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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국산 가스터빈 발전기의 미국 수출에 대한 소고

에너지 공학에서 효율(Efficiency)은 투입된 에너지 대비 활용된 에너지의 비율이며 에너지 변환 상의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하는 데 사용한다. 효율의 단위는 무차원수 혹은 %로 표현될 수 있다. 분모와 분자의 성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시스템의 우수성을 효율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조명의 경우는 투입되는 전기 에너지 대비 조명의 밝기 같은 것이다. 적은 에너지를 투입하고 더 밝은 조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면 그 조명기기는 우월한 것이다. 이때 그 단위는 %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분모(전기)와 분자(조도)가 상이한 단위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변환 상의 손실량이 얼마인가 보다는 원하는 현상이 얼마나 잘 발현되는 가를 평가하는데 사용되며 효능(efficacy)이라고 한다. 전력 시스템에서 효율과 효능은 비슷한 듯 하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된다. 전통적 석탄 발전소에서 발전된 전기가 집안의 백열등까지 전달되어 사용될 때의 에너지 효율은 5% 미만으로 황당할 정도로 낮은 효율을 가지고 있지만, 최종 결과물인 방 안의 밝기는 그 비효율성을 용인한다. 손실된 에너지의 비용은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얻게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을 넘어서는 가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너지 시스템에서 효율은 공학도들의 관심사고 효능은 소비자들의 관심사이다. 지난 200년 석탄과 석유의 시대는 단지 에너지 생산력의 증가 뿐만이 아니라 그 원료 가공물에 의한 문명의 전환을 이룬 시기였다. 탄소 함유 물질은 에너지 연료 이외에도 플라스틱, 아스팔트, 화학 섬유, 합성 고무 등 인류 생존과 생활의 필수품에 영향을 주고 시장과 산업생태계를 만들어 왔다. 특히 물질을 산소와 화학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고온의 열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연소 엔진 기술은 인간을 지구 위의 '겸손한' 존재에서 삶의 환경을 지구 밖 우주에서 탐색할 수 있는 '괘씸한' 존재로 만들었다. 지구 위의 바람과 태양 에너지의 일부를 수거하여 겸손히 살아가자는 것과 물질에서 신이 숨겨놓은 에너지를 뽑아내어 경계의 벽을 넘어 날아가자는 것은 전혀 다른 가치의 효율과 효능이다. 연소 엔진의 폭발적 효율성은 연료를 수소로 바꾸면 친환경적 효능성을 가지면서도 유지될 수 있다. 얼마 전 미국에 수출한다고 보도된 두산 에너빌리티의 가스 터빈 발전기는 그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효율성과 친환경성을 확보하는 궁극의 연소 엔진 기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탄소중립 정책과 더불어 화석 연료 에너지 시스템의 좌초 자산화라는 인식으로 인해 가스 터빈 기술을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미래의 에너지 시장은 재생 에너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예측과 기대가 있다고 해서 천연가스 시대가 바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미래 수요를 잘못 예측하면서 현재의 주력 기술에서의 혁신을 소홀히 하는 경우는 20 여년전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시스템 반도체로 투자 방향을 바꾸면서 벌어진 결과를 생각나게 한다. 그 당시 일본은 단순히 메모리 용량을 늘리는 반도체 기술 보다는 뭔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시스템 반도체 분야가 더 부가가치가 높아질거라 기대했었다. 한국은 오히려 단순하다는 메모리 용량 늘리기에 초격차 기술을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일본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 수요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고 산업생태계 전반에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오늘 내가 하는 것은 단순하고 쉬우니 미래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새로운 것을 하자는 것은 리스크가 작지 않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투자 전략과 결과는 시장의 수요 예측의 타이밍과 종합적 대응 방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김재민

