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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체코 원전 수주 논란의 진짜 교훈

한국수력원자력 등 '팀코리아'가 지난 6월 4일 최종 계약한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 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50년간 1기당 1조원대의 로열티 지급, 차세대 소형모듈형원자로(SMR)의 기술 자립 검증 실시, 원전 수출 지역 제한 등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보다 내용상 후퇴했다. '노예·매국 계약'이라는 비판과 백지화 요구까지 나온다. 반대 쪽에선 전형적인 정권 교체 후 정치 공세라고 반박한다. 감정적 대응은 금물이다. 철저한 상황 분석과 현실 인식, 냉철한 대차대조표 작성과 구조적인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 먼저 원자력 기술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점과 미국 우위의 기술 패권 구도를 인식해야 한다. 원자력 기술은 미국이 2차대전을 종결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한 것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에너지 공급의 핵심이다. 핵폭탄·원자력 잠수함 등 군사적 활용, 의료·산업용 기술 등까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미국은 그래서 1950년대부터 법과 제도를 정비해 원천기술을 국가 안보의 명분으로 철저히 관리해왔다. 이번 계약에서 웨스팅하우스의 배후로 미국 에너지부(DOE)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배경이다. 현재로선 한국이 아무리 독자 기술 개발을 주장해도 미국의 허락이 없다면 수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원천 기술 통제 체제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 첨단 극자외선 노광 장비(EUV 리소그래피)가 대표이다. 네덜란드의 ASML사가 만들지만, 미국은 포토리소그래피의 개념, 레이저, 광학계까지 대부분의 원천 기술 지식재산권(IP)을 갖고 있다. 미국은 “우리 기술이 쓰였으니 수출하지 마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미국은 미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AI) 시장에서도 원천 기술을 이용한 '알박기'를 본격화하고 있다. 올해초부터 전 세계 국가를 3등급으로 나눠 핵심 장비인 그래픽 처리 장치(GPU)의 수출을 통제했다. 학습데이터 관리, 모델 학습 서비스 규제 등에도 나서고 있다. 원자력, 반도체, AI는 모두 미국이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지난 50년간 원전을 건설해 최고의 시공 능력을 갖췄다. 반도체 생산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 기술에 종속된 구조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AI는 시장·기술 공백이 있어 우리나라에게도 아직 기술 주권을 가질 기회가 남아 있긴 하다. 원전의 경우 미국의 허락없이는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가 어렵다는 게 밝혀졌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논란은 막대한 로열티를 내는 대신 시장에서의 생존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5년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당시 '원전 수출 자율권'을 따냈다며 기세 등등했던 국내 원전 관련자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특히 한미 원자력협정 내용보다도 후퇴한 계약을 체결해 사실상 기술 주권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소송으로 갔어야 한다는 지적도 타당성이 있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논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은 이같은 글로벌 기술 패권 구조를 냉철히 인식하고 진짜 국익을 취하는 것이다. 또 미래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짜고 실행해야 한다. 김봉수 기자 bskim2019@ekn.kr

