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기자의 눈] 적자 기업만 떠본 예비입찰…홈플러스, 농협만 바라보는 신세

청산 위기에 몰렸던 홈플러스가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 매각보다 청산가치가 더 높다는 시장 평가에도 지난달 31일 마감한 공개입찰에서 복수의 원매자가 홈플러스 인수의향서를 제출해서다. 당장 급한 불을 끄면서 홈플러스 매각전이 새 전환점을 맞은 한편, 경영 정상화를 위한 정부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거세다. 홈플러스와 매각 주관사는 비밀 유지를 이유로 입찰 참여 업체명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인공지능(AI) 전문 업체 '하렉스인포텍', 부동산 개발회사 '스노마드' 2곳으로 알려졌다. 다만, 인수 의향을 드러낸 후보 업체들의 자금 조달 능력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인수 주체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비상장주식 거래플랫폼 서울거래 비상장에 따르면, 하렉스인포텍은 지난해 33억원의 영업손실을 거둔 데다, 매출도 3억원 수준인 중소기업이다. 해당 기간 부채도 28억원으로 자산(10억원)보다 큰 완전자본잠식 상태다. 이 회사는 미국 아나리 캐피털로부터 약 2조8500억원을 조달해 홈플러스를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스노마드의 재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스노마드는 매출 116억원, 영업이익 25억원을 거뒀지만 73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채무 합계 금액이 1375억원임에도 자본총계가 222억원으로 부채비율만 약 619%에 이른다. 두 회사 모두 재무안정성이 낮은 상황에서 4조원(청산가치 3조6816억원)에 가까운 홈플러스 몸값을 감당하기에 무리라는 해석이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트 노동자들의 반응도 회의적이다. 홈플러스 공동대책위원회 측은 지난 달 31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름이나 알려보자고 뛰어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홈플러스를 인수할 능력도 없고 경영할 의지도 없는 자들임은 너무나 분명하다"면서 “정부의 개입이 없다면 홈플러스는 청산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국민의 일자리 청산이자 지역경제의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간 노조 측은 홈플러스 사태의 원인으로 MBK파트너스의 차입매수(LBO) 방식 인수·장기투자 없는 부동산 매각·구조조정 등을 짚었다. 이 같은 투기자본의 횡포를 정부가 방치한 폐해가 홈플러스 사태라는 것이 노조 측의 주장이다. 홈플러스가 매수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정치권에서는 공익적 책임 관점을 이유로 농협이 인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다만, 농협은 하나로유통·농협유통이 각각 연간 400억원의 적자를 보는 터라 재무상태가 열악하다. 앞서 공개 예비입찰에서 농협은 불참한 가운데, 오는 26일 본입찰이 남아있는 만큼 참여 가능성도 제기된다. 홈플러스가 매수자 찾기에 난항을 빚는 이유로는 어려운 대형마트 실태와도 무관치 않다. 이커머스에 밀려 성장세가 과거만치 못한 데다, 의무휴업·영업시간·신규 출점 제한 등 해묵은 과제로 인수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M&A 거래 당사자들의 충분한 협의와 조율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유통망 붕괴를 막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요구되는 때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EE칼럼] 덴마크, 시민들이 만든 행복한 재생에너지 강국

윤태환 루트에너지 대표 아마 많은 국민들이 미국이 우리나라의 군사적, 경제적 동맹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덴마크가 우리나라와 '녹색성장'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약 14년 전인 2011년 5월, MB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하에 덴마크와 전략적인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후 202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녹색성장을 위한 긴밀한 협력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북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가 왜 녹색성장의 협력국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덴마크는 독일보다 약 10년이나 앞선 '에너지 전환'의 선도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했다. 