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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소상공인, 내수둔화 시대의 생존 해법은

내수둔화와 비용상승이 겹친 지금, 많은 소상공인들은 디지털 전환과 AI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지금 당장 내 가게와 무슨 상관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임대료·인건비·에너지요금·플랫폼 수수료 등 눈앞의 비용에 시선이 쏠린다. 그러나 디지털전환과 AI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비용을 낮추고, 매출을 키우며, 리스크를 줄이고, 사람의 역량을 높이는 실전 도구다. 아래에서는 소상공인이 마주한 네 가지 과제(비용·매출·리스크·사람)를 중심으로 디지털전환·AI의 역할을 짚어본다. 첫째, 운영 효율로 비용을 낮춘다. 판매·날씨·지역행사 데이터를 반영해 발주·재고(식당·마트) / 소모품·약제(미용실) 수요를 예측하면 과잉재고·품절을 동시에 줄일 수 있다. 전단·배너·메뉴판·서비스안내판 시안은 AI 초안에 사진과 가격만 교체해 제작 시간을 단축한다. 에너지 비용이 부담이면 피크 시간대에 맞춰 조리·조명·냉난방(식당·마트), 드라이·열기기 사용(미용실) 스케줄을 표준화하고, 장비 매뉴얼의 절감 팁을 추출해 루틴에 반영한다. 둘째, 수요창출로 매출을 키운다. 상품·메뉴·시술 소개 페이지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짧게 비교 실험한 뒤, 클릭·예약·구매 전환이 높은 문구를 자주 쓰는 템플릿으로 고정한다. 리뷰를 요약해 핵심 키워드를 뽑고, 이를 배달앱·지도·인스타·네이버 등 채널 검색 노출에 반영한다 셋째, 선제 대응으로 리스크를 줄인다. 매출 급락, 회전율 악화, 불만 급증 같은 이상 신호를 자동으로 감지하고, 무엇을 할지·누가 맡을지·언제까지 끝낼지를 추천한다. 예를 들어 재고경보가 발생하면 대체품목을 제안하고, 이어서 동네마트는 가격과 진열을 조정하고, 식당은 세트·메뉴 구성을 손보고, 미용실은 예약 슬롯과 동선을 조정하는 식으로 작은 규칙을 연쇄적으로 적용하면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넷째, 사람의 역량을 키워 시간을 절약한다. AI가 레시피·시술가이드·장비매뉴얼을 읽어 절차, 주의점, 실수 Top3를 쉬운 언어로 제공하면 신입도 빨리 배우고 덜 실수한다. 오픈/클로즈 체크리스트, 위생·안전 점검표를 표준화하면 교대 시 품질이 흔들리지 않는다. 채용이 어려운 시대, 교육 속도와 현장 적응력이 곧 경쟁력이다. 이제 업종별로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인 '현장형' 예를 들어보자. 식당의 경우 날씨·요일 기반으로 식재료 수요를 예측하고, 품절시 대체 메뉴를 안내한다. 점심/저녁도 차등 세트를 자동 제안한다. 리뷰 키워드(“따뜻함", “바삭함")를 메뉴설명·간판카피에 즉시 반영한다. 미용실의 경우 사전상담 챗봇으로 얼굴형 및 모발 상태에 맞춘 스타일을 3가지 제시한다. 노쇼 예방 리마인드와 시술 후 홈케어 가이드를 자동발송한다. 후기 요약으로 디자이너별 강점을 도출한다. 동네마트는 유통기한 임박 상품에 대해 자동 할인 라벨과 그 재료로 만드는 3분 레시피 카드를 생성한다. 품절 시 대체상품 추천으로 매출·마진을 동시에 방어한다. 공방·크래프트는 스토리텔링, 네이밍과 다국어 상세페이지로 해외 마켓 진입 장벽을 낮춘다. 기억해야 할 점은, 소상공인의 디지털전환은 'IT 프로젝트'가 아니라 '경영 습관의 업데이트'라는 사실이다. 경영지표를 보고, 루틴으로 붙잡고, 순간을 설계하고, 신뢰로 지키면 매출·마진·충성도를 동시에 올릴 수 있다. 오늘의 선택은 간단하다. “고객 경험을 표준화하라." 그 순간, 식당도 미용실도 동네 마트도 가격 프레임에서 내려와 경험 프레임으로 갈아탄다. 그리고 그 프레임 위에서 AI는 작은 자동화의 연쇄로 매일 묵묵히 성과를 쌓는다. 손님은 최저가 대신 '늘 같은 품질'이라는 안심을 기억한다. 그 기억이 충성도가 되고, 충성도가 내일의 매출이 된다. 가격이 아니라 경험으로 기억되는 가게가 이긴다. 박주영