[기자의 눈] 중대재해 잡겠다는 정부, 돌연 리스크 떠안은 은행

정부가 최근 이슈가 된 기업 중대재해사고의 해결책으로 '자금 옥죄기'를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뒤 은행권의 짐이 늘어난 모양새다. 최근 정부는 금융권에서 한 단계 구체화 된 심사 반영안을 꺼냈다. 대출의 신규 취급과 만기 연장 과정에서 기업의 안전관리 수준을 따져 금리와 한도를 조정하는가 하면 기존 대출도 약정 변경 시 한도 축소나 인출 제한에 처해질 수 있도록 했다. 중대재해 이력이나 안전 관리 수준에 따라 정책금융 평가도 달라진다. 공시나 ESG평가에 반영함으로써 투자자 판단에도 영향을 주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은행권은 최근 신용평가 체계 확립을 위해 구체화 단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의 '중대재해 뿌리뽑기'라는 짐을 돌연 은행권이 떠안게 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아무래도 대출과 관련된 변화가 이번 제도의 핵심축이므로 은행에서 직접 수행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권 내부에선 무엇보다 새로운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데 대한 불만과 우려가 높다. 기업에겐 목숨과도 같은 대출 문제를 은행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면서 기업과의 첨예한 갈등 문제가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특정 산업군에 집중된 문제를 갑작스레 금융권이 뛰어들어 해결하는 모양새기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며 “그 과정에서 안전문제라는 비재무적 요소를 두고 기업의 책임을 가려내야하고, 법적 공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점까지 모두 은행이 갑작스레 떠안은 리스크"라고 말했다. 정부가 여러 방향에서 정책을 밀어붙이는 통에 정부의 또 다른 기조와 부딪히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은행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산재가 많은 업종이나 기업에 대출을 꺼리게 된 현실이지만, 이는 정부가 기업에 자금을 흘려보내라는 기조와 반대되는 행보다. 은행은 비슷한 문제로 상생금융 지원 규모를 다방면으로 늘려야하는 분위기 속에 밸류업 정책도 이뤄내야 하는 이슈에서 고민이 많다고 토로한다. 기업의 생명줄인 자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 기업들이 안전 관리에 있어 확실하고 빠른 변화를 보이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를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해 목표만 바라보면 필연 다른 곳에서 탈이 나기 마련이다. 속도와 강도도 중요하지만 조화와 균형을 고려한 정책도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경현 기자 pearl@ekn.kr

[EE칼럼] LNG 트레이딩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상호관세 15%, 미국 투자 펀드 3,500억 달러 조성, 미국산 에너지 4년간 1,000억 달러 구매를 골자로,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 재정수입 확보, 제조업 부활, 에너지 패권에 거의 부합하는 맞춤형 협상 타결로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협상 결과 우리나라는 향후 4년 동안 매년 25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 미국산 에너지 수입액이 이미 2024년 기준으로 약 232억 달러에 이르고 있어, 매년 20억 달러 내외의 추가 수입은 큰 부담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추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산 LNG 수입 비중은 현재 12% 정도에 지나지 않고, 상당수의 가스공사 장기 도입 계약이 만료 시점을 앞두고 있어, 미국산 LNG 수입 증가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LNG 수입을 최전방에서 책임지고 있는 가스공사의 속내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국내 LNG 수요의 급격한 감소를 전망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법정 수급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확정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LNG 발전량은 2022년 157.7TWh에서 2038년 74.3TWHh로 약 53% 감소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비중을 각각 29.2%, 35.2%까지 늘려 잡은 반작용이다. 계획이 실현될 경우, 발전용 LNG 수요량은 덩달아 약 1,200만 톤가량 줄어들게 된다. 가스공사의 장기계약 물량 중 2024년부터 2026년 사이 만료되는 1,300만 톤에 거의 육박하는 엄청난 물량이다. 장기계약 기간은 주로 20년이다. 가스공사가, 향후 15년 이내에 발전용 LNG 수요가 반 토막 나는 법정 수급계획을 무시하고, 20년 기간의 대규모 도입 계약에 선뜻 나서기 어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현재 가스공사는 카타르 및 BP와의 신규 계약을 통해 358만 톤 물량을 대체했을 뿐,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미국산 LNG로 대체하는 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계획의 수립과 실현은 다르다. 계획은 의지의 표현이라면, 실현은 의지와 현실적 제약 간 타협의 결과다. 정부는 계획을 통해 재생에너지, 원자력 등 무탄소전원 중심의 에너지전환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가득 찬 세상이 정부의 의지대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신규원전 완공 지연, 계속 운전 기간 단축, 재생에너지 확대 한계 등과 같은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면, 무탄소전원은 계획 대비 턱없이 부족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LNG 도입 계약을 계획에만 입각해 체결할 경우,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국가적 에너지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안보의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다. 가스공사는 에너지안보 차원에서 법정계획의 수요 전망을 사뭇 초과하여 LNG 도입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잉여 물량 해소보다 에너지부족이 초래하는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법정 에너지수급계획의 경직성을 완화해 법적 리스크를 줄여 주어야 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정부의 정책 의지와 별도로 다양한 현실적 가능성에 입각하여 발표하는 에너지아웃룩과 같은 형태면 충분해 보인다. 전체 물량의 과부족만 문제가 아니다. LNG 수요의 변동성 확대가 더 큰 문제다. 자연 조건에 따라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확대를 에너지저장장치(ESS)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워 LNG 발전의 병용이 필수다. 따라서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은 LNG 수요의 변동성으로 곧바로 이식되어, LNG 수급의 단기적 불일치가 수시로 일어날 가능성을 높인다. 이래저래 LNG 과부족의 빈번한 발생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수급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급 안정화 방안은 트레이딩 역량 강화다. 가스공사는 단순한 수입공급사를 넘어 고도의 트레이딩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가스공사는 연간 약 3,600만 톤의 LNG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 수입사일 뿐만 아니라, 1,216만㎘에 달하는 단일 기업 최대 저장시설과 전국 단일 천연가스 환상망을 보유하고 있다. 트레이딩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물류, 운송, 저장시설과 같은 하드웨어 조건을 이미 구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장 정보 분석, 금융 리스크 관리, 시장 참여자 간 네트워크 등 소프트웨어 능력은 한참 뒤져있는 것이 현실이다. 향후 에너지 수급의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LNG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가스공사의 수급 조절 능력은 곧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다. 가스공사의 트레이딩 역량 강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박주헌