덴마크는 우리나라에 비해 인구가 10분의 1 수준이지만 세계 1위 풍력 기업인 '베스타스'가 시작된 곳이고, 풍력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산업이 국가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재생에너지 강국이다. '풍력 산업을 제2의 조선업으로, 태양광 산업을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키우고 싶었던 한국 정부의 협력 대상으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성공 비결이 궁금했다. 재생에너지 최강국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그리고 지난 30~40년간 수많은 정권의 변화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첫번째 비결은 그들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덴마크인들은 19세기 후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를 잃었고 척박한 농업 환경으로 인해 공동체 의식으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다. 덴마크인들은 강한 협동 정신과 수평적인 평등 의식이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다. 두번째는 덴마크도 자원 빈국으로서 에너지 자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는 전 세계 에너지 안보에 경종을 울렸지만, 특히 지하자원이 전혀 없는 덴마크에서는 그 피해가 더 심각했다.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한국처럼 핵발전 시스템을 도입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회가 될지 모르는 풍력과 바이오 에너지를 도입할 것인가. 덴마크는 국민적 합의를 통해 후자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핵발전 같은 중앙집중형 시스템에 비해 더 유연하고 회복 탄력성이 높은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을 완성했고, 재생에너지의 최강국으로 시장을 선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변화를 시민들이 상향식으로 주도했다는 점이다. 시민 엔지니어들이 직접 풍력발전기 개발에 참여하고 풍력과 바이오매스 마을법인을 결성하여 사업 주체가 되었다. 기술과 정책 결정의 주도권이 시민과 공동체에 있었다. 2009년엔 재생에너지 사업에 주민들이 최소 20%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는 '지역공동소유권'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사업의 수익금을 지역의 공동기금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펀드 등 혁신적인 금융상품을 도입하여, 국민 개개인이 에너지 전환의 경제적 과실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덴마크의 사례는 에너지 전환의 성공이 기술이나 자원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자본과 거버넌스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국민들과 소통과 합의를 통해 국가적 에너지 전환의 방향을 정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각 사업의 소유권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 커뮤니티 펀드로 국민들이 투자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전 국민이 에너지 전환에 참여하는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자, 정치인들은 좌우 없이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법 제도를 발의했고, 정부는 예측가능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에 기업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술과 인재육성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기업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 국민의 1~2% 이상이 재생에너지 산업에 종사하고, 재생에너지 산업이 국가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실의 최대 수혜자는 다시 국민이 되어 경제, 환경, 사회적 선순환을 만들었다. 덴마크의 사례는 한국에도 큰 교훈을 준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대전환을 앞둔 새 정부에선, 국민 개개인이 체감할 수 있는 에너지 전환을 목표로 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의 가장 중요한 양분은 사회적 자본과 거버넌스다. 한국에서도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에너지 전환이 만들어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윤태환

[김병헌의 체인지] APEC, 한국의 외교적 주도권과 실질 성과