[기자의 눈] 부동산정책 성공, 국토균형발전에 달렸다

정부가 지난 9·7 대책을 통해 전국에 주택 135만호를 공급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집값을 잡는데 실패했다. 시장에 진짜 주택 공급이 이뤄질 것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대규모 주택 공급 정책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시행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처럼 계획경제 하에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주택 공급책을 수행하기엔 현재 대한민국은 민간 자본의 지배력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일단 소비자들부터 정부가 짓는 집이 아닌 민간 건설사가 짓는 집을 원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을 만족시킬 수 없다. 결국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이상적인 대규모 공급책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부동산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른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국토균형발전이다. 물론 우리나라 모든 재원과 인프라가 서울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당장 지방을 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현 정부가 주요 국정과제로 선정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이다. 정부가 행정부 대부분을 세종시로 보냈지만 여전히 대통령이 서울에 상주하고 국회가 여의도, 사법부가 서초동에 있어 행정수도 이전 효과가 미미한 상황이다. 또 행정부가 세종에 내려갔지만 여전히 행정부 수반과 주요 정부 기관은 서울에 있어 수많은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을 왕복하고 있다. 가족들은 서울에 거주하고 공무원만 세종과 서울을 오가는 꼴이 되면서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효과가 감소됐다. 공무원 가족이 서울에 계속 거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교육' 문제다. 직장은 멀더라도 부모가 좀 고생하고 말지, 자녀 교육은 서울에서 시키겠다는 것이다. 공기업 대부분이 지방으로 이전했지만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여전한 것도 결국 부모는 얼마든지 직장이 멀어도 이를 감수하고, 자녀 교육은 서울에서 시키겠다는 '맹모민국' 마인드를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나라 교육시장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명문대, 그 중에서도 국립 교육기관인 서울대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서울대와 같은 입시 서열 최상위 대학이 전국 지방 각지에 10곳이 생기고, 입학 시 해당 지역 학생에게 메리트를 제공한다면 가족 단위로 이주하는 이들이 상당히 생길 것이다. 이렇게 거주 수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 현 부동산 시장의 근본 문제인 서울 주요 지역에 치중된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해소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교육부가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을 골자로 한 '국가균형성장을 위한 지방대학 육성방향(안)'을 12월에 공개할 예정이다. 내달 발표될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의 해결점이 보일 것이다. 임진영 기자 ijy@ekn.kr