[EE칼럼] 관세 압박을 기회로, 한미일 협력의 분수령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23-24일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뒤 ,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2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첫 한미정상회담을 갖는다. 역대 대통령 중 취임 후 한미 정상회담보다 한일 정상회담을 먼저 하는 것은 처음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광복 8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해에 한일 협력의 의지를 드러내는 측면도 있지만, 일본과 미리 의견 교환을 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도 읽힌다. 지난 7월 31일 한미 양국 간 관세 협상 결과 미국이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가로 한국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와 1000억 달러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는 내용의 구두 합의가 발표됐다. 문제는 이 약속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행하느냐이다. 이 대통령의 방일·방미에 앞서, 1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이 모여 투자 계획을 점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은 텍사스주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에 대한 투자(370억 달러)를 포함해 총 51조 원, SK는 인디애나주 HBM 패키징 공장에 18조 원, 현대차는 2028년까지 배터리 및 전기차 생산기지 확장을 위해 29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 전해진다. 4대 그룹의 미국 내 투자 합계만 126조 원을 넘어서는데, 한화와 HD현대가 참여할 이른바 'MASGA(미국 조선업 재건)'프로젝트도 보다 구체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투자가 단순히 '관세 압박 회피 비용'으로만 쓰인다면 오히려 한국 경제에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이 투자가 궁극적으로 한국의 국익, 즉 에너지 안보나 미래 성장 산업의 동력 강화에 마중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정책 제언을 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미 약속한 바 있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구매도 상기 투자와 연계할 수 있는 묘안을 발굴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미국산 LNG 구매는 단순 수입 보다는 터미널 지분 참여나 알래스카산 LNG 공동 개발 투자 등과 연계해 장기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겠다.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자력발전의 연료 문제도 시급하다. 한국이나 일본, 심지어 미국조차 원자력발전의 연료가 되는 농축우라늄 공급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AI 발전으로 인한 전기 수요 폭증, 기후변화 대응 등의 차원에서 원자력 발전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 추세일 것을 고려한다면, 연료 공급의 안정성 확보는 세 나라에게 모두 매우 중대한 과제가 아니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e Reactor) 시대를 대비한 HALEU(고순도 저농축 우라늄) 생산 체제 구축도 세 나라 모두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한국은 현재 농축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농축우라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은 핵무장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합의를 거쳐 농축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본의 자체 농축 능력은 자국의 원자력 발전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미국의 농축 능력도 한일이 의지할 수준이 전혀 아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연료 공급 안정성 확보를 위한 구상은 한미일이 반드시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사안이라 하겠다.이 밖에도 에너지저장장치(ESS) 확대나 수소 관련 공급망 구축 등도 장기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통해 풀어간다면 상호 보완적인 분야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전 이시바 총리를 먼저 만난 것은 한미일 삼각 협력에 분명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3500억 달러는 한국 GDP의 약 20%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일본도 5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막대한 투자금액을 가지고 한일이 미국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만 한다면 제로섬 게임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일 간에는 23일 도쿄에서의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정부 간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정책을 서로 조율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대미 투자도 한국의 국익은 물론 한미동맹, 한미일 협력에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임은정