무대 위의 조명이 한곳에 모였다. 순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경주, 그 낯익은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된 밤이었다. APEC 정상회의가 막이 오르자 시선은 곧 하나의 장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마주 앉은 그 순간이었다. 짧은 악수 뒤, 회담은 단숨에 본론으로 치달았다. 곧이어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 숫자만 봐도 숨이 막히는 금액이지만, 의미는 따로 있었다. 연간 200억 달러 이하로 분할 투자한다는 방식이었다.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 파트너십의 신호였다. 한국을 '일시적 거래상대'가 아니라 '미래의 시장이자 기술 동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우리는 당신의 시장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미국은 “그렇다면 당신은 신뢰할 만한 동맹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한 문장의 교환이 이번 회담의 핵심이었다. 한미 협상의 진짜 성과였다. 이어진 안보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숙원 사업인 '핵연료 추진 잠수함' 개발을 사실상 승인했다.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단순한 무기체계의 확보가 아니라, 미국이 핵심 군사기술을 공유하는 협력선에 한국을 올려놓았다는 의미였다. 이제 한국은 공조의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가는 안보'에서 '주도하는 안보'로의 변환점, 이번 승인에 담긴 진짜 의미였다. 거대 투자와 핵잠 승인은 APEC의 본회의보다 훨씬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세계가 주목한 건 회담장안 공동선언문이 아니고 회담장 밖에서 이어진 한국과 미·중·일의 연쇄 회담이었다. 실질적 약속, 구체적 행동, 한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과거 APEC이나 ASEAN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늘 미국과 중국, 혹은 일본의 움직임에 쏠렸다. 의장국은 진행자에 머물렀고, 회담의 무게중심은 늘 '외부'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경주는 외교의 지리적 무대가 아니라 외교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질적 조정자이자 협상가로 무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드물다. ASEAN이나 G20에서도 의장국이 일정한 존재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양자·삼자 회담을 동시에 주재하며 경제와 안보의 양축을 모두 흔든 경우는 손에 꼽힌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에 전례 없는 방식을 만들어 다자와 양자를 동시에 이끄는 '무대의 연출자'로 바뀐 것이다. 물론 남은 과제가 없진않다. 먼저 이번에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이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한국 정부는 거대한 합의를 구체적 산업 전략으로 연결해야 하고, 기업들은 이를 실행 가능한 사업계획으로 세분화해야 한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유치 실적이 아니라, 향후 10년 한국 산업의 지형을 다시 그릴 '구조적 약속'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제 투자라는 숫자가 아니라 내용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도체, 인공지능, 방산, 청정에너지 같은 전략산업에 어떤 방식으로 그 자금이 흘러들지, 어떤 기업이 주도하고 어떤 지역이 중심이 될지가 중요하다. 외교가 현실경제로 연결될 때, 그것이 비로소 '국익'이 된다. 핵연료 추진 잠수함 사업도 그렇다. 미국의 승인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성과는 기술협력과 연료공급, 그리고 제작역량 확보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이 자주적 안보 역량을 갖추려면, 단순한 첨단 무기 도입을 넘어 자체 제작 체계를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내 방위산업 생태계를 새로 짜고, 연구·인력·제조 라인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동시에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투명성 확보도 필수적이다. 핵 관련 기술은 언제나 국제 규범과 감시의 대상이다. 한국은 '평화적 이용'이라는 원칙 위에서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은 투명성 위에서만 단단해진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번 성과들을 APEC 틀 안에서 제도화하는 일이다. 지금의 외교적 존재감이 일회성 이벤트로 소모된다면, 어떤 성과도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핵심국을 하나의 협력 구조로 묶어내는 경제·안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외교의 무게중심은 '이벤트'가 아니라 '시스템'에 있을 때 유지된다. 외교는 말보다 결과로 평가된다. 이번 회담은 '말'이 아니라 '실행'을 예고한 자리였다. 이제 남은 일은 분명하다. 합의를 현실로, 약속을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한국에게 남긴 진짜 과제이자, 앞으로의 도전이다.