[기자의 눈]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아니다

식민 지배, 전쟁, 군사독재, 외환위기.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꿰뚫는 핵심 키워드다. 파란만장한 역사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구조를 탄생시켰다.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대체 불가능한 한국 고유의 단어 '재벌(Chaebol)'이다. 재벌 대기업 중심 경제 발전은 우리나라를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석유 한 방울 없는 나라가 글로벌 석유화학제품 생산거점으로 거듭났다. 기술·자본 모두 부족했던 삼성은 '반도체 초격차 신화'를 썼다. 국민들도 마음속으로 '한국 기업'을 응원했다. 해외에서 삼성·현대차의 로고를 보면 많은 이들이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100년 넘게 이어진 독립운동정신의 연장선인 듯하다. 외국계 자본이 우리 기업 지분을 사들이면 이를 '공격'이라고 표현한다. 정부는 대기업 총수를 '동일인'이라고 지정하며 별도로 관리한다. 글로벌 스탠다드 관점에서는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다. 문제는 어느 순간 재계가 '한국의 특수성'과 '재벌 특혜'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뜨거운 감자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란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계는 해당 상법 개정에 반대하며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진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사주는 주주 전체의 돈으로 사들인 '회사의 자산'이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이를 소각하는 게 전세계 자본시장의 상식이다. 특정 총수 개인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이를 우호 세력과 맞교환하는 행위는 배임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회사 돈으로 본인 경영권을 지킨다는 생각 자체를 했다는 게 놀랍다.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꽃놀이패'로 활용하는 관행은 재계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다. 기업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주주 권익을 침해하면서 노동계·정치권을 향해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계가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등에 반대할 때 내세운 명분도 '글로벌 기준'이 아니었나?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고집하는 것은 재계가 '기득권 지키기'에 스스로 매몰돼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명분이 무너지면 시장, 주주, 국민 모두 기업의 편에 서지 않는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이슈&인사이트] 강남 불패 신화와 ‘똘똘한 한 채’가 만든 부동산 왜곡

10·15대책으로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구를 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해 토지거래허가제를 확대했다. 고가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제한했으며, 스트레스 금리를 상향 조정했다. 강력한 규제로 집값 급등세는 진정되었지만, 한국부동산원에 의하면 10·15대책 한 달 서울 아파트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투기와의 전쟁'과 유사성을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집값 안정을 위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대출 제한,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제 부활 등 강력한 26번의 규제책들을 잇달아 쏟아냈지만, 집값을 잡는 데 실패했다. 한국 부동산 투기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진보정권에서 심하다. 지가 상승이 보수정권인 김영삼 3%, 이명박 16%, 박근혜 10%, 윤석열 11% 등 평균 8%이다. 이에 비하여 진보정권의 지가 상승은 김대중 38%, 노무현 34%, 문재인 38% 등 평균 36.7%로 3배 이상 높다. 진보정권에서 투기가 심한 것은 한국 부동산 속성에 기인한다. 한국 부동산 문제의 속성을 요약하면, 첫째 한국인들의 부동산 투자엔 지금 아니면 집을 못 살 것 같다는 불안 심리가 무차별 구매를 유도한다. 둘째는 원활한 공급 없는 규제는 소비자의 불안 심리를 가중한다. 셋째는 강남 불패 신화다. 주변에 주식으로 망한 사람은 많으나 강남 부동산으로 망한 사례는 없다. 넷째, 진보정권의 무차별 규제가 보수정권의 규제 완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진보정권의 규제로 부동산 투기가 잡힐 만하면 보수정권에서 규제를 완화한다. 예를 들면, 문재인 정부에서 26번의 온갖 규제를 다 동원했다. 그대로 5년만 계속되었다면 부동산 투기는 근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26번의 무차별 규제로 투기뿐 아니라 선량한 실수요자 희생양을 양산했다. 이를 빌미로 윤석열 정부는 규제를 완화했다. 진보정권이 부동산 투기를 막는 것은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만이 유일한 생산재이며 자본가는 노동을 착취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슘페터는 자본가는 기술 혁신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창조하는 것을 밝혔다. 이는 자본가가 기술 혁신을 통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한다면 노동을 착취하는 셈이다. 그러나 정권이 극소수의 투기를 막기 위해서 다수의 희생을 초래한다면 그 또한 정의가 아니다. 진보정권의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소수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서 너무 많은 선량한 실수요자를 희생시켰다. 투기의 시발점인 강남 4구를 핀셋 규제로 막으면 되는데 서울 전역과 경기도로 토지거래허가제를 확대함으로써 선량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결과적으로 야당에 빌미를 주고 선거를 앞두고 규제를 해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강남 4구에 투기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강남 불패 신화 때문이다. 불패 신화는 8학군이라는 교육적 요인도 있지만, '똘똘한 한 채'에 대한 무차별 선호에 기인한다.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선호 현상은 '다주택을 보유는 악이고 똘똘한 한 채를 보유하는 것은 선'이라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만든 기형아다. 수십억 원의 똘똘한 한 채는 1주택 세제 혜택이 주어 지는데, 시가 수억 원의 다주택자는 다주택의 불이익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비강남권의 수채 아파트를 처분하여 강남 4구의 똘똘한 한 채로 전환하는 무차별 구매가 일어난다. 이로써 다른 지역 부동산은 폭락하는 데 강남 4구만 독야청청하는 이유다. 이의 해결책은 소득세와 유사하게 주택 수가 아닌 보유 주택합산으로 세제를 운영해야 한다. 1가구·1주택의 세제 혜택은 1가구·일정 금액, 예를 들면, 서울 아파트 가격의 중위수인 10억 원의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이다. 부동산 정책은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고 핀셋 규제와 같은 지속 가능한 섬세한 디테일이 중요하다. 윤덕균