[기자의 눈] 체코 원전 수주, 냉철한 대차대조표 필요

2023년 중소·벤처기업 분야를 취재하던 시절, 윤석열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스타트업들의 경쟁력이 무너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계약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매국 계약' 논란에서 당시의 데자뷔를 느꼈다. 두 사건은 정권의 치적을 쌓으려다 국내 산업의 기초를 무너뜨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한국전력(한전)은 체코 원전 최종 계약을 앞두고 올해 초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충격적인 내용의 합의문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1기당 무려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 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몰아주기로 했다. 1기당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 원)의 기술 사용료도 따로 준다. 원전 1기를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에 약 1조 원을 지불하는 셈이다. 수수료나 물품 구매 등 금전적 대가는 그렇다 치자. 한국형 원전은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된 만큼 지식재산권(IP) 분쟁 해소를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심각한 것은 해외 원전 수주와 기술 독립의 길을 막아 놓았다는 것이다. 합의문에 한국 기업이 개발하는 차세대 원전(SMR) 수출 시에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받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넘겨 주고 싶지 않은 웨스팅하우스에게 사실상 기술 주권을 넘겨 주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SMR은 안 그래도 대형 원전에 비해 수익성이 낮다. 웨스팅하우스의 간섭으로 국내 기업의 이익이 크게 줄어들면 해외 사업에 뛰어들 이유가 없어진다. 대형 원전도 북미·유럽·우크라이나 등에서 신규 시장 개척이 어려워졌다. 여당 등에서는 이번 계약이 정권의 치적 쌓기를 위해 지나치게 성급히 협상을 진행해 결국 원전 기술 주권을 팔아 먹은 '매국 계약'을 체결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수원과 한전은 이미 웨스팅하우스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 당시 한차례 지재권 협상을 했었고, 이번보다 나은 조건에 합의한 바 있다. 이번 협상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내주면서 급히 계약을 체결했어야 했는지는 분명히 의문이다. 정권의 단기적 성과를 위해 한국 원전 산업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셈이다. 이미 원전 건설 기업 주가가 출렁이는 등 파장이 크다. 철저한 사실 확인과 냉철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매국 계약'인지 아닌지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김유승 기자 kys@ekn.kr

[이슈&인사이트]“내가 다시 남편과 살 수 있을까”