[이슈&인사이트] 한·중 협력의 패러다임 전환 모색

한중 수교 후 우리나라 기업들은 국내 사양산업을 중심으로 중국에 적극 진출하였다. 2001년 중국의 t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에는 대기업도 중국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였다. 업종별로 희비가 있지만, 중국에서 우리나라 기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은 초기에는 중국을 생산기지로 활용하여 제조에 집중하였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독자 법인으로 진출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중국 시장이 거대해지고 마케팅이 중요해지면서 중국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를 모색하는 가운데, 합자 법인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중국 로컬 기업의 경쟁력이 급상승하면서 외자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대거 밀려나고 있다. 독자 법인은 물론이고 베이징현대와 같은 합자 법인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계 기업뿐 아니라 일본계, 독일계, 미국계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투자는 급감하고 오히려 매각 등 투자 회수가 확대되고 있다. 투자가 위축되면서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은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오히려 감소한 반면, 대중국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여 2023년부터는 대중국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하였다. 중국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던 품목이 공급과잉으로 전환하면서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 여지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 해외로 덤핑 수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중국의 경쟁력은 단순히 가격 우위에만 있지 않고 기술력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10월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서 국내 제조 기업 57%가 중국 기술력이 우리보다 앞서거나 대등하다고 응답하였다. 우리나라의 먹거리로 장기간 기술 투자를 한 전기차 및 배터리, 디스플레이, 태양광, 풍력 등 여러 업종이 단기간에 중국에 따라잡히거나 추월당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중국이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는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주행, AI 등의 산업도 적지 않다. 전자상거래(알리바바, 테무 등), 게임(텐센트), 숏폼(틱톡) 등 IT 플러스 산업에서도 중국 기업은 자국의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필자는 지난 8월 휴머노이드 로봇 분야에서 유명한 항저우 6소룡(小龍)이라 불리는 기업을 방문하였다. 당시 DEEP Robotics라는 기업 관계자는 현대차가 인수한 보스턴 다이너믹스의 기술을 100이라 한다면, 자사의 기술은 95 정도이고 가격은 10분의 1 수준이라 하였다. 중국 기업은 기술력이 글로벌 최고 기업에 조금 못 미치더라도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 기업인 BYD가 테슬라를 넘어 세계 1위 전기차 판매량을 기록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이 미래 산업기술을 개발하면 중국이 단기간에 추월하는 리스크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중국의 유망 기업을 미리 발굴하여 지분을 매입함으로써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알리바바가 공룡기업으로 성장할 것을 예상하고 창업 아이디어 수준에 불과한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는 SK(주)가 중국 물류회사인 ESR의 지분을 인수한 후 상장 후에 매각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 금융 부문에서 하나은행의 지린(吉林)은행 지분 인수, DB손보의 안청(安城)손보 지분 인수 등을 우수 사례로 들 수 있다. 중국을 앞서가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유망한 중국 기업을 발굴하여 사전 투자하는 전략적 투자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기보

[기고] IAEA, “후쿠시마 처리수, 국제 기준 충족”… 2년간 방류에도

일본 정부가 2023년 8월에 시작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의 ALPS 처리수 방류 작업은 올해 9월까지 지난 2년여 간 총 15회에 걸쳐 진행됐다. 처리수는 매회 방류 전 처리수 내 방사능 수치를 철저히 검사한 뒤 약 19일에 걸쳐 방류된다. 모든 처리수 방류 과정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며, 방사능 수치는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특히 처리수 내 삼중수소 농도는 리터당 1,500베크렐(Bq/l) 미만으로 희석한 후 방류되는데, 이는 세계보건기구(WHO) 음용수 기준치의 1/7 수준으로 매우 보수적인 수준이다. 이러한 처리수 방류 현황은 도쿄전력이 운영 중인 '처리수 포털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원자력 이용국에 자문과 독립적 평가를 제공하고 있다. IAEA는 모든 방류 과정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시료 채취와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15차 처리수 방류 이후 발표된 IAEA의 보도자료에서도 처리수의 삼중수소 농도가 기준치보다 훨씬 낮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은 독립적 샘플링의 분석 결과는 IAEA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IAEA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ALPS 처리수 방류가 국제 안전 기준에 부합하며, 인체와 환경에 미치는 방사선학적 영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과 다른 국제기구들도 별도로 샘플을 채취 및 분석한 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인근 해역 모니터링 역시 일본 환경성, 원자력규제위원회(NRA), 일본 수산청, 후쿠시마현, 도쿄전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 수산청은 방류 지역 주변 몇 킬로미터 내에서 잡힌 어류를 직접 검사해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해당 결과는 일본 수산청 공식 홈페이지(https://www.jfa.maff.go.jp/e/inspection/)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으며, 방사능 기준치 이하임이 확인된다. 지난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지금까지 20만 마리가 넘는 어류 샘플이 검사됐고, 지난해에만 1만 3천여 건이 분석됐지만, 일본 정부가 정한 보수적 기준치(킬로그램당 100베크렐, 100 Bq/kg)를 초과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이러한 일본 수산물은 현재 일본 내에서 방사능 관련 제한 없이 정상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일본의 각 지방자치단체도 어류 방사능 검사를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에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수산시장을 방문해 어류가 해부되어 방사능 검사를 받는 과정을 직접 지켜본 바 있다. 모든 검사 결과는 '불검출'이었으며, 필자는 그 자리에서 맛있는 생선을 먹을 수 있었다. 후쿠시마 처리수 방류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국민들도 처리수 방류가 한국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며, 일본산 수산물이 안전하다는 점을 알고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처리수 방류는 일본은 물론 주변 지역 어디에도 사람이나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토니 어윈 호주국립대학교 명예 부교수 외부기고자