[EE칼럼] 석유화학 구조조정, 부생수소 공백이 온다

12월 12일 여천NCC는 한화솔루션·DL케미칼과의 2025~2027년 장기 원료 공급계약을 이사회에서 의결했다. 이 과정에서 90만~140만 톤 수준의 감산(공급 조정) 가능성이 언급되며, 국내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는 신호를 시장에 던졌다. 앞서 산업통상부와 10대 석유화학사는 자율협약을 통해 국내 NCC(나프타 분해설비) 설비의 18~25%(270만~370만 톤) 감축 목표를 공식화했고, 롯데케미칼·LG화학 등도 박스업·통합·매각을 검토하며 최소 3~5개 NCC 라인의 폐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대산·울산 산단에서도 대형 통합과 '빅딜' 시나리오가 병행 검토되며 업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탄 배경은 명확하다. 글로벌 올레핀 공급체계 재편과 국내 NCC의 구조적 원가 한계가 맞물린 결과다. 2010년대 후반 이후 COTC, ECC, CTO/MTO 등 대체 공정이 확산하면서 미국과 중동은 저가 에탄·원유 기반 생산시설 증설로 원가 경쟁력을 크게 높였다. 특히 ECC(에탄 분해설비)는 에틸렌 수율이 80% 이상으로, 나프타 NCC와의 원가 격차가 구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시 에틸렌 생산능력을 2018년 약 2,600만 톤에서 2027년 약 7,000만 톤대로 확대하며 저가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국내 NCC는 나프타 의존과 원료비 변동성 탓에 수익성이 악화해, 가동률이 70%대까지 떨어진 상태다. 문제는 이 구조조정이 석유화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프타 분해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생수소는 국내 수소공급의 핵심축이다. 2023년 기준 국내 수소 생산량은 약 248만 톤으로, 이 중 부생수소가 57%(약 141만 톤)를 차지한다. 특히 석유화학 NCC 공정에서 나오는 부생수소만 109만 톤으로 전체의 44%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2026년 전후 대산·여수·울산에서 일부 NCC 라인이 가동 중단되거나 폐쇄될 경우, 국내 수소공급이 당장 20~30만 톤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공급 축소는 곧바로 가격 문제로 이어진다. 부생수소는 공정 부산물로 생산단가가 kg당 1,500~2,000원 수준의 가장 저렴한 수소다. 반면 천연가스 추출 수소는 2,000원대 중반 이상, 수전해 기반 그린수소는 kg당 1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현재 차량용 수소 소매가격이 약 1만 원 수준임을 고려하면, 부생수소 비중 축소는 수송용 수소 가격 상승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가격 탄력성이 낮은 수소차 시장에서 연료비 상승은 곧 경제성 악화로 이어지고, 이는 수소경제 전반의 추진 동력을 약화하는 리스크가 된다. 물론 NCC 구조조정은 산업 경쟁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문제는 속도와 순서다. 수소공급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구조조정과 대체 공급원 확보를 병행하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정부는 부생수소 의존도가 높은 지역에서 NCC 폐쇄 시점과 신규 수소 생산기지 구축 시기를 연계해 조율할 필요가 있다. 산업부문 사업재편 승인 과정에서 부생수소 감소 영향 평가를 시행하고, 기업에 대체 수소 공급원 확보 방안을 함께 제출하도록 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감축 대상 NCC 부지에 블루수소 플랜트를 전환 설치하거나, 폐쇄 설비를 수소 저장·물류 거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공급 다변화와 가격 안정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 청정수소와 수입 수소를 조합해 공급원을 넓히고, 배관·저장 인프라를 확충하며, 청정수소 인증과 연계한 생산 지원 제도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다. 동시에 수소경제로의 이행 역시 시간을 다투는 과제다. 부생수소라는 기존 기반이 흔들릴 경우, 수소차·수소발전·산업 탈 탄소화 계획 전반이 압력을 받을 수 있다. 그만큼 구조조정과 수소 수급 안정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설비 감축이 곧바로 수소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부와 업계가 두 과제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 김재경