이강윤 정치평론가 “내가 다시 남편과 살 수 있을까. 다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구속중인 김건희 씨가 변호인에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 고전문학의 한 대목이 연상되는, 애절한 탄식이다. 그러나 그 말이 지아비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지어미의 가슴 아픈 사연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엊그제, 몇 달 전까지 그들 부부가 한 일과 한 말을 생각하면 저 말에 측은지심보다는 괘씸함이나 답답함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저렇게 한탄하기 전에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사죄가 우선적으로 이뤄지는 게 마땅한 도리이자 자세이다. 수사에 정직하게 임하며, 감히 눈조차 함부로 들지 않는 다소곳한 자세로 지내야 저런 말이 그나마 귓가에 닿을락말락 하겠건만, 부인과 묵비권으로 일관하다 변호인과 차 한 잔 하는 휴식시간에 저리 말했다 하니 그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여러 물증과, “6천만원 짜리 목걸이를 사서 건넸다"는 서희건설 측 자수서를 제시해도 “예전 홍콩 여행 때 산 모조품"이라거나, “착용 후 바로 돌려줬다"고 말을 바꾸며 모르쇠로 일관한다는데 저런 탄식이 어찌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그녀가 지난 몇 십 년간 한 일을 속속들이 다 알아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부인으로서 지난 몇 년간 한 일 중 우리 공동체 구성원의 삶이나 국정에 직간접으로 위력을 행사한 것은 알아야 할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 고속도로 노선 변경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 주식시장을 어떻게 교란시켰는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민의힘 공천과 총선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역시 국민참정권 침해 측면에서 당연히 밝혀야 한다. 대통령의 부인은 아무런 법적 지위나 권한이 없는 일개 자연인에 불과하다. 순방 나가는 남편과 붉은 색 카핏이 깔린 비행기 트랩을 같이 오르내리자니 자신에게 공적 지위와 권한이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착각이다.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 측은 문제의 목걸이 세트를 건네며 검사 출신 사위의 공직을 부탁했다고 하고, 그 사위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정녕 목걸이와 무관하다면 김건희 씨는 임명권자인 남편 윤 씨를 특검으로 나오라고 해 대가성 청탁이 아님을 입증하면 된다. 그런데 출석조사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잖은가. 국민은 어떤 중년 여성의 귀금속 취향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다.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전횡을 밝히고 실정법에 따른 조치를 하라는 것이다. 형사 처벌에서 가족 동시 구속은 드문 일이다. 윤석열 씨 부부 동시 구속에 대해 '계엄내란을 이유로 부부를 도맷금으로 징치하려는 법적 한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남편 윤 씨 죄목과 부인 김 씨의 혐의가 엄연히 다르기에 별도의 사건인 것이지 도맷금 탄압이나 징치가 아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고개가 가로저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윤 씨 부부로 인해 3년 여 간 상식과 원칙과 합리가 짓밟히는 참담함을 겪었다. 탄핵재판과 조기대선을 통해 민주공화정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다시금 뼈저리게 절감했고, 국민들이 국정을 도탄에서 구해냈다. 만시지탄이지만 윤 씨 부부는 지금이라도 일체의 분심이나 저항심을 버리고 겸허히 사과하고 석고대죄해야 하거늘, 부부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 허위의식과 망상에서 깨어나 오만과 잘못을 고하며 국민께 사죄하고 또 사죄하라. 생이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사죄하라. 사죄란 피해자가 “이제 됐으니 그만 하시오"라고 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이 죽는 그 순간까지 사죄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죽어서도 지탄을 면치 못하고, 사람들이 그들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이다. 이같은 이치를 정녕 모르는가. 이강윤

[EE칼럼] 기후변화의 책임은 누가져야 하는가?

혹독한 여름을 지날 때마다 뉴스는 이상기후라고 한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닥치고 해일이 들고 쓰나미가 일어나도 인간이 화석연료를 과다 사용해서 지구온난화가 발생한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1750년대 산업혁명 전에 278ppm에서 꾸준히 올라서 2022년 422.8ppm으로 약 60% 가량 증가했다고 보고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증기기관을 통한 대량생산을 하면서부터 인류는 기아와 가난으로부터 구원되기 시작했다. 1859년 미국 사업가 에드윈 드레이크가 기계식 시추장비를 통하여 석유를 상업적으로 추출하면서 저렴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1821년 천연가스가 개발되고 1920년대 천연가스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파이프라인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천연가스의 대량 운송과 도시 지역으로의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천연가스의 LNG 특허가 제출되면서 상업적으로 해상운송을 통하여 전 세계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대부분의 화석연료는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시작하여 미국을 거쳐 전 세계의 산업화를 이끌고 선박과 항공 운동 비용을 낮춰 무역을 가능하게 하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화석연료 사용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선진국은 더욱 부유해졌는데 이제는 더러워진 지구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해서 부유해지고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했던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기후변화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1992년 체결된 최초의 국제기후협약은 국가마다 배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다르다는 것과 함께 앞으로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대한민국이 역사적으로 책임져야 할 양은 1%에 불과하다. 지구를 뜨겁게 만든 많은 책임은 화석연료를 대량 사용한 유럽과 미국이며 누적하면 거의 60%에 육박한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더럽혔고 그 과정에서 제조업으로 융성했고 부유한 국가들이 되었다. 그러다가 더러워진 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져서 인건비가 싸거나 기술이 더 좋은 나라로 이전하여 다시 제조업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은 생산기지가 없어서 계속해서 가난한 나라들이 생산한 것을 수입하고 소비하며 배출하고 있다. 중국은 자기네가 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수출하기 때문에 최근 배출량이 늘어서 전체 배출량의 약 33%를 배출하지만 1인당 배출량은 여전히 미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하라 사막 이남에 살고 있는 10억 명은 미국 인구 평균의 1/20 정도를 배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여전히 다른 국가들에 대해 “배출 빚"을 지고 있고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 국가들이 욕망을 줄이고 소비를 줄여서 자국의 배출량을 줄이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지구는 지켜질 것이다. 타국의 배출량을 줄이도록 압박할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한 국가들이 탄소를 덜 배출하면서 경제를 발전할 수 있도록 금융과 기술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이 오랜동안 배출한 결과로 가난해지거나 해수면에 잠기는 피해 국가들이 당면한 기후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선진국은 강자이고 그들은 선한 것처럼 얘기하며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며 온실가스를 내뿜은 결과이고 못살고 이제 막 경제를 부흥하려고 하는 나라들의 경제발전 사다리를 걷어차고 희생을 강요할 뿐이다. 인도가 1인당 gdp가 약 2,600불에 불과한데 그들이 석탄을 쓴다고 지구를 지키지 않는 나쁜 나라라고 아무리 욕해봐야 소용없다. 선진국이 석탄을 안 쓸수록 석탄 가격은 하향 안정화되고 더 많은 석탄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충분히 공급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할 것이다. 2024년도 석탄 사용량은 줄기는커녕 또 한 번의 피크를 찍고 말았다. 온실가스를 줄여 지구를 지키자는 담합은 책임유발자들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조홍종