[김한성의 AI시대] AI 시대의 언어, 명령에서 협력으로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5년의 인공지능은 단순히 더 똑똑해진 것이 아니다. 이제 AI는 스스로 사고하고, 계획하며, 협력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오픈AI의 최신 에이전트는 짧은 요청 한 줄만으로도 복잡한 절차를 설계하고 실행한다. 클로드는 여러 도구를 동시에 조작하며 사람 대신 업무를 완수한다. 구글의 제미나이는 여러 AI가 함께 일하는 멀티에이전트 협력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은 이러한 Agentic AI가 기업 효율을 약 30% 높여, 2024년 51억 달러에서 2030년 471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 전망한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가상 동료(Virtual Colleague)시대의 개막"이라 부른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기술이 아니다. AI의 자율성이 커질수록, 인간의 언어가 바뀌고 있다. 명령의 언어가 사라지고, 협력의 언어가 등장한다. Agentic AI는 목표를 인식하고 스스로 실행하는 인공지능이다. 과거의 AI가 질문에 답하는 도구였다면, 지금의 AI는 함께 판단하고 행동하는 동료적 지성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정확한 지시문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 형식으로 써라", “이 조건을 따라라"는 식의 명령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의 AI는 명령이 아니라 목적을 이해한다. “함께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하자." 이 한 문장에 AI는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맡고, 인간은 전략을 결정하며, 둘은 체크포인트를 통해 결과를 함께 검토한다. AI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 상황을 예로 들여다 보자. 글로벌 자산운용업을 하는 A사는 다음의 방식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한다. “위험 대비 수익률을 최적화하자"는 요청에 AI는 수천 개 자산의 상관관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여러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한다. 인간 펀드매니저는 AI가 제시한 옵션들을 검토하며 시장 심리와 지정학적 리스크를 고려해 최종 전략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AI에게 묻는다. “이 전략의 취약점은 무엇인가?" AI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수행하고, 인간은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략을 미세 조정한다. 명령과 응답의 구조가 아니라, 대화와 해석의 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롬프트가 기술을 넘어 사고의 언어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철학자 오스틴은 말했다. “말하는 것이 곧 행동이다." Agentic AI 시대의 프롬프트는 이 문장을 현실로 만든다. “시장 분석을 설계하자." 이 말이 발화되는 순간, AI는 데이터를 모으고, 구조를 설계한다.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행위로 바뀌었다. AI의 자율성은 효율과 창의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긴장을 낳는다. 첫째, 자율성과 통제의 긴장— AI는 스스로 판단하지만, 그 과정은 인간에게 투명하지 않다. 둘째, 명확성과 유연성의 긴장— 명령형 프롬프트는 재현 가능하지만 창의성을 잃고, 에이전틱 프롬프트는 창의적이지만 예측하기 어렵다. 셋째, 전문성과 보편성의 균형— 모든 이가 AI와 협력해야 하는 시대에, 그 언어는 소수 전문가의 기술이 아니라 모두의 문해력이 되어야 한다. Agentic AI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인식이다. 최신 모델은 이미 자기 검증과 동적 역할 전환이 가능하다. 문제는 인간의 인식이 여전히 'AI는 명령받는 기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기술의 한계보다 사고의 한계가 더 크다. 따라서 협력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명령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동안 인간은 그 의미를 해석하고, AI가 실행하는 동안 인간은 방향을 조율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분업이 아니라 공동 해석의 과정,즉 인간과 기계가 함께 의미를 생성하는 세미오시스(semiosis)다. AI가 실행을 맡는 동안 인간은 목표를 설계하고, 사회적 맥락을 해석하며, 결과의 의미를 판단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 AI의 시대에 인간의 지성은 더 깊이 있는 사유로 진화해야 한다. AI가 자율적일수록 인간의 언어는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AI가 논리적으로 완벽해질수록 인간은 더 깊은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Agentic AI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묻는다.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시킬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사고할지를 배워야 한다. 협력이란 서로의 강점을 조율하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언어는 단순한 지시가 아닌 약속과 책임의 도구로 작동한다. 이 변화는 산업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학교는 AI와의 협력으로 새로운 문해력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의료기관은 AI와 협진을 통해 진단의 질을 높인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정책 수립 과정에 AI를 참여시켜 보다 투명하고 시민 친화적인 행정 구조를 설계한다. AI와 인간의 협력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신뢰의 실험이 되고 있다. AI의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닮아갈수록, 인간의 언어도 더 깊은 사유의 윤리를 요구받는다. AI는 정답을 제시하지만, 가치의 방향은 여전히 인간이 정한다. AI의 언어가 효율의 언어라면, 인간의 언어는 의미의 언어다. 이 둘이 만나야 기술은 문명이 된다. Agentic AI의 시대는 기술보다 언어의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AI는 이미 자율적 에이전트로 진화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명령의 언어를 버리고, 협력의 언어를 배우려는 의지 — 그것이 지속 가능한 AI 생태계의 출발점이다. AI는 이미 준비되었다. 이제 언어가 인간을 시험한다. 협력의 언어를 익힌 사회만이 AI와 공존하며 진보할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도구에 맞는 언어를 만들어왔다. 활판 인쇄가 문학을, 인터넷이 소통을 바꾸었듯, AI는 이제 사고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 프롬프트는 더 이상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과 다시 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문명 언어다. 김한성