[기자의 눈]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목표가 아니라 주문(呪文)이 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내세운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보급' 목표를 두고 에너지 업계 안팎에서는 고개를 갸웃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 숫자만 놓고 보면 야심차다 못해 과감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 목표는 정책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깝다. 현재 국내 재생에너지 설비는 태양광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었지만, 계통에 실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설비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인허가 단계와 계획 물량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2030년까지 추가로 수십 기가와트(GW)를 안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과 같은 속도와 구조라면 매년 두 자릿수 GW의 신규 재생에너지를 계통에 무리 없이 연결해야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목표다. 문제는 단순히 '설비 용량'이 아니다. 재생에너지는 지역 편중이 심하고 출력 변동성이 크다. 특히 태양광과 풍력은 전력 수요와 시간대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발전 설비는 늘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송전망과 계통 보강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전력망 포화로 인해 발전을 줄이거나 접속을 대기하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적지 않다.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반복되는 주민 수용성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태양광은 산지 훼손 논란, 풍력은 소음·경관·어업권 갈등이 뒤따른다. 행정 절차를 아무리 간소화해도 사회적 갈등까지 단기간에 해소하기는 어렵다. 조직 개편이나 부처 명칭 변경이 곧바로 현장의 합의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고민은 깊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지만, 계통 보강 비용과 출력 제한, 보조서비스 비용까지 감안하면 전체 전력 시스템 비용은 오히려 상승하는 구조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전력 다소비 산업은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라는 숫자가 제시된 배경은 분명하다. 국제사회에 대한 의지 표명, 탈석탄·에너지 전환 정책의 상징성, 그리고 새 정부 에너지 정책의 방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히 강렬한 수치다. 하지만 목표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를 현실로 만드는 경로가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에너지 전환은 장부상의 용량 경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설비를 설치했느냐가 아니라, 그 전기가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쓰일 수 있느냐다. 이제는 재생에너지 100GW라는 구호를 넘어, 24시간 무탄소 전력(24/7 CFE)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는 기후정책의 이정표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공허한 숫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이슈&인사이트] 연준의 ‘스텔스 QE’와 한국은행의 딜레마