[기자의 눈] 이재명 ‘쪽박’·오세훈 ‘대박’…K-주식의 민낯

한국 자본시장의 민낯은 정치 지도자의 투자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이재명 대통령은 2018년 성남시장 시절 LG디스플레이·두산중공업·성우하이텍·SK이노베이션·KB금융 등 13억원 규모의 국내 주식을 보유했다. 그러나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총액은 약 9억 원 수준이다. 두산중공업과 SK이노베이션, KB금융은 수익을 냈지만 LG디스플레이와 성우하이텍의 부진이 발목을 잡았다. 5년 넘게 들고 있었다면 –28% 손실이다. 대통령도 물린 K주식의 현실이다. 반면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학개미'였다. 그는 2024년 말 기준 국내 주식은 모두 매각하고, △AI 반도체 대장주 엔비디아(20.4%), △양자컴퓨터 테마주 아이온큐(14.9%), △미국 국방부와 거래하는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13.9%), △비트코인 투자회사로 불리는 마이크로스트래티지 (50.7%) 등 해외 기술주와 가상자산이 대부분이다. 종전 평가액 155만원이던 포트폴리오는 현재 10억5000만원으로 불어나 약 680배 수익을 기록, '탈국장' 후 미주에 올라타 성과를 거뒀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투자 성향 차이를 넘어 한국 증시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결국 투자자들이 왜 점점 '서학개미'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왜 정부의 자본시장 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외치는 이재명 정부가 증권거래세 인상과 대주주 양도세 강화 같은 세제 개편을 밀어부치자 투자자들이 반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선 세수 확대 효과도 불확실하다. 정부는 증권거래세를 0.15%에서 0.2%로 올려 향후 5년간 11조5000억 원을 더 걷을 수 있다고 밝혔지만, 정작 대주주 양도세 기준 강화로 늘어날 세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지 못 하고 있다. 현 제도는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에도 못 미치는 주식 10억원어치를 보유한 투자자까지 '대주주'로 규정해 최대 25%의 양도세를 부과하는데, 이로 인해 투자자들이 연말마다 매도에 나서며 시장 불안을 키운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2017년과 2019년 12월, 대주주 기준 강화 시행을 앞두고 각각 5조원 안팎의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진 전례가 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정 비전은 '실용적 시장주의를 통한 지속 성장'이다. 그러나 현행 세제 개편안은 소득 재분배라는 제도 취지와 달리, 실제로는 증시 활력을 떨어뜨리고 개인 투자자들의 자산 형성 기회를 제한하는 역설을 만들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세수 증대라는 단기 성과에 치중하는 한, 대통령도 물렸던 K-주식의 현실은 수백만 개인 투자자들의 좌절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이슈&인사이트] 대만과 영국의 국민소환제

