별 기고]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독립을 이야기하자

최근 연이어 발생한 두 건의 항공기 사고로 인해 대한민국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이하 사조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사조위는 항공과 철도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안전 개선책을 마련하는 핵심 기관이다. 현재 사조위는 조직 구조상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으로 운영돼 사고 조사 과정에서 이해 충돌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국민 신뢰 확보는 물론 대외적인 신인도 측면에서도 구조적 한계를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공정하고 객관적 조사의 진행을 위해 시급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항공 산업의 급속한 양적 팽창과 더불어 다양한 항공 사고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 전문적인 조사와 대응을 위해 이제는 독립적인 사고 조사 기관의 필요성과 기대 효과를 해외 선진 사례를 통해 고찰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선진국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들은 독립적 사고 조사 기관을 운영하고 있어 높은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967년 설립된 미국의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연방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기관으로, 업계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공정한 항공·철도·도로·해양 사고 조사 역할을 진행해 왔다. 이곳은 연방항공청(FAA) 등 정책 집행 기관과의 이해 충돌을 방지함으로써 객관적인 사고 원인 분석과 안전 권고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NTSB는 전 세계 항공 사고 조사 조직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의 항공사고조사위원회(AAIB)는 교통부(DfT) 산하에 있지만 법적으로 독립된 권한을 보장받고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부속서 13에 따라 사고 조사의 목적이 책임 추궁이 아닌 안전 개선에 있음이 명확히 규정돼 있어 정부나 기업 등 외부의 개입을 불허한다. 또한 조사 보고서와 권고 사항은 AAIB 외의 어떤 기관도 수정할 수 없고, 사고 조사 방법과 범위를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이 같은 독립성 보장 체계 덕분에 AAIB는 사고 조사 과정에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항공사고조사국(BfU)과 호주의 교통안전국(ATSB) 역시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고 조사 기관으로 운영된다. 특히 ATSB는 조종사가 직접 사고 조사에 참여하는 구조를 채택해 사고 분석 과정에서 현장 경험을 지닌 전문가의 시각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위의 사례와 같이 사고 조사 기관이 정책 집행 기관과 분리되면 이해 관계에 따른 유착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객관성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만일 사조위가 국토부로부터 독립할 경우 사고 조사 과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한층 강화될 것이다. 또한 사고 원인 분석의 신뢰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각종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국민 모두가 납득할만한 조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성을 갖춘 사조위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국토부와 관련 기관에 좀 더 강력하고 실질적인 안전 개선 권고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정책 집행 기관이 조사 결과를 수정하거나 개입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안전 대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외에도 조종사와 항공 전문가가 직접 사고 조사에 참여하면 실제 비행 중에 발생하는 문제와 조종사의 의사결정 과정을 심층적이고 실질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더불어 조종사의 심리·생리적 상태를 고려한 선진적인 조사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사고 예방을 위한 더욱 실효성 있는 조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ICAO와 국제철도연맹(UIC) 또한 독립적인 사고 조사 기구의 운영을 강력히 권고한다. 사조위의 독립은 우리나라가 국제 기준을 준수하는 국가로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해외 사례를 참고할 때 독립 기관을 운영하는 국가일수록 사고 발생 후 개선 조치의 효과가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공 사고 조사는 단순한 원인 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핵심적인 과정이다. 사조위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더 미뤄져서는 안 된다. 정부와 항공 관계 당국이 이러한 측면을 고려한 즉각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해 국민이 신뢰하고 안심하는 선진화된 안전한 운항 환경이 구축될 날을 기대해 본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대형마트 영업규제, 강화-완화 이분법 벗어나야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선고 직후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향후 유통업계 이슈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형마트 영업규제'를 제일 먼저 꼽았다. 대형마트 규제는 윤석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의 견해 차가 가장 뚜렷한 이슈인 만큼 향후 대선 결과에 따라 향방이 크게 달라질 사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대형마트 업계의 숙원인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규제개혁 1호로 선정하고 관련 내용으로 의무휴업 평일 선택, 의무휴업일 온라인영업 허용 등을 적극 추진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제22대 국회 출범 이후 현재까지 발의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중 대형마트 영업규제 관련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발의 건수만 총 13건에 이른다. 국민의힘이 발의한 6건은 모두 대형마트 영업시간 완화, 의무휴업일 공휴일 지정 완화, 의무휴업일 온라인영업 허용, 자영업자인 프랜차이즈 가맹점 의무휴업 완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발의한 7건은 모두 평일 의무휴업 금지, 상권영향평가 강화, 준대규모점포 규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들 13개 발의안은 현재 모두 소관상임위 계류 중이다. 대형마트 영업규제가 실제로 주변 소상공인·전통시장 보호에 효과가 있는 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난 2월 산업연구원(KIET)이 발표한 보고서에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전환한 대구시와 충북 청주시는 평일 전환 이후 대형마트 주변상권 매출액이 평균 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의 경쟁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온라인 업체"라고 지적하면서 “대형마트와 전통상권이 공존하는 복합상권으로 소비자가 찾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기업회생을 진행 중인 홈플러스는 월 2회 의무휴업에 따른 매출 감소 효과가 연간 1조원에 이른다고 추산하고 있다. 홈플러스의 위기가 의무휴업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홈플러스 기업회생으로 2만명에 이르는 근로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입점 소상공인들도 위기에 직면했다는 점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의 시사점을 제시해 준다. 6월 대통령선거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든 대형마트 규제 방향이 이분법적 잣대가 아닌 전통시장 소상공인은 물론 대형마트 근로자, 소비자 모두 아우르는 통합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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