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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패시브 ETF(상장지수펀드), 이런 거에 목을 맸습니까? 자본시장이 비겁해졌어요." 한국 자본시장을 개척해 온 증권업계 구루가 소주 한 잔을 앞에 놓고 한탄했다. 자산운용에 한 획을 그은 뒤 최근 은퇴해 누구보다 업계를 훤히 꿰뚫고 있을터다. 너도 나도 패시브 ETF를 선보이는 2025년, 그는 무엇을 아쉬워했을까. 공모펀드나 ETF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목받았다. 미국 채권 시장이 흔들린 여파가 한국으로 이연했다. 위기를 겪으며 개인은 본인 정보력이 기관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당신만 알고 있어' 따위 정보에 현혹돼 개별 종목에 투자했다가 낭패를 거듭하고 난 뒤다. 백전백패하느니 증권 전문가가 운용하는 펀드에 올라타자는 심리가 확산했다. 전문가가 운용하니 잘될 거란 기대감이 컸다. 돈 좀 벌어보려 매분 내가 가진 주가가 오르나 내리나 노심초사하며 눈알 빠지게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지 않아도 됐다. 대신 펀드매니저가 바빠졌다. 애널리스트를 통해 업황과 기업을 조사·분석하고, 밤을 새워 투자 전략을 수립, 타이밍에 맞춰 종목을 편/출입했다. 정보와 전략이 중요했고 펀드매니저간 경쟁도 치열했다. 매일 수익률로 평가받았다. 밤에도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2020년대 들어 액티브 ETF가 부상했다. 매니저는 펀드액의 30%내(상관계수 0.7 규제)에서 직접 주식이나 기타 자산을 선택하고 거래했다. 지수추종의 대세추종성, 매니저의 전략적 수익추구성, ETF의 투명성과 저렴한 보수 등 장점이란 장점은 모두 모았다. 지난해 초 펀드 매니저에게 굴욕적인 통계가 나왔다. 주식형 액티브펀드의 10년 누적수익률이 인덱스펀드의 절반에 그쳤다는 거다. 밤을 새워 정보를 모으고 전략을 짜고 종목을 골라 사고 팔지 않아도 수익률이 배 이상 많이 나왔다. 펀드매니저는 '당신, 일을 왜 했어'란 핀잔을 들었다. 그래 그런지 요즘 자산운용업계는 패시브 ETF가 대세다. 업체 설명만 듣고 있으면, 세상 이렇게 앉아서 돈을 버는 상품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상세 설명서를 받아 상세히 뜯어봤다. 읽어본 결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시브 ETF는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팔기만 하면 된다. 펀드 매니저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되고, 설정 이후 아무 것도 할 수도 없다.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에 불이 꺼졌다. 자산운용사에 워라밸이 찾아왔다. 달리 말해보자. '투자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만, 돈만 벌어드리겠습니다'라는 자세만 견지하면 된다. 그것이 자본시장과 증권맨의 존재이유인가? 투자로 돈을 버는 것은 결과다. 자본시장의 목적은 세상의 가치를 키워낼 기업을 골라내 육성하는 일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기업을 찾아내고 투자해 성장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수익과 가치를 이뤄내는 게 자산운용업계의 본업이다. '투자업'을 하지 않고 안정적인 수익만 쫒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모의 시장에서 신산업을 키워낸 펀드 매니저는 존경 받게 마련이다. 구루는 이를 한탄한 게 아닐까. 박상주 기자 redphoto@ekn.kr

[김성우 칼럼] K-조선에 주어진 골든타임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위원 공교롭게 우리나라 조선업에 중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조치들이 이번 달에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글로벌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를 차지하는 해운업은 물류 수요 증가로 배출 비중이 점차 확대될 것에 대비해,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IMO)를 중심으로 2050년 순배출제로라는 목표하에 (2008년 대비) 2030년까지는 20% 감축하는(2040년까지는 70%) 것을 중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지난 7일에서 11일 개최된 제83차 해양환경보호위원회에서 IMO 회원국들은 중단기 조치를 승인했고, 오는 10월 공식 채택 예정이다. 우선 중기조치로 선박연료온실가스집약도(GHG Fuel Intensity, GFI) 기준을 새롭게 도입한다. GFI는 선박연료의 단위열량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배를 움직이는데 얼마나 저탄소연료를 사용하는지를 측정하는 지표이다. 5,000톤 이상의 선박은 2028년부터 매년 강화되는 GFI를 준수해야 하고, 초과 배출량에 대해서는 그 정도에 따라 톤당 100불 혹은 380불에 달하는 개선금을(Remedial Unit) 부담하거나, 초과로 준수한 회사로부터 초과준수분을(Surplus Unit) 구매해야만 한다. 준수 목표는(Direct Compliance Target) 2008년 대비 GFI를 2028년까지 17%, 2030년까지 21%로 낮추는 것이고, 기본 목표는(Base Target) 2028년까지 4%, 2030년까지 8%로 낮추는 것이다. 가격 중심의 경제적 조치와 연료 중심의 기술적 조치를 하나의 규제프레임에 담겨 있다. 2028년 1월부터 매년 선박이 배출한 온실가스를 연료 생산·운송·연소까지 전 과정(Well-to-Wake)으로 계산해 해당 년도의 GFI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런던에서 순배출제로로 가기 위한 IMO 조치가 승인될 무렵, 대서양 반대편에서는 완전히 다른 목적의 해상 조치가 발표되었다. 