2025년 12월 10일, 우리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또다시 밤잠을 설쳐야 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의 사실상 마지막 임기 중 열린 이번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전 세계 금융시장의 이목이 쏠린 '슈퍼 위크'의 정점이었다. 시장의 예상대로 기준금리는 3.75~4.00%에서 3.50~3.75%로 25bp(0.25%포인트) 인하되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짜 주인공은 금리인하가 아니었다. 3명의 위원이 반대표를 던지는 이례적인 내부분열 속에서, 연준이 조용히 꺼내든 '준비금 관리 매입(Reserve Management Purchases, RMP)'이라는 낯선 카드가 등장한 것이다. 연준은 12월 12일부터 매월 400억 달러 규모의 단기 국채(T-bills)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시장 예상치였던 200억~300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파월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이것은 양적 완화(QE)가 아니다"라고 수차례 강변했다. 과거 금융위기 당시 장기국채나 모기지담보증권(MBS)을 사들여 장기 금리를 끌어내리던 것과는 달리, 단기 자금시장의 유동성을 충분한(ample)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 관리'일 뿐이라는 논지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달랐다. 연준이 매월 400억 달러어치의 국채를 민간에서 사들이면, 그만큼 민간의 무위험 자산(국채) 비중은 줄고 현금(지급준비금)은 늘어난다. 넘쳐나는 현금을 쥔 투자자들은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주식이나 회사채 등 위험 자산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포트폴리오 재조정 효과'이며, 사실상의 양적완화다. 실제로 FOMC 발표 직후 미국 중소형주 중심의 러셀 2000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시장이 이를 '유동성 파티의 재개'로 받아들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준의 이와 같은 '스텔스 돈 풀기'는 한국은행에 양날의 검이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은 한미 금리 역전폭의 축소다. 미국의 금리 인하로 양국 간 금리차는 기존 1.50%포인트에서 1.25%포인트(미국 상단 3.75% - 한국 2.50%)로 줄어들었다. 1,400원대 중반에 고착화된 환율과 자본유출 압력에 시달리던 한국은행으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반가운 소식이다. 또한 연준이 공급한 막대한 달러 유동성이 글로벌 자산시장을 타고 일부 국내증시로 유입된다면, 환율안정과 자산가격 부양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을 낙관하기엔 아직 이르다. 현재 우리나라 유동성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5년 9월 기준 광의통화(M2)는 전년 대비 8.5%나 급증하며 사상 최대인 4,430조 원을 기록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 12월 초 비상계엄 사태 이후 금융시장안정을 위해 한국은행이 '무제한 RP(환매조건부채권) 매입'을 선언하며 단기유동성을 대거 공급하고 있다. 이미 내부에 돈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외부발 유동성까지 더해질 경우, 물가불안과 부동산 재과열을 자극할 위험이 크다. 이번 FOMC에서 연준은 2026년 미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8%에서 2.3%로 대폭 상향 조정했다. 반면 한국은행이 제시한 한국의 2026년 성장률 전망은 1.8%에 그친다. 성장률 역전은 통화가치 차별화로 이어진다. 미국경제 나홀로 호황을 누리는 '미국 예외주의(US Exceptionalism)'가 지속되는 한 연준이 돈을 풀어도 달러약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미국 자산시장의 활황은 국내 투자자들의 '서학개미' 행렬을 가속화해, 무역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다시 금융계정을 통해 빠져나가는 구조적 환율상승 압력을 부추길 것이다. 결국 미연준의 돈풀기가 우리 경제에 '약'이 되게 하려면 정교한 정책 대응이 필수적이다. 첫째,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하에 신중해야 한다. 연준이 내린다고 해서 섣불리 따라 내렸다간, 좁혀진 금리차가 다시 무색해지고 집값 불안만 키울 수 있다. 현재의 2.50% 금리를 당분간 유지하며, RP 매입 등 미세 조정을 통해 필요한 곳에만 유동성을 공급하는 '핀셋 지원'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둘째, 환율 방어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2026년 1월부터 도입되는 원화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KRW FX Bonds)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외국인의 원화채권 투자를 구조적으로 유도하여, 단순히 달러를 팔아 환율을 막는 소극적 개입에서 벗어나 원화수요 자체를 늘리는 적극적 전략으로 선회해야 한다.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효과와 연계하여 원화자산의 매력도를 높이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다. 셋째, 과잉유동성이 부동산이 아닌 생산적 부문으로 흐르도록 물꼬를 터줘야 한다. 가계대출에 대한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는 한편, AI나 반도체 등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기업금융 지원은 확대해야 한다. 2025년의 끝자락, 파월의 임기내 마지막 실질적인 FOMC회의에서 연준은 다시 유동성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이것이 우리 경제에 단비가 될지 아니면 인플레이션과 투기라는 홍수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대응에 달려 있다고 본다. 돈잔치라는 환상에 취하기보다, 그 뒤에 날아들 수 있는 청구서를 대비하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수현

