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의 가치는 오랫동안 '숫자'로 평가돼 왔다. 몇 년 숙성되었는 지에 따라 위스키의 품질과 가격이 결정된 것이었다. 지난 2010년 한 글로벌 위스키기업이 'The Age Matters(숙성 연수가 중요하다)'라는 소비자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이 같은 인식이 더욱 공고해졌다. 그 시절, 위스키병 라벨에 적힌 12년, 18년, 21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희소성'과 '품질'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위스키 시장에 조용한 반란이 시작됐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중심으로 '숫자'가 아닌 '캐스크(오크통)'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위스키 원액이 어떤 오크통에서 숙성되었는 지, 그 오크통에 이전에 어떤 술이 담겨 있었는 지가 '위스키의 개성'을 좌우하는 요소로 떠오른 것이다. 버번, 쉐리, 와인, 럼 캐스크 등 다양한 캐스크 이력은 위스키의 향과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고, 그 영향으로 소비자들은 새로운 선택 기준을 갖게 되었다. '몇 년 숙성'이라는 단일한 잣대가 더이상 위스키를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게 된 셈이다. 이처럼 '숙성 연수'에서 '숙성 캐스크'로 바뀐 패러다임 전환은 단순한 마케팅 변화가 아니다. 위스키가 시간의 길이만으로 평가되는 시대에서, 재료와 방식, 철학이 함께 고려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브룩라디(Bruichladdich) 증류소와 그 부활을 이끈 마크 레이니어(Mark Reynier)라는 인물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와인 캐스크 숙성'이었다. 당시 브룩라디는 고급 버번 캐스크를 대량 구매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고, 레이니어는 자신의 와인업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프랑스 유명 와이너리에서 사용한 캐스크를 들여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된 위스키는 시장에서 신선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2009년 샤토 라피트, 마고, 디켐 등 프랑스 최고 와이너리의 캐스크로 숙성한 'First Growth' 시리즈를 선보이며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아일라 위스키 특유의 피트(peat, 이탄) 향을 극대화한 초고도 훈연 제품 역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마크 레이니어가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단순한 캐스크의 변화가 아니었다. 와인산업에서 익숙한 '테루아(terroir)'의 개념을 위스키에 접목하고자 했다. 위스키의 원재료인 보리를 '어디서, 어떻게, 누가' 재배했는 지에 따라 제품의 풍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철학이었다. 레이니어는 유기농 보리, 아일라 섬에서 재배한 보리, 영국 전통품종인 Bere Barley 등으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위스키의 '뿌리'를 탐구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원료 실험이 아니라 위스키가 하나의 농산물로서 갖는 정체성과 철학을 되묻는 시도였다. 2012년 브룩라디는 대기업에 인수됐고, 레이니어도 회사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아일랜드 워터포드에 '워터포드 증류소(Waterford Distillery)'를 설립하고, '밭 단위 위스키'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단일 농장, 단일 품종, 단일 토양의 보리로 위스키를 증류하고 이 차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시도였다. 부르고뉴 와인의 '클리마'(Climat, 미세 기후·토양·지형 조건이 고유하게 결합된 포도밭 구획) 개념을 위스키에 이식한 셈이다. 레이니어가 위스키 산업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의미 있는 울림을 지닌다. 위스키는 단지 몇 년을 숙성했는가를 넘어 어떤 철학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가를 소비자에게 묻고 있다. '숙성 연수'에서 '캐스크'를 거쳐 '테루아'로, 위스키는 계속해 진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단지 술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하나의 맛으로 응축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한 병의 위스키를 마시며 그 안에 담긴 '시간'을 넘어서 '맥락'을 음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맥락이야말로 앞으로 위스키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