7월 26일 대만에서는 야당 국민당 의원 24명의 국민소환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집권당 민진당은 5-6명 정도는 파면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을 걸었지만 단 한 명도 파면시키지 못했다. 보통 소환투표의 참여율이 낮지만 이번에는 2개의 지역구를 제외하고는 52-60%로 투표율도 상당히 높았다. 그 결과 113석의 의석 가운데 민진당 51석, 국민당 52석, 민중당 8석의 현상이 유지되었다. 친미 반중 성향의 민진당 라이칭더 총통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계속 갇히게 된 것이다. 사실 정치적 극단 투쟁은 2024년 1월 대선과 총선 동시선거 이후 예견되었다. 라이칭더는 차이잉원 총통이 8년 집권한 뒤에 대만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민진당 3연임으로 총통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의회에서는 민진당이 한끝 차이로 제2당에 그쳤다. 그 뒤 1년 동안 공무원 선거 및 소환법 개정안 등 3개의 쟁점 법안을 두고 여야는 서로 의사당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치며 쿵후 싸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민중당은 민진당 라이칭더 정권의 탈원전 정책도 가로막고 정부예산안도 대폭 삭감했다. 민진당은 국민당이 대만을 중국에 팔아넘기는 세력이라고 몰아붙였고 국민당은 라이칭더 정권이 안보 불안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야당을 친중세력이라고 탄압한다고 싸워왔다. 소환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지방자치 수준에서 적용되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 예외 중에 다른 하나가 영국이다. 영국에서는 2009년 하원의원들이 국민 세금인 의정활동비를 의사당이 있는 런던의 비싼 거주비로 유용하거나 부풀려서 청구한 사실이 대거 드러나면서 국민소환제 도입 논의가 일었다. 오랜 격론 끝에 마침내 2015년 의원소환법이 제정되었고 2016년 3월 4일부터 하원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가 시행되었다. 2024년 1월까지 모두 5건의 소환투표가 실시되었고 4명의 의원은 실제로 파면되었다. 영국의 의원소환법은 직접 자기 선거구 의원을 소환하는데 특정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영국은 1) 범죄행위로 인한 기소 및 구금형 선고, 2) 하원윤리위원회 제재에 따라 일정기간 직무 정지, 3) 2009년 의회윤리법상 수당신고를 허위로 하거나 오해를 유발해 기소된 경우로 소환 사유를 제한한다. 단 구금 형량이 1년 이상이면 별도의 절차 없이 의원직이 자동 박탈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된 뒤 선거구 유권자의 10% 이상이 6주 이내에 소환 청원에 서명하면 해당 의원은 파면된다. 대만의 국민소환제와 영국 사례의 차이는 극명하다. 영국의 경우는 대만과 달리 정치적인 사유가 아니라 형사상의 범죄 혐의로 유죄를 받은 경우에 한해 소환절차가 작동한다. 실제로 영국에서 국민소환의 대상이 된 사례는 1) 의원 행동강령 위반으로 30일 의원 자격정지(이언 페이즐리), 2) 사법절차 남용으로 기소 뒤 3개월 형 선고(피오나 오나사냐), 3) 2009년 의회윤리법 제10조 위반으로 기소(크리스 데이비스), 4) 의원 행동강령 위반으로 30일 의원 자격정지(마가렛 페리어), 5) 의회 괴롭힘, 성적 비행에 대한 정책 위반으로 6개월 의원 자격정지(피터 본)이다. 이 가운데 이언 페이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의회에서 쫓겨났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주민소환제가 시행되었는데 서명자 미달이나 소환 청구 철회 등으로 중단된 사례가 132건이다. 실제로 투표가 실시된 사례는 11건인데 그나마 자리에서 쫓겨난 선출직은 2명의 기초의회 의원에 그친다. 2007년 12월 광역화장장 유치 문제로 경기 하남 시장과 시의회 의원 3명에 대한 소환절차가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시의원 2명만 파면된 것이 유일무이하다. 가장 최근의 사례인데 7월 24일 서대문구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서대문구의회 부의장 대상 주민소환 투표 청구 서명부에서 서명한 적이 없는데도 이름이 올라간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되었다. 국민소환제는 한국에서 개헌이나 정치개혁을 논할 때 단골 메뉴이다. 한국의 주민소환제식이면 실효성이 적다. 대만식 국민소환제라면 정쟁만 더 확대시킬 것이다. 영국식이려면 국회윤리위원회가 강화되고 사법부의 재판절차가 짧아야 한다. 쉽지 않아 보인다. 이준한