[기자의 눈] 신뢰 사라진 코스닥 시장

1996년 '제2의 나스닥'을 표방하며 코스닥 시장이 문을 열었다. 기준 지수는 1000이었다. 11월 3일 현재 코스닥 지수는 910대를 오간다. 코스닥 시장이 문을 연 지 29년 됐지만 기준점에도 못 미친다.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코스피 시장을 보면, 최근 코스닥 시장의 침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연초 코스피는 2398에서 3일 4200을 돌파했다. 74% 상승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코스닥은 32% 올랐다. 코스닥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시장 수급을 보면, 연기금, ETF, 기관 자금 대부분이 코스피 중심으로 운용된다. 코스닥은 개인 위주 단타 시장으로 전락했다. 코스닥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코스닥 시장의 개인 투자자 비중은 65%에 달한다. 연평균 회전율은 430%를 웃돈다. 코스닥에서 한 종목이 1년에 4번 이상 사고 팔린다는 뜻이다. 기관이나 외국인이 코스닥을 꺼리는 이유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업이 기술특례로 상장했지만, 상당수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코스닥 상장사 중 절반 가까이 올해 상반기 적자를 냈다. 매출보다 홍보비가 많은 기업, 연구개발비보다 전환사채 발행이 잦은 기업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런 부실이 구조적으로 방치된다는 점이다. 코스닥은 '혁신기업 지원'을 명분으로 상장 문턱을 낮췄지만, 이른바 '좀비기업'을 내보내는 과정은 더디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코스닥의 한계기업 비중은 23.7%다. 한계기업은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으로,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회사를 뜻한다. 코스닥이 다시 살아나려면 시장 질서를 바로 세우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코스닥 시장 전체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 근본적인 대책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부터 한국거래소는 코스닥 시장에서 부실기업을 신속히 퇴출하는 제도를 개선했다. 결국 내 돈을 선뜻 투자하고 싶은 기업이 있어야 한다. 기업의 질을 높이고 신뢰를 바로 세워야 시장이 제자리를 찾는다. 상장 이후 성과 검증과 퇴출 절차를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혁신은 실패를 전제로 하지만, 실패에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면 혁신은 왜곡된다. 1996년 코스닥은 '한국형 혁신시장'의 출발선이었다. 현재 900대에 머무는 코스닥 지수는 그 약속이 얼마나 빛바랬는지 보여준다. 코스닥이 다시 혁신의 실험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최태현 기자 cth@ekn.kr

[이슈&인사이트] 정보시스템의 재난 방지를 위한 중복 설계의 중요성

국가정보자원관리원(NIRS) 대전 본원의 2025년 9월 29일 화재로 G 드라이브 서버와 백업 실이 전소되었다. G 드라이브에는 공무원 약 12만 5천 명이 사용 중이었으며, 74개 정부 부처와 19만 1,000여 명의 업무자료가 저장되어 있었다. 소실된 데이터는 858테라바이트에 달한다. 전산망에 대한 복구 작업이 인력·장비 총동원 '안간힘'에도 화재로 영향을 받은 709개 시스템의 복구율은 한 달이 지난 현재 70%가 채 안 된다. 연내 정상 가동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현장에는 공무원 약 220명과 관련 사업자 상주 인원 570명, 기술 지원 및 분진 제거 전문 인력 약 30명 등 모두 800여 명의 인원이 투입돼 작업을 펴고 있다. 전문 인력에는 삼성 SDS, LG CNS를 비롯해 정보통신 분야 국책기관인 KISTI, ETRI 소속 연구원들까지 동원되었음에도 작업에 속도가 낮은 요인은 시스템 중복 설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중복 설계의 오류는 2001년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WTC)의 금융기관들이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며칠 만에 영업을 개시할 수 있었던 배경과 대비된다. 25년 전인 9·11테러 당시에 이미 미국의 대형 증권사들은 재해복구 개념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뉴저지, 코네티컷 등 외곽 지역에 데이터 백업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캔터 피저랄드 사는 9·11 테러로 전 직원의 2/3인 658명이 사망하였음에도 뉴저지에 실시간 백업 서버를 두고 있어 8일 만에 온라인 거래를 재개하였다. 모건스탠리는 철저한 대피 훈련 덕으로 전 직원 2천7백 명 중 피해를 극소화했고 테러 발생 2주 만에 타임스 스퀘어로 임시 이전 업무를 정상화하여 위기관리 및 위기 대응 모범 사례로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NIRS 대전 본원의 정부 전산망 설계는 600년 전의 조선왕조실록의 중복 설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보다 어려운 여건하에서 원본 포함 백업 수를 여러 개 만들어 보관했다. 