지난 9일 백악관이 발표한 미국해상주도재건(Restoring America's Maritime Dominance) 행정명령의 후속조치로, 19일에는 미국무역대표부가(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USTR) 중국의 해양, 물류 및 조선 부문 지배력 강화에 대한 301조 조치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은, 미국으로 입항하는 중국 국적 선박과 중국산 선박에 수수료를 부과해 자국의 조선·해운 산업을 육성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는 10월부터 운송화물톤당 수십달러의 입항 수수료를 점진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그 밖에 자동차운반선박이나 LNG수출선박에(3년뒤시행) 대해서는 자국에서 제조한 선박을 사용하도록 촉진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단, 동급 이상의 미국산 선박을 주문하면 중국산 선박에 대한 수수료는 최대 3년 유예하는 단서도 붙였다. 이미 시장에서는 직간접적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IMO 조치 관련 LNG 운반선에 이어 무탄소연료선박의 기술 종류와 전환 속도가 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해 왔다. 기존의 LNG 이중연료 추진선이나 메타놀 추진선 발주에 추가로, 최근 암모니아 추진선이나 액화이산화탄소 운반선 등 다양한 친환경선박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암모니아 연료 비중을 2030년 8%에서 2050년 46%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기까지 했다. USTR 조치 관련 중국 조선소 대체제를 찾는 시장의 반응은 더 민첩하다. 3월말 미국 정유회사가 중국 조선소에서 만들 예정이던 액화천연가스벙커린선 주문 계약을 연기했고, 유럽 해운사는 중국 조선사 대신 국내 조선사와 20척 규모 발주를 논의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까지 있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대서양 양쪽에서 4월 중 거의 동시에 발표한 해상 조치들은 각각 목적과 내용은 다르지만 조선강국인 우리나라는 이 둘을 함께 고려해 대응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IMO의 탄소규제 강화와 USTR의 중국해상 견제로 당분간 중국 조선소를 대체하려는 발주와 친환경 선박 건·개조 수요가 동시에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IMO 조치도 3년 후부터 시행되고 미국내 조선 인프라 구축에도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골든타임에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친환경 기술을 확보하고, 그 가격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낮추어 경쟁사와의 초격차를 벌려 둘지에 K-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다. 김성우

[기자의 눈] ‘경영권 침해’ 프레임 뒤에 숨은 상법 개정의 본질

“상법 개정안 부결은 부적합하고 옳지 않아서 부결된 것이 아니라 편 가르기의 결과다. 상법 개정안은 주주들이 기업에 힘을 더 실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는 자본시장 업계 한 전문가의 말이다. 지난 17일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와 '전자주주총회 의무화'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정당의 이탈표를 끌어내기 위해 일부 조항이 삭제됐지만, 결국 재의결 정족수인 200석을 넘지 못했다. 상법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기업 이사가 충실해야 하는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범위를 넓히고, 상장 기업의 전자 주주총회 도입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당초 개정안에 담겼던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와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제외됐다. 상법 개정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으는 대목이 있다. 또한 이는 소액주주들이 하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소액주주는 회사가 잘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가 그간 거둔 이익을 배당이 아닌 연구개발(R&D)이나 새로운 투자에 쓴다고 한다면, 소액주주들의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여기서 회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소액주주와의 대립이 아니라 설득이다. 설득은 R&D와 새 투자가 회사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래서 얻는 주주 공동체의 이익은 무엇인지를 이해시켜야 얻을 수 있다. 설득이 더 어려운 것은 오히려 회사에 설득된 주주라도 회사를 상대로 고소·고발을 남발할 수 있다고 보는 기업의 시각이다. 상법 개정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주들의 고소·고발 남발이 회사 운영에 지장을 주고, 또 어떤 기업에는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액주주의 눈에서 자유로운 사주 일가 혹은 대주주의 기습적인 블록딜, 계열사끼리의 부당 내부거래, 외부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기술이 들어간 특수관계자 금전 지원 등으로 입는 회사 피해가 더 막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상법 개정에 대한 경영권 침해 프레임이 계속된다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기업과 자본시장 전체다. 대주주의 전횡, 불투명한 내부거래, 정보 비대칭은 기업 신뢰를 무너뜨린다. 주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없다면, 투자자들은 지금보다 더 한국 시장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상법 개정의 본질은 경영권을 위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시장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있다. 장하은 기자 lamen910@ekn.kr