[EE칼럼] 이 산이 아닌가벼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이 산이 아닌가벼." 산 정상에서 외친 그의 한 마디에 절반의 병사가 허탈함에 쓰러졌다. 나폴레옹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다른 산을 올랐다.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 나머지 병사들마저 기가 막혀 쓰러졌다. 이 우스갯소리야 웃어넘길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연구개발 현장에서는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첫째, 등정할 산을 정하는 데 전략적 성찰이 부족하다. 왜 이 산을 올라야 하는지, 정상에 오르면 무엇을 얻는지 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발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다 오르니까"라는 이유만으로 등반을 시작한다. 선진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활용도나 미래 수요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형 연구시설을 짓거나, 경제성이 부족한 사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사례가 그렇다. 이는 예산 낭비를 넘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결정적 기회를 놓치는 더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쉬운 산만 오르려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 불확실하지만 잠재력이 큰 미지의 봉우리를 외면한다. 대신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여 안전한 등산로만 찾는다. 논문이나 특허와 같은 단기적인 성과에 매몰된 평가 제도가 이러한 풍토를 더욱 부추긴다. 이런 풍토에서는 '최초의 개척자(First Mover)'는 사라지고, 남을 따라 하는 데 급급한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만 남게 된다. 이는 결국 스스로 길을 낼 능력을 퇴화시켜 도전 정신이 거세된 '눈치꾼 연구자'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정상까지 완주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떤 원자로는 1980년대부터 연구를 시작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서류 속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완주(건설)를 해봐야만 위험 구간은 어디인지, 어떤 장비가 필수적인지, 체력 안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암묵지나 위기 대응 능력, 그리고 팀 전체에 축적되는 성공의 DNA는 오직 완주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다. 성공과 실패를 막론하고 끝까지 수행해 본 경험의 축적 없이는, 경험 부족이라는 실패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우리의 연구개발 철학과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이는 곧 올라야 할 산을 제대로 정하고(전략), 과감하게 도전하며(도전), 기어코 정상에 도달하는(완주)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이 혁신의 핵심은 사람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핵심 인재를 길러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올라야 할 '보물산'을 알려주는 전략가를 키워야 한다. 이들은 기술 동향, 산업 구조와 사회적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잠재력과 우리의 기술 역량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선택과 집중'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이들이 “저 산에 우리가 찾던 금맥이 있다"라고 정확히 짚어줄 때, 우리의 노력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잡고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다음으로, 그 험준한 산을 직접 오를 용감한 개척자를 길러내야 한다. 개척자에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용기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사회적 믿음과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에서 나온다.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과감히 도전한 명예로운 실패를 격려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다음 도전을 위한 자산으로 삼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한편, 실패를 딛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이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더 큰 도전을 이끌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등반의 전 과정을 지휘하고 완주를 이끄는 시스템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이들은 전략가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자원, 그리고 개척자들을 최적으로 조합하고 전 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원정대장과 같다. 개별 연구의 성과는 훌륭하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엮어서 우리 사회와 경제가 필요로 하는 종합적인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역량과 경험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존재다. 이제 우리는 시류에 휩쓸리는 연구를 버리고, 국가 미래를 여는 연구개발로 나아가야 한다. 전략가가 방향을 잡고, 개척자는 담대하게 도전하며, 시스템 디자이너가 이들의 완주를 이끌 때, 우리는 더 이상 “이 산이 아닌가벼"라며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 산이 맞는가벼!"라는 확신과 함께 과학기술 강국의 정상에 설 수 있다.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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