[데스크 칼럼] 모니터 속 AI만 버블이다

'인공지능(AI) 버블론'이 국내외 증시를 강타했다. 코스피 지수를 4000까지 끌어올렸던 큰 축이 AI 반도체 산업이었으니, AI에 대한 흥분이 잦아들자 반도체 기업 주가가 급락, 코스피 지수마저 크게 흔들렸다. 빌 게이츠는 “AI 붐은 닷컴 버블과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예일 경영대학원은 벤처캐피털 투자의 70%가 AI 스타트업으로 몰리고 있으며 “패자의 손실은 상당할 것"이라 분석했다. IMF와 영란은행은 지난 10월 “투자자 입맛이 틀어지면 글로벌 주식시장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과연 AI 버블이 터진 것인가. 과거 IT 버블에서 답을 찾아보자. 2000년 3월 10일, 나스닥 지수는 5048포인트를 기록했다. 2년 7개월 후 같은 지수는 1114포인트로 추락했다. 78%의 가치 증발. 5조 달러가 사라졌다. IT버블의 교훈은 명료했다. '.com' 접미사만으로 기업가치가 치솟던 시절, 수백 개 기업이 실적 없이 상장했다. 그러나 Pets.com은 상장 9개월 만에 파산했고, 2000년 슈퍼볼에 광고를 집행한 17개 닷컴 기업 대부분은 2년 내 소멸했다. 거대한 마케팅 비용을 쓰며 손해를 감수하고 시장점유율을 쫓던 비즈니스 모델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현재 IT를 버블이라 칭하는 사람은 없다. 인터넷은 살아남았고 버블을 견딘 IT 기업들은 오히려 지구의 산업과 증시를 이끌고 있다. 결정적 전환점은 '실제 산업으로의 확산'이었다. 구글 애드워즈는 2000년 출시돼 광고 산업을 재편했다. 검색 광고 시장은 2005년 100억 달러에서 2024년 2800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전자상거래는 2000년 270억 달러에서 2024년 1조 1000억 달러로 40배 증가했다. 마케팅과 소매라는 명확한 수익 모델이 기술을 구했다. IT는 측정 가능했고, 수익화가 가능했다. 2025년 AI를 향한 자본시장을 보자. 엔비디아는 2년간 1150% 상승했고, AI 주식은 S&P 500 수익의 75%, 이익 성장의 80%를 차지한다. 빅테크의 AI 인프라 지출은 2025년 2분기에만 950억 달러를 넘어섰다. 아마존의 연간 자본 지출은 1180억 달러를 상회한다. 과거 IT 버블 직전 닷컴 기업에 자본이 쏠리던 그 당시 모습이다. 현재 시장 흐름의 특징은, 자본이 칩과 데이터센터로만 흐른다는 점이다. 순환 투자의 미로가 형성됐다. 오픈AI는 AMD 지분 10%를 취득했고, 엔비디아는 오픈AI에 1000억 달러를 투자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 대주주이자 엔비디아 매출의 20%를 차지한다. 오픈AI는 오라클과 5년간 3000억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연간 600억 달러다. 그런데 오픈AI의 2025년 매출 추정치는 130억 달러에 불과하다. 여전히 적자다. 돈은 순환하지만, 수익은 없다. 그래서 AI 버블론이 나왔다. 결정적으로 '실제 산업 확산'이 더딘 것이 문제다. 맥킨지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AI 에이전트를 확대 배치한 기업은 23%에 불과하다. 제조업 AI 도입률이 77%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예측 정비나 품질 관리 개선 같은 내부 효율화다. 혁명을 기대했건만 개선에 불과했단 이야기다. 협동 로봇 시장은 2024년 약 10억 달러로, 전체 AI 시장 1840억 달러의 1%도 안 된다. 공장 자동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서비스 혁신도 마찬가지다. ChatGPT는 그림도 그리고, 동영상도 만들고, 보고서도 잘 쓴다. 하지만 모니터 안에서만 인상적이다. 아직 가상세계인거다. 산업은 리얼월드에서 소비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기상천외한 기술이나 화려한 논문은 연구자 외의 인류에게 그다지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이나 잘 조합한 보고서는 찰나의 흥미에 지나지 않는다. AI로 재화의 가격은 떨어지고 품질은 올라가고, 노동자의 여가 시간과 소득이 늘어나는 등 인류의 행복이 비가역적으로 증대되어야 AI가 또 하나의 '산업 혁명'이 된다. AI 버블론은 칩 양산과 데이터센터 같은 AI 기초 기업에 대한 자본 집중이 한도에 닿았다는 의미다. 이제는 AI가 인간의 실제 삶으로 확산하도록 자본 흐름이 전환될 때다. 엔비디아가 아니라 GPU의 결과물을 리얼월드에 응용하는 기업을 살펴볼 시점이다. 박상주 기자 redphoto@ekn.kr