[박영범의 세무칼럼]사이버 레커, 엑셀 방송, 사이버 도박 업체의 탈세 방법

후원을 받기 위해 BJ들은 점점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엑셀 방송, 타인의 불행이 생기면 부리나케 달려와 사실무근의 극단적인 언어폭력을 늘어놓는다는 사이버 레커, 사이버 도박 특별단속 결과 검거자 중 청소년이 절반에 가까웠다는 사이버 도박장은 유해 콘텐츠의 평가이다. 온라인을 퇴폐적 유흥문화로 물들이는 엑셀 방송은 출연 BJ들이 시청자 후원에 따라 선정적 행위 댄스와 포즈 등을 하고, 출연 BJ별 후원금 순위를 엑셀(Excel) 문서처럼 정리하여 보여주어 후원 경쟁을 유도하는 방송을 말하고, 가짜뉴스로 온라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이버 레커는 '사설 레커차'에 빗댄 신조어로, 타인의 사고 등을 자극적으로 왜곡하여 수익을 올리는 유튜버를 말한다. 이처럼 사회규범을 어지럽히고 건전한 법질서를 위배하는 유해 콘텐츠들은 온라인 생태계를 빠르게 잠식하고 자극적 콘텐츠로 단기간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면서도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을 악용해 수익 내역을 숨기고 비용을 변칙적으로 부풀려 세금을 탈세하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달 6일 유해 콘텐츠를 양산하여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고 납세의무는 회피한 탈세 혐의자 엑셀 방송 운영 BJ 등 9개, 딥페이크 악용 도박사이트 운영업자 5개, 사이버 레커 유튜버 3개 등 총 17개 업체에 대하여 세무조사 착수하여 조사 진행 중이다. 성 상품화로 1인 방송 시장을 오염시키는 엑셀 방송 운영 BJ들은 유흥업소를 연상케 하는 방송 내용으로 이른바 '사이버 룸살롱'이라 불리며 연 백억 원이 넘는 이익을 얻고 있으며, BJ에게 지급한 출연료를 사실과 달리 과다 신고하거나, 가족에게 가공 인건비를 지급하고, 고가 사치품 구매비용을 사업용 경비로 처리하는 등의 방법으로 탈세하고 있다. 해외 성인 플랫폼을 통해 개인 방송을 송출한 일부 성인 BJ들도 플랫폼으로부터 정산된 수익금을 가족 명의로 된 차명 계좌와 해외 위장 계좌로 받아서 숨겼다. 인공지능 기술(딥러닝)에 의해 실제처럼 보이도록 조작된 오디오, 사진, 비디오 등 딥페이크로 미성년자까지 유혹하는 사이버 도박사이트 운영자는 오프라인 도박판을 온라인 공간에 그대로 옮겨다 놓고, 유명인의 이미지를 도용한 딥페이크를 통해 성인은 물론 청소년까지 가리지 않고 사이버 도박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아시아·동남아 각지에 사무실을 운영하며 10만 명 이상으로부터 도박 자금을 받았으며, 이를 합법적 거래로 위장하기 위해 입․출금을 위한 '전용 앱'을 개발하고, 사회질서에 반하는 지출은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되지 않는 온라인 도박장 운영 관련 비용을 마치 기업체의 정상 사업 비용인 것처럼 꾸며 세금을 탈세하였다. 도박 자금은 여러 개의 차명계좌로 쪼개어 받고, 배우자 명의로 다수의 부동산을 취득하여 소득과 재산을 은닉하였으며, 대형 상가와 고급 승용차, 고가 시계 구입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허위·비방 콘텐츠로 피해자를 갈취하는 사이버 레커 유튜버는 유튜브 플랫폼에서 신원을 은폐한 채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타인을 비방하고 약점을 빌미로 뒷돈을 뜯어내는 등 도를 넘는 비윤리적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명예훼손이나 인격권 침해에는 아랑곳없이, 오직 금전적 이득을 위해 미확인 사실이나 개인의 사생활을 무분별하게 노출하면서도 그간 법적․도덕적 책임은 회피하고, 개인 계좌로 받은 후원금 및 광고 수익 등을 미신고한 후 이를 부동산 매입 등 재산 증식에 사용하고, 실체가 없는 외주 용역비와 임차료를 실제 지급한 것처럼 가장하거나, 다수의 고가 외제 차량을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를 업무용 차량으로 신고하는 등 거짓 비용 처리를 통해 세금을 탈세하였다. 국세청은 세무조사에서 포렌식과 금융 추적, 국가 간 정보교환, 외환 수취 자료, FIU 정보 및 수사기관의 수사자료 등 외부 정보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숨겨 놓은 수익 구조와 자금 흐름을 철저히 파헤쳐 과세한다고 한다. 세무조사 끝나기 전에 확정 전 보전 압류하여 세금을 제대로 받고, 세무조사 후에는 조세 범칙 행위가 있는 경우는 검찰에 통보하여 처벌도 받도록 할 예정이다. '일상에 만연한 범죄의 유혹', '증오와 혐오의 조장', '성 가치관의 왜곡' 등, 현대 사회의 수많은 병리적 현상은 온라인상의 유해 콘텐츠가 낳은 부작용을 국세청이 최선을 다해 막으려 한다. 박영범

[기자의 눈] 한화에어로 유상증자, 소통은 해결이 아니라 설득이다

국내 자본시장 역사상 최대 규모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상증자 과정에서 '소통'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급기야 금융감독원은 주주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지난달 20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내놓은 3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소식에 주주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유상증자로 마련한 자금이 한화그룹 승계에 활용될 것이라는 추측마저 불거지면서 한화그룹과 주주·투자자들 사이의 소통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를 확인한 금감원은 1차로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청했다. 