조선조 초기에 전란으로 인한 소실을 대비해 4부를 작성하여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전주 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자 다시 5부를 작성하여 이번에는 인간들의 거주지가 아닌 태백산,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의 산속과 춘추관에 분산 배치하여 화재 등 재난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은 조선시대만도 못한 후진적이다. NIRS 대전 본원 G 드라이브는 외부 백업이 전혀 없이, 원본과 백업 데이터가 모두 같은 건물 내에 보관되어 있어, 화재 등 재난 시 복구 불가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다. 인사혁신처 등 일부 부처는 모든 업무자료를 해킹 방지 차원에서 G 드라이브에만 저장하도록 해 피해가 컸다. NIRS의 G 드라이브와 같은 귀중한 데이터를 보관하는 시스템의 재난 방지를 위해서는 신뢰성 특유 설계 기법이 있다. ① Fool Proof 설계 방식이다. 사용자가 잘못된 조작을 하더라도 고장이나 사고가 없도록 하는 설계다. 예를 들어 카메라에 찍힌 필름을 돌리지 않고는 셔터가 작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등이다. ② Fail Safe 설계 방식이다. 특정 기기가 고장 났을 때 타 기기로 파급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③ Safe Life 설계 방식이다. 절대 고장 나지 않는 완벽한 안전 구조 설계 방식이다. 특히 보전이 곤란하고 고신뢰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항공기 엔진, 원자로 등이 있다. ④ 리던던시에 의한 신뢰성 향상 기법이 있다. 한 부품이 고장을 일으키더라도 전체는 작동되도록 여분의 회로나 구성품을 갖추어 놓는 중복 방식이다. 클라우드는 편리하다. 하지만 재난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한 번에 모두를 잃는다. 정부, 기업, 개인의 재난 방지를 위한 시스템의 중복 설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윤덕균

[EE칼럼] 동떨어진 한국의 에너지 ‘패스트 트랙’

정부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위원회를 열고 99개 송전선로와 변전소 구축 사업을 국가기간 전력망으로 지정하는 '패스트 트랙'을 지정했다. 송전망은 전력공급을 위한 필수 인프라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기피시설로 분류되면서 건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이런 송전망 건설 지연이 탄소중립 목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전력망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난 9월 26일 시행했다. 전력망 특별법이 시행되면 국무총리 주재 전력망위원회가 지정한 전력망에 대해선 정부가 직접 지역주민과 지자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지자체별로 받아야 하는 각종 인·허가를 일괄 처리하게 된다. 이는 재생에너지 송전망을 늘리기 위해 바이든 정부에서도 고려했던 방식이다. 그러나 민주당 셸던 화이트하우스 상원의원과 일리노이주의 마이크 퀴글리 하원의원은 아예 주요 송전선로 경로 승인 권한을 FERC라는 단일 연방기관에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는 주와 지방정부 의사결정권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그만큼 송전설 건설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아예 정부가 미리 송전선 건설 위치를 파악하고 승인 절차부터 시작하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미국 트럼프 2기 정부는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 속도를 높이기 위한 패스트 트랙인 '스피드 투 파워'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지만 잘 살펴보면 한국과는 다른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에너지부가 7월 발표한 '전력망 신뢰성과 보안 평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전력 공급원을 계속 폐쇄하고 추가 기저 용량(firm capacity)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2030년까지 광역 정전사고가 100배 이상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미국 제조업 회복과 AI 경쟁은 24시간 안정적이고 저렴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석탄과 가스 같은 기저부하 폐쇄를 강요했던 과거 행정부의 위험한 에너지 감축 정책을 계속하면 안 된다고 기술했다. 또한 에너지부가 원자력규제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첨단 원자로 분야 시범 프로젝트를 승인하는 절차로 10년 이상 걸리는 원전 분야 일정 단축을 위해 '3년 이내 임계 도달'을 목표로 하는 '패스트 트랙'을 실행하고 있다. 캐나다의 변신은 좀 더 극적이다. 마크 카니 총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키티맷 소재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시설 확장 승인을 패스트 트랙에 올려놓았다. 카니는 이 프로젝트가 캐나다를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만드는데 직접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 선언했다. 