[기자의 눈] 오너의 ‘개인은행’이 된 비상장사

“상장사 오너에게 비상장사는 개인을 위한 작은 은행에 가깝다." 수많은 경영권 분쟁을 다뤄온 한 법조인의 말이다. 비상장사가 오너 일가의 '사금고(私金庫)'로 전락하는 현실을 압축한 표현이다. 특히 코스닥 시장처럼 지배구조 감시가 느슨한 곳에서는 이런 구조가 더 깊게 뿌리내려 있다. 수법은 단순하다. 오너는 자신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비상장사에 배우자나 자녀를 대표이사·사내이사로 앉힌다. 이들은 실제 업무에 관여하지 않지만, 매달 급여를 받아간다. 외부에서는 합법적 급여로 보이지만, 실상은 회사 돈을 가족에게 이전하는 통로다. 세무상 손금처리로 위장된 사익편취의 한 형태다. 또 다른 방식은 '자금 순환'이다. 급전이 필요할 때 분기 초 비상장사 자금을 끌어다 쓰고, 분기 말 재무제표 결산 직전에 다시 넣는다. 2~3개월간 오너의 자금창구처럼 이용되는 셈이다. 겉보기엔 문제없지만, 만약 돌려막기에 실패하면 부실로 전이되고 급하게 채권채무로 돌려 재무상태를 꾸민다. 더 심한 경우엔 그룹 총수의 개인 채무 상환에까지 비상장사 자금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런 비상장사는 대부분 상장사의 출자금으로 세워진다. 결국 상장사의 돈이 오너 개인의 현금흐름으로 흘러드는 구조다. 비상장사가 사금고로 변질되는 순간, 피해는 상장사로 전이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주주의 몫이 된다. 문제는 이런 행위가 '합법의 외피'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내부거래 신고 기준(100억원)에 미치지 못하면 공시 의무가 없다. 사실상 시장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구조다. 그 틈을 이용해 수년간 반복적으로 '돈 돌리기'가 이뤄진다. 거래 상대방이 계열 비상장사라면, 외부 감사도 실질 내용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감시 시스템의 사각지대는 결국 제도 미비에서 비롯된다. 오너 일가가 이사로 이름을 올릴 때, 실제 근무나 경영 참여 여부를 검증하는 절차는 없다. 등기이사로만 올라 있으면 세법상 급여 지급도 가능한 구조다. 근로제공이 없거나, 명목상 이사에게 급여를 지급하면 '인건비 손금산입 불가'하지만, 현실적으로 근무 실태를 입증·조사하는 절차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이 틈새를 악용해 세금 절감과 자금 유출을 병행하는 '가족회사식 경영'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코스피는 '오천피' 시대를 논하지만, 코스닥은 여전히 외면받는다. 기업 가치가 저평가되고, 투자심리가 위축된 배경에는 이런 지배구조 리스크가 깔려 있다. 투명한 회계와 책임경영 없이 시장 신뢰는 회복될 수 없다. 코스닥이 성장의 무대가 되려면, 이런 사금고식 경영부터 바로잡는 것이 출발점이다. 감사 강화와 내부통제 실질화, 그리고 주주가 지켜보는 시장 문화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장하은 기자 lamen910@ekn.kr