금감원이 정정을 요구한지 나흘 만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전격적으로 보유한 ㈜한화 지분 절반을 세 아들에게 증여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회장의 발표 이후 일주일여 만에 유상증자 구조도 갑작스레 변경됐다. 기존 주주를 대상으로 3조6000억원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이 2조3000억원 주주배정과 1조3000억원 제3자 배정의 혼합 구조로 바뀐 것이다. 제3자 배정 대상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다. 돌연 진행된 지분 증여와 유상증자 축소·변경은 경영권 승계 논란과 소액주주의 반발을 의식한 대응으로 분석된다. 한화그룹은 속전속결로 시장의 우려를 털어내려 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주주들이 원한 것은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의 사용처와 그에 대한 판단 근거였지만 한화그룹은 승계 관련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집중한 탓이다. 주주들이 원한 핵심 정보가 빠진 상황에서 유상증자 계획이 크게 변경되자 오히려 혼란이 가중됐다. 이를 확인한 금감원이 재차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다면 횟수에 관계없이 정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시장과 금감원은 속전속결보다는 다소 느리더라도 확실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낸 셈이다. 위기 상황에서 소통은 단순히 속전속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시장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제 해결법을 내놓는 것 뿐 아니라 그 같은 결정을 내린 타당성을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특히 문제가 불거진 이후 해법을 내놓는 경우 더욱 설득에 집중해야 한다. 속전속결로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태도로 비춰질 경우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지고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쳐야 진정한 실력이 드러난다. 한화그룹이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진정한 소통의 실력을 발휘하길 기대해본다. 윤동 기자 dong01@ekn.kr

[EE칼럼] 차기 정부에 바란다: 에너지 정책을 국가 미래전략으로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대선을 앞두고 있다. 6월 3일, 우리는 국가 에너지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데이터센터와 전기화 수요로 전력 수요는 치솟고, 글로벌 시장에서는 RE100이 기업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됐다. 한편 핵심 우방인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내세워 화석연료 개발을 추진하고 있어, 우리가 처한 상황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지난 몇 번의 정권 교체를 거치며 에너지 정책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한 정부는 재생에너지를, 또 다른 정부는 원전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급격한 정책 전환이 에너지 산업 생태계에 가져온 혼란은 결코 작지 않다. 전력망과 발전설비는 수십조 원의 장기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인데, 5년마다 방향이 바뀌면 산업계는 장기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닌, 국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93%를 해외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에너지 안보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어떤 에너지원도 단독으로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각 에너지원의 장점을 최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원전은 안정적 전력 공급과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는 장기적 지속가능성과 탄소중립을 위한 필수 요소다. 당분간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러한 에너지 현실을 고려할 때, 차기 정부는 장기적 관점에서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차기 정부가 집중해야 할 네 가지 핵심 과제를 제안한다. 첫째, 안정적인 전력 공급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 데이터센터와 전기화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려면 송배전망 투자가 시급하다. 재생에너지는 주로 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를 수도권과 산업단지로 보내려면 거대한 송전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는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 전력망 확충에 대한 주민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철저한 환경영향평가와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수적이다. 둘째, 주민 수용성과 정의로운 전환에 주목해야 한다. 