사실 그는 유엔 기후 특사로 활동하며 은행·투자자·보험사 연합체인 '글래스고 탄소중립 금융연합(GFANZ)'을 공동 설립했던 넷제로 전사였다. 하지만 캐나다 총리 취임 후 전임 트뤼도가 실시했던 탄소세, 전기화 의무 정책을 폐지했고 산하단체 넷제로뱅킹얼라이언스는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탈퇴한 후 10월 공식 운영을 중단했다. 또한 SMR, 핵심 광물을 위한 광산개발도 패스트 트랙에 올려놓았다. 영국 보수당은 정권 재탈환 시 기후변화법 폐기를 선언했는데 2050년 넷제로 달성을 법적 구속력 있는 목표로 설정했던 당으로서는 극적인 변화다. 케미 바데녹 보수당 대표는 탄소중립 정책이 경제를 파산시키고 있으며 제조업과 수많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독일 메르츠 총리와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5월 공급망법 폐기를 요구했으며 폰데어라이엔이 소속되어있는 정당 그룹 유럽 국민당 대표 만프레드 베버 또한 내연기관차 금지 폐지를 비롯해 탄소중립 정책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는 모두 에너지 위기 후 급등한 에너지 비용과 제조업 경쟁력 상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현재 넷제로 폐기를 선언한 극우 정당이 여론조사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갈수록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필자는 지난해 '에너지 위기 이후 EU, 미국 탄소중립 동향과 향후 전망'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탄소중립 백래시 현상이 확산될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한국과 서구 주요 국가의 에너지 정책의 방향성은 다소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이 차이가 어떤 결론으로 흘러갈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글로벌 희토류 전쟁, 한국은 엉뚱한 대책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마무리됐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 중국, 일본 등 21개국 정상들이 모여 경제 협력을 약속했다. 우리나라도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세계적으로 봤을 때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미국과 중국의 관세협상 타결이었을 것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정권 초기부터 중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대중국 관세를 100% 이상으로 높이겠다며 으르렁댔다. 그러나 경주에서 타결된 미중 관세협상 결과를 보면 전혀 딴판이다. 미국이 최종적으로 매긴 대중국 관세는 20%에 불과하다. 처음에 주장했던 100%는 고사하고 한국, 일본 등 최혜국에 매긴 15% 관세와도 별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미중 관세협상은 중국의 완승이란 평가가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시진핑 주석에 대해 “미국의 눈을 깜짝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자신감을 내비쳤다"고 평가했다. 세계 각국이 모두 미국에 쩔쩔 맬때 중국은 단 하나의 카드로 미국에 맞섰다. 바로 희토류 수출 통제다. 희토류(Rare-earth element)는 첨단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리우는 핵심광물이다. 반도체, 우주항공, 군수, 첨단전자제품, 재생에너지, 석유화학 등 안 쓰이는 곳이 없다. 이렇게 귀한데, 거의 전량이 중국에서 밖에 생산되지 않고 있다. 희토류는 지구상에 부존량은 풍부하지만 지각 내 함유량이 매우 적어 상업적 생산량을 얻으려면 엄청난 면적의 땅을 개발해야 한다. 또한 추출, 분리 과정에서 독성이 매우 강한 황산 물질을 대량 사용해야 해 환경오염도 심각하게 발생한다. 중국이 희토류 생산을 독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를 받은 적은 없지만, 대중국 수입의존도가 워낙 높아 항시 불리한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한국, 미국, 일본이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이 매우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희토류 확보를 위해 자국 내 희토류 광산 개발 및 생산을 장려하고, 나아가 정부가 개발사의 지분을 사들이도록 지시했다. 정부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미국은 일본, 호주와 희토류 동맹까지 맺었다.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과 자본으로 호주에서 희토류를 생산해 자급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이 동맹에서 일본을 눈여겨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미국과 호주 간의 협력인데, 일본이 끼어 있다. 이것은 희토류 개발과 생산에서 일본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일본은 2010년 중국과의 센카쿠열도 분쟁 이후 희토류 확보를 위해 칼을 갈았다. 비록 자국에서 희토류 생산은 못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생산하기 위해 매장량 확보와 함께 정제련 기술까지 고도화했다. 