[기자의 눈] 방산 수출 확대, 수은법 개정에 그쳐선 안 된다

지난해 2월 말, 국회는 한국수출입은행(수은)의 법정 자본금 한도를 기존 15조원에서 25조원으로 증액하는 수출입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30조원 규모의 폴란드 2차 방산 수출 계약이 금융 지원 한도에 막혀 좌초될 수 있다는 업계의 절박한 호소가 6개월 만에 수용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K-방산의 가장 큰 장애물이 제거된 듯 보이지만 이는 '응급처방'일뿐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K-방산이 진정한 '세계 4대 강국' 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수은법 개정 너머의 구조적 문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특정국가에 대한 신용공여 한도를 '자기자본의 40%'로 제한한 핵심 규정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10조원 증액은 또 다른 리스크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K-방산이 제2의 폴란드급 수주에 성공하면 K-방산은 또다시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또한 이 10조원은 즉각 활용 가능한 실탄이 아니라 정부가 예산으로 채워 넣어야 할 '그릇'을 늘린 것뿐이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신임 국방부 장관이 “금융 조건이 수용 가능하길 바란다"고 압박했듯 K-방산의 금융 지원 역량 한계가 전 세계에 노출됐고, 향후 협상 비용만 영구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핵심부품의 해외 의존도는 가장 큰 문제다. K-방산의 대표 상품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K-9 자주포는 오랜 기간 엔진과 변속기(파워팩)를 독일산에 의존해 왔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의 수출 허가 없이는 우리가 수주한 물량도 팔지 못하는 기술종속 상태에 놓였었다. 최근에야 엔진 국산화에 성공하며 한숨을 돌렸지만 현대로템 K-2 전차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 등 여전히 많은 주력무기체계가 핵심부품 해외 의존도라는 아킬레스건을 안고 있다. '폴란드 원 툴'이라는 심각한 편중 현상도 해소해야 한다. 2020년부터 2024년 사이 K-방산 수출 물량의 46%가 폴란드 단 한 국가에 집중됐다. 이는 K-방산 전체의 지속 가능성이 폴란드의 정치·경제 상황에 좌우된다는 의미다. 실제 2023년 폴란드 정권 교체 후 계약 재검토 가능성이 거론되며 업계 전체가 흔들렸다. 중동·미주 등 시장 다변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정부의 역할 재정립도 시급하다. 수출 규모가 커지며 기업 간 각개전투나 갈등이 발생해도 방위사업청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조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미국의 경우 대외 군사 판매(FMS)를 통해 정부가 계약을 보증하고, 이스라엘은 SIBAT을 통해 마케팅과 G2G 계약을 직접 지원한다. 이처럼 우리 정부도 K-방산 '수출 전담 기구'로서 전면에 나서야 한다. 수은법 개정은 K-방산이 넘어야 할 수많은 허들 중 첫 번째를 넘은 것에 불과하다. '금융·기술·시장·거버넌스' 네 바퀴가 함께 굴러가지 않는 한 'K-방산 르네상스'는 모래성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인사이트] 부동산 담보의 그늘을 넘어: 은행의 사업전환이 여는 신성장의 문