에너지 인프라는 지역 주민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에너지 개발 이익을 주민과 공유하는 '이익공유제'를 법제화하고, 석탄발전 등 전통 에너지 산업 종사자들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셋째, 청정에너지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수소, 에너지저장장치는 향후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한국은 제조·설비·엔지니어링 역량이 뛰어나지만, 재생에너지 정책 지원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실정이다. 차기 정부는 내수 시장 확대와 핵심 R&D 투자를 통해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넷째, 재원 조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며, 정부 예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린 뉴딜 채권' 발행이나 탄소세 도입 등 창의적인 재원 마련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부담 증가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에너지 컨센서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여야 정치권과 산업계, 환경단체, 학계,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상설 논의 기구를 만들어 최소 10년 이상의 장기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이 기구에서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마련하고, 국가 에너지믹스부터 법제도 개편까지 정파를 넘어선 최소한의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차기 정부는 석탄발전의 조기 퇴출과 재생에너지 비중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는 RE100을 요구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우리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체제로 나아가되, 필요한 부문에서 원전과 수소를 적절히 활용하고, 사회 갈등을 민주적 절차로 풀어가야 한다. '원전 vs 재생에너지' 구도를 넘어, 안정적 에너지 공급과 탄소중립을 동시에 구현하는 통합적 비전이 필요하다. 정치화된 논쟁을 넘어 국가 미래전략으로 에너지를 바라볼 때다. 하윤희

[기고] 디지털 에너지 시대와 Quality 4.0... 품질은 전략이다

에너지 산업이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 시대로 전환하면서, 품질의 개념 또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요구받고 있다. 이제 품질은 단순한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데이터 활용, 고객 경험, 지속 가능성, 그리고 조직의 디지털 역량 전반을 포괄하는 전략적 가치로 확장되고 있다. 'Quality 4.0'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개념으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디지털 기술을 품질관리 체계에 융합함으로써, 예측형 대응, 자율적 개선, 실시간 품질관리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사후적 품질관리에서 벗어나, 오류를 사전에 감지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능형 품질 혁신을 의미한다. 특히 에너지ICT 산업에서는 이와 같은 디지털 품질 역량이 곧 기업의 플랫폼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스마트그리드, 재생에너지 관리, 전력 계통 제어 등 모든 분야에서 정밀한 데이터 품질과 예측 기술이 요구되며, 이를 통해 사용자 경험(UX)과 ESG 관점의 품질 책임까지 실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글로벌 주요국은 이미 품질의 디지털 전환을 국가 전략으로 수용하고 있다. 미국은 '첨단 제조 파트너십(MEP)', 독일은 '하이테크 전략 2025', 일본은 'Connected Industries', 중국은 '품질강국 전략'을 통해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대기업과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면 여전히 '측정' 또는 '관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특히 중소 에너지 관련 기업들의 품질 디지털화 수준은 낮은 실정이다. 이러한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품질 역량 강화를 위한 인재 육성과 함께, 데이터 기반의 자율적 품질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품질은 더 이상 특정 부서의 몫이 아니라, 전사적 참여와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조직 문화의 결과물이다. 리더십 또한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기술과 사람을 잇는 전략적 사고를 가진 융합형 리더십이 요구되며, 이는 에너지 산업이 지속 가능한 전환을 이뤄내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디지털 에너지 시대로의 전환기 속에서 품질은 단순한 관리 항목이 아닌, 생존과 경쟁력의 핵심 축이다. 지금이야말로, 품질경영의 패러다임을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하고, 에너지 산업의 미래를 선도하기 위한 담대한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남현

[이슈&인사이트] 관세, 손자병법의 가르침