[기자의 눈] ‘국중박’ 유료화, 걸맞은 전시 콘텐츠 선행돼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은 2008년부터 무료로 전환해 입장료 없이 관람 가능하다. 꾸준한 방문객의 증가로 지난 11일 1945년 개관 이후 79년 만에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돌파했다.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영향으로 그 인기가 폭발했다.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입장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오픈 런' 현상이 일어날 정도다. 그렇다보니 이전까지 크게 개의치 않았던 대기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한정된 공간에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에 대해서 불만사항을 표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사전 예약제와 유료화다. 지난 10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상설 전시 유료화 언급 이후 온라인상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향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유료 입장료 정책이 확정된다면 국중박을 향하는 발걸음이 뚝 끊길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초반 시행착오의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안정적으로 정착한다면 지금보다 더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전 예약제의 경우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와 외국인 등이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일례로 일부 야구장에서는 고령자 및 장애인에 한해 현장에서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않고도 직원의 도움을 받아 티켓을 구매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유료화는 금액이 관건이다. 17년 가까이 무료로 관람해온 시설의 유료 전환을 심리적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료의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결정 과정에서 충분한 여론 수렴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많은 이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료 전환하지만 돈을 내는 만큼 기대한 만족도를 충족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방문객이 감소하는 등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관람객 수를 자랑하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일반 22유로(약 3만8000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성인 기준 30달러(약 4만4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고령자, 장애인, 학생, 미취학 아동, 지역 주민에게는 입장료 할인, 무료 관람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국중박이 올해 처음으로 루브르, 바티칸, 영국박물관에 이어 세계 4위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글로벌 박물관 대열에 합류한 만큼 해외 사례를 고려해 입장료 정책을 도입한다면, 그에 걸맞은 전시 콘텐츠를 선보여야 관람객의 이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백솔미 기자 bsm@ekn.kr

[김병헌의 체인지] 대통령, 반도체 앞에서 원칙을 묻다

금산분리는 한국 경제의 오랜 원칙이었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금융 지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기능해 왔다. 쉽게 손대기 어려운 규범으로 인식돼 왔지만 반도체와 AI 같은 첨단산업의 시간표 앞에서 이 원칙은 점점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수십조 원이 단번에 투입돼야 하는 산업에서 투자 시기를 놓치면 기술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진다. “돈을 벌어서 투자하려면 장비를 들여오고 세팅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의 말은, 기업의 이해관계를 넘어 산업의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를 보여주는 현실 진단이었다. 지난 10일 열린 '인공지능(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곽 사장이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가로막는 금산분리 규제를 언급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틀었다. “일리가 있다"는 대통령의 한마디는 정치적 수사라기보다 현장을 전제로 한 실질적 판단이었다. 대통령은 규칙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산업은 멈출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짚었다. 최근 이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념이나 진영의 언어보다 지금 무엇이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원칙은 지키되, 원칙이 만들어진 목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세다. 금산분리라는 오래된 규범 앞에서 대통령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지금의 규제가 독점을 막고 있는가, 아니면 첨단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가를 물었다. 대통령의 생각은 간단명료하면서 단순했다. 독점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다면 손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법은 유연하게 '예외적 완화'다. 반도체라는 국가전략산업에 한해, 지주회사 증손회사 지분율을 100%에서 50%로 낮추고 외부 자본을 끌어올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다. 원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조정하는 선택이다.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미국 인텔은 이미 글로벌 자산운용사 브룩필드와 합작사를 만들어 반도체 팹 투자를 진행했다. 인텔이 경영권을 유지한 채 외부 자본을 활용한 구조다. 일본 역시 정부와 민간 금융이 함께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고 있고, 대만 TSMC는 글로벌 금융시장을 적극 활용해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가 직접 보조금을 쏟아붓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에서, 규제 완화는 '돈 안 드는 산업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우려가 없을순 없다. 핵심 사업을 분리해 외부 투자를 받을 경우, 주주 이익이 희석될 수 있다는 지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과거 LG에너지솔루션 분사 당시의 논란이 다시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기업, 특히 SK하이닉스를 위한 '맞춤형 정책' 아니냐는 시선마저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른다. 이 대통령은 모든 완화를 공정위 심사와 승인이라는 안전장치 안에 두겠다고 했다. 무제한 특혜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의 '개방'이다. 삼성전자가 이미 누리고 있던 구조적 자유를 SK하이닉스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점에서, 역차별 해소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미국에 원자력 잠수함 건조 협력을 요청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과거 보수 진영의 의제로 여겨졌고, 동시에 진보 진영에서 경계하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보수가 원해온 요구도, 보수가 반대해온 영역도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태도. 이재명식 실용주의의 핵심이다. 정치는 선택의 예술이다. 모든 원칙을 지키면서 모든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조정하느냐다.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안보이자 미래 성장의 축이다. 그 사실 앞에서 대통령은 규칙을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두지 않았다. 이재명식 실용주의는 단기 성과보다 장기 경쟁력을 본다. 이번 금산분리 예외 완화는 그 철학이 구체적 정책으로 드러난 사례다. 논란은 남겠지만, 변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 한국 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변화다.

