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 기업들이 인공지능(AI) 등 미래 산업 패권을 가져가기 위해 연구개발(R&D) 분야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 정부·국회도 각종 지원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지난 10년간 중국의 R&D 투자가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자칫 우리 주력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는 5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세계 R&D투자 상위 2000대 기업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는 유럽연합(EU) 공동연구센터가 작년 12월에 발표한 '2024년 R&D 투자 스코어보드'의 2000대 기업 명단을 기반으로 펼쳐졌다. 대한상의는 2023년 기준 R&D투자 상위 2000대 기업을 보면 미국이 기업 수와 투자액 모두 1위를 유지했지만 2위를 기록한 중국의 성장세가 눈부시다는 점에 주목했다. 2013년부터 10년간 2000대 기업에 포함된 중국기업 수는 405개 늘었다. 투자액은 11.5배 뛰었다. 상위 10개국 중 10년간 기업수와 투자액이 계속 증가한 국가는 중국이 유일했다. 우리나라는 기업 수는 14개 감소했지만 순위는 8위를 유지했다. 상황이 이렇자 미국과 중국으로 '쏠림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R&D투자 상위 2000대 기업에 포함된 미국(681개)과 중국(524개)의 기업 수는 1205개로 전체의 60.3%를 차지했다. R&D투자액의 합은 7477억유로로 59.5%에 달했다. 미국의 아성은 여전하다. 해당 조사 기업 수, 투자액에서 1위를 계속 유지했다. 투자액 기준으로는 2013년 1910억유로로 전체의 36.1%였으나, 2023년에는 5319억유로로 42.3%를 기록했다. 중국은 2013년에는 기업 수 119개로 4위, 투자액 188억유로로 8위였다. 2023년에는 기업 수 524개, 투자액 2158억유로로 2위로 올라섰다. 일본, 독일, 영국 등 주요국의 기업 수는 감소했다. 우리나라의 기업 수도 2013년 54개에서 2023년 40개로 줄었지만, 순위는 10년 연속 8위를 유지했다. 투자액 기준으로는 2013년 193억유로로 7위였으나, 2023년에는 425억달러로 5위를 꿰찼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액을 나타내는 R&D 집중도도 미국과 중국의 증가세가 컸다. 미국은 2013년 5.1%에서 2023년 8.5%로 3.4% 포인트(p) 늘었다. 중국도 1.4%에서 3.9%로 2.5%p가 뛰었다. 우리나라의 R&D 집중도는 2.4%에서 4.0%로 1.6%p 상승했다. 2000대 기업 전체로 보면 3.3%에서 5.1%로 1.8%p 많아졌다. 첨단산업 분야별로 R&D투자를 분석한 결과 반도체 산업에서는 엔비디아가 2013년 9억6000만유로에서 2023년 79억유로로 8.2배 늘어 가장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SK하이닉스가 6.7배, 미국 AMD가 6.1배, 대만 미디어텍이 5.1배 늘어나며 뒤를 이었다. 삼성전자의 R&D 투자액은 199억유로로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았다. 투자액은 10년간 약 2배 가량 증가했다. IT 소프트웨어 및 플랫폼 산업에서는 미국의 메타(페이스북)가 10년 전 대비 32.4배 증가한 332억유로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중국 1위 인터넷 기업인 텐센트가 15배, 이어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미국의 세일즈포스가 10.1배 증가해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 네이버는 10년전에 비해 R&D 투자액이 약 2배 증가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미국 테슬라의 R&D투자가 10년전에 비해 21.5배 뛰었다. 세계 전기차 점유율 1위인 중국의 BYD가 15.8배 증가했고, 인도의 타타 자동차가 2.9배 늘어났다. 제약 산업에서는 미국의 길리어드 사이언스(3.4배), 애브비(3.1배), 브리스톨 마이어스(3.1배), 아스트라제네카(3배)의 투자액 증가속도가 높았다. 재계에서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R&D 역량이 조금 더 늘어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AI, 로봇 등 첨단 분야 패권경쟁이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도 직접 경쟁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AI 시대 반도체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첨단 제품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로봇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LG그룹 역시 이차전지, 로봇, AI 등 신사업 진출에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중국 공세에 우리 기업들 존재감은 미미한 상황이다. R&D투자 상위 50개 기업 명단을 보면 한국에서는 삼성전자(190억유로, 7위), SK하이닉스(53억800만유로, 42위) 정도만 이름을 올렸다. 1~4위는 미국 기업(알파벳, 메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가 휩쓸었다. 독일 기업은 폭스바겐 등 7개, 일본 기업은 토요타 등 5개가 50위안에 들었다. 박기순 성균관대학교 중국대학원 교수는 “중국은 미-중간 기술패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초기술 R&D 강화, 반도체 대기금, 배터리 보조금 등 대규모 투자자금 및 R&D 지원, 각종 세금감면 등 세제지원, AI 육성 위한 규제완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며 “우리도 반도체 지원법 등과 같은 입법 지원을 신속하게 진행해 기업들을 옭매고 있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정부도 미래 기술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산업정책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국의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의 등장에서 보듯이 산업별 선도기술을 둘러싼 기업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이라며 “우리도 국회에 계류 중인 첨단 R&D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상향 및 일반 R&D에 대한 공제율 상향 등 세제지원을 통해 연구개발을 촉진하고, 동시에 반도체특별법과 같은 선제적이고 과감한 지원을 통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R&D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제도적인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