트럼프는 그의 저서 『Think Like a Champion』에서 『손자병법』을 읽고 지혜를 얻으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미국의 상호관세와 중국의 강경대응 이어지는 중국 고립전략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략과 매우 닮아있다. 트럼프는 상호관세라는 무기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휘둘렀다. 펭귄만 사는 섬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사실은 모든 나라와 싸우려 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중국 하나만을 명확히 겨냥한 전략이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를 부과하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상황 하에서 적어도 중국만은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알고, 예상했던 대로 중국이 전세계 연합의 선봉장 처럼 강하게 반발해오자 덫을 놓고 기다린 것이다. 트럼프의 전략에 걸려든 중국은 트럼프의 작전대로 보복관세를 연이어 부과했고, 그 결과 미국이 부과한 중국산 수입품 관세는 100%를 훌쩍 뛰어넘는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트럼프는 중국의 보복이 일정 수준에 이르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관세를 유예하였고, 전 세계 무역 상대국들 사이에서 중국만이 높은 관세의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다. 이는 전형적인 『손자병법』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공격하겠다는 기세를 드러내며 실제로는 중국 한 곳만을 정밀타격한 것이다. 혼비백산했던 국가들은 트럼프의 공격대상이 실제로는 중국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동시에 미국-중국의 치열한 싸움에는 뛰어들기보다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전과 실리를 챙기는 구도로 흘러가게 되었다. 트럼프의 이러한 전략적 결정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의 무역전쟁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에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경제 강국 두 나라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글로벌 공급망은 재편성되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국가들이 그 여파를 실감했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다시 한 번 중국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고, 모두가 한 발 물러나버린 평원에 미국과 중국만 남아 전면전을 앞두고 있다. 중국이 미국에 굴욕적인 협상에 나서지 않는 이상 중국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는 암울한 소식이다. 트럼프 1기 미중무역분쟁 영향으로 2017년~2018년 우리나라의 성장률은 3.2%에서 2.9%로 하락하였고 2019년에는 반도체, 전자기기, 철강, 석유화학 등을 중심으로 수출이 약 16% 감소하며 성장률은 2.2%로 떨어졌다. 당시에는 무역분쟁을 제외하면 성장세를 견고한 수준이었으나, 성장세가 잠재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제는 정말 바닥을 뚫고 내려가야하는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2차 미중무역분쟁' 반드시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미국 기업들이 관세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에 사전 주문한 물량을 대거 취소할 경우 중국 제조업체들은 생산비라도 회수하기 위해 남은 재고를 전 세계 시장에 저가로 내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저가 중국 제품의 물결은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에게는 일시적이나마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관세로 인한 물가상승 우려를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줄어들고 한은이 금리인하를 단행할 여력이 생긴다. 최근 경기둔화의 조짐이 점차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한은도 경기부양을 위한 금리인하의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은의 금리인하가 실제로 몇 개월 내에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금리인하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은 충분히 가능하다. 미국과의 내외금리차는 여전히 금융시장의 우려로 남을 수 있으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역시 트럼프 정부로부터 금리인하 요구를 받고 있으며 미국 재무부는 약(弱)달러를 원하는 상황이므로 금리인하가 환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격렬한 미중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와 같은 국가들은 중요한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는 분쟁이 심화될수록 연쇄적 충격이 가해질 수는 있지만, 반대로 이 기회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면 장기적 산업경쟁력 강화 및 시장 다변화를 통해 긍정적인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트럼프 1기의 무역분쟁 당시에도 나타났지만, 미중무역분쟁은 필연적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발생시킨다. 중국과의 경쟁관계에 있거나, 중국의 공세에 힘을 받지 못하던 산업분야에서는 이러한 분쟁상황 속에서 기회를 찾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트럼프가 손자병법을 활용하였듯이, 우리도 이를 전환점으로 기회삼아 전략과 전술을 활용하여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경제질서의 재편에 중장기적 안목으로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시간으로 24일 저녁 미국과 협상을 시작하는 우리 대표단에 기대를 걸어본다. 김수현