일본이 동맹에 끼게 된 배경이다. 그 핵심 역할을 일본의 자원개발 공공기관인 조그멕(JOGMEC)이 맡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전혀 엉뚱한 대책을 세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10월 중순 범정부 희토류 TF를 구성하고 희토류 확보에 나섰다. 정부 전략의 핵심은 재자원화다. 희토류가 들어간 폐제품을 리사이클링을 통해 희토류 등 핵심광물을 추출해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2030년까지 10대 전략 핵심광물 재자원화율 20%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리사이클링만으론 국내 수요를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경제성도 맞추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국내외 광산을 통해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하고, 리사이클링은 부차적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희토류 확보 전략이 리사이클링으로 간 것은 상당히 잘못됐고, 실책이다. 자원개발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미국과 일본이 그랬듯 희토류 확보는 공공기관밖에 할 수 없다. 우리도 자원 공기업이 확보할 수 있도록 해외진출 족쇄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기자의 눈] 저신용자 불법사금융행 기차표, 누가 예매했나

경찰이 내년 10월말까지 불법사금융 특별단속에 돌입한다. 검거건수가 1년 만에 70% 가까이 급등할 정도로 문제가 커진 탓이다. 수사당국에서는 모바일 등을 활용한 범행 수법 고도화를 원인으로 보고 인센티브 제공을 비롯해 단속 효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중으로, 캄보디아 범죄조직과의 연계 이슈도 걸려있다. 정부의 가계부채 정책 강화 기조도 피해자 양산을 야기하는 요소다. 900점이 넘는 신용점수를 갖고도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렵게 된 고신용자들이 상호금융과 카드사로 옮긴 '유탄'을 저신용자가 경쟁 심화라는 형태로 맞고 있기 때문이다. 저신용자의 대출 영역에서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도심에 외부인과 자본이 들어오며 원래 살던 이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여기에 장기카드대출(카드론) 규제가 겹쳤다. 9월말 기준 카드사 9곳(삼성·신한·현대·KB국민·우리·하나·롯데·BC·NH농협)의 카드론 잔액은 41조8375억원으로 전월 대비 6000억원 넘게 감소하는 등 몇 달째 줄어들고 있다. 정점에 달했던 지난 2월과 비교하면 1조원 가까이 축소됐다. 다른 금융기관들의 대출 규모도 대폭 줄었다. 특히 저신용자들이 많이 찾는 대부업 대출 잔액이 1년 만에 12조원 넘게 급감했다. 이들로서는 한정된 취급 규모와 '6.27 가계대출 ㄱ규제' 및 3단계 스트레스 DSR을 비롯한 정부 규제 속에서 건전성 관리도 지속해야하는 만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벼랑 끝에 선 금융소비자들이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사금융 대출 광고 등을 누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도 불어났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문제점이 어제오늘 지적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드론이 축소되면 정치권과 시장에서는 자동반사적으로 '서민들이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린다'는 우려를 쏟아냈고, 실제로 관련 피해도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보인 일련의 행보는 소비자 보호를 외친 정부가 오히려 가장 보호 받지 못하는 소비자를 내몬 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가계부채를 늘리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단행한 획일적인 규제의 부작용이라는 지적도 나오는 만큼 더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현장과 소통하며 현실적인 솔루션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나광호 기자 spero1225@ekn.kr

[EE칼럼] 2025 노벨경제학상과 지속가능성장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전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 부회장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영예는 '신기술을 통한 지속 가능 성장'연구에 크게 이바지한 3인의 교수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조엘 모키어(Joel Mokyr)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교수, 필립 아기옹(Philippe Aghion) 프랑스 INSEAD 및 런던 정경대(LSE) 교수, 피터 하윗(Peter Howitt) 미국 브라운대 교수 등 3인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하였다. 