[이슈&인사이트]이재명 대통령 발언과 한국식 라이시테의 시작

한국 정치의 무대에서 “정교분리"라는 단어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불법 종교단체는 해산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단순한 원칙 확인 이상의 정치적 신호다.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특히 특정 종교 세력이 정치·행정의 영역에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난 수년간의 풍경—을 고려하면, 이 발언은 프랑스의 라이시테(laïcité) 개념과 비교했을 때 더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식 라이시테는 흔히 “세속주의"로 번역되지만, 그 본질은 종교를 배척하는 국가가 아니라 종교를 우대하지도, 종속되지도 않는 공화국을 만드는 데 있다. 1905년 제정된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두 가지 원칙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 즉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중립성, 즉 국가는 어떤 종교에도 급여를 지급하거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단순한 제도 설계가 아니라, 프랑스가 오랫동안 교권과 맞서 싸우며 쌓아온 역사적 축적의 결과이다. 왕정과 가톨릭의 동맹 속에서 억압되고 배제된 시민사회가, 공화국의 이름으로 종교적 권력을 정치의 바깥으로 밀어낸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이시테는 언제나 정치적 장치이자 사회적 투쟁의 결과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이 프랑스적 맥락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한국식 라이시테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첫 장면처럼 보인다. 한국은 헌법에 이미 “정교분리"가 명시돼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 종교가 정치 네트워크, 복지사업, 언론,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정교분리는 선언되었으나 제도적 관철은 이루어지지 않은, 말하자면 비완성의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한국적 맥락에서 정교분리는 더 이상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행정의 투명성, 시민의 평등권, 국가 권력의 독립성을 둘러싼 실질적 문제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종교적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라이시테가 과거 교황권의 정치 간섭을 차단하며 공화국을 재건했던 과정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례가 말해주듯, 정교분리는 법률 조항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라이시테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무슬림 여성의 히잡 착용 문제, 학교에서의 종교 상징 문제, 정체성 정치에 종교가 결합하는 극우의 전략 등, 라이시테는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쟁점화된다. 국가의 중립성은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균열 앞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선언적 의미를 넘어, 한국 정치에 내재된 종교 권력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어떻게 투명화하고 해체할 것인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던진다. 정교분리란 단지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거나, 종교 활동을 공적 공간에서 제한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정치, 그리고 역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종교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장치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특정 종교 세력이 정치 권력과 결합하여 형성한 비가시적 영향력, 즉 종교적 사적 권력이 민주주의의 공적 영역을 침식해온 오랜 구조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공화국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프랑스의 1905년 법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와 국가 사이의 새로운 경계 설정을 요구하는 시대적 압력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한국식 라이시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모델을 단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균형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종교 다원주의와 시민권의 확대 속에서 새로운 정교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프랑스의 라이시테가 12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교분리는 완결된 제도가 아니라, 지속적 실천의 과정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선언이 공화국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이제 한국 시민사회와 정치가 어떤 실천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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