[박원주 칼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작년 12월 태국 방콕 비즈니스 미팅에서 있었던 일. 회의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대화하던 중 자연스레 11월 당선이 확정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걱정이 많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외교안보 정책, 우방국들을 타깃으로 하는 관세 전쟁, 기후 환경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극우적, 미국 우선주의적 접근 등... 이후의 국제 비즈니스 환경이 이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고 많은 나라들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다가 한 참석자가 한 말. “그래도 태국은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태국이 타일랜드인지 타이완인지도 구별 못할 거에요." 참석자들이 모두 웃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말에 필자의 마음이 갑갑해졌다. “한국은 다르지요. 세계적인 무역 대국이고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닿는 지점이 많잖아요. 게다가 계엄령 사태로 국가의 리더십도 부재중이고." '줄도 운'이라는 말이 있다.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타일랜드, 타이완 운운하는 말 속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이 자국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 태국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대통령이 뜬금없이 계엄사태를 일으키고, 탄핵소추에 휘말리면서 우리나라에 트럼프가 협박할만한 대화상대가 사라져 버린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물론 턱도 없는 소망이다. 리더십 공백으로 우리가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전 세계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탄핵 국면의 권한대행 체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정부는 부처 하나 하나가 자기 멋대로 국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단일체가 아니다. 끊임없는 조정과 조율, 지휘로 이해관계의 충돌을 제어하고, 국민경제 전체가 당초 목적했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리더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전 두 번의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뼈아프게 겪어 보았듯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상유지'고 '자율주행'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다. 12.3 비상계엄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우리 내수 경제는 회복의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다. 거리의 상점가에는 공실이 넘쳐나고 있다. 작년 말 이후 단 두 달 사이에 20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폐업했다는 통계까지 나오고 있다. 소비심리도 크게 위축되어 있고 기업들의 경기 전망도 최악의 수준이다. 경제성장 전망치도 하향 조정을 거듭하고 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내일 모레의 우리 경제가 더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계엄 당시 1,400원대였던 대미 달러 환율은 1,470원을 훌쩍 넘긴 이후 최근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살얼음판이다. 정치 불안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발을 빼거나 신규 투자를 주저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당장 그 투자 여부로 생사가 오가는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것이다. 일부 위정자들이 그토록 목을 매던 견고한 한미 동맹이 어디로 갔는지 미국 에너지부가 우리를 민감국가로 지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한, 미국의 관세 캠페인에서 우리를 콕 찍어서 특별하게 요구하는게 없다고 해서 우리를 봐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냥 무시할 뿐이다. 앞장서서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협상을 걸어야 할 한국정부가 부재중인 것이다.국민들간의 갈등과 분노도 치유가 어려울만큼 심각하다. 거리에서, 전철안에서, 온라인에서, 온 국민들이 연령, 지역, 성별, 종교로 분열되어 다투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런 분열을 돈벌이 기회로 삼는 유튜버들까지 횡행하는 우리 상황은 세기말 그 자체인 것 같다. 우리가 멈춰 있다고 세계도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글로벌 트랜드로부터 역주행한다고 해서 전 세계 역사의 흐름이 함께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계엄이라는 어마어마한 충격 속에서 우리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전 세계는 차근차근 다음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트럼프가 기후 협약을 파기하고, 화석연료 시대의 재래를 설파하고 있지만 그는 미래를 여는 선지자도 예언가도 아니다. 