왕립과학원은 모키어 교수에 대해 '기술 진보를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의 전제 조건을 파악(identified)'한 공로를, 아기옹 교수 등 2명에 대해서는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 이론'을 연구한 공로를 수상의 이유로 설명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상금의 절반이 모키어 교수에게, 나머지 절반은 아기옹 및 하윗 교수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모키어 교수는 전통적인 연구 방법을 추구한 학자로, 실제 현장에 가서 관찰하여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하는 방법으로 연구한 반면, 아기옹 및 하위 교수는 현대적인 방법인 분석모형과 다량의 자료를 사용한 계량 분석의 결과를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연구하였다. 이번 노벨경제학상이 가져오는 첫 번째 의미는 애덤 스미스 이래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경제학의 틀이 아닌, 1912년 조셉 슘페터(J. Schumpeter)가 제창한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발전 이론의 틀을 드디어 인정한 첫 번째 수상이라는 점이다. 기술혁신, 창조적 파괴 등 이미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경제발전의 방법이 최근까지도 주류경제학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한 자리를 받게 된 것이다. 슘페터는 경제발전의 역동성을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으로서 창조적 파괴를 꼽았는데, 특히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 행위를 중요시했다. 이윤은 창조적 파괴 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업가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이며, 그것을 다른 기업이 모방하면서 이윤은 소멸하고, 새로운 혁신적 기업가의 출현으로 다시 사회적 이윤이 생성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 명의 학자는 이를 증명하는 업적을 쌓은 학자들이다. 모키어 교수는 1차산업혁명에 초점을 맞추어 '왜 연속적인 기술혁신이 1800년대 이후에야 일어났으며, 왜 그 장소가 영국인 것일까'라는 물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성장의 원인이자 기초가 됨을 확인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과 같은 대형 발명(macro-invention) 못지않게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작은 발명(micro-invention)들이 함께 나타나서 양자 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함을, 그리고 영국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음을 보였다. 즉, 혁신의 키워드로 자주 언급되는 창조적 파괴는 사실 여러 창조 과정이 누적된 형태임을 보인 것으로, 이러한 누적 과정이 일어나는 사회적 환경이 영국에 있었음을 보인 것이다. 한편, 아기옹 및 하윗 교수는 혁신을 촉진하는 시장 및 제도의 조건을 연구하였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경쟁을 통하여 성장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으나 슘페터와 그 학파는 적절한 독점이 혁신을 촉진하여 성장이 일어난다고 보았는데, 아기옹 및 휴잇 교수는 경쟁과 혁신 간에 '역 U자형' 관계가 존재함을 실증분석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즉, 적절한, 또는 제한된, 경쟁이 혁신에 가장 좋음을 증명한 것이다. 주류경제학의 기존 이론이 여러 측면에서 변경과 수정이 필요함을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번 수상자들이 연구한 사례가 영국만이 아니고 한국, 일본, 독일, 중국 등이라는 것이다. 최근 선진국들이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보호무역을 시행하는 것도 자유무역이나 완전경쟁보다 적절한 보호무역과 산업정책이 경제성장에 더 효과적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 슘페터 및 혁신 성장 이론은 21세기 들어 기술 경제학(Technology Economics)으로 분파하여 과학 및 기술 분야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성장에 대한 이론 이외로도 기술이전, 기술 상용화, R&D 정책, 기술 정책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마치 1, 2차 석유위기 이후 에너지경제학이 분파한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은 과연 무엇일까? 영어로는 sustained growth이니, 이는 환경, 이산화탄소 등의 고려를 통하여 등장한 지속가능한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와는 차이가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같이 볼 수 있다. 기술혁신이 없으면 지속 가능한 발전도 없다는 건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서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분들과 이들을 선정한 왕립과학원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정부와 기업의 더욱 적극적인 기술혁신 정책을 기대한다. 허은녕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