우리 경제의 혈맥을 담당하는 은행권이 여전히 부동산이라는 안전지대 속에 머물러 있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권의 원화 대출 중 부동산 관련 대출 비중은 70%에 육박했다. 이는 은행 여신의 10원 중 7원이 주택담보대출 또는 부동산 개발자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5년간 이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금리 인상기에도, 경기 둔화기에도, 은행들은 가장 손쉬운 길을 선택했다. 담보가 있고 리스크관리가 용이한 부동산 대출이 주요 대출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단기 안정성 추구는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안정된 퇴행'에 가깝다. 실물경제로 자금이 적시에 공급되지 않으면 기업의 혁신 투자가 위축되고, 일자리 창출 여력도 줄어든다. 가계의 자산은 부동산으로 쏠리며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된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중산층을 잠식하고, 젊은 세대에게는 '내 집 마련'조차 요원한 목표가 된다. 결국, 은행의 안정이 국민경제의 불안으로 전이되는 역설이 형성된 것이다. 은행권이 생산적 금융을 실현하는 첫 출발점은 평가 역량의 혁신이다. 과거 벤처 붐 시절, 많은 자금이 기술력만을 믿고 투입됐으나 부실로 끝났다. 반면 오늘날의 '기술 금융'은 동일한 벤처 대출이라도 기술 가치 평가에 근거한 정밀한 심사체계를 바탕으로 운용된다. 이는 성공적인 생산적 금융의 안전판이 된다. 은행이 단순히 자금을 공급하는 '대출기관'이 아니라, 산업을 분석하고 리스크를 공유하는 '투자기관'으로 진화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제도적 유인이다. 현재 은행들은 BIS 비율 규제에 따라 대출자산의 위험가중치에 맞춰 자기자본을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벤처기업 등에 대한 위험가중치가 400%로 책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 대비 과도하게 높은 수준이다 보니, 은행들이 같은 자본으로 더 많은 대출을 할 수 있는 안전한 부동산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만약 정부가 벤처·혁신기업 투자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120% 수준까지 낮추면, 은행으로서는 동일한 자본으로 더 큰 투자 여력을 가지게 된다. 이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을 유인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될 수 있다. 또한, 지역금융 강화도 필요하다. 일본은 2000년대 초부터 '관계형 금융(Relationship Banking)'을 통해 지방은행이 중소·중견기업과 장기적 거래관계를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대출 대상 기업의 신용등급뿐 아니라 현장 방문, 기술력, 고용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이 방식은 지역경제의 회복탄력성을 높였다. 관계형 금융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으로서 정부의 보증 지원 활성화가 시급하다. 신생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은 담보가 부족하거나 신용이 충분히 평가받지 못해 금융 접근성이 낮다. 이에 정부가 일정 부분 대출에 대해 보증을 서서 은행의 리스크 부담을 줄여주면 은행이 보다 적극적으로 성장 가능성 있는 기업에 투자할 수 있다. 은행 내부의 체질 개선도 병행되어야 한다. 국내 은행 인력의 다수가 여전히 담보평가, 채권관리, 소매금융 영업에 집중되어 있다. 기술평가, 산업 분석 등 생산적 금융의 핵심 역량을 갖춘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신용리스크를 평가할 수 있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산업별 전담 심사팀을 구성하는 것이 향후 10년의 은행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다. 생산적 금융의 전환은 단순한 '투자 확대'가 아니다. 우리 경제의 자원배분 구조를 바꾸는 패러다임의 개혁이다. 적절히 운용된 생산적 금융은 다음과 같은 거시경제적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첫째, 기업 투자가 확대되어 고용이 창출되고, 가계소득이 증가한다. 이는 소비와 세수를 늘려, 경제의 선순환을 유도한다. 둘째, 은행 수익구조가 다변화되어, 부동산 경기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 구조가 가능해진다. 셋째, 기술 금융과 벤처투자를 통한 혁신기업 성장으로 국가 경쟁력이 강화된다. 넷째, 금융과 산업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자본시장의 깊이가 한층 두터워진다. 궁극적으로 금융은 국민의 부로 이어질 때 그 존재 가치를 갖는다. 국민경제가 더 이상 부동산과 대출금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 위해서는, 은행의 자금이 창의와 도전, 생산과 혁신의 현장으로 흘러가야 한다. 유동성과 리스크 회피가 아닌, 신용과 감별력으로 먹고 사는 '원래의 금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는 손쉬운 담보에 안주하던 시대를 넘어, '평가할 줄 아는 은행', '투자할 줄 아는 금융'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모멘텀이 되어야 할 때이다. 부동산 담보가 아니라 기술과 신용으로, 이자수익이 아니라 성장성과 가치로 승부하는 은행이야말로 국민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미래형 은행이다. 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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