그냥 과거의 프레임에 갇힌 노쇠한 정치인일 뿐이다. 트럼프가 없을 10년후의 세상에선 친환경, Net-Zero, CBAM, RE100 같은 글로벌 환경 규제가 우리 기업들의 시장 성과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제자리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 국민의 갈등을 조장하고 악용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은 이들, 그것으로도 부족해 국가의 운명을 송두리째 위난에 빠뜨린 이들, 피와 땀으로 일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오염시킨 이들, 국민경제와 서민들의 삶을 위기에 빠뜨린 이들. 그들에게 언젠가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시시비비를 연연할 때가 아니다. 상황을 수습하고 리더십을 다시 세워서 위기를 탈출하는 것이 더 급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이끌어 줄 이가 없다면, 국민 모두가 뜻을 모으면 된다. 과거 일본 식민통치기, 일제의 경제적 폭압 앞에서 민족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언론과 국민들이 힘을 모았던 물산장려운동처럼, 우리는 우리를 지켜줄 정부가 없어도 스스로 공동체의 살길을 찾아나갔던 경험을 갖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분열을 벗어나 번영의 역사를 되찾는 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박원주

[기자의 눈] 나으리,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막내기자 시절 작성했던 칼럼을 뒤적이다 '우문현답'이란 단어가 훅 들어왔다.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현명한 답(愚問賢答)'이란 뜻을 지닌 성어를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사행시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는 국민 여론을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겠단 의지를 함축한다. 그날따라 유독 네 글자가 눈에 밟힌 건 최근 두 차례에 걸친 국회의 기업 방문 행보에서 느꼈을 산업계의 실망감과 무관치 않다. 현장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의례적으로 쓰이는 역두문자어조차 공염불이 될 수 있단 우려가 적잖아서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는 인공지능(AI) 기술 현주소를 살펴보겠다며 올 상반기 네이버·LG유플러스를 잇따라 찾았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 파동 이후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 요구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그동안 밑그림에 그쳤던 AI가 국가 의제로 부상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골든타임'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인원 구성을 본 후 반응은 다시 냉담해졌다. 현장을 찾은 과방위원의 절반 이상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던 탓이다. 물론 조국혁신당·국민의힘 위원들도 각 1명씩 참석했지만 '보여주기식'이란 비판을 피할 순 없었다. 이를 인지했는지 한 위원은 최근 “기업을 직접 찾는 것도 좋겠지만, 줌(ZOOM)으로 진행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기업 입장에선 현장 세팅을 위해 전사 인력이 동원돼 번거롭고, 과방위 역시 모든 구성원의 일정이 빈 시간대를 맞추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업무효율과 실용성을 높이는 측면에선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진정성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진 의문이다. 기술 개발 여건이나 발전 속도는 서비스를 직접 써 봐야, 업계 애로사항은 현장 종사자들과 눈을 마주보고 소통해야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향후 제정될 법·제도에 대한 신뢰·정당성 확보로 귀결된다. 그래서일까. 과방위는 기업 방문 때마다 전방위 지원사격에 나서겠다고 강조했지만 산업 진흥 전략 방향성은 안갯속이다.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약 경쟁이 한창인 정치권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여야 예비후보들이 표심잡기를 위해 저마다 AI를 1호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로드맵·투자 방식 등은 구체화되지 않아 내실이 부족하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많은 기업이 정치·행정가의 갑작스러운 발걸음을 반기는 건 업계 목소리를 한 마디라도 더 경청하고, 시의적절한 정책을 마련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미 두세 걸음 늦은 AI 산업의 발전을 앞당길 근본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4년 전 비슷한 주제로 쓴 막내기자의 칼럼은 이렇게 끝맺음한다. “공약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계도를 촘촘히 짜기 위해 필요한 걸 찾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답은 현장에 있다." 이태민 기자 etm@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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