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전역을 들여다보고 있다. 전력과 용수가 넉넉한 곳이라면 어디든 검토 대상이다."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참석차 일본 센다이를 찾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31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급증하는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를 감당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로 일본 내 합작 공장의 타당성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구체적인 파트너사나 후보 부지를 묻는 질문에는 답을 아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차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 패키징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국내에서도 반도체 생산시설 확장에 54조원을 투입할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AI발 저장장치 수요를 좇아 생산 거점을 전 세계로 넓히는 동시에, 미국의 대중(對中) 기술 견제 흐름에도 대응해야 하는 처지에서 일본이 새 후보지로 떠오른 셈이다. 일본이 거론되는 배경에는 이미 얽혀 있는 협력망이 있다. SK하이닉스는 베인캐피털 특수목적회사(SPC)를 통해 일본 낸드플래시 업체 키옥시아 지분을 14% 넘게 쥐고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고객·협력사와 낸드 시장을 함께 키울 방안을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비상장 소재기업 나믹스부터 장비 대기업 도쿄일렉트론까지 협력사 스펙트럼이 넓고, 소니그룹·닌텐도 같은 대형 고객사도 일본에 있다. 앞서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히로시마에 공장을 둔 전례도 있는 데다, 일본 정부가 대만 TSMC 같은 해외 반도체 기업의 현지 증설에 적극적으로 보조금을 얹어준 전력도 후보지 매력을 키우는 요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지의 관심도 달아올랐다. 최 회장이 앞서 참석한 '제1회 한일 저출산대책 심포지엄'에는 무라이 요시히로 미야기현 지사가 동석했고, 행사장 주변은 미야기현 관계자와 지역 매체 기자들로 북적였다. 행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최 회장을 일본 기자들이 뒤쫓으며 미야기현 공장 건설 가능성을 캐물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구체적 답변은 피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미야기현은 이미 물밑에서 부지 카드를 내밀었다. 오히라무라의 제2센다이 북부 핵심공업단지 내 약 30만㎡ 규모 부지를 제안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용수·전력 인프라도 갖췄다는 게 현 측 설명이다. SK하이닉스의 미야기 투자설이 처음 알려진 건 지난 21일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고, 회사 측은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도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후보지로는 미야기뿐 아니라 간토·홋카이도·규슈 등도 함께 거론돼 왔다. 미야기현이 이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는 지역경제의 판을 바꾼 선례를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TSMC를 유치한 구마모토현처럼, 대규모 투자와 고용을 발판 삼아 지역 산업구조 자체를 바꿔보겠다는 구상이다. 무라이 지사는 2005년 취임 이후 '풍요로운 미야기'를 내걸고 제조업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그는 도요타자동차·도쿄일렉트론 등을 끌어들이며 미야기현의 제조품 출하액을 2005년 대비 약 1.6배(2024년 5조8000억엔)로 불렸다. 지난해 지사 선거에서도 '세계적 반도체 기업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6선 24년 임기의 마지막 승부수로 SK하이닉스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유치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경계심도 있다. 2023년 대만 PSMC와 SBI홀딩스가 미야기현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가 이듬해 계획을 접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실제로 짓더라도 생산 품목이 제한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AI용 HBM 같은 최첨단 제품의 해외 생산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쉽게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SK그룹 입장에서는 반도체 소재·장비에 강한 일본 기업들과 공급망을 더 촘촘히 엮을 수 있다는 유인이 크다. 실제로 SK그룹은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업체 인수합병(M&A)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단순 생산 거점 확보를 넘어 일본 반도체 생태계 자체와의 결합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최 회장도 지난 6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반도체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어 충분히 매력적인 후